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 장미와 주판>
글쓰기의 묵시록 : 비약과 총체
1. "그 날부터 그들은 매일 밤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그녀는 언제나 사나이의 편지가 짧다고 나무랐다."1)
연사(戀辭)의 분량을 불평하는 연인들의 얘기는 한가해 보이는 고래의 사설(私說)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그것은 마음을 계교지심(計較之心)으로 기능화한 근대, 그리고 연애를 사적 열정의 공식적 회로로 정형화한 근대가 내통해서 만든 트기와 같은 것이다. 한편, 그것은 이중으로 중요한데, 사랑에 관한 인습의 도착(倒錯)을 드러내는 지표인 점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 도착에 글쓰기가 복무하는 방식을 통해 글쓰기의 긴한 이치 하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잡히지 않는 바로 그 속성에 의해서 오히려 연명하는 환상의 물매 효과2)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연인들은 습관처럼 사랑을, 그 사랑의 실체를 잡으려고 하고, 이로써 사랑은 그 만고(萬古)의 효용을 지치지 않고 유지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즉 (없는) 기원을 숨기는 척 하면서 존속한다는 점에서---그 모든 연인은 곧 신(神)이요, 그 모든 사랑은 곧 종교인 것이다.
연인이 편지를 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편지는 마치 신이 쓴 것처럼 그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못하는) 안티노미의 구성과 '저지의 체계'(보드리야르)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편지 속에서, 더구나 '짧은' 편지 속에서, 연인의 연정과 신의 계시를 확인하려는 사랑과 종교는 제 마음대로 성공하고 또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만이 사랑과 종교의 유일한 환상적 동력이기에, 그 불평의 인습은 오히려 한갓 도착인 것이다. 더불어, 사랑과 종교의 환상적 물매가 만드는 그 마음의 진자운동에 글쓰기가 동원되는 방식은 참으로 우스개감이 아닐 수 없다. 사랑과 종교는 그 활동 속에서 필연적으로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그 '쓰기'의 과정 속에서 '글'의 약속이 어긋난다는 사실만을 그 고유한 흔적으로 간직할 수 밖에 없다. 헤겔이 칸트의 비판철학을 두고 꼬집었듯이, "인식의 시험은 인식하면서 할 수 밖에 없다."3)
"편지는 아직 장관의 손에 있군요. 강점은 그 편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에 있지,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써 버린다면 효과는 사라져 버리지."4)
말할 것도 없이 글쓰기의 배경과 동기에는 수많은 이치들이 복류하고 교착한다.5) 신성(神聖)을 문자 속에 구금, 그 진리를 현전시키려는 근본주의적 글쓰기에서부터 문자 그 자체가 상형(象形)의 우연성으로 해체되는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글쓰기는 사회변동이나 문화사조, 그리고 매체의 역사와 더불어 쉼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넓게 보아서 한가지만은 예외다: 종교적 문자근본주의, 그리고 프레이저(J. Frazer)나 하우저(A. Hauser)가 지적했던 '주술적 자연주의(magical naturalism)'를 제외한다면, 그 모든 글쓰기는 오히려 실재를 유예하거나 저지하는 이율배반적 체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글쓰기가 보여주면서 숨긴다는 것은 극히 진부한 지적이다. 그러나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숨기는 체 한다거나, 혹은 숨기는 방식을 통해 보여주는 체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제법 새롭다.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따온 구절이 플라톤 이래 계속되면서 강화된 글과 마음 사이의 위계적 도착(倒錯)을 잘 보여준다면, 포우의 단편 <도난당한 편지>는 인류의 문화를 그 근저에서 견인하는 환상과 부재의 효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부재의 환상적 효과는 특정한 영역과 소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결절(結節)을 이루면서 소외되거나 투사(投射)되는 모든 인간적 현상에서 공히 드러난다. 물론, 전기했듯이 종교와 사랑의 영역에서는 이같은 현상이 유달리 도드라진다.
