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의 기호학
■ 탐구의 논리와 기호
현대인의 일상적 삶은 기호의 홍수 속에 표류하고 있다. 우리의 전자메일에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유혹의 메시지,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 입는 옷과 악세서리, 우호적이거나 냉소적인 타인의 시선, 물리학이나 경제학 혹은 전자공학 등의 학문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그리고 타인에게서 받은 선물 등 모든 것이 기호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기호에 나타난 의미와 숨은 의미를 생각하고 추론하며 또한 기호를 통해서 소통된다. 모든 영역의 문화적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의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자극이 약한 기호의 수준에서도 기호의 의미작용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호학은 기호의 본질과 그 구성요소는 무엇이며, 사회적 삶의 맥락에서 그 의미작용 혹은 기호작용을 지배하는 법칙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비교적 새로운 학문이다. 원래 기호학은 20세기 초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와 미국의 퍼스에 의하여 각기 서로 다른 지적 배경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출현하였으나, 소비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기호학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기호학적 원리를 문화산업에 활용하려는 기능적 활용성과, 소비 자본주의사회의 문화현상 이면에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려는 비판적 필요성에서 기호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대된 것이다.
원래는 소쉬르 계통의 기호학을 세미올로지(semiology)라 하고, 퍼스의 전통을 계승하는 기호학을 세미오틱스(semiotics)라 불렀으나, 오늘날은 계보에 관계없이 기호학 전체를 세미올로지 혹은 세미오틱스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소쉬르의 기호학적 전통을 따르는 대표적 인물은 코펜하겐학파를 설립한 옐렘슬레브(Hjelmslev)이며, 그레마스(Greimas)와 바르트(Barthes)의 기호학은 옐렘슬레브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데리다(Derrida)의 해체철학적 언어관도 소쉬르의 언어관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퍼스의 기호학적 전통은 모리스(Morris), 리차드(Richards), 세보크(Sebeok) 등 기호학자들의 저서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 출신의 야콥슨(Roman Jakobson)과 이탈리아의 에코(Eco)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전통과 퍼스의 철학적 전통 사이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표적 기호학자로 유명하다. 소쉬르가 사망한 후 옐렘슬레브가 주도한 코펜하겐학파와 야콥슨이 주도한 프라하학파가 구조언어학을 계승 발전시켰으나, 야콥슨은 미국으로 이주한 후 퍼스의 기호학적 관점의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야콥슨 자신도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과 라깡의 언어학적 정신분석이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의 대표적 기호학자로 유명한 에코는 『기호학의 이론』(Theory of Semiotics)에서, 옐렘슬레브의 구조주의적 기호학과 퍼스의 인지적 및 해석학적 기호학간의 통합을 시도한다.
한편 1960년대 말부터 구조주의 진영 내부에서 구조주의적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바르트, 라깡, 푸코, 데리다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의 관점도 끊임없는 의미작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학을 연결하는 데 이바지하게 되었다. 어떻든 오늘날의 기호학은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바르트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슈투어드 홀이 주도하는 영국 현대문화연구센터(CCCS)의 활동을 통해서 문화연구의 주요 방법론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 1839~1914)는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매서츄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을 졸업했으나, 하버드대학과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몇 년간 강사직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거의 평생을 연안 측량부 기사로 근무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스는 수많은 기술적 업적을 쌓는 한편 고도로 전문화된 수학, 논리학, 기호학, 철학 등에 관한 독창적 논문들을 여러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퍼스는 생전에 단 한 권의 책도 발간하지 않았으나, 그가 사망한 후 1931년부터 1935년 사이에 총 8권으로 된 『논문집』 (Collected Papers
)이 출판됨으로써 비로소 실용주의 철학과 기호학 등에 관한 그의 독창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호학에 관한 퍼스의 관심은 인간과 사회 및 자연적 대상에 관한 합리적 인식과 탐구의 논리를 규명하려고 하는 철학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퍼스의 철학적 입장은 한편으로는 대상은 실재하나 대상의 실재성(reality)이 우리의 인식활동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관념론적 실재론(idealistic realism)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활동은 대상이 인식되고 해석되는 경험적 삶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식에서 얻은 관념을 경험적 삶의 맥락에 적용해 본 결과 그 유효성과 실용성이 입증되면 그 관념은 의미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실용주의(pragmatism)라고도 한다. 후자는 일찍이 제임스도 프래그머티즘의 효시로 인정한 실용주의 철학의 핵심적 명제이다.
