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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권 신간회의 민족운동 / 제5장 신간회의 지방 지회 / 2. 국내의 군별 지방 지회 |
2. 국내의 군별 지방 지회 신간회의 지방 지회는 처음 군읍별 구區로 조직되었는데, 1931년 무려 120여 곳에 달하였다. 또한 회원이 많은 지방 지회는 분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지회들을 모두 설명할 수 없으므로 대체로 각도에 1개 지회씩을 뽑아서 간단히 설명을 붙이기로 한다. 지회의 임원은 거의 해마다 교체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설립 당시의 간부 임원에만 한정하여 이를 서술하기로 한다. 1) 경성지회 경성서울지회는 지회 가운데 가장 규모도 크고 활동도 많이 한 매우 중요하고 큰 비중을 가진 지회였다. 註6) 경성지회는 설립준비위원회의 상당기간의 만반준비 끝에 1927년 6월 10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회원 290여 명, 방청객 300여 명의 참석리에 성대한 설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임시의장 안재홍의 사회로 임원선거에 들어가 우선 전형위원 11인을 선출한 다음 전형위원이 뽑은 임원 후보들을 회원이 무기명 투표를 실시해서 다음과 같이 회장·부회장과 간사 25명을 선출하였다. 註7) 그 후 6월 15일 제1회 간사회에서 25명의 간사들을 부서별로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다. 註8) 회 장 : 한용운韓龍雲 부회장 : 허 헌許 憲 서무부 : 총간사 김영륜金永倫, 상임간사 김홍진金弘鎭·이병헌李炳憲·김인수金仁洙 재무부 : 총간사 이용호李龍浩, 상임간사 이갑준李甲俊·박 일朴 一 정치문화부 : 총간사 이춘숙李春塾, 상임간사 이관구李寬求 조직부 : 총간사 김항규金恒圭, 상임간사 신현익申鉉翼 선전부 : 총간사 이원혁李源赫, 상임간사 정칠성丁七星·이 황李 晃 ![]() 신간회 경성지회 정기대회 광경 경성지회는 해마다 일어나는 동맹휴학의 원인을 대중 앞에 여실히 폭로하기 위해 1927년 8월 17일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연사로는 이관구·최명환·이황·이병의 등이 참여하였다. 註9) 경성지회는 1927년 10월 29일 간사회를 열고 ① 중앙학교 맹휴사건 진상조사, ② 남북 만주 거류 동포가 중국 관헌에게 무리한 압박과 학해虐害를 당함에 대하여 당해 관헌에게 항의를 제출하도록 중앙본부에 건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註10) 그러나 경성지회가 1927년 12월 8일 개최하려는 ‘강연회’는 일제가 ‘금지’ 탄압을 가하였다. 註11) 경성지회는 1927년 12월 10일~11일 제2회 정기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여 ①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적극 지지하고, ② 조선노동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의 3총동맹의 집회금지는 극도의 언론·집회의 압박이므로 집회해금集會解禁운동을 일으키며, ③ 「집회취체령」의 철폐를 결의하여 그 실천을 신임간사에게 일임하고, ④ 일본 노동농민당대회에 축전을 보내기로 의결하였다. 註12) 경성지회는 원래 제3회 정기대회를 1928년 12월 18일~19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집회금지’로 부득이 연기되다가 마침내 1929년 1월 19일~20일의 양일간 출석회원 305명과 방청인 500여 명의 참석리에 성대한 ‘임시대회’를 개최하였다. 註13) 이 대회에서는 과거 1년간 일제의 온갖 집회금지와 노동쟁의 및 학교 맹휴 탄압 등에 대해 질문과 성토가 있은 후에 회관 신축을 토의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였다. 註14) 회 장 : 허 헌許 憲 부회장 : 홍순필洪淳泌 간 사 : 박 완朴 浣·민중식閔中植·정칠성丁七星·김항규金恒圭·박한경朴漢卿·김인수金仁洙·이원혁李源赫·이시완李時玩·김세진金世振·박호진朴昊辰·김사목金思牧·박양신朴陽信·오일철吳一澈·정헌태鄭憲台·허정숙許貞淑· 정종명鄭鍾鳴·박세영朴世榮·구자옥具滋玉·김원식金元植·한봉석韓鳳錫· 이병헌李炳憲·조헌식趙憲植·강인택姜仁澤·김연배金連培·유한일劉漢日· 김 섬金 暹·박명환朴明煥·손몌례孫袂禮·강상희姜相熙·윤시영尹始榮 이상 30명 본부대회 대표회원 : 허 헌·박 완·이종린·홍명희·정칠성·김항규·이시완·이원혁·홍기문·박한경·민중식·김병로·김명동·오일철·오상준·장지필·홍순필·정헌태·신태순·박호진·조헌영·김인수·정종명·김원식·김홍진·김사목·허정숙·김교영·박희도 후보자 : 권승렬·서정희·김태영·김 진·최선익·윤시영 일제가 신간회 전체대회를 계속 ‘금지’ 탄압하자, 본부에서는 몇 개 지회가 하나의 구區를 편성하여 ‘복대표複代表’ 방법을 고안해서 이에 대한 지방지회들의 의견을 물어왔다. 