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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녹색수필상]인생 외 4편 / 김희식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16.06.14|조회수175 목록 댓글 0


11회 한국녹색수필상 수상소감

 

 

가을은 소리 없이 억새꽃 사이로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2014. 그 중 한가지도 마무리되지 못한 채 가을은 소리 없이 억새꽃 사이로, 코스모스 꽃 위로 다가왔다. 그동안 숨쉬고 있다는게 이리도 감사한 건지 모르고 살아왔다.‘희망’이란 두 글자가 보이지 않던 어느 해 여름, 친구 따라 우연히 들른 철학관에서 관상과 손금을 본 적이 있다. 재미삼아 본 건데 남자도 있기 힘든 벼슬‘관’이 두 개나 있어서 분명 이름을 날릴 필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말에 ‘내가 무슨.’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또를 사 놓고 일주일을 행복해 했다. 그때 내게 오지 않은 행운이 지금 온 것만 같아 실로 설레고 기쁘다.

 

이 상은 모자란 글에 대한 채찍질 같다.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에 힘입어 앞으로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달릴 것이다. 불꽃같은 열정도, 푸르른 젊음도 모두 나를 지나쳤다고 자책했는데 아직 내게는 타오르지 않은 불씨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 불씨 하나 잘 살려 밤도 굽고, 고구마도 굽고, 된장찌개도 끓이다 보면 아주 기막힌 음식 하나 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느 서점에 다소곳이 꽂혀있는 내 수필집을 보았을 때의 그 떨림과 흥분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다. 나를 믿고 기다려 주신, 거기에 더해 사랑으로 덮어 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김희식 / 1959년 충남 아산군 도고면 오암리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살며 사랑하며』가 있다.

 

 




 

11회 한국녹색수필상 수상작

 



 

인생 외 4

 

김희식


 

세상엔 지금 이순간도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고 있는 반면 수많은 아기들이 탄생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길은 이승에 있음에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신라시대, 월명사가 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지었던 향가의 내용처럼 아버지는 가노란 말도 못 하신 채로 여든 여덟 해의 모든 추억과 아픔을 뒤로한 채 한줌의 재로 자식 품에 안겼다.

 

1월부터 아버지는 서서히 인생을 정리하신 듯싶다. 시설원장님 말씀에 의하면 도무지 곡기를 넘기려 하지 않으신다고 했고, 난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엄마 따라가고 싶느냐며 닦달했다. 소식은 하셨어도 한 끼 거른 적 없던 아버지의 변화에 병원에 모시고 갔건만 워낙 고령이시라 식도에 무슨 병이 있어도 내시경은 무리라며 영양주사와 식욕당기는 약만 지어준 게 전부였다. 평소 봄은 타셨지만 추운 겨울에 그런다는건 이해되지 않는 부분으로 치부했다. 그런 지도 여덟 달. 차도는커녕 당신은 가랑잎처럼 말라갔고 어느 한 군데 살집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낮에도 깊은 잠에 빠져 언어 소통이 어려워 졌다. 지금 와 생각하니 천기누설하지 않았을 뿐, 아버지는 하늘의 명을 알고 계신 듯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예사롭지 않은 전화벨 소리와 함께 원장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님 말로는 호흡곤란이 와서 병원 응급실로 모셔야 할 것 같다고 했고, 서둘러 나도 따라나섰다. 작년부터 천식으로 두어 번 응급실을 노크했어도 이삼일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퇴원했었기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었다. 뭘 감지한 듯 힘들 것 같다고 여운을 남기는 원장님의 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아니라고 애써 무시했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서도 무사했기에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입원 후 이틀 뒤, 웬 중환자실에 비빔밥이 나왔고 죽을 싫어하셨던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비빔밥을 가리키기에 두어 수저 떠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하며 자지러지셨고 아버지는 그날 밤, 흡인성 폐렴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다. 곡기를 끊다시피 한 아버지가 입맛을 찾을 거라는 나의 부질없는 욕심이 낳은 결과였다. 그날 밤, 아버지의 호흡은 시간이 갈수록 가빠졌고, 맥박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결국 기도삽관을 해야 했다. 내가 화근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늘 탓이 많은 남동생은 두고두고 나를 원망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이십오 년간 최선을 다한 작은딸이 받을 원망을 잠재우려는 듯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셨다.