따라서 퍼스는 선험적인 직관의 능력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해 온 데카르트류의 내성법(Cartesian introspection)을 비판하고, 직관적 이성과 경험적 이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칸트적 인식론을 계승한다. 따라서 그는 물자체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구분하는 칸트의 철학적 관점을 수용하여, 탐구대상 그 자체와, 우리의 의식에 나타난 탐구대상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을 범주적으로 구별한다. 그러면서도 퍼스는 물자체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본 칸트와 달리, 인간은 끊임없는 재해석과 탐구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실재를 점진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퍼스에 따르면, 우리는 개인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인식을 초월하는 이상적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합의를 통해서 실재에 점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관한 퍼스와 하버마스의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언어학에서 출발했고, 퍼스의 기호학은 철학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interpreted communication)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해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고, 퍼스의 기호학은 실재에 관한 탐구의 논리(logic of inquiry)를 발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퍼스는 대상을 탐구하는 논리적 사고의 과정을 기호활동으로 파악하고, 사고의 법칙일반을 다루는 논리학을 기호학과 같은 범주로 파악한다. 그 이유는 인간과 사회 및 자연에 관한 탐구의 논리를 다루는 논리학은 우선 무엇보다도 탐구의 대상을 표상하는 기호의 특성을 연구하는 기호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호체계를 그 연구대상으로 삼는 소쉬르의 기호학과는 달리, 퍼스의 기호학은 인위적 기호뿐만 아니라 의도적 발신자가 없는 자연현상까지도 기호로 규정하는 그야말로 범기호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 세미오시스(semiosis)
그러나 무엇보다 두 기호학을 구분 짓는 중요한 차이점은 소쉬르의 기호학이 지시대상을 배제한 이원체계인 반면, 퍼스의 기호학은 지시대상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삼원체계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소쉬르의 기호학은 기표와 기의, 소리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개념을 연상하게 되는 의미작용을 분석단위로 삼는 이원체계(dyad)인 데 비하여, 실재에 관한 탐구의 논리로 개발된 퍼스의 기호학은 기표와 기의에 각기 해당되는 표상체와 해석체 뿐만 아니라 탐구의 대상까지 포함하는 삼원체계(triad)로 이루어진 것이 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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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기호작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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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의 의미작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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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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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ific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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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os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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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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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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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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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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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는 기표(S)를 보고 그 기표에 상응하는 기의(s)를 연상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화 혹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표현하지만, 퍼스의 기호학에서는 지시대상과 그 표상체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에 어떤 생각이나 개념이 드러나는 현상을 세미오시스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의미작용에 해당하는 것이 퍼스의 기호학에서는 세미오시스(semiosis)라고 할 수 있는데, 세미오시스는 기호작용에(sign-action)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오늘날 기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의미작용과 세미오시스 및 기호작용이라는 용어가 마치 동의어처럼 사용되기도 하나, 소쉬르의 의미작용과 퍼스의 세미오시스 혹은 기호작용은 구별해야 한다. 그 이유는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을 전자는 배제하고 후자는 재현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소쉬르의 의미작용이 이원체계인 데 비하여, 퍼스의 세미오시스는 삼원체계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자가 이원체계, 후자는 삼원체계라는 단순한 차이점뿐만 아니라, 소쉬르의 기호학과 퍼스의 기호학 사이에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보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소쉬르의 기호학과 대조적으로 퍼스의 기호작용은 끊임없는 기호작용(endless semiosis)을 강조하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소쉬르의 기호이론은 언어체계 안에서 소리가 그 개념을, 기표가 그 기의를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해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퍼스의 기호학은 탐구의 대상(object)을 표상하는 기호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는 생각이나 개념을 뜻하는 해석체(interpretant)가 대상을 여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특정 측면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새로운 기반(ground) 혹은 새로운 기호로 해서, 대상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보다 진리로운 인식을 향해 단계적으로 접근해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독특한 퍼스의 관점을 그의 『논문집』/FONT>Collected Papers)에 나타난 아래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호는... 우리에게 어떤 대상의 특정 측면을 대신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기호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의 의식에 저 기호에 상응하는 기호, 말하자면, 한 단계 발전된 새로운 기호를 드러내 준다. 첫 번째 기호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드러난 것을 첫 번째 기호의 해석체라고 부른다. 기호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여 나타내지만, 대상을 여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특정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Silverman, 14쪽에서 재인용)
이와 같이 부단한 재해석과 끊임없는 기호작용을 강조하는 퍼스의 기호학적 관점은 기표의 끝없는 연쇄가 있을 뿐 최종적 기의를 확정할 수 없다고 보는 데리다나 라깡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과 유사하다. 그러나 데리다나 라깡이 언어체계 밖이든 언어체계 안에서든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과 대조적으로, 퍼스는 부단한 기호작용의 과정에서 궁극적으로는 이상적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합의를 통해서 실재를 재현할 수 있다고 본다.
