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카프카
이 강 복 / 청주대학교 인문대학 유럽어문학부 (독어독문과) 교수
1. 서론
카프카의 작품에서 종종 동물 혹은 사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들이 마치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변신 Die Verwandlung』에서처럼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에서처럼 원숭이인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어느 개의 탐구 Forschungen eines Hundes』나 『조세핀, 여가수 혹은 쥐의 족속 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ause』에서처럼 동물 자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 인물들 - 인간이든 동물이든 - 은 시적 비유에 의한 은유적 인물형상들로서 인간의 실존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원숭이는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 특히 장편의 주인공들이 이야기 결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이 되기를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한다. 원숭이의 인간됨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삶에 적응을 위한 불굴의 의지에 의해서 성취된다. 본 연구에서는 원숭이의 인간됨의 과정과 그 의미를 파악하여 카프카에 의해서 구성된 하나의 현실주의적 삶의 모형을 밝히고자 한다. ‘낯선 형식: 비유’에서 은유적 원숭이에 의해서 연출된 이야기 구성이 부조리하고 그로테스크하게된 이유와 그 문학적 효과에 대하여, ‘현실주의: 출구’에서 원숭이의 인간됨의 노력과 출구의 의미에 대하여 밝히고, ‘시작과 결말: 중간상태인물’에서 예견된 이야기의 반전과 인간이 된 원숭이의 어중간한 중간상태인물의 형상을 음미하고자 한다.
2. 낯설게하기: 비유
언어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창조된 허구의 세계이며 그 허구화의 독창성이 최대로 발휘될 때 독자들의 경험세계를 뒤흔들고 독자들을 긴장시킨다. 바로 카프카의 문학이 허구화의 독창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문학은 낯설음과 신비한 경이감으로 차고 넘친다. 따라서 독자는 이제까지의 상투적인 관습의 틀을 벗어나 신선한 감흥을 느끼게 된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원숭이 로트페터는 불과 5년여의 인간사회에 적응을 위한 노력에 따른 진화에 의해서 인간이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의 조상은 침판지이고, 침판지는 무수한 세월을 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한 결과 오늘날의 인간으로 진화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진화의 의미 속에는 카프카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인간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 아마도 원숭이로부터 특별히 진화된 동물이며, 인간은 인간됨과 문명을 위해서 높은 희생을, 말하자면 인간의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는 희생을 지불해야만 했다는 생각이다.
원숭이의 인간화는 생물학적으로 규명될 수 없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불합리하고 그로테스크한 사건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불합리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은 현실의 실상을 표현한다. 작가의 최대의 과제는 이제까지 독자들이 습관적으로 신뢰하였던 것을 이러한 낯설음을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보도록 유도하여 사실의 진면목을 보고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낯선 시선에 의해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독자를 유도한 장치를 낯설게 하기Verfremdung라고 한다. “카프카의 불합리성도 습관된 가시적인 관념 뒤에 숨겨진 현실을 비로소 보이도록 하는데 공헌을 한 낯설게 하기의 한 형식이다.”
낯설게 하기 효과Verfremdungseffekt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서사적 연극론을 서술하면서 언급하였다. 관객이 연극에 몰입하지 않고 이상스럽다고 느끼는 낯선 시선을 갖도록 함으로써 관객은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현실을 다시 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낯선 시선은 갈릴레이가 샹델리아의 흔들림에서 흔들이의 등시성을 발견한 시선이다.
일상의 습관에서 벗어난 자연과학자의 낯선 시선이 진리를 발견한 동기가 되었던 것처럼 “현미경 안 Mikroskop-Augen”을 가진 예민한 작가의 낯선 시선이 진리를 표현할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였다. 카프카는 동물을 이야기에 끌어들여 낯선 시선을 창출하였다. 카프카의 동물들은 직유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동물변신 혹은 동물의 인간변신이 일상의 일처럼 이루어진다. “인간의 탈 인간화와 동물의 인간화는 세계의 근본적인 혼란을 기호화한다
카프카는 이해될 수 없는 암호와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독자에게 이상스러움을 안겨주면서 거리 두기를 유지한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카프카는 여러 면에서 낯선 시선과 인상을 제공하고 있다. 학술원의 고귀한 회원들에게 보고하는 보고자는 품위 있는 고상한 학자가 아니라 원숭이로 소개되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그로테스크한 희극적 특성이 예견된다
독자는 보고자가 원숭이 자체로 존재했던 당시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숭이이기를 중단했다고 듣고있다.