 

하루에도 수차례 아버지는 허공을 보며 옛 고향에서 돌아가신 친구들을 만나 막걸리를 마시며 정담을 나눴다는 헛소리를 하셨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에 준비를 하라는 언니와 남동생을 보면서도 아닐 거라고 부인했다. 열흘째 되던 날, 촛불이 마지막 사력을 다해 피듯 아버지는 날 찾으셨다.

 

“고맙다. 너를 만나 일평생 행복했고 편히 살았다. 내 죽어서라도 그 은공 잊지 않으마. 그리고 작은애야. 미안하지만 철없는 네 남동생하고 조카 부탁한다.

 

“아버지 내가 살아있는 한은 다 돌볼 게요. 그리고 자식들 모두 아버지를 사랑해요. 나도 다음 생애에도 아버지의 딸로 태어날 게요. 고마워요.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를 맡았던 의사는 폐렴도 어느 정도 나았고, 노환이라 달리 치료 방법이 없으니 퇴원을 해도 좋다고 했다. 대신 시설로 가지 말고, 요양병원으로 모시라고 했다. 이대로 시설로 가면 하루도 못 버티고 돌아가실 거라며 요양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거듭했다. 결국 아버지는 언니네 집에서 가까운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평소 큰딸 노릇 한 게 뭐 있냐며 술만 취하면 읊어대던 남동생 때문인지 언니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쪽으로 옮기신 후 아버지는 깊은 저승잠에서 며칠씩 깨어나지 않으셨고, 겨우 눈을 뜨시면 바쁜데 얼른 가라고 손을 휘휘 저으셨다. 그게 전부였다.

 

태풍 곤파스가 온 새벽, 아버지는 평소 아들노릇 한번 안 했다고 면박 받던 동생 앞에서 운명하셨다. 요양병원으로 모신 지 꼭 한 달 되던 날이었다. 굽이굽이 한 많은 사연은 가까이 살던 내 몫으로 남았다. 딸의 모진 소리 앞에서도 늘 침묵하시던 아버지. 한 마디 말이 모자라서 안 하신 게 아니었을 것이다. 며느리 없던 집안에서 핏덩이 손주를 키우고, 하루하루 폐인의 길로 들어서는 외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느라 아버지의 속은 다 타들어갔을 터였다. 그럼에도 내 짐이 더 무겁다며 아버지에게 타박했던 못된 딸이 나였다. 아버지 계신 시설에 일주일에 두어 번씩 다니며 내가 이 길을 언제까지 다닐지 모르니 기분 좋게 다녀야 한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때론 힘들어도 했었다. 친정 잘못 만나 고생한다며 푸념할 때면 아버지는 헛웃음만 흘리시며 미안해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을 끔찍이 생각하셨다. 자식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며 두고두고 후회할 언니에게는 요양원으로 모실 기회를 주었고, 아들노릇 제대로 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았던 동생에게는 임종을 보게 해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화살이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버티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들 간의 우애를 다져놓고 어머니 곁으로 떠나신 것이다.

 

영정사진 속 아버지를 본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 고생하셨음에도 워찌 저리 잘 생기셨을까.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 미처 거두지 못하고 황급히 가신 길을 아버지가 다 갈무리하셨으니 말이다. 자신을 몸 바쳐 키운 할아버지를 위해 이 년 동안 시설비를 감당했던 조카는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 넓은 사랑에 보답할 시간이 이제는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으리라.

 

가족 납골묘에 안치된 아버지는 이제 내가 아닌 먼저 간 아내, 그리고 큰아들과 함께 옛 이야기를 할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소풍 같은 인생은 아니었다 해도 나름대로 즐거웠던 추억들을 꺼내 보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깃불과 전자 모기향

 