무릇 연서(戀書)라면, 그 속에는 연정의 틈, 부재, 그 함몰의 기미가 곳곳에 역설적으로 번득인다. 오히려 그 역설로써 사랑은 지속적으로 운신하는 동력을 얻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 역설은 고해(告解)라거나 기원(祈願)이라는 매우 독특한 종교 행위 속에서 극도로 강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설은 모든 종류의 글(紋)에 스며드는 특유하게 인간적인 현상일 뿐이다. 가령 인간의 신화적 사고와 태도 속에서 문화의 맹아로 거론되는 이른바 '잉여', 혹은 '거리(距離)'의 체험이야말로 이러한 역설의 단초를 이룬다. 인간만의 실존을 잉여/결손으로 특징짓는 철학적 인간학은 실로 재래시장의 파리만큼이나 흔하다. 가령 카시러(E. Cassirer)의 문화론에 등장하는 '활동(Werk)-표시(Merk)-상징(Symbol)'이라는 단계론 역시 바로 잉여의 체험이 문화화의 과정 속에서 점차 고차적으로 체계화되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문화(文化)가 문화(文禍)를 낳고, 역설(力說)이 역설(逆說)을 낳는 인간의 가치표현적 욕망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글(쓰기)라는 인류가 낳은 가장 탁월한 문화적 매체는 이 역설과 이중성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이중성과 이율배반, 저지(沮止)와 역설이라는 인간 문화(文化)/문화(文禍)의 특성은 글쓰기에서 고스란히, 그리고 가장 첨예하게 반복된다. 글은 마음을 드러내다가도 홀연 숨기며, 숨기는가 하면 곧 드러낸다. 글은 그 무늬(紋)의 흔적만으로 없는 마음의 징후가 되었다가도, 한 순간, 그 마음의 정상(頂上)에 꽂은 깃대처럼 엄연하게 그 실재감을 증명하기도 한다. 사물과 무관한 한갓 자의(恣意)의 기호였다가도, 어느 순간 글은 사물과 직접 혼효(混淆)하는 그 물질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글은 실재였다가, 실재의 전령이었다가, 실재의 흔적이나 징후였다가, 실재의 상처나 껍질이었다가, (니체의 말처럼) 실재를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안개였다가, (알튀세르의 말처럼) 실재의 환상과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수동의 매체였다가,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실재의 부재를 거꾸로 속이는 중층의 알리바이였다가, 이윽고 전자적 상형 체계의 한 단말기가 되어 아무 의식없이 그 체계의 구성원칙(=구조)에 복무하기도 한다.
이 논의에서 극히 중요한 점은, 글과 인간, 글과 실재, 그리고 글과 사유의 사이에는 '타자(성)라는 심연'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노동이 표현주의적 가치를 상실하고 노동자로부터 소외되듯이, 무릇 글도 전래의 그 표현주의적 낭만성을 잃고 필자에게서 등을 돌린다: "60초 동안도 계속해 생각할 수 없는 괴상한 말만 지어내는 따위 놈들과 경쟁하려구요?"6)
따라서, '비약'이라는 행위는 키에르케고르나 마르크스나 베르그송이나 비트겐쉬타인 등의 생각에 고유한 이론이 아니다. 사실상 모든 글은 늘 비약(도약)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요컨대, 비약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글 이상이지만, 비약하려 하지 않는 것은 '아직' 글 이하다. 이처럼 비약에의 지향(志向)과 그 실질적 무능 사이에서 글의 운명은 조금씩 진동한다. 예를 들어, 기호학이란 이 진동을 내재화하는 최근의 소식인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실존(實存)은 인간에게 고유하면서도 근원적인 존재방식(Seinsweise)이다. 그것은 신과 홀로 대면하는 이른바 '단독자'의 삶이다. 고진(柄谷行人)의 설명을 원용하면 '개체-일반'으로 일괄되는 자기동일성의 변증법에서 벗어난 타자성의 발현이기도 하다. 무한한 열정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이 주체성의 삶은 결단과 선택으로 점철되는데, 그 이치의 요체는 질적인 비연속성의 '비약'에 있다. 이 종교윤리적 비약의 이치 속에서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본질주의적 동일성 논리를 초극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투기(投己)와 비약의 이치 때문에 그의 신앙은 루터 류의 것과 달리 그 본성상 위험할 수 밖에 없다. 실존주의 신학자 틸리히(P. Tillich)의 말처럼, 궁극적 관심의 형태를 띠는 신앙은 실존적 의심과 믿음이라는 양극을 지니는 것이다.