경성지회는 1929년 4월 11일 임시간사회를 열어 ‘복대표’ 방법을 검토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여 중앙본부에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註15) (가) 중앙간부 개선의 건 개선방법은 13도와 일본을 합하여 14개 지역을 14개 선거구區로 정하고, 매 선거구에 2인씩의 중안간부 선거위원을 단기單記투표식으로 선출한 후, 해 위원에게 일임하여 중앙간부를 개선케 함. 단, 중앙간부 선거위원회 선거권 및 피선거권은 해 구區에 소속한 대표회원에 한하며, 개표는 전前 본부 정기대회 준비위원을 개표위원으로 하여 일임해서 개표케 함. 중앙간부에 일임 등 기타 방법으로의 개선은 이를 반대함. (나) 규약 개정의 건 신간회 규약은 중앙간부 선거위원을 규약개정위원으로 하여 일임해서 개정케 함. 단, 다른 방법에 의한 개정은 이를 반대함. (다) 지회연합회 촉성의 건 회무의 진척을 위하여 중앙간사회는 ‘지회연합회’에 관한 임시판법辦法, 규정을 제정하고, 이 판법은 공포일로부터 1주일 이내에 ‘지회연합회’ 촉성의 수속을 취할 것으로 함. 단, 이 ‘판법’은 신간회의 규약 개정이 있을 때는 효력을 잃는 것으로 함. 신간회의 창립 이래 대회의 계속 ‘금지’로 인하여 규약과 임원을 개정하지 못해 회무의 적체됨은 물론이오, 장래의 발전에 중대한 지장이 있으므로 이번 본부 자문에 대한 ‘건의안’을 각 지회에 통지하여 의견의 소통을 도모함. 경성지회는 회장제를 집행위원장제로 바꾸고 복대표제를 채택하게 되자, 1929년 7월 21일 대성황리에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집행위원장과 집행위원 등을 개선했으며, 註16) 이어서 부서별로 집행위원을 선임하였다.註17) 집행위원장 : 조병옥趙炳玉 서기장 : 이원혁李源赫 회 계 : 김탁원金鐸遠 상무집행위원 : 민중식閔中植·박한경朴漢卿·이민행李敏行·손재기孫在基· 김응집金應集·김세진金世振·강상희姜相熙 서무부장 : 이원혁, 부원 김진태金晋泰 재정부장 : 김탁원, 부원 한봉석韓鳳錫·이기종李麒鍾 조직부장 : 민중식, 부원 이병헌李炳憲·김진태 선전부장 : 박한경, 부원 박세영朴世榮·김○준金○準 조사부장 : 김세진, 부원 방두파方斗波·이희춘李熙春 교육부장 : 이민행, 부원 김 섬金 暹·김관빈金關斌 출판부장 : 박 완, 부원 박양신朴陽信·홍봉유洪鳳裕 집행위원 : 박 완·김응집·민중식·김인수·김세진·한봉석·박한경· 박세영·손재기·장지필·김탁원·조헌식·이민행·김연배·오일철·이병헌·○성채·이건춘·방두파·강인택·정칠성·신현창·이관용·강상희·김관빈 집행위원후보 : 박명환·이동욱·신창순·손몌례·장수창 검사위원 : 오화영吳華英·권승렬權承烈·김용기金容起·유한일劉漢日·김원식金元植·홍기문洪起文·김사목金思牧 경성지회는 1929년 8월 24일 정기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친일적 ‘범태평양회의’에 조선지부는 탈퇴하도록 권고하고, 신간회 회원은 그러한 친일적 국제회의에 출석하려 할 때에는 사전에 신간회에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록 결의하였다. 註18) 경성지회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신간회 본부가 이를 전국에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를 기획 추진하자 집행위원장 조병옥이 이에 적극 참가하였다. 경성지회는 그동안 창립 2주년 기념대회와 정기대회도 ‘금지’당해 탄압을 받다가, 1930년 8월 25일 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3총해금三總解禁운동’ 추진과 각道지회연합회 조직을 촉성하기로 의결하였다. 註19) 경성지회는 1930년 말 신간회 중앙본부와 갈등 관계가 발생하였다. 경성지회가 신간회 정신에 배치된 박문희朴文熺를 중앙집행위원회에 재선한 김병로 중앙집행위원장 체제를 부인하는 의결을 했기 때문이다. 