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실재(Real) : 지젝과 데이비드 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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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승기 (경희대)
1. 0 히치코크식 얼룩
공포는 목가적인 실내장면과 위협적 외부의 대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평화로운 실내의 '억압된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히치코크의 영화가 발생시키는 '낯설고도 친밀한'(uncanny) 효과는 수평적 병치가 아닌 수직적 겹침에서 생겨난다. 억압적 대상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삐죽 튀어나와 재현의 그물에 틈을 낸다. "이창"(Rear Window)에서 재현될 수 없는 얼룩은 아내 살해자의 '응시'와 정체불명의 '목소리'이다. 제프(James Stewart)는 자신이 동일시했던 시선을 되돌려 받는다.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타자의 욕망의 불가해함을 외치는 아내 살해자의 질문은 제프를 욕망의 근원에 맞닥뜨리게 한다. 팬터지를 통해 성관계를 피하고자 하는 제프의 욕망은 다시 성관계를 방해하는 목소리를 통해 드러난다. 목소리의 다지자는 창문을 통해 볼 수 없지만 마치 우리 자신 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가까이 있다. 너무 가까이 와 있는 보이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 "싸이코"의 노만 베이츠를 점령하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소프라노 음성은 제한될 수 없는 얼룩으로 남아있다. 문제는 이 얼룩이, 목소리의 예기치 않은 침임이 스튜어트가 관찰하고 있는 현실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얼룩은 단순히 부정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현실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라깡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불)가능하게 하는 얼룩을 실재(Real)라 부른다. 실재는 팬터지 속에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원인(Objet a)으로 존재한다. 바로 이 대상원인과의 만남이 팬터지가 이중적이도록 한다. 팬터지는 주체가 대상원인에 너무 가까이 가지(직접적인 만남) 않도록 해주는 방어기제일 뿐 아니라 팬터지 속에서 드러나는 타자의 욕망 자체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내 살해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그레이스 켈리를 제거하기를 소망하는 제프의 욕망은 '도대체 나에게 무얼 원하지?' 라는 질문에 의해 의문시 된다. 타자의 욕망은 여전히 파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담지자 없는 목소리는 성관계를 피하려는 욕망ㅇ리 뿐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지시한다. 얼룩은 사라짐으로써 일상적 현실을 가능하게 하고 왜상(anamorphosis)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현실의 결핍을 드러낸다. 히치코크의 영화에서 현실은 정신병적 요소들이나 도착적 관습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으며 주체가 아닌 집이 우리를 보고 있다. 응시나 목소리들은 사소한 대상들을 '숭고한 사물'로 끌어올려 숭고한 효과를 자아낸다. 대상원인으로서의 소타자와의 맞닥뜨림을 피하기 위한 팬터지 속에서 현실 속의 왜상적 얼룩이 다시 귀환한다.
1.1
린치의 영화 속에서 팬터지는 현실 아래 억압되어 있지 않고 나란히 병치되어 있다. 병치는 팬터지가 현실을 지탱해주는 요소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안전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현실과 절대적 가까움으로 다가오는 실재 간의 해결될 수 없는 불일치를 강조함으로써 '팬터지 횡단'할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숭고함의 팬터지 대신 숭고함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린치의 영화를 지젝은 '우스꽝스런 숭고'(ridiculous sublime)라고 명명한다. "로스트 하이웨이"(1997)는 너무 밝아 볼 수 없는 이미지나 고통스러워 귀를 막을 수밖에 없는 소리들을 제시한다. 지나침의 요소들은 팬터지 속에서 현실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서사가 봉합하고자 하는 욕망과 팬터지를 분리시킴으로서 팬터지의 작동방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끊임없는 의문의 형태로 드러남으로써 서사를 충동시키는 욕망과 이미 항상 거기 있어 욕망의 모호성에 답을 제시하는 팬터지의 결합을 보여주기는 커녕 린치의 영화는 욕망과 팬터지의 병치를 통해 팬터지로 해결될 수 없는 욕망의 불가해성, 타협하지 않는 욕망, 충동(drive)의 차원을 드러낸다. 사후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같이 있어 욕망을 구조짓고 있는 팬터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욕망과 팬터지의 악순환과는 다른 차원이 이야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2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영화 자체가 모호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팬터지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보다 분명히 함으로써 린치는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 보여주는 기괴함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프레드(Fred Madison)에게 참을 수 없는 불안을 부러일으키는 것은 르네(Renee)의 불가해한 욕망이다. 그것은 언제나 프레드가 포착할 수 없는 또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르네가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되는 불가해하고 불명확한 욕망(의 원인)에 의해 프레드 역시 욕망하는 주체로 태어난다. 르네의 말을 해석해보려는 프레드의 노력은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깡의 말을 상기시킨다. 욕망은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것은 주체가 언어에 편입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지만 언어 속에서 온전히 재현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이것이 욕망이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이유이고 끊임없는 질문으로 행사되는 욕망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는 주체는 그 대답을 찾아 팬터지로 도피한다.