글(쓰기)이 위험한 것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과 화폐 사이의 사회적 도약, 그리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적 투기로서의 종교윤리적 도약처럼, 글쓰기도 도약의 위험을 직면하면서, 혹은 그 직면의 긴장이 제공하는 역설적 탄력성에 의해서 자신을 운신한다. 전기했듯, 이미 글 이상이 된 글과 아직 글 이하에 머문 글 사이에서 글쓰기는 자신의 명운을 조절한다. 그 사이에는 도처에 심연이 입을 벌리고, 글이라는 인류의 작란(作亂)을 단숨에 삼킬 각오가 단단하다. "모든 말들이 길을 헤매고 있었"7)던 것처럼, 모든 글들은 운명처럼 위험하다.
2. 글쓰기의 명운에 개입했던 요인들은 다종다양하다. 글쓰기는 워낙 넓은 뜻에서 '세속적'(사이드)이기 때문이다. 혹은 바르트(R. Barthes)의 지적처럼, 글쓰기는 작가의 순수한 의도만 통과해가는 길이 아니기에 필자가 속한 역사사회적 상황과 전방위적으로 관련된 사건이다. 그러므로, '거미학(hyphologie)'이라는 용어가 시사하듯이, 텍스트는 완결된 진리와 의미의 포장이 아니라 생성중인 사건이며 따라서 이른바 '시니피앙의 무한한 성좌(星座)'인 것이다. '유희(jeu)할 줄 아는 작가'라는 개념은 이러한 논의의 계선을 타고 등장한다. 이것은 모어(T. More)와 볼테르, 그리고 니체와 데리다8)가 계승한 구라파 사상의 물줄기 속에 엄연했던 명랑, 혹은 '유쾌한 긍정'의 정신과 상응하는 것으로, 첨단의 언어기호적 장식을 휘두르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 내력은 낡디 낡은 것이다. 유쾌한 긍정의 기호론은 푸코나 바르트가 호감을 지니고 들여다 본 일본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일본이라는 풍토성과 기독교적 영성 사이의 거리감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엔도(遠藤周作)의 글쓰기는 오히려 존재의 성화(聖化)를 지향한다.9)
글쓰기의 유희든, 혹은 성화의 글쓰기든, 무릇 글쓰기는 도약/비약의 위험에 직면하는 행위다. 또 그만큼 모든 글쓰기는 '세속적으로' 흔들린다. '자신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던 헤겔이나 '자기관계는 곧 타인과의 관계를 물고 들어간다'던 마르크스의 말처럼, 글은 곧 글의 바깥에 존재하는 양식의 삶이며, 세속적 관계들 속에서 서성이고 흔들리고 교차하면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저울질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일종의 계시로 여기는 태도는 글과 세속 사이의 간극이나 비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시내산에 불꽃처럼 강림한 유대인들의 신은 손수 십계명을 글쓰기하는데, 그 신성은 일말의 틈과 비약도 없이 그 글쓰기 속에 현전한다. 이로써 그 의도는 세속을 비껴가고, 순수한 원전으로서 초역사의 권위를 얻는다. 모든 글은 타자를 향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글은 타자를 갖지 않는 것이다. 지상에 화육한 신(神) 예수는 단 한번 손가락으로 글을 쓴다. 신처럼, 그러므로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매체없이, 손수, 그 의도가 순수하게 현전할 수 있도록, 신은 그 신의 일부로써 글을 쓴다.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1969)에서 권위적 저자가 불필요한 언설의 미래 문화에 대해 예언한다. 그것은 글(쓰기)에 묻어 있던 종래의 중앙집권적 가치가 소멸하고 파편적 익명성의 순환으로 유지되는 문화를 가리킨다. 그는 사무엘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체 누가 말하든 무슨 상관인가?"라고 글을 맺는다. 푸코 식의 구조주의 속에서 신(神)이라는 부동(不動)의 무한 지성이 익명의 순환 구조로 바뀐 것이다. 비코(G. Vico) 식으로 고쳐 말하면, 인간의 사유라는 점을 통해서 신과 구조는 서로 호환된다. 이런 식으로, 서구의 구조주의가 신학적 변용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철학을 내내 답답하게 여긴 레비 스트로스는 푸코보다 한결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책이 나를 통과하는 사건'으로 기술한다. 통과한 이후에 생기는 '텅빈 느낌'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그 신화적 글쓰기의 순수함을 시사한다. 야훼의 모세처럼, 그 역시 구조의 레비스트로스인 것이다: "책은 나를 통해서 지나가는 것이며, 나라는 존재는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사물들이 만들어지고 정돈되고, 그런 다음에는 배설 작용처럼 서로 분리되는 장소입니다."10)
3. 서양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신학의 변주이듯, 그들의 글쓰기도 본질적으로 신학적이다. 말하자면, 글쓰기의 현실과 무관하게 글과 실재, 그리고 글과 영혼(사유)의 사이에 개재하는 심연을 무화시키려는 신학적 무의식이 복류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를 말하든, 구조를 개시(開示)하든, 영감(靈感)이 분출하든, 개인들을 호명(呼名)하는 음성이든, 혹은 무의식이든, 그 모든 글쓰기는 내가 말하는 세속과 비약의 이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동기와 신학적 추억으로 완강하다. 과연 이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신학(onto-theology)'의 추억이라고 할만하다. 근년 아무렇게나 인용되곤 하는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라는 말의 뜻은 오히려 이 완강함에 가장 가까우리라.