여름밤, 돗자리 깔고 누워 바라보던 하늘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보였고 길게 누워 흐르던 은하수라는 강이 있었다. 지금은 별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조차 잊고 살지만 어린 날 우리는 여름밤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었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며 건너지 못했다는 서글픈 강으로 생각했고, 사자자리나 물개자리의 전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해석도 해보았었다. 마당 한편엔 모깃불을 놨는데 쑥 타는 내음이 짙어질수록 신기하게도 모기들은 오지 않았다.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내리 덮이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시며 우리 삼남매가 잠이들 때까지 부채를 부쳐주시던 어머니. 그 부채 바람도, 어머니의 무릎도, 손길도 이젠 아득히 멀어져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꼴망태 등에 지고 걷던 산길도, 어깨동무하던 옛 친구도, 문풍지 떨던 고향집도, 울타리 가에 열심히 거미줄 치던 왕거미도 이제는 마음속에 그리움이라는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은 선풍기니 에어컨이니 여름이면 부채가 필요 없게 되었고, 전자 모기향이 있어 밤새 피워 놓으면 모기를 퇴치할 수 있어 얼마나 편리한 세상 속에 사는지 새삼 신기할 때가 있다. 유난히 물것을 많이 타는 딸아이의 종아리에는 여름이 오기 전에 모기향을 미리 준비 못 해줘 몇 년 전에 물린 자국이 흉터가 되어 남아있다. 초여름부터 맨 먼저 딸애 방에 모기향을 준비해야 하는 것, 이것이 매년 여름 모기와 나와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다.

 

어릴 적, 종일토록 땡볕에서 논밭 일에 시달렸던 우리 부모님은 늘 옥수수를 노랗게 쪄서 큰 소쿠리에 담아오시고 수박을 잘라 내오셨었다. 그럼에도 행여 자식들이 모기한테 물릴까 싶어 힘든 부채질을 해주셨는데 이렇게 편리한 세상 속에서 그깟 전기 모기향 하나 미리 준비 못한 어미의 지혜롭지 못함을 탓해 봤었다. 이제 이 아이들의 마음의 고향엔 전기 코드만 꽂으면 시원해지는 선풍기와 전자 모기향만 남게 될 것이다.

 

지금도 눈감으면 그릴 수 있는 어머니의 얼굴. 졸음에 겨운 몸놀림으로 헛손질까지 해가며 밤새 모기를 쫓으시며 금지옥엽으로 키워주셨음에 늘 감사드린다. 지금도 묻어올 것 같은 모깃불의 매캐한 연기 속에 도란대던 가족간의 이야기들. 인간은 추억을 먹고산다고 했던가. 세월이 가고 자식들이 성장해 갈수록 그 옛날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 풍족치 못했던 생활 속에서도 나름대로 낭만이 있었고 철학이 있었던 그 옛날이 그리워진다.

 

며칠 전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난 남편은 밤새 모기 한 마리와 소탕 작전을 벌였고, 기어코 잡고 나서야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체질도 변화하는지 모기를 무시하던 남편은 요즘들어 나와 반대가 되어 야단이다. 누가 낮에 베란다 문을 열고 안 닫았느냐며 어미란 게 확인도 안 해봤냐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여름과 모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목화솜 이불

 

요즈음 아파트문화는 문만 닫으면 타인의 간섭도 받지 않고 깨끗하고 간편하게 가족들만의 보금자리로 각광을 받고 있다. 게다가 가스시설이 잘 되어 있어 옛날처럼 무거운 이불보따리를 이고, 지고 다니는 번거로움마저 없어졌다.

 

가난했던 시절, 외풍이 센 집에 세들어 살면서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두꺼운 솜이불이었다. 아이 셋을 연년생에 쌍둥이로 올망졸망 키우며 감기를 달고 살다보니 그저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숨구멍만 살짝 열어놓는 게 바로 겨울을 나는 방법이었다. 연탄 다음에 솜이불, 그것은 우리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새 집을 장만해서 몇 달 뒤면 이사를 하는 언니는 짐정리를 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이불이라고 했다. 연립주택에서 이십 오년간 토박이로 살았으니 묵은 짐이 오죽 많겠는가. 성당사람들은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헌 짐 가져가봤자 집만 헌집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 것 같았다. 워낙 알뜰해 가전제품의 수명도 대부분이 십오 년을 넘었고, 시어머님을 이십오 년간 모시고 살다보니 오래된 물건이 더 많았다. 그 중에서 언니는 목화솜 이불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이불이야 돈만 있으면 이불집에 널리고 널렸고, 호사스러운 빛깔에 디자인 또한 천차만별이라는걸 알지만 자꾸만 친정어머니의 손때와 흔적이 없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온다고 했다.

 

예전에는 시집갈 장성한 딸이 있는 집안에서는 삼사 년씩 목화를 심어 순목화솜 이불을 장만하는 것이 으레 있는 일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큰딸의 결혼을 위해서 삼 년이나 심고 가꾼 목화를 긴 겨울 내내 손톱이 까지도록 씨를 뽑고 심혈을 기울여 백 퍼센트 목화솜으로 두 채나 해주었던 이불. 비록 세월 앞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렸지만 그 이불을 버릴 수 없는 건, 등잔불 밑에 잔뜩 웅크린 채 흐린 눈으로 씨를 빼던 어머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였으리라.