1.3
욕망으로부터 도피하는 또 다른 방법은 법에 의존하는 것이다. 욕망의 질문에 대한 상상적 해결책인 팬터지와는 달리 욕망의 질문과정 자체를 통제하는 초자아의 법은 욕망의 전복적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욕망을 감시한다. 내부에서 주체를 감시하는 법. "당신이 나를 초대했다"고 말하는 미스터리 맨처럼 초자아는 주체의 한가운데에 이미 들어와 있는 외부 침입자이다. 프레드의 집에 배달된 비디오처럼 내부와 외부를 모두 아는 법. 욕망의 불가해성은 초자아로의 도피를 초래한다. 주체가 욕망을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초자아는 더욱더 많은 포기를 요구한다. 죄의식이 증가함에 따라 프레드는 욕마의 근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죄의식이란 욕망의 근원과의 만남에서 생겨나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베일일 뿐이다. 죄의식은 이미 타협의 산물이다. 욕망의 끔찍함을 견디지 못한 주체가 차자아라는 법과 타협하여 내놓은 절충물이 죄의식이다 . 그러나 욕망의 대상원인은 르네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르네를 살해함으로써 욕망이 해결되지 않는다. 제거하려 하면 할수록 욕망의 대상은 보다 붙잡을 수 없는 형태로 출몰한다. 이것이 프레드가 보다 더 강력한 팬터지를 필요로하는 이유이다. 팬터지 속에서 프레드는 피트(Pete)가 되고 르네는 엘리스(Alice)로 변신한다. 팬터지는 타자의 욕망의 근원, 비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고자 한다. 르네의 불가해한 욕망 대신 피트는 엘리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것을 충족시킨다. 그는 그녀가 에디(Mr. Eddy)의 정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팬터지가 현실의 불충분함을 채워주는 것처럼 보일때 팬터지 자체의 결핍이 드러난다. 피트의 머리에 난 상처는 팬터지조차도 봉합할 수 없는 외상적 실재(traumatic Real)이다. 린치는 팬터지의 공간인 피트의 세계를 훨씬 더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팬터지가 현실의 부정이 아닌 지지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문제는 욕망의 타협물인 팬터지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피트가 팬터지를 통해 대상을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너는 결코 나를 가질 수 없다."는 엘리스의 말은 팬터지를 와해시킨다. 엘리스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도록 한 에디의 금지가 오히려 엘리스와의 사랑을 가능하게 했듯이 엘리스를 완전히 가실 수 없을 때 피트는 그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팬터지는 여전히 대상을 향유하는 또 다른 타자(Other)를 상정함으로써 대타자에 종속된다. 누군가가 나의 향유를 빼앗아 즐기고 있다는 도착적 팬터지가 만들어진다. 끝 장면이 처음 장면을 반복하게 함으로써 린치는 욕망과 팬터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팬터지를 횡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반복을 통해 작동하는 충동(drive)이다. 인터폰에서 흘러나오는 "딕 로랑은 죽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프레드는 이제 스스로 인터폰에 대고 그 말을 외친다. 불가해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던 메시지는 팬터지나 초자아의 법을 통과한 후에 주체화된 형태로 되돌아온다. 타자의 불가해한 욕망이 주체 자신의 피할 수 없는 곤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팬터지나 초자아를 통한 방어막이 걷힌다. 주체가 대상 소타자를 자신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정신분석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2.0
<로스트 하이웨의>의 여성적 판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로스트 하이웨이>와는 반대로 팬터지가 먼저 등장하고 뒤이어 욕마에 관계된 현실이 묘사된다. 후반부에 다이앤(Diane)은 카밀라(Camilla)를 소유할 수 없어 애태우지만 전반부의 베티(Betty)는 팬터지 속에서 그녀의 대상을 차지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사고 후 기억상실증에 거려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처지에 놓인 리타(Ritta)의 팬터지 대상이 베티인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그것은 다이앤이 자신의 욕망을 방어하기 위한 팬터지였음이 밝혀진다. 다이앤의 팬터지는 소유불가능한 대상인 카밀라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대상인 리타로 바꿔놓는다. 신비함은 불가능함에 대한 방어이다. 그것은 욕망을 구성하는 불가해성을 더 많은 지식을 동원한다면 밝혀질 수 있는 지식의 대상으로 바꾸어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어떤 팬터지적 보환물도 갖고 있지 못한 욕망의 주체로서 다이앤은 충동의 반복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팬터지 속의 베티는 시간성을 경험한다. 팬터지가 현실보다 더욱 시간적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의 두려움을 피해 팬터지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간성을 구성해낸다.
서사로서의 팬터지는 시간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반복, 즉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준다. 팬터지와 욕망의 명확한 구분은 팬터지와 욕망의 악순환이 숨기고 있는 욕망의 실재, 외상적 흔적을 보여준다. 외상적 실재는 팬터지가 숨기는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며 팬터지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아파트에서 죽은 채 내버려진 다이앤은 (베티나 리타 모드 그것이 다이앤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팬터지 자체의 외상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모든 팬터지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팬터지인 동시에 그 의미 없음으로 말미암아 팬터지의 방어체계를 손상시키는 상처이다. 팬터지를 횡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렇듯 팬터지 내부에 있다. 아무런 타협 없이 팬터지의 논리를 극단적으로 추구할 때 팬터지가 와해될 수 있는 지점이 생겨난다. 남성 팬터지는 소유할 수 없는 욕망의 팬터지로 끝나지만 여성의 팬터지는 욕망의 팬터지 자체의 결핍을 드러낸다. 실렌시오(Silencio) 클럽의 노래 소리. 크라잉이라는 노래는 베티와 리타 모두를 눈물 흘리게 하는데 이때 눈물은 팬터지 자체의 상실에 대한 애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채 상실한 대상 소타자가 팬터지 속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진정한 애도는 팬터지 속에서만 가능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속에서 팬터지는 욕망의 곤궁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식처인 동시에 주체가 외상적 실재와 만나는 장소이다. 공항에서 만난 노부부처럼 팬터지 대상들이 유령처럼 출몰하여 다이앤을 괴롭히는 것이 그 예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팬터지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 외상적 실재가 드러나도록 한다. 팬터지와 욕망 사이의 빈 공간(Silence)과 마주하는 경험, 바로 여기서 윤리적 주체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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