■ 기호의 구성요소
기호(sign) :
위에서 이미 퍼스의 기호학을 표상체와 그 지시대상 및 해석체로 구성되는 삼원체계(triadic system)라고 했다. 여기서 ‘표상체’라고 하는 것은 ‘기호’라는 용어와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퍼스의 기호학에서 기호라는 용어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적절히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넓은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기호작용(semiosis)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요소인 표상체와 대상 및 해석체를 총칭하는 광의의 기호개념이고, 좁은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이들 세 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표상체만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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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기호작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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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sign): 표상체(representam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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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os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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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referent/objec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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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체(interpretant) |
앞에서 우리는 퍼스의 세미오시스가 기호와 해석체 및 대상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퍼스에 따르면, 기호(sign)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표상하거나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기호를 표상체(representamen)라고도 한다. 여기서 표상되거나 나타내어지는 어떤 것을 대상(object) 혹은 지시대상(referent)이라고 한다. 기호는 대상을 대신 나타내는 것이긴 하나, 대상의 모든 측면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어떤 특정 측면 혹은 특정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퍼스는 이러한 특정 개념을 기반(ground)라고 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계속적인 기호작용을 통해서 탐구의 과정이 거듭되어야 한다고 본다.
퍼스의 기호학에서 의미작용을 촉발시키는 이러한 기호는 그것이 어떤 개념을 연상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소쉬르의 기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수행하는 대상 표상적 특성(representational qualities)이라는 점에서 보면 소쉬르의 기표와 다른 측면도 있다. 그 이유는 퍼스의 기호는 지시대상을 표상하지만, 소쉬르의 기표는 지시대상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해석체(interpretant) :
퍼스의 기호학에서 해석체라고 하는 것은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기의와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퍼스가 기호와 대상간의 관계에 의하여 해석자의 의식에 드러나는 생각이나 개념을 해석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식에 나타난 생각이나 개념을 기반으로 해서 대상을 인식하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퍼스의 기호학은 인지적이고 현상학적인 특징이 있다. 그러나 소쉬르의 기의와 달리, 해석체 그 자체가 한 단계 더 심층적 차원의 기호(기호2)가 될 수 있고, 이 기호는 또 다른 해석체(기호3)를 생성하며, 이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본다. 에코(Eco)는 퍼스의 기호학의 이와 같이 끊임없는 전환가능성을 부단한 기호작용(unlimited semiosis) 혹은 끊임없는 기호작용(endless semiosis)이라고 하고, 이를 소쉬르에서 볼 수 없는 퍼스의 기호학이 갖는 특징이라고 본다. 해석체에 부여하는 바로 이러한 특성에 관한 한, 퍼스의 기호학은 소쉬르보다는 오히려 옐름슬레브나 바르트의 기호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해석체 혹은 기의의 끝없는 전환가능성을 강조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기의의 특성을 강조하는 퍼스의 기호학은 오늘날과 같이 상품 그 자체의 효용성 못지 않게 상징적 이미지가 문화산업의 성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특히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범람하는 이미지와 기호의 이면에 은폐된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독할 수 있는 기호학적 안목을 넓혀야 하는 현실적이고 규범적인 필요가 있고,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오늘날 퍼스의 기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퍼스의 이러한 관점은 최종적 기의의 끝없는 유보를 강조해 온 데리다와 라깡을 비롯한 최근의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이론과도 유사한 것이다.
대상(object) :
기호학에서 ‘대상’은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을 뜻하기 때문에 지시대상(referent)이라고도 한다. 소쉬르의 기호체계는 언어 외적 실재와 무관한 자족적 체계이기 때문에 지시대상에 대한 판단이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그러나 퍼스의 기호학은 인간과 사회 및 자연에 관한 탐구의 논리를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기호체계에서는 기호가 표상하고 지시하는 대상이나 실재가 바로 끊임없는 세미오시스의 과정을 통해서 탐구되어야 할 대상이고, 그래서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 그 자체가 세미오시스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따라서 퍼스의 기호학이 가장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중 하나는 인식론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Hawkes, 128). 기호학적 표상이 실재에 대한 유일한 접근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에, 퍼스의 기호학에서는 실재에 대한 표상의 진실성이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따라서 퍼스는 기호와 실재, 기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의 특성에 따라 기호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도상적 기호는 기호와 그 대상 사이에 가장 높은 유사성이 있는 경우이고, 지표적 기호는 기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에 유사성이 덜 명백하거나 매우 희박한 기호이고, 상징적 기호는 기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가 유사성은 전혀 없이 전적으로 문화적 자의의 산물인 기호를 뜻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념적 구분이고 실제적으로는 도상과 지표 및 상징적 요소가 서로 섞여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기호의 유형
도상적 기호(iconic sign) :
최근에 신세대가 선호하는 감성언어의 일종인 이모티콘은 전형적인 도상이다. 이러한 기호들은 각기 그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유사성에 착안한 것이다. 사진이 실물과 유사한 도상, 분자모형은 물질의 구조적 특징과 유사한 시각적 도상, 그리고 한국에서는 ‘멍멍’이 개 짖는 소리를 나타내는 음성적 도상으로 통용되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기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의미작용을 기능하게 하는 기호를 도상(icon)이라고 한다. 퍼스는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 도상적 기호가 유용하게 활용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가령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나무라는 언어를 사용하면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나, 나무의 사진을 보여주면 나무의 관념이 직접적으로 소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표적 기호(indexical sign) :
풍향계는 바람의 방향을 알리는 지표이고, 문을 노크하는 소리는 누군가가 와있다는 지표이며, 콧물과 재채기 그리고 미열 등은 감기 같은 질병의 지표이며, EQ가 정의적 능력의 지표이고, 연기가 불의 지표이며, 고급 승용차가 부의 지표로 통용되는 관행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퍼스는 기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에 인과관계나 서열관계(sequential relation) 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관계가 있는 경우를 지표적 기호라고 한다.