그러면, 전자적 글쓰기의 공간은 얼마나 신학적인가? 혹은 그것은 과거의 형이상학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탈신학화, 세속화된 것인가? 요컨대, 기계는 영혼이 없으며, 기술은 그 본질에서 반(反)형이상학적인가? 글쓰기의 공간은 과거의 신화적 공간에서 얼마나 멀리 나아왔는가? 이 분야에서 그간 진행된 논의는, 전자적 글쓰기 환경이 종래의 텍스트가 누려오던 안정성, 기원성, 특권성, 개성, 권위성을 박탈했다는 진단에서 대체로 일치한다. 요컨대, 글쓰기의 신학과 형이상학은 전자 공간과 디지털 기호세계와 더불어 영영 퇴출되었다는 진단이다. 이 진단은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을까? 역사적으로 보자면, 신의 의지가 기호와 아무런 간극없이 일치하는 문자근본주의적 태도는 표의(表意)에서 표음(表音)을 거치고 기호의 자의성(소쉬르)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괴멸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디지털 환경 속의 글쓰기에 이르면서 글쓰기의 무의식 속에 꿈틀거리던 신학적-형이상학적 추억은 마지막 우상으로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아방가르드가 다름 아닌 '디지털 코드'라는 것이다:
"알파벳이 근원적으로 상형문자에 대항했듯이, 현재에는 디지털 코드들이 자모음 코드들을 추월하기 위해 그것들에 대항하고 있다. 근원적으로 알파벳에 토대를 둔 사고방식이 마술과 신화(형상적 사고)에 대항했듯이, 디지털 코드들에 토대를 둔 사고방식은 순차적, 진보적 이데올로기들을 구조적, 체계분석적, 사이버네틱적 사고방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그것들에 대항하고 있다."11)
플루서도 콩트나 베버, 프로이트나 프레이저처럼 역사의 진보적 단계론을 글쓰기의 공간 속으로 압축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디지털적 사고는 훨씬 더 빨리 승리할 것"(글쓰기263)이라고 비관적으로 낙관한다. 그는 전자적 글쓰기 시공간의 탄생과 더불어 패러다임의 교체를 말하면서, 이 새로운 시공간의 경험은 "'신(神)의 편재'와 '동시성'과 같은 낡은 개념들로써는 파악되지 않는 모든 경험"(글쓰기266)이라고 규정한다.
신이 편재하던 시공간---물론 그 신은 전기했듯이 여러 가지 형식과 내용을 지닌 채 형이상학적으로 변용해왔다---으로부터 전자적 네트워크가 편재하는 시공간으로 틀이 바뀜으로써 진정으로 변한 것은 무엇일까? 신의 뜻과 말씀이 편재하던 시공간에서 기계와 전자적 기호가 편재하는 시공간으로 옮아옴으로써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무엇일까? 이 장구한 변화의 와중에 글쓰기는 완벽하게 세속적으로 진화한 것일까? 다시, 기계는 영혼이 없으며, 기술은 그 본질에서 반(反)형이상학적인가?