또한 보고자는 해부학적으로 털로 덮이어 있고, 꼬리가 있다는 점, 행동학적으로 총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지를 벗는 행위, 그를 가르치는 교사가 있는 다섯 개의 방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행위 그리고 “Herr”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은 로트페터 Rotpeter라는 별명을 가졌다는 점에서 원숭이임 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가 사용하는 통신매개물은 인간의 언어다. “동물적 육체와 인간적인 정신 사이 즉 원숭이에 합당한 느낌과 인간의 언어 사이의 모순 이 전면에 부각된다. 이러한 원숭이의 모습과 보고의 상황은 어울리지 않게 그로테스크하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인간이 된 원숭이가 지정된 내용에 관한 보고 대신에 보고자의 의도에 따라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을 보고한다는 점이 우리의 관습에서 벗어나 있다.
언어예술 작품인 서사문학에 이용되는 필법은 대체로 서사와 묘사가 주류를 이룰 것이다. 서사는 사건을 설명하고, 묘사는 독자의 마음에 사물에 대한 지배적인 형상을 만들어주는 작가노력의 총화 일 것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주관이 설화자의 언어형식을 빌려 기록되는 데, 그것은 픽션에 의한 상상물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학술원에드리는 보고』에서 ‘보고’는 과학적 실험사실의 보고처럼 객관적으로 정돈된 상태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려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제목에서 ‘보고’라는 단어를 대할 때 독자들은 이상스럽다는 인상을 받는다. 독자는 자연과학적인 논증에 의해서 쓰여진 원인과 결과에 모순이 없는 논리적인 글을 연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고’의 내용은 원숭이가 인간이 된다는 허구적 특성을 가진 언어 예술 작품이다. 노베르트 카쎌에 의하면 그것은 작가의 의도된 문체수단으로 이용된다.
문학적 이야기가 객관적 보고의 문체수단을 문학적 창조를 위해서 아이러니하게 이용하고자 한다면 문학적 이야기는 이유 없이 “보고”라고 불리어 지지는 않을 것이다. 설화자의 정해진 경향이 이야기의 기초가 되어 있다.
일인칭 설화자로서 보고자인 원숭이는 그로테스크하고 은유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로테스크하다 함은 이상스럽고 어리둥절하게 하는 낯선 인상을 독자에게 제공하여주는 불합리의 한 유형이다. 또한 은유적이라함은 여기의 원숭이는 원숭이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의 형상을 빌린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낯선 인상을 주는 문체수단의 한 일종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확고한 사물들의 실재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사물들이 유동적으로 존재하고 있음 사이의 해결될 수 없는 불일치로서 정의될 수 있다. 원숭이는 현실의 원숭이가 아니라, 의식의 유동상태의 반영이다. 그의 어투는 표면적으로는 완곡하고 정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유치한 단어배열과 경박한 어조로 조롱적인 면을 보여준다.
거의 오년이란 세월이 저를 원숭이 세계로부터 갈라놓고 있습니다. 달력으로 재면 아마도 짧은 세월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간에 따라서 유능한 인간들, 충고, 박수갈채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의해서 성원된 채로 제가 해온 것처럼 헐떡이며 달려오기에는 무한히 긴 세월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혼자 달린 셈입니다. 왜냐하면 저를 동반했던 모든 것들은, 비유로 말씀드립니다만, 장애물 앞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에 의해서 비유로 언급된 것들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유능한 인사들과 충고는 하겐백 회사의 뱃사람들과 원숭이의 스승을 연상시키고, 박수갈채와 오캐스트라의 음악은 버라이어티무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유능한 인간들’, ‘충고’, ‘박수갈채’, ‘오캐스트라의 음악’처럼 속성이 다른 단어들 즉 서로 낯선 요소들을 등위에 놓음으로써 은유적 원숭이는 청취자를 무시한다.
비유는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문체수단이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비유는 한결같이 심리적 상황의 말로 된 내용을 표현한다. 비유는 의식의 여러 차원에서 심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현상에 결부시키는 수사상의 장치이다. 카프카는 “내 머리에 간직한 엄청난 세계, 그러나 손상시키지 않고 어떻게 나를 해방시키고 세계를 해방시킬까 라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는 그러한 엄청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나타낼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 대상화하는 일 즉 “(심적)현실의 현상을 빈틈없이 구성되어 있는 언어의 예술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꿈과 같은 내면적인 삶은 언어로 표현되기 위해서 느낌과 인상에 따라 일목요연한 현실태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때 감각적 인상의 요소들에 의해서 파악된 세계는 상징이 풍부한 비유의 세계로서 비로소 언어의 형성물이 된다.