지표(index)를 기호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퍼스의 기호학적 입장은 소쉬르의 기호 개념과 구별되는 뚜렷한 차이점이다.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기표와 기의 간의 관계는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 자의적 관계인 데 비해서, 퍼스의 기호학에서 지표는 대상을 필연적으로 지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기호의 본질을 규정하는 관점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퍼스의 기호학이 원래 인간과 사회 및 자연에 관한 탐구의 논리를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고, 그래서 소쉬르의 기호학보다 기호의 외연이 넓기 때문이다.
상징적 기호(symbolic sign) :
도상이 유사성을 기반으로 하고, 지표가 인과성에 근거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기호라면, 상징적 기호는 자의성이 그 특징이다. 상징적 기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나 인과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상징은 소쉬르의 기호이론에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처럼 전적으로 자의적 관행의 산물이다. 붉은 악마가 한국 축구 응원단을 상징하게 된 것도 필연적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자의적 관행의 산물이다.
언어는 전형적인 상징적 기호에 속한다. 화판에 그린 소나무의 그림은 소나무의 도상적 기호이고, 저 소나무를 가리키는 내 손가락은 지표적 기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소나무’라고 표현하는 언어는 소나무에 대한 상징적 기호이다. 그 이유는 ‘소나무’라는 낱말을 발화할 때, 이 기표와 소나무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없고, 어떤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소나무다운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소리로서의 소나무와 개념으로서의 소나무 사이의 관계는 사회의 자의성과 관행의 산물이다.
이상과 같이 기호와 그 지시대상 간의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 퍼스는 기호를 도상과 지표 및 상징 등 세 가지 양식의 기호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어디까지나 개념적 구분이고 실제적으로 상호 배타적이지는 않다. 가령,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도서관의 ‘메뚜기’족이라고 하는 것은 톡톡 튀는 행태의 유사성에 근거한 비유라는 점에서 도상적 기호이긴 하나, 톡톡 튀는 행태를 벼룩이 아니라 메뚜기에 비유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그래서 상징적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개 짖는 소리를 ‘멍멍’이라고 나타낼 때 이는 분명 음성적 도상이면서도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 사회의 자의적 관행의 소산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상징적 측면을 가진 도상적 상징기호라 할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 통용되는 것은 도상적 상징, 지표적 상징, 혹은 상징적 지표와 같이 두 가지 이상의 기호양식이 중첩된 기호들이다.
■ 기호학의 상호보완성
소쉬르는 언어체계를 특징짓는 규칙은 언어를 비롯한 모든 문화적 현상의 분석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기호학은 철저하게 언어 중심적인 기호학이다. 그러나 퍼스의 기호학은 대상세계를 합리적으로 탐구해 가는 논리학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기호로 파악하는 범기호학적 관점(pansemiotic perspective)이 그 특징이다. 음성적 영상과 개념, 기표와 기의의 결합을 언어의 기본단위로 파악하는 소쉬르의 기호학에는 현실적 대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퍼스의 기호학은 대상세계에 대한 탐구의 논리이기 때문에, 기호가 표상하고 지시하는 대상이 중요시된다. 그래서 실버만도 이 점을 두 기호학의 핵심적 차이점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두 기호학은 의미작용에 있어서 인식주체의 역할을 파악하는 관점에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의미는 결합관계와 계열관계 같은 언어체계의 구조적 형식에 따라 결정될 뿐 의미작용에 의식적 주체가 개입될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 기초가 강조되나, 퍼스의 세미오시스에 있어서는 기호가 지시하는 현실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합리적 해석과 재해석의 과정이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소쉬르의 기호학은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틀짓는 구조적 제약요인을 분석하는 데 기여할 수 있고, 퍼스의 기호학은 인식주체의 끊임없는 재해석을 통해서 자신과 대상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두 기호학은 상호보완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출전: 전경갑 외, 『문화적 인간·인간적 문화』, p.3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