경성지회는 1930년 12월 15일 집행위원회를 열어서 ① 신간회 중앙본부의 신임 중앙집행위원회를 부인하고, ② 부산지회가 결의한 ‘신간회 해소문제’에 대해서는 부산지회에 문의해 본 후 반대 태도를 설명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註20) ◇ 결의문 본 지회는 제3회 중앙집행위원회의 전체대회 권한대행의 임시규정을 신중히 적용해 달라는 조건부로 승인했었으나, 그러나 대회의 권리를 대행한 제3회 중앙집행위원회는 임시규정을 불신중不愼重히 운용하였으므로 이를 문책하는 동시에 신임 중앙집행위원회를 부인함. ◇ 이유 (1) 중앙상무집행위원 박문희朴文熺씨가 본회의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언동을 행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거위원으로 뽑고 그를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하는 동시에 또 그를 옹호한 것. (2) 신임 중앙간부 가운데 본회의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언동을 행하는 본자들이 있는 것. (3) 본 지회로부터 신임 중앙간부에게 현하 혼란한 운동정세에 처하여 본부로서 취할 바 그 태도의 성명을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구실 아래 이를 회피한 것. 경성지회는 1930년 12월 17일과 22일 연이어 상무집행위원회를 열 어, 새로 선임된 중앙본부 간부를 그 가운데 신간회 정신에 위반되는 행동을 한 사람박문희이 있는데 본부의 취할 태도를 성명하라는 경성지회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회피한다는 이유로 중앙본부 간부들을 부인하고, 신간회 ‘해소반대’의 ‘통의문通議文’을 초안하여 전국 각 지회에 발송하기로 결의하였다. 註21) 또한 경성지회는 1930년 12월 30일 임시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중앙본부의 공문은 참고자료로만 검토키로 하고, 역점을 주어 “관념적 신간회 해소운동 반대”의 성명을 하기로 결의하여, ‘성명서’ 작성위원으로서 강상희·이관구·홍기문을 선임하였다. 註22) 경성지회는 1931년 1월 9일 임시집행위원회를 열고 중앙본부 중앙집행위원회의 김병로와 이항발을 제명하고 서정희徐廷禧·양봉근楊奉根·박명환朴明煥·홍봉유洪鳳裕·유진태兪鎭泰·성낙훈成樂薰을 무기정권停權에 처하는 과격한 결의를 하였다. 註23) 이에 놀란 신간회 중앙본부는 1929년 12월 19일 신임 중앙집행위원장 김병로가 ‘유감’을 발표하고, 註24) 이어서 1931년 1월 9일 오후에 긴급히 상무위원회를 열어 경성지회 집행위원 31명 전부를 정권 처분하였다. 註25) 또한 경성지회의 검사위원회는 일부 검사위원이 경성지회 결의에 반대하여 중앙본부 중앙집행위원회를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내부갈등이 일어났다. 註26) 경성지회는 중앙본부와의 이러한 갈등 후에 1931년 4월 14일 임시대회를 열고, 해소문제를 상정한 결과 94대 36으로 ‘해소’가 가결되었다. 註27) 이에 경성지회는 1931년 4월 19일 해소위원회를 조직하고 해소론 주장의 15명을 해소위원으로 선정하여 해소사무를 담케한 도중에 1931년 5월 15일 전국전체대회를 맞아 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註28) 2) 경서지회 ![]() 신간회 경서지회 설립광경 서울지역의 지회로서 경성지회 이외에 ‘경성북부지회 설치준비회’가 1927년 5월 일찍 조직되었다가 중단된 바 있었다. 註29) 실제로 서울 교외부근의 지역적 서울 서부지역 지회를 설립하려는 운동은 1928년 정초부터 일어났다. 그 결과 1928년 1월 29일 고양서부高陽西部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註30) 이어서 1928년 3월 3일에는 시외 연강沿江 일대의 경서京西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별도로 결정되었다. 註31) 두 설립준비위원회의 명칭은 달랐지만 그 내용은 ‘서울 의 서부지역’ 지회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두 설립준비위원회는 통합을 위하여 1928년 3월 12일 신간회 중앙본부에서 대표를 초청하여 합동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지회 명칭은 본부에서 지시한 ‘경서지회’로 정하고 상무집행부를 선정했으며, 3월 21일 설립대회를 개최하여 회장단을 선출하기로 합의하였다. 