카프카의 서술언어는,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 유동적인 심적 상황이 현실에 존재하는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게다가 묘사된 것은 중립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낯설고 경이롭게 된다. “카프카의 서술양식의 형식성은 경험세계와 거리를 분명히 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일은 일상적인 것처럼 묘사된다. 카프카의 서술에는 사건에 관여하는 말은 하나도 없고, 흥분시키는 말도 없고, 정서적인 말도 없기 때문에, 순수한 사실로서 평온하게 일상의 ‘보고’처럼 진술된다. 이러한 진술방식으로 인하여 독자들은 당황하게 되며, 이야기된 것을 더욱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베르트 나겔은 카프카 작품의 부조리한 사건에 대한 진지하고도 냉담한 보고형식에 의해서 야기되는 이러한 이중적인 불합리를 “이중의 낯설게하기 효과 라고 표현하였다.『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역시 이러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불합리는 내용적인 것의 영역에 보다 오히려 로트페터가 이야기를 중개하는 방식에 있다
소설은 픽션으로서 허구의 영역에서 실현된다. 소설에는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즉 현실성과 가능성이 혼재하며 그것들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더욱이 본 이야기는 ‘보고’라는 제목으로써 마치 현실의 사건처럼 독자를 현혹하고 사실처럼 이야기된다. 독자는 이러한 카프카적 사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예시하는 감추어진 진실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음미하게 된다.
3. 현실주의: 출구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동물인 원숭이의 시점에서 기록되고 있다. 단지 황금해안에서 동료 무리들과 함께 물을 먹다가 하겐백Hagenbeck 회사의 선원들의 총을 맞고 사로잡혀서 배의 중간 갑판의 상자로 막혀진 우리에서 깨어난다. 원숭이의 의식에 비추어진 우리의 상태는 매우 협소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 전체는 똑바로 서기에는 너무 낮고 앉기에는 너무 좁았습니다. (...) 우선 아무도 보고싶지 않고 계속해서 어둠 속에서만 있고 싶었기 때문에 상자 쪽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뒤에서 창살이 살 속으로 파고 들어왔습니다.
원숭이에게는 총상에 의한 두 개의 상처밖에 없다. 여기에서 쇠창살이 살 속으로 파고 들었다함은 원숭이가 처한 상황은 현실적인 육체의 고립상황이 아니라 『변신 Die Verwandlung』의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어 어찌할 수 없이 등을 대고 누워서 무의미하게 많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의식상황과 마찬가지이다. 협소한 우리와 뒤에서 살을 찌름과 “난폭한 사격은 서로 상통한다. “근본적으로 자유와 권력은 항상 동일하다 자유와 권력에 관한 이러한 인식은 생명을 담보로 강제와 억압에 의해서 완전히 무력감을 느끼는 원숭이의 육체 안에 존재한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어둠을 향함으로써 과거의 자유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다. 과거에의 집착은 여기의 현재의 삶에 위협이 된다. 이러한 억압과 위협의 상황은 원숭이에게 출구부재의 상황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써 형상화 된다.(141)
“옛날의 원숭이 진실 die alte Affenwahrheit(141)”은 무엇인가? 그것은 황금해안에서 사방에 열려진 자유를 만끽하였던 과거의 원숭이의 삶으로 집약된다. 그가 어둠 속에서 외부를 등지고 상자의 벽을 향하고 있는 행위(141)는 바로 옛날의 원숭이 진실과 상통한다. 그는 아직도 황금해안 원시림의 자유를 동경한다. 이러한 동경 속에서도 원숭이는 출구를 찾으려 노력한다. 현실적으로 육체를 죄어오는 좁은 공간, 우리의 압박을 그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배로부터의 도주를 생각하고 예상되는 하나 하나의 손익을 계산한다.
원숭이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원숭이의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서 원시림으로 도주를 하든가, 또는 우리에 계속 머물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통찰된다. 보다 오래 살아 남으면서 원숭이로 머물 가능성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살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제3의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존재형식이다. Vgl. W. H. Sokel: a. a. O., S. 372.
원숭이는 도피의 무의미한 본질을 파악하고 오디세우스Odyseuss가 싸이랜들Sirene의 유혹을 물리친 것처럼 귀향에 대한 유혹을 물리친다. 그래서 원숭이는 틈새를 보았을 때 기쁨의 환호성을 “이해못할 외침 Heulen des Unverstandes”(141)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도피를 단념한다. 도피에 의한 자기멸망의 비극적 유혹을 원숭이는 이성적으로 물리친다. 원숭이에게는 그때 섬광처럼 “높은 목표가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출구를 찾는 일 즉 출구부재 상황을 벗어나는 일이다.
저에게는 출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출구를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원숭이이기를 중단했습니다.
위의 서술은 육체적인 상황이 정신적인 상황으로 변화되는 혁명적 사고방식에 의한 표현이다. “우리는 출구부재 상태로서의 매우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절망의 존재형식이다 우리에서 깨어난 원숭이가 맨 처음 자신에게 적용한 것은 그의 옛 근원에 대한 집착이다. 최초의 원숭이는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에서 보여지는 자기고문이나 『단식 예술가 Der Hungerkünstler』에서 보여지는 단식의 고통으로써 자신을 엄하게 훈계한다. 자기 고문을 하는 일과 단식을 하는 일은 순수자아를 고집하는 일이다. 순수자아의 모든 주요한 특징들은 고집이란 단어에 미묘한 상태로 함축되어 있다. 순수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단식가는 단식우리 안으로 들어가고 장교는 처형기계에서 스스로 자신을 처형한다.