 

어머니는 밤새 손끝에서 솜사탕처럼 목화솜을 피워냈다. 목화솜만큼 따뜻했던 긴 겨울, 소쩍새 울음소리가 깊어가는 가운데 입담 좋은 어머니는 『옥루몽』을 들려주셨다.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그림자놀이에 열중했던 내 유년의 형제자매들. 곰삭은 청국장 내음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구름과 입맞춤하고, 외양간에서는 어미소와 송아지가 한낮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재롱떨던 곳. 어머니란 이름의 우주가 있어 유년의 뜰은 향기로운 꽃동산이었고 낙원이었다. 가을 햇살을 따라 순백의 목화꽃송이는 바깥마당에서 눈처럼 하얗게 부풀어올라 온 집안을 하얗게 꽃피웠었다. 산마을의 굴뚝 연기가 피어오르던 저녁나절의 그 기억들은 삶에 지친 내게 평화로움을 안겨주고 행복한 추억이 되어준다.

 

이제는 양지바른 납골당 안에서 한 줌 재가 되신 어머니의 지난날은 아픔과 설움의 세월이었다. 늘 이불이 모자라 배만 겨우 가리고 문풍지 떠는 겨울을 혹독하게 지냈던 어머니에게 있어 두툼하고 폭신한 이불이야말로 육체와 정신을 감싸줄 특별한 선물일 터였다. 내 딸이 일평생 훈훈하고 따숩게 살기를 염원했던 가난한 어머니의 소원을 익히 알고 있던 나로서도 가슴 한쪽이 미어져 왔다. 유난히 작은딸을 귀여워하셨던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별거 아닌 별거를 하게 했고, 매년 돌아오는 긴 겨울을 아버지와 함께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안방사정은 아랑곳없던 철없던 시절 아버지 이불은 무겁고 크고, 따뜻했다. 늘 배만 가리고 추위에 옹송그리고 주무시던 어머니는 인생 또한 춥고 외롭고, 힘겹게 살다 가셨다. 언니의 결혼을 겨우 보시고 몇 달 후 어머니는 먼 나라로 가셨다.

 

어머니가 가신 뒤 목화씨를 고르며 참 많이도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 습관처럼 아버지는 나를 위해 목화를 2년간 심으셨고, 어머니가 하던 것처럼 나 또한 목화씨 빼는 기계비가 아까워 겨울내내 씨를 빼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었다. 더 춥고 더 슬펐던 그 겨울날, 나 역시 어머니처럼 긴 겨울을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씨를 뽑으며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우리집 장롱에는 눈물로 씨를 빼면서 해 온 이불이 있다. 햇볕 좋은 날 일광소독을 하려고 널어놓으면,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겨서인지 두 배로 부풀어올라 있다.

 

어느새 나도 지천명을 코앞에 두고 오래지 않아 홍일점인 막내딸을 시집보내게 될 것이다. 혼수백화점에 가면 만나게 되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이불과 솜씨 좋게 개켜 넣어주는 종업원의 손을 보면서 내 딸은 먼 훗날 ‘어머니’란 이름을 어떻게 기억해 줄런지 모르지만, 내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 내 딸이 따숩고 정 많은 배우자를 만나 한평생 편안하고 포근하게 살기를 염원할 것 같다. 

 

언니는 목화솜 이불 한 채를 둘로 나누는 작업을 해서 도로 친정에 보내야겠다고 했다. 치매로 인해 정체성마저 잃은 아버지가 그 옛날 꽃 같이 어여뻤던 어머니를 기억이나 하실는지 모르지만 사슴이 잃어버린 전설을 생각하듯, 그 이불을 덮으시면서 어머니를 기억해 내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삼십 년 만의 휴가

 

여러 번의 혹한기를 넘기고 신묘년 새해가 밝아왔다. 작년 12, 삼십 년만의 휴가를 보내던 중 베란다 창문으로 부나비처럼 부딪치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지나온 날들을 반추해 보았다. 결혼생활 삼십 년.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톱니바퀴가 닳아 동그란 원이 되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다보니 어느덧 강산이 세 번씩이나 바뀌었다. 연년생에 쌍둥이 세 아이를 키우며 몸조리 한번 못한 채 달려온 세월이었다. 세월이 좋아 백만 원의 거금을 들여 조리원에서 공주처럼 산후 조리하는 친정 조카며느리를 보면서 많이도 변해버린 아내의 자리, 여자의 위치를 실감했다.

