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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쳐읽기 & 마주보기

작성자이충이|작성시간04.12.22|조회수121 목록 댓글 0



겹쳐읽기 & 마주보기

/ 강성민(출판 칼럼니스트/ <교수신문> 학술기자)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맞는 말을 찾아가는 여정”

요즘 인간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다투고 사랑하고 헤어지다 보니 어떨 땐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들 속에서 내 삶의 위안과 철학을 이뤄나갈 것인지라 그런 상처들이 관심의 싹으로 바뀌는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책을 봐도 내용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인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 『사랑, 그 환상의 물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그 흔한 연애론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물매’라는 표현이 좀 독특하다. 저자를 보니 ‘김영민’이다. 이럴 수가. 내가 아는 김영민 교수는 예전에 사랑을 졸업하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사랑론이라니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독자들을 위해 잠깐 설명을 하자면 그는 90년대 초중반부터 우리 인문학의 지독한 식민지성을 질타하면서 ‘탈식민지적 글쓰기’를 실천해 온 자생적 학문하기의 선두 주자다. 그것은 9. 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를 본 떠서 여의도에 지은 LG 본사처럼, 서구의 관념 체계를 요약해놓은 우리의 기성 관념 체계를 허물고, 이 땅의 삶을 감각하고 사유하고 구조화하는 매우 보람찬 작업이었다. 그런 그가 ‘사랑론’을 썼다. 사랑, 이 지극히 문학적으로 보이는 주제를 철학자인 그가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우리 철학계에 드디어 어떤 드라마틱한 급반전의 제2라운드가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 사회에 사랑에 대한 글은 많지만, 사랑을 제대로 사유해서 그 복잡한 심리적, 관계적, 물리적 메커니즘을 분석해낸 책은 없었다. 이 책은 바로 그걸 하고 있다. 제목의 ‘물매’를 나는 ‘물로 때리는 매’를 말하는가 싶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환상이라는 물로 우리를 때리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는 문학적 유비법에 익숙해진 관성적 추측이었다. 여기서 물매는 건축 설계의 용어로, 기울기의 정도를 의미한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목숨을 바치느냐, 아니면 목숨을 빼놓고 바치느냐, 다소 뻣뻣하게 쿨하게 구느냐. 우리가 아는 사랑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울기의 다양한 차이와 변주라는 것이다. 저자는 사랑을 관계의 문제로 푼다. 사랑은 너와 나를 맺어 주는 ‘관계의 언어’로 성립하는데, 사랑보다 강력하고, 보편적으로 우리를 맺어 주는 관계는 없다는 것이 이 책이 씌어진 계기다. 사랑론 다음에 우정론을 쓰겠다는 저자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씨줄과 ‘관계’라는 날줄로 우리 사회의 총체적 벽화를 짜기 위해 물레질을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는 ‘사랑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만족을 위한 환상놀이에 불과하기에, 사랑을 통해 생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연역법을 대입하는 식으로 논의를 풀어가지 않는다. 이런 비극적인 인식이 책 전반에 깔려 있다고 해서, 그가 ‘우물 속에 돌을 던지면 바닥에 닿는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에 쉽사리 투항하고, 깃들고, 스며드는 우리 시대의 온갖 거울놀이의 ‘유희성’을 지적하고 종아리를 때려가면서, 그와 별개로 사랑의 삶을 살아나가는 다양한 방식들을 주목한다. 사랑의 대부분은 본능이거나 문화적으로 패턴화된 기제들에 실려서 소비되지만, 때때로 사랑 그것의 뛰어난 극화(劇化)를 시도하는 천재들의 흔적은 사랑과 인간의 역사를 의미의 풍요로운 풍경으로 바꿔 왔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사랑의 단상』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한다. 바르트의 경구들은 자주 저자에게 반박 당한다. 그만큼 ‘사랑은 무엇이다’ 식의 이야기에는 빈틈이 많다. 저자에 의하면 홍상수의 영화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맞는 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 말은 ‘사랑의 언어는 사랑을 실어 나르지 않으며, 그 언어의 무늬가 곧 그대로 사랑인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상식적 정의들은 확실히 그것의 결여를 우리에게 들킴으로써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사랑에 대한 담론은 그래서 순수하게 경험적이지 않고, 담론에 대한 담론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김영민 교수는 이 책에서 많은 이들을 끌어들인다. 니체와 프로이드, 피카소와 도스토예프스키, 에리히 프롬과 김승희의 사랑에 대한 진술들이 저자에 의해 분석되며, 그 분석되는 과정 자체가 사랑이 된다.

저자는 사랑을 ‘연하디 연한 놀이’라고 말한다. 말과 피부, 그리고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을 재료로 엮는 건축술이기에, 무슨 무거운 본질을 부여하거나 무겁고 둔탁한 몸을 의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연한 말들에 도통해지면 마음의 최소주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으로, 휘발성이 강한 열정이 생겨날 때라도 그것을 모르는 채 내버려두면서, 그 열정이 연하디 연한 방식으로 변할 수 있게 콘트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사랑을 재생산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는 뜻일까. 너무 공리(公利)적으로 이 책을 읽어선 곤란할 것이다. 그냥 사랑에 대해서는 ‘마음의 최소주의’가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는 정도로 읽어두자.

사랑이 철학적으로 사유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그 옛날 내가 공부를 몰랐을 때, 소설을 5~6편, 시를 2천편 쓰고 버린 일이 있다. 이 책은 오로지 그 증상의 마지막 흔적일 뿐이다’라고 씌어 있다. 저자에게 사랑에 대한 추체험은 공부라기보다는 저자의 경험이 형성한 환상과 사랑의 역사에 남겨진 끈적끈적한 갈피들을 뒤적이는 ‘결산’과 ‘이별’의 과정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학자로서의 저자가 그렇게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서, 자연인으로서의 그가 과연 ‘사랑’이라는 것과 결별할 수 있을까. 사랑은 혹시 글쓰는 행위 그 자체에 깃들어 있는, 물상(物象)에 대한 인식의 접신(接神)과 그 마찰에서 일어나는 맹렬한 폭발의 결과는 아닐까.

이 책은 무지하게 어렵다. 김영민 교수의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현학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읽을 수 있으리라는 점이 이 책의 불행이라면 불행일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게 위해 저자가 1994년도에 쓴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철학과 현실사)를 소개한다. 영화와 철학을 적당히 버무려 놓은 책이 아니다. 오늘날 김영민 교수의 사유와 글쓰기의 방식이 어떤 개인사적 배경 속에서 이뤄졌는가를 매우 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다.

만화가게 아들로 태어나, 이미지에 대해 친화력을 갖게 됐던 것, 극장집에 세 들어 살면서 공짜로 영화를 즐기고, 영화를 통해서 ‘연정’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게 된 과정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 품었던 종교적 삶에 대한 부분적 고백, 운동부로 활동하면서 벌였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한 마디로 김영민 교수의 청년 시대가 잘 요약돼 있으며, 왜 사랑에 대해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를 한 인간의 성향과 관련지어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인문학과 우리 영화에 대한 그의 비판적 성찰, 서양철학사의 구조와 영화적 상상력에 대해서 전개하고 있는 후반부의 논의들도 요즘 넘쳐나는 가벼운 영화평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강성민 - 출판칼럼니스트,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출판저널』기자를 거쳐, 현재『교수신문』학술 담당 기자로 있다. 여러 매체에서 책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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