그러나 원숭이가 인간세상을 관찰한 이후 그의 삶의 의지는 순수자아의와 정반대로 대립된다. 그것은 출구를 찾음이며, 원숭이가 원숭이이기를 중단하는 혁명적 결단이며, 보다 오래 살기위한 수단이다. 『변신』의 그레고르는 잠자는 동안에 무의식적으로 변신된 반면, 원숭이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변신을 이룩한다. 그레고르는 변신된 후에도 인간이었을 때에 대한 회상을 계속함으로써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원숭이는 자기의 과거 즉 이전 원숭이의 삶을 기억할 수 없다. 원숭이의 인간으로의 변신은 옛 자아로부터 완전한 분리, 즉 새로운 삶의 습득 과정으로 의미된다. 원숭이는 변신을 통하여 현실주의적인 새로운 인간이 된다. 그레고르는 외적으로 변신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옛날 그대로이다. 그러나 원숭이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변화되어 다른 종이 되었다.
원숭이는 고집을 포기하고 원숭이이기를 중단함으로써 출구를 찾고 인간됨의 길에 들어선다. 원숭이의 이러한 결단은 배로 생각했을 명석하고도 멋진 사고과정에 의해서 성립된다; “그 이유는 원숭이는 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denn Affen denken mit dem Bauch.”(142) 배로 생각한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의 의식 체계를 뒤집어 놓는다. 이제까지의 우리의 인식에 의하면,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는 최고의 주체는 뇌의 작용에 따른 마음일 것이다. 배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에너지의 공급원이다. 모든 동물은 먹어야 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과 사회생활을 한다.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본다면 배는 인간의 직업적인 삶 즉 공동체의 삶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보다 오래 살기 위해서는 밀림 속에서 혼자 독단적인 삶을 사는 밀림의 자유가 아니라, 공동체 삶으로의 출구를 찾는 일이 필수적인 삶의 방식이다.
원숭이의 인간됨은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하였던 원숭이를 “타협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
가 되도록 한 요인은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그의 투철한 의지와 안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안정감은 우리 밖에 있는 선원의 안정감과 그것의 영향으로 파생된 내적 안정감으로 인해서 가능하다(142). 그는 단지 하겐백 회사의 사업적인 이유에서 아무 죄도 없이 사로 잡혔다. 그렇다고 그는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추궁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 배 위에는 그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도 그를 벌주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원숭이에 대한 선원들의 냉담하게 우정어린 관계 때문에, 원숭이 자신도 똑같은 안정감과 우정으로써 그들을 대한다. 그리고 그는 도주를 포기하고 학습을 시작한다. 이러한 안정감 속에서 원숭이가 제일 처음으로 배운 것은 악수하는 일이다(139). 악수에 의해서 인간세계에 편입된 원숭이의 “방향선die Richtlinie”(140)이 보여진다. 악수는 일반적으로 이해와 화해의 몸짓이다. 그런고로 악수는 그를 포획한 선원들, 즉 그보다 우월한 권력자들과 객관적이고 친근감이 있는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악수가 가능한 관계는 언어소통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원숭이는 안정감 속에서 뱃사람들의 행동, 습성, 언어 등을 면밀히 관찰한다. 그들은 원숭이를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고, 원숭이에게 화를 내는 법도 없다. 그렇다고 원숭이에게 아양을 떨고 아첨하는 법도 없다. 그들은 원숭이에게 한사람같이 똑같이 비쳐진다(144). 원숭이는 뱃사람들의 모습에서 개인의 성격과 개성을 본 것이 아니라, 냉담하고 무관심한 획일적인 로봇의 인상을 받는다. 그들에게는 원숭이를 유혹할만한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원숭이는 대양의 저쪽 밀림 속에 존재하는, “언급된 자유의 신봉자 가 아니기 때문에, 오랜 관찰의 결과 “특정한 방향을 선택한다. 그것은 권력자인 선원을 모방하는 일이다. 특히 침을 뱉고 처리하는 과정(144)에서 원숭이의 태도와 인간의 태도가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침을 뱉고, 배를 쓰다듬는 일과 비슷한 일들은 인간에게 품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예에서 동물적인 것의 그로테스크한 시점에서 인간적인 것을 무시하는 풍자적 충격이 느껴진다..