 

내 인생은 누구를 위한 세월이었는지 헤아려 보았다. 아내, 엄마, 며느리,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목적 가정부처럼 내 몸 하나 돌보지 못한 날들이었다. 작년에는 유독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불과 일 년 안쪽에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께서 하나님 곁으로 떠나셨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다시 일반병실로 다니며 가장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란걸 가슴 아프게 느낀 날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통제가 아니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생리통이 심해졌다. 칠 년 전부터 근종이 생긴건 알았지만 폐경기가 오면 수술을 안 해도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희망을 안고 살아왔는데 건강검진을 하면서 내 몸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더 커지고 늘어난 근종, 그리고 높아진 난소암 수치로 인해 자궁 적출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자궁 적출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다른 병원도 한 군데 더 가 봤지만 결론은 같았다.

 

혹한기가 시작되던 날, 간단한 소지품을 들고 두 아버지들로 인해 지겹게 맡아야 했던 병원 냄새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만나기 힘들다는 여성 근종 수술의 권위자인 박사님을 하나님 은총으로 만나게 되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걱정했던 난소 쪽도 깨끗했다. 무통 주사가 맞지 않는 체질이라 고생은 했지만 일주일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밖의 세상은 활기차고 아름다워 보였지만 병실 안의 풍경은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부터 암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칠십 대의 노인까지 모두가 창문 밖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향해 달려왔던 것일까? 오직 자식의 출세를 바라며 자기 몸을 희생한 노인 분들은 모두가 헛된 세월이었노라고 술회했다. 내가 살아야 자식도 있다는걸 병이 온 후에야 알았다고 했다. 이제 짐스러워진 엄마가 되었노라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건 건강이다. 돈을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있지만, 건강을 잃었을 땐 다시 찾기가 힘들다. 

 

일주일 뒤, 함박눈을 맞으며 퇴원을 했고 의사선생님 말씀대로 두 달 간의 휴가에 들어갔다. 아이들이 다 커서 밥부터 세탁, 청소,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주었고, 남편 역시 가끔씩 자취하던 시절의 음식솜씨를 과시했다. 환자라는 명목 하에 얻은 휴가였지만 그 옛날 친정 부모님과 함께 했던, 공주처럼 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작대기 맞은 뱀 마냥 시집 살림, 친정 살림, 우리 살림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달려 온 삼십 년의 세월이었다. 할 일 없이 이집 저집 커피 마시러 다니는 여인네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 세월 속에서 내가 제일 갈구했던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던 것 같다.

 

이제 바깥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지 포근하다. 꽃이 피는 봄부터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까지 매년 반복되는 이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흐르고 흐른다. 삼십 년 만의 화려한 휴가도 끝나간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 남은 날들을 잘 갈무리하며 더 열심히 살 것이다. 세상 끝나는 그날까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늘 행복하길, 그리고 병원이나 약국을 찾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풍년꽃은 또 피건만


 

이른 새벽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새벽만큼 사람을 경건하고 숙연하게 만드는 마술이 없다는 것을. 그때만큼은 인생의 도화지에 예쁜 그림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벅찬 희망을 맛볼 것이다.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면 맨 먼저 나를 풀냄새에 젖게 하며 웃고 있는 작은 꽃이 있다. 이 꽃은 꽃이라기보다는 들풀이라 해도 어울릴 만큼 작고 흰 얼굴로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들판 어디에나 튀밥을 엎은 듯한 모습으로 흔하게 피던 꽃. 자세히 들여다보면 흰쌀을 연상케 하는 울 엄니의 희망이었던 풍년꽃이다.

 

“언년아. 풍년꽃이 만발했으니 올해는 양식 걱정 안 해도 되려나 보다.

