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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첩 유래

작성자고령사랑(황영만)|작성시간26.06.10|조회수7 목록 댓글 0

 2026. 06. 10 수요일
          (2715 회)

- "3대첩 유래(由來)!" -

이여송의 명나라 군사가 평양성을 탈환(奪還)하고 서울을 향해 내려올 때, 수원 가까이 있던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은 군사를 몰아 한강(漢江)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진군(進軍)하였다.

관군 2,300명과 승병 5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도착한 권율(權慄)은 준비(準備)를 갖추고 이여송의 명군을 기다렸다.

명나라 군사와 합세(合勢)하여 서울에 모인 일본군을 공격(攻擊)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권율 장군(將軍)의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벽제관 싸움에서 이여송의 명군이 일본군에 패하여 평양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권율(權慄)은 용기(勇氣)를 잃지 않고 적을 맞아 일대 격전(激戰)을 치를 각오로 전투 준비를 하였다.

우선 산 둘레에 말뚝을 튼튼하게 박아 목책(木柵)을 세우고 화살과 돌을 모아들였으며, 물을 담을 독과 항아리를 거두어 들여 왜군(倭軍)들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행주산성에 조선군이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왜군들은 선조 6년(1593년) 2월 이여송의 명군을 쳐부순 고바야카와를 선봉장으로 무려 3만 명의 정예 부대가 벌판을 까맣게 메우고 밀려들었다.

적은 해가 질 무렵까지 아홉 차례나 맹렬히 공격(攻擊)을 가해 왔으나 굳건한 행주산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돌을 날라 군사들을 도왔다.
드디어 왜군은 2만 4,000명이나 되는 시체(屍體)를 남겨 놓은 채 물러가고 말았다.

권율(權慄) 장군이 지휘한 이 행주산성의 대승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첩의 하나로 크게 기록되었으며, 부녀자(婦女子)들이 치마를 두르고 돌을 날라 온 앞치마는 이 때부터 행주치마라고 불리었다.

또한 권율 장군은 이 행주 대첩(大捷)의 공로로 도원수(都元帥), 곧 총 사령관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도 대첩,

김시민(金時敏)의 진주 대첩,

권율(權慄)의 행주 대첩을 가리켜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미리 준비(準備)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과거(過去)처럼 되지 않을까 우려(憂慮)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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