원숭이에게 최대의 노력을 요구한 것은 완벽하게 코르크마개를 빼고 전문가답게 술을 마시는 일이다. 그는 자기의 궁극적인 승리, 높은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서 술병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극복한다. 술을 마시는 행위에서 행위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능력이 강조된다. 여기에서 야성적인 마시고자하는 시도가 아니라 힘들고 긴 훈련의 결과가 빛을 발한다. 원숭이의 야성적인 행위는 인간의 품위 없는 행동에 대한 풍자일 수 있으나, 조켈의 지적대로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있기 위해서 원숭이에게서 무엇이 추방되었는지 그것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야성적인 것, 난폭한 것, 황홀한 것, 잘못된 것,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던 그런 요소다. 인간됨은 이야기 속에서 고로 결코 풍자로 추론될 수 없는 대단히 확정적인 것을 의미한다. 인간됨은 야성적인 것 대신에 길들임, 광포한 것 대신에 안정적인 것, 황홀한 것 대신에 전통적이고 중용적인 것 그리고 오류 대신에 이성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학습과정을 통해서 원숭이는 드디어 격식에 맞게 코르크마개를 빼고 술을 마시는 데 성공한다. 술을 마시는 일은 옛 인식에 대한 인위적인 승리 즉 자연에 대한 인간의지의 승리이다. “병을 비우는 일은 자기극복이 (...) 삶의 구제와 일치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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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절망된 자로서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술병을 던졌다 Nicht mehr als Verzweifelter, sondern als Künstler die Flasche hinwarf.”(145f.) 이제 원숭이는 동물원이 아니라 버라이어티무대를 선택하고 무대에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다. 그것이 인간세계로의 출구이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노력해 왔던 입장을 배움이란 말로써 고백한다; 그리고 저는 배웠습니다. (...) 배워야 한다면; 배우게 됩니다. 출구를 원한다면; 배우는 것입니다. 따지지 말고 배우는 것입니다.
원숭이는 꾸준한 관찰과 모방을 통해서 인간의 대열에 편입하였다. 그것이 원숭이가 찾은 출구이다. 그는 원시림의 사방으로 터진 자유를 포기하고 인간 세상에 길들여진 또 하나의 다른 인간이 되어 보다 오래 살아남는 안정적인 삶을 선택했다. 인간의 삶은 도도하게 넘실대는 대해와 같아서 당사자에게 아부하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삶은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의 결단만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원숭이에게는 관찰과 모방이 목표가 아니라, 삶으로 형상화된 출구를 찾는 일이 목표였다. “인간들을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습니다; 저는 출구를 찾으려고 모방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간섭과 판단을 원치 않는 로트페터로 불리어지는 원숭이의 독자적인 일이다.
4. 시작과 결말: 중간상태인물
카프카의 장편들과 중편들은 대부분 주인공들이 낯선 미지의 세계에 던져지거나 갑작스러운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독자들의 기대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불합리하고 낯선 상황으로 전개된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서두에 긴장하고 그 결말을 예측하지만 그때마다 독자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이야기는 반전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독자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 방치된다 .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기대와 반전으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서두에서부터 인간이 된 원숭이가 원숭이적의 삶에 관해서 학술원에 보고를 하도록 초청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주인공이며 설화자인 인간화된 원숭이는 이 요구에 불응하고 인간이 되는 과정을 진지하게 설명한다. 그는 보다 오래 살기 위해서 출구를 찾으나 그 출구는 현실의 현상물에서 찾아질 수 없는 독자에게는 생소한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미결정의 유동적인 심적상황을 현실세계의 언어로, 현실의 경험에 의한 삶과 거리가 먼 불합리한 비유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언급된 개별적인 사물들은 상징성이 풍부하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비유담의 상징성은 신화와 철학적 세계관의 통념적 사고를 초월한다. 상징은 필연적으로 이중의 지시의미, 즉 원래의 대상과 그것이 현재 대변하고 있는 대상에 동시에 지시의미를 가져야 하며, 진실과 허구, 실재와 비실재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상징이란 항상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넘어서서 실제로 그가 의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이상을 나타낸다. 상징이 풍부한 “카프카가 표현한 상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표현한 암호이자 기호이다.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예고한다.
인간이 된 원숭이의 상징성이 풍부한 비유적 어법이 그의 그로테스크하고 은유적인 특성에 상응하여 독자의 흥미를 진작시킨다. 그에 의해서 사용된 비유담을 이루는 단어들은, 전후의 문장을 생략하고 독립적으로 놓아둔다면,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로 존재할 뿐이다. “하늘 (...) 문 ,” “육체의 가죽 das Fell vom Leib”, “한 가닥 바람 ein Luftzug” 그리고 “아킬레스 Achilles”(139) 등을 비유담에서 들어내면 현실의 사전적 의미 외에는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후의 상황과 관련되어 상징성을 띄게 되면, 심오한 현상세계를 연출한다.