현대의 기술문명이 형이상학적 사태라는 것을 직시한 것은 누구보다도 하이데거였다.12) 잘 알려진 정식처럼, 그에게 있어 기술문명의 '닦달'은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의 허무와 일상적 권태라는 형이상학적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일관되게 중요한 문제의식은 현대 기술문명이 지닌 형이상학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고, 더불어 망실된 존재에 대한 총체적 직관을 회복하려는 일념의 다양한 변주였다. 그런데, 꼭 철학사에서 과용되어온 '존재'(실재)의 총체성만이 형이상학을 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와 달리 헤겔처럼, 존재가 곧 매체라는 입장에 선다면, 전자적 (글쓰기) 시공간의 편재성/총체성 그 자체가 곧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존재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유효한 형이상학적 과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맥루한(M. McLuhann)의 작업 역시 최소한 그 지향에서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흔히 그의 작업의 정식을 '매체는 메시지'라고 요약하는데, 보다 정확히 고쳐 보자면 '매체의 총체성은 곧 메시지를 이룬다(드러낸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 매체의 총체성 역시 응당 형이상학적 의의를 한껏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편재하면서 그 나름의 총체를 이루는 것은 다 형이상학적 아우라를 얻게 된다.
신(영혼)이 글을 손수 쓰던 신화적 과거를 뒤로 한 채, 새로운 글쓰기의 시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기계다. 그러나 기계에 새로운 신화가 기생하고 이윽고 기계-신(Deus ex Machina)으로 둔갑하는 것은 기계의 강도(强度)나 밀도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기계-신은 기계의 총합이 아니다. '정통은 오히려 무의식'이라고 했듯이, 기계가 우리의 몸처럼, 그리고 몸 속으로 부드러워져서 우리의 체질과 욕망, 우리의 기억과 소망이 될 때 기계는 기계신으로 둔갑할 수 있는 여건을 얻는다. 영혼을 빼앗고 등장한 기계가 스스로 영혼을 갖는 것이고, 마침내 기계가 우리 시대의 영혼이 되는 것이다. 기계가 우리의 몸이 되는 그 때에는 베르그송의 말13)처럼 모든 것이 우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우스움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글쓰기의 역사는 간단하다: 신이 글을 쓰던 과거에서 기계가 글을 쓰는 미래로 흘러가는 것, 그것이 우리 역사의 전부이며, 그 거대한 한 순차(順次)인 것이다.
기계적 글쓰기는 그 총체성에서 이미 형이상학을 품는다. 인류의 마지막 형이상학은 기계 그 자체가 형이상학의 형식이자 내용인 형이상학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글은 내내 신(神)들이 쓰는 셈이다. 우리들은 마지막 신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점의 문턱에서 살고 있다. 완벽한 무신(無神)의 총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기계-신의 글쓰기.
--
1)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민희식 옮김 (삼성출판사, 1992), 170쪽.
2)관련되는 논의는 내 책을 참고. 김영민, <사랑, 그 환상의 물매> (마음산책, 2004).
3)헤겔, <철학강요>, 서동익 옮김 (을유문화사, 1998), 67쪽.
4)에드가 엘런 포우, "도난당한 편지," <포우, 검은 고양이(외)>, 이희춘 옮김 (금성출판사, 1981), 73쪽.
5)관련되는 논의는 다음의 내 글을 참고. 김영민, "글쓰기의 물리학, 심리학, 철학,"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민음사, 1998).
6)제임스 조이스, "끔찍한 사건," <더블린 사람들>, 김병철 옮김 (문예출판사, 1977), 143쪽.
7)이청준, "떠도는 말들,"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81), 27쪽.
8) "그 반대쪽은 니체적인 긍정, 즉, 세계의 유희와 생성의 순수성에 대해 유쾌하게 긍정하는 것, 흠도 없고 진실도 없고 기원도 없는 기호들의 세계에 대해 긍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J.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tr. A. Bass (Chicago U. Press, 1978), p. 292.
9)관련되는 논의는 다음의 책을 참고. 김승철, <엔도 슈사꾸의 문학과 기독교: 어머니되시는 신을 찾아서> (신지서원, 1998).
10)레비 스트로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레비 스트로스 회고록>, 송태현 옮김 (강, 2003), 145~146쪽.
11)빌렘 풀루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윤종석 옮김 (문예출판사, 1998), 262~263쪽. 이후 본문 속에서 '글쓰기'로 약칭.
12)M. Heidegger, <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and Other Essays>, tr. W. Lovitt (Harper: New York: 1977).
13)H. Bergson, <Comedy> (New York: Doubleday, 1956), p.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