 

내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가노라면 오빠 등에 업혀 아카시아꽃을 따던 날이 떠오른다. 개울에서는 개구리 떼의 합창이 이어졌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었던 아버지와 삼베적삼을 희게 입었던 어머니의 소쿠리에는 쌀보다 푸짐한 아카시아꽃이 담겨 있었다. 그 가난한 어머니의 뜨락에는 봉숭아꽃 같은 네 자식들이 꿈이었고 희망이었건만 큰아들은 청춘에 민들레 꽃씨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그 아카시아 떡 맛이 지금도 생각나는걸 보면 아마 그때가 우리 가족의 가장 행복했던 날이 아니었나 싶다.

 

명절이나 돌아와야 뻥튀기 아저씨가 까만 연기통 같은 걸 수레에 싣고 산골 마을을 방문했다. 옥수수나 검은콩을, 좀 사는 집들은 쌀을 튀기기가 마을 한가운데서 축제처럼 벌어졌다.

 

“옥수수 말고 쌀 튀겨 줘. 왜 맨날 옥수수야!

 

마당 한군데에는 부끄러운 듯 옥수수를 깡통에 담던 초라한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철없던 딸의 말이 행여 어머니 가슴에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까?

 

마을에서 가장 큰 돼지를 잡는 행사 날에는 오줌보로 공을 만들어 차려는 머슴애들의 줄다리기가 시작됐고, 얼큰히 한잔 걸치신 아버지의 어깨에는 돼지 다리가 하나 얹혀 있었다. 전설처럼 들려오는 보릿고개를 우리 집도 넘어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보리이삭 주워 가져오기가 숙제였고, 어머니 밥에는 감자 두 개가 전부였었다. 언니는 늘 횟배를 앓는 듯 배가 아프다며 어머니 밥에 자기 몫을 덜어놓곤 했다. 철이 늦게 난 나는 어머니 생각은커녕 아버지가 은근히 밀어 놓은 밥까지 먹어 치웠다. 

 

어린 날, 어머니 손잡고 물주전자 들고 아버지가 소를 모는 산골길을 걷노라면 늘 무리지어 피었던 꽃. 찔레꽃 같은 향기도, 장미 같은 화려함도 없이 그 옛날 산골 구석에 묻혀 여행 한 번 못 가보고 떠난 내 어머니를 닮은 초라한 꽃. 진정 그 꽃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오매, 풍년꽃 핀 것 좀 보아.” 하시며 웃던 내 어머니 얼굴은 환희에 부풀었었다. 먹고사는 것이 그 당시 최고의 관심사였고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이 목표였던 날들이었지만 내게는 늘 행복한 추억의 뒤안길이다.

 

진달래꽃을 한 아름 꼴짐 속에 꽂아 오셨던 아버지의 옷에서는 늘 들풀 냄새가 났었다. 의식주가 부족했음에도 내 마음이 항상 넉넉했음은 아마도 어머니의 신앙 같은 믿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자고 새면 늘 똑같은 일상이 주어지고, 허덕대면서도 꿈만은 잃지 않았던 날들.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것 같았던 어머니가 황급히 떠난 빈자리는 내게 세상이 어떤 것인지, 왜 살아야 했는지, 무엇이 그토록 질기게 삶의 끈을 지탱해 왔는지를 깨우쳐 주었다. 내가 크면 제일 먼저 시장에 가서 맛있는 국밥 한 번 사 드리고 제일 예쁜 색 한복을 사서 입혀 드리리라던 소망은 그리도 허무하게 꺾여버렸다.

 

어쩌면 어머니의 염원이었고, 잡고 싶던 한 가닥 희망의 줄 같았던 풍년꽃이 피는 6월이 오면 나는 어머니 생각에 늘 목이 멘다. 이제 도회지에는 흉년이라 해서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도 없고, 풍년꽃을 기뻐 맞을 이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마다 누가 보든 말든 풍년꽃은 혼자서 무수히 많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나름대로 바쁜 도시 한편에서 피고 또 지고 있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풍년꽃. 하찮은 풍년꽃 하나에도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사셨던 어머니가 잡았던 꿈은 일확천금이 아닌 풍년이었다. 그 가엾은 꽃을 보면 어머니 얼굴이 아른거려 가슴이 아파온다. 작년이었던가? 시댁에 가는 길, 우리 부부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저 길가에 핀 꽃 이름을 아느냐고 물어 왔다.

 

“응, 풍년꽃이라는데….

 

그런 꽃 이름은 생전 처음 듣는다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남편의 얼굴을 뒤로한 채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날 그 길가의 풍년꽃은 산 속에 누워계실 어머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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