귀환 가능성으로서의 하늘 문은 원숭이의 인간으로의 전진적 발전에 따라 더 낮아지고 좁아져서 결국에는 작은 구멍으로 된다(139). 원숭이의 정신적 의식의 변화가 물질적 현상물의 시각적 변화로 옮겨진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관계를 유추하면 원숭이는 그 문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이 되었다. 그 문은 의식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변신을 전제로 한 문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변신이란 육체의 변화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 경계는 문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하늘 문은 카프카의 소품 『법 앞에서Vor dem Gesetz』의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상시킨다. 문은 안으로 계속해서 연달아 있으며 문마다 더 힘이 강한 문지기가 지키고 있다. 시골에서 온 남자는 평생동안 입장허락을 얻지 못하고 문밖에서 임종을 맞이한다. 그 문은 단지 당사자 한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한다. 로트페터가 달려온 길은 주위의 많은 영향이 있는 인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백대로 궁극적으로는 혼자서 결단하고 살아왔다(139). 문을 통과하는 일은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다. 엠리히는 문과 동물의 보편적 의미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동물적인 것으로 통하는 문은 보편세계이다. 인간의 영역에서 그 문은 하나의 구멍으로 수축한다. 즉 삶의 손실로써만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이 구멍을 통해서 그러나 아킬레스의, 물론 모든 사람의 발꿈치를 간지럽히는 바람이 분다. 고로 동물은 보편적 자유의 의미상이다.
인간이 된 원숭이는 이제 그 문을 통해서 과거로 귀환할 수 없다. 원숭이가 인간세상에 더 잘 적응하고 호의를 가질수록 문의 구멍은 그만큼 더 수축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그 구멍을 통해서 강풍이 불어 왔는데 이제는 한 가닥 미풍으로 변했다. 과거로부터의 영향이 바람으로 상징되었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 서늘하거나 찬 공기의 비유는 인간의 실존을 빼앗는 위협적인 자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좁은 구멍으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이 아직도 발뒤꿈치를 서늘하게 한다함은 과거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의 자유와 실존 사이의 엉거주춤한 상태를 표현한다. 현재의 원숭이는 과거의 그가 될 수 없다. 그가 좁은 구멍을 통해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털가죽을 벗겨내야만 한다. “잘 손질된 털가죽 ein wohlgepflegter Felz”(140)은 현재의 습관이 된 삶에서 얻어진 명성과 명예 등 일체의 현세적인 것을 의미할 것이다.
원숭이 로트페터는 얼마전에 죽은 잘 길들여진 페터와 자신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빰에난 상처의 붉은 점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점에 불만스러워 하며 이름을 붙여준 당사자를 원숭이로 취급함으로써 자신을 차별화한다.(140)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하늘 문과 바람의 영향을 말하면서 교묘하게 침판지와 아킬레스를 등위에 놓는다. 침판지와 같은 미미한 작은 인물이나 신화적 관념 영역의 아킬레스처럼 위대한 인물이거나 간에 지상에서 모든 인간은 차등이 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학술원의 회원들 모두가 원숭이 성질을 가지고 있다(139)고 말함으로써 회원들을 비하시킨다. 인간은 진화단계에서 원숭이 보다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할지라도 버라이어티무대의 곡예사 부부가 보여주는 것처럼 공허한 실존을 영위해 간다. 곡예사의 곡예는 원래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게 어울리는 자연의 활동이다. 그러나 곡예사 부부는 버라이어티무대에 예속된 “인간의 자유Menschenfreiheit”(142) 즉 자유라는 이름으로 기만된 자유를 벗어나지 못한다. 설화자 원숭이의 전망에서 볼 때 버라이어티무대에서 인간은 원숭이의 웃음거리가 된다; “성스러운 자연을 우롱함이여! 이 광경에 임한 원숭이의 너털웃음 앞에서 어떤 건물도 지탱하기 힘들 것입니다 학술원 회원들이 원숭이의 국면을 경험하였는지 혹은 아직 못하였는지는 그대로 남겨져 있지만, 원숭이의 조롱적인 언사에서 원숭이처럼 행동하는 인간의 희극성이 나타난다.
원숭이는 달변가의 거침없는 어조로 인간의 반열에 선 것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자수성가로 벼락출세한 사람의 어설픈 교양수준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되풀이 된 적이 없는 그런 노력으로 저는 유럽인의 평균교양에 도달하였습니다 그의 태도에서 원숭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적으로 ‘유롭인의 평균교양’을 지닌 인간임을 자부한다. 그로테스크하게 희극적인 삶이 유럽인의 평균교양의 수준이라고 주장된다면, 과연 교양이 있는 삶은 어떠한 것인가. 독자는 유럽인의 평균교양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적 삶의 관계를 다시 한번 반추할 것이다.
원숭이의 시점에서 볼 때 인간세상은 풍자적인 비꼬는 방식으로 그릴 이야기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삶은 풍자화 되고, 인간의 문제들은 우스꽝스럽고 진부한 것으로 끌어내려진다. 따라서 이야기는 한층 더 불합리하고 이상스럽게 된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순간, 원숭이와 인간 스승 사이의 관계변화는 원숭이와 인간의 상호관련성을 풍자해서 보여준다.
