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선비 조지훈 2018. 6. 3. 14:56 |
멋과 드높은 기개의 영원한 선비

시인 조지훈

1. 탄생과 생애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본관은 한양(漢陽) (1920년 12월 3일-1968년 5월 17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주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전통적 명문의 후손으로 조부 조인석은 6‘25때 좌익 청년들이 집안을 모욕하고 난리를 치자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부친 조헌영도 영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으나 한의학을 연구하여 대가가 되었다. 초대, 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나 6.25전쟁 때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납북 되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한 후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치고 동국대학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9년 <문장(文章)>지에 ‘고풍의상(古風衣裳)’과 ‘승무(僧舞)’를 추천받아 등단하였고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와 혼인하였으며 1941년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교와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고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일체의 일제 식 교육을 받지 않기 위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하는 등
격동하는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도 민족 주체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 민족 전통을 집중 연구하고 그것을 시로 썼다.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자연과 무속, 선을 소재로 한 민족의 아름다움과 불교색채를 향한 관심을 작품에 깊이 반영하며 창작하였고 1956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1962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 민족문화개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언제나 반듯한 선비의 기개와 풍모를 유지하였으며 당시 진보성향으로 흐르던 보편적 문단의 성향과는 달리 어느 정도 보수의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신경림 시인에 의하면 ‘부도덕하고 경박한 진보주의자들 보다는 도덕적이고 성실한 보수주의자가 역사에 더 많은 기여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고 전해지며, 정부와 대립하면서 무작정 강경하게 반대만을 일삼는 진보문인들에게도 쓴 소리를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의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에는 강렬한 비판의 꾸짖음을 펼쳤다. ‘지조론’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 없음도 신랄하게 꾸짖고, 혁명이후의 서슬 퍼런 박정희의 철권정치에도 불의에는 타협하지 않고 잘못은 직접적인 비판으로 일갈하는 등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은 서정주시인과는 너무도 큰 대비가 되어 오랜 후배이지만 그를 존경하는 시인이 더욱 많았다고 한다.
2. 시인의 사회활동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는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을 거부하며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수영시인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면 조지훈은 그 반대로 정신적 지주로써의 한 기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과거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불의를 보면 흔들림 없는 지조를 지키며 글로 나서서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의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릎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
-지조론 중에서
그는 과거 친일세력이 광복이 되자 친미세력에 달라붙는 걸 혐오했고 그런 자유당을 뒤엎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4.19 혁명 때 앞장서서 학생운동을 지지했고 학생이 앞장서 혁명의 선두가 되기를 요청했다.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삼아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 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 (중략)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여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민족의 지사, 구국의 투사로서 자임해야 할 시기가 왔다.“
-고대신문에 기고한[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중에서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박목월과 박두진 시인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은 당시 유행하던 시 세계에로의 근본적 변혁이 있었는데 조지훈은 초기 자연과 친화한 시를 꽤 오래 유지하였다.
시집으로는 《청록집》과《조지훈시선》이 있고 수필집《창에 기대어》,《한국민족 운동사》이 있다.
1961년 벨기에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여했으며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 196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68년 5월 17일 ‘고혈압과 기관지확장증’의 합병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다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퇴원하지 못하고 아깝게 타계하였다.
정부는 1982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아들인 조태열은 오랜 시절 대한민국의 외교관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외교부차관을 역임하고 2017년 현재 UN대한민국 대사로 재임하고 있다.
![]()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僧舞)전문-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 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완화삼 전문-
3. 뒷이야기
조지훈시인의 지조와 강직한 선비정신의 이면에 야사에서는 ‘시험지를 날려 멀리 날아가는 순서에 맞춰서 채점하기’등 해학적인 재미도 발견할 수 있으며, 음주를 매우 즐기고 좋아하여 바둑에 빗대어 ‘주도 18단’이라는 별명을 가진 것도 유명하다.
시인의 시편들은 불교적 인간의식의 심화하는 면에서는 혹자에 따라 일가를 완성시켰다 평가받지 못하지만, 유교적 도덕의식의 격조 높은 자연인식 및 삶의 융합 면에서의 가치는 시문학적면에서 모두에게 높은 의의를 평가받고 있다. 또한, 『풀잎단장』과『조지훈시선』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혼란의 시대를 불구하고 곧고 반듯이 지켜낸 고귀한 기품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영원한 선비였다.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 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현대시 연구』(국어국문학회 편 정음사.1981)
5. 『조지훈 연구』(김종균 외,고려대학교 출판부,1978)
글쓴이 - 이희국 (詩人)
편집 - 김내식 (詩人)
[출처] 영원한 선비 조지훈|작성자 허돌 김내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