원숭이의 본성은 전도되면서 저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나의 첫 스승 자신은 그것으로 인해 거의 원숭이처럼 되었고 곧 수업은 중단되고 요양소로 보내져야만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거기서 나왔습니다.
심적인 상황이 물적인 현상으로 그려진다. 교사의 원숭이화, 즉 인간의 동물화에서 원래의 인간은 비하되어 표현된다. 이러한 표현방법은 인간세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한 적절한 문체상황으로 간주된다. 더욱이 물적인 것의 영역과 관계가 있는 동사 “사용하다verbrauchen”(146)를 인간적인 것의 영역에 옮겨놓음으로써 인간은 물화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표현 역시 그로테스크한 어법의 수단이며, 그 결과 독자에게는 인간이 원숭이인지 원숭이가 인간인지 모호하게 된다. 원숭이는 인간이 되었지만, 인간을 원숭이로 비하시킴으로써 인간도 원숭이도 아닌 중간상태인물이 된다.
원숭이의 담담한 보고의 어조에는 원망이나 원한이 없으며, 사건은 순응되어야 할 또는 운명적으로 필히 겪어야 될 어떤 당연한 사건으로 설명된다. 원숭이는 근원에 반대하는 아무 죄도 범하지 않았다. 그는 죄 없이 사로잡혔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느끼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묶이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내면적 갈등도 없다.
그는 모든 사실을 반항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원숭이가 흉터를 설명하면서 “난폭한 총상"이라고 표현한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또 다른 인상이 나타난다. 원숭이는 표현대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특정한 목표를 위한 특정한 단어를 선택하였다. 원숭이는 현재의 인간으로의 삶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저는 도달하려고 했던 것에 어쨌든지 도달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난폭한’이란 단어에서 자신의 포로가 힘에 의한 강압적인 수단이었음을 암시한다. 총상에 의한 사로잡힘이라는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원숭이가 출구를 찾으려는 무의미한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달하려고 했던 것’이 처음부터 약속된 인간으로의 삶이라면, 버라이어티무대에서 매니저까지 고용하고 매일 학술회의나 연회에 참석하는 성공한 인간이 된 원숭이의 일과 중 그의 동거녀와의 관계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가 (...)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반쯤 조련된 작은 암 침팜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고 저는 원숭이 방식으로 그녀 곁에서 편안히 지냅니다. 낮에는 그녀를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녀의 눈길에는 어찌할 바 몰라하는 조련된 동물의 착란증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저만이 그 점을 알아보는데 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원숭이가 동거녀를 견딜 수 없다면 상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는 밤에는 반복적으로 원숭이 방식의 삶을 이어간다. 원숭이는 동거녀와의 관계에서 인간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니라는 점이 여기에서 부각된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반쯤 조련된 작은 암 침판지’와 성행위를 한다. 카프카의 모든 주인공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교는 내면의 진실을 벗긴다. 폴리쳐는 두 원숭이의 이러한 방식으로의 만남을 “반영효과Spiegeleffekt" 라고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원숭이 로트페터는 낯에는 동거녀의 눈에서 자신의 타락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밤이면 원숭이 식으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에서 관찰되고 기록되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선택 된 단어는 바로 그의 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원숭이가 조련된 동물이란 점이 고려된다면, ‘어찌할 바 몰라하는 조련된 동물’에서 ‘어찌할 바 몰라하는’은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달하려고 했던 것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실존에 만족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인 언어행위를 면밀히 분석해 본다면, 이러한 원숭이의 성행위에서 타협적인 것, 이제까지의 업적의 반, 그의 해결되지 않은 난관, 그의 제어되지 않은 고향상실이 섬광처럼 나타난다.
원숭이는 무대에서든, 암 침판지 옆에서든 잘 아물어서 잘 손질된 털로 덮이어 있는 상처를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상처는 인간으로의 탈바꿈의 징표일 것이다. 현실의 삶은 상처로 형상화되었다. 상처는 인간이 된 원숭이의 중심적 총화로서 인간의 실존을 위한 비유이다. 원숭이의 인간적 삶은 사방으로 터진 자유도 꽉 막힌 우리도 아닌 세계라는 무대위에서 카인의 후예로서 상처를 입은 채 살고있는 인간에 대한 비유이다. 버라이어티무대는 원숭이에게 현실 삶의 무대이다. 그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곡예를 한다. 무대에서 새로이 습득한 자유는 진짜 자유가 아니라 기만된 자유일 뿐이다. 그러나 원숭이에게 있어서 진짜 자유나 기만된 자유나 모두 숭고한 감정으로 이해된다(142). 그는 현실주의자가 된다.
이야기 서두에서 제기된 인간으로의 변신은 결국 온전한 인간도 아니고 온전한 원숭이도 아닌 중간상태의 원숭이인간 또는 인간원숭이로 변신일 뿐이다. “원숭이는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아주 솔직히 의식하고 있다
그는 출구를 찾았지만 중간상태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운명을 감수한다. 그래서 그는 중간상태인물이란 “특이한 종류의 인간존재 로 살아간다. 또한 원숭이의 인간으로의 변신이 보다 낳은 특별한 삶으로의 행로인 것처럼 기대된다. 그리고 또한 버라이어티무대의 활동공간은 『아메리카 Amerika』의 오클라호마 대극장처럼 무한히 확대된다. 더욱이 “그것이 노력할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말씀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라고 로트페터는 재차 강조한다. 순진한 독자는 원숭이 로트페터가 장밋빛 희망 속에서 만족한 삶을 발산할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행복을 찾는 동화의 분위기처럼 만족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옛날에 가족과의 연대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 그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관중들로 만족해야 한다. 어중간한 원숭이의 삶은 불평도 불만도 없는 현실주의적인 평범한 삶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 독자들은 원숭이처럼 어찌할 바 몰라 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깊이를 되새긴다. 카프카가 인식한 현실적 삶의 모습이 재차 담담하게 형상화된다.
5. 결론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표면 줄거리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변신한 어느 원숭이의 자전적 이야기로서 그로테스크하고 희극적이다. 그러나 심층 줄거리는 강압적인 현실여건에 적응하기 위한 의식 변화의 과정과 어중간한 인간의 현실 삶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이다. 원숭이는 외형상 원숭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임을 자처하고 그의 통신 매개물도 인간의 언어이다. 원숭이는 진짜 원숭이도 아니고 온전한 인간도 아닌 현실과 거리가 먼 새로운 인물형상이다. 그는 그로테스크하고 희극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현실적 삶을 완곡하게 연출하는 은유적 인물이다. 은유적 원숭이는 유동적인 심적 현상을 느낌과 인상에 따른 상징이 풍부한 비유로 표현한다. 언어에 의해서 사실적인 현실태로 변형된 유동의 심적 현상은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형상과 불합리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불합리한 이야기는 독자를 낯설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감정 개입 없이 아주 냉담한 필치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중으로 낯설게 한다.
원숭이가 깨어난 곳은 좁은 우리이다. 원숭이는 좁은 우리에서 출구를 찾아 탈출하고자 한다. 원시림으로의 도주 또는 우리에 집착은 순수자아를 고집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재의 삶에 대한 위협으로서 좁은 우리로서 형상화되었다. 좁은 우리는 현재 삶의 출구부재상황으로서 절망의 존재형식이다. 원숭이는 원숭이의 자아 즉 순수자아를 포기하고 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 출구를 찾는다. 출구는 새로운 삶의 모형으로서 인간이 되는 일, 의식적으로 원숭이이기를 중지하는 일이다. 원숭이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이 하는 일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방식을 배운다. 그러나 원숭이에게는 인간에 대한 관찰과 모방이 목표가 아니라 그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며 삶으로 형상화된 출구를 찾는 일이 목표이다. 출구는 유럽의 평균교양인으로서 버라이어티무대에서 곡예를 하면서 사는 현실의 삶이다.
카프카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서두에 문제가 제기되고 독자는 그것에 대한 결말을 예견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독자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간다. 그리고 처음에 제기된 문제는 어느 것 하나 해결됨이 없이 방치된 상태로 남겨진다. 원숭이는 출구를 찾아 순수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도약한다. 그는 그의 해학적이면서도 교활한 언어행위 - 아킬레스와 침판지를 동류로 취급하고 인간의 원숭이 성질에 관한 언급 등 -로써 인간을 비하한다. 독자는 이제 언급된 인간들 보다 낳은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한 원숭이가 멋진 삶의 모형을 완수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원숭이는 자신의 총상에 대한 인식과 동거녀인 암 침판지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순수자아의 삶인 과거와 완전한 단절을 하지 못하고 어느 것 하나에 확실한 소속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중간상태에 살고 있음을 노정한다. 이야기에 이끌려 가는 독자는 이러한 어중간한 중간상태인물의 모습에서 호기심과 신비함을 느낀다. 신화의 인물들과 성서의 예언자들이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때문에 신비스럽게 보이면서도 현세의 인간들보다 못하지 않게 현실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카프카의 창조물인 원숭이는 원숭이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상태의 모습과 행위로써 신비감과 호기심 속에 독자를 사로잡으며 삶의 의미를 재음미하도록 한다.
참고문헌
金晸鎭: 『카프카 硏究 -그의 生涯와 作品-』, 探究堂, 1983.
오왕근: 『카프카의 소외문학 연구』, 공주대학교 출판부, 1997.
金容翊: 『프란츠 카프카 硏究 - 作品의 構造와 意味를 中心으로 -』, 三英社,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