註32) 경서지회의 설립대회는 1928년 3월 21일 동막임시극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선출된 회장·부회장과 합동회의에서 선임된 상무집행부를 합해 보면, 설립 당시의 경서지회의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註33) 회 장 : 서세충徐世忠 부회장 : 박용구朴容九 서무부 : 최형식崔亨植·강준표康俊杓·정대희鄭大熙·김규태金奎泰·김용근金龍根 경리부 : 최길부崔吉溥·김 철金 哲·조경모趙景模·이재묵李載默 선전부 : 정호석鄭浩錫·오재연吳在衍·차구현車九鉉·정병기鄭昺基 ·박성철朴性哲 심사부 : 최등만崔登萬·은재기殷在基·차창균車昌均·김정희金正熙 경서지회는 1928년 12월 15일 정기대회에서 다음의 의안당면문제을 의결하려 했으나 일제의 ‘집회금지’로 대회를 연기하였다. 註34) 결국 이듬해 1929년 1월 26일 임시대회를 열어 이를 의결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註35) ◇ 의안당면문제 (1) 구區내 민간교육 협의기관 수립 (2) 풍속개량 선전데이 가. 미신타파 데이 나. 허례허식 폐지 데이 다. 봉건적 결혼 폐지 데이 (3) 소비조합 설립 (4) 부인운동 촉성 (5) 경서지회 회관 건축 (6) 경성형무소 및 연와煉瓦공장 위치 반대 (7) 마포선 전임電賃 통일운동 독려 (8) 경성부 비료탱크 철폐운동 독려 (9) 구내 사설도서관 설립 ◇ 건설안 (1) 조직체제 변경 (2) 전민중생활 통계표 작성 (3) 유리민流離民 대책 강구 (4) 재외동포 생활상태 조사 (5) 동척東拓·불이不二 이민 반대 (6) 소작권 확립 (7) 8시간 노동제 및 최저임금 확립 (8) 강제결혼 및 인신매매 금지 (9) 일반학교 조선어 사용 실시 경서지회는 음력 정월 초순을 기하여 미신타파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기 위해 1929년 2월 23·24일 양일간 미신타파 선전삐라를 살포하고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註36) 또한 1929년 3월 10일 경서지회 간사회에서는 ① 3총해금 동맹지지, ②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획득, ③ 조선노동총동맹 지지, ④ 조선농민총동맹 지지, ⑤ 『청년조선』 속간, ⑥ 『무산자신문』 지지를 의결하기로 하였다. 註37) 경서지회는 창립 1주년을 맞아 1929년 3월 24일 300여 회원의 참석리에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 후 관내에서 무산자교육에 열성을 다한 교육공로자와 극빈자 등 40여 명에게 표창과 기념품을 증정하였다. 註38) 일제는 1930년 4월 경서지회 간부 박순균·최점득·김상집·은재기·최길부·김익배·임서봉 등 10여 인을 갑자기 검거하여, 註39) 그 가운데 7명을 검찰로 송치하였다. 註40) 일제는 경서지회 간부들을 구속해서 온갖 고문과 박해를 다 가한 후에 1930년 5월 26일 모두 범죄혐의가 없다고 불기소로 석방하였다. 註41) 일제는 무려 40일간을 죄없는 경서지회 간부들을 체포하여 온갖 고문과 박해를 가한 것이다. 경서지회는 일찍이 1929년 12월 정기대회를 열고자 했으나, ‘금지’ 당해 열지 못했으므로 그간 만반 준비를 하여 1930년 6월 14일 정기대회를 개최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는 또 이를 ‘금지’하고 위원회 개최도 ‘금지’하는 억압을 가하였다. 註42) 경서지회는 1931년 4월 25일 임시대회에서 다수가결로 ‘해소’를 가결하고, 5월 16일 전국전체대회에서 ‘신간회 해소’가 가결된 후, 5월 20일 경서지회 해소위원들이 모여 잔무를 정리했으며, 비품들은 모두 경룡노동합동조합京龍勞動合同組合에 기증하였다. 註43) 3) 경동지회 경동京東지회는 서울 근교의 숭인면·한지면·독도면·신설리 일대를 구역으로 하여 설립이 준비되었다. 註44) 마침내 1929년 6월 16일. 본부대표 조헌영趙憲泳을 비롯하여 시내 각 단체 대표의 감격에 찬 축사 속에서 설립대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였다註45) 회 장 : 권유상權裕相 부회장 : 이윤우李允宇 이 사 : 심의성沈宜聲·이규갑李奎甲·장세걸張世傑·이원섭李元燮· 이규성李奎成·이인강李仁康·강극주姜克周·윤충식尹忠植· 김영수金永秀·전○배田○培·김선월金宣月·손석호孫錫鎬· 김순자金順子·이탄호李坦浩·이재소李在遡·이순재李舜在· 김순희金順熙·김성진金聲振·김 일金 日·마 호馬 壕· 이병은李秉殷 경동지회는 설립한 지 1개월 만에 다시 집행위원회 체제로 1929년 7월 20일 설립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다음과 같이 집행위원회 체제의 임 원을 선출하였다. 집행위원장 : 이규갑李奎甲 집행위원 : 전○배田○培·이탄호李坦浩·윤충식尹忠植·이정구李正九· 서광훈徐光勳·김성진·정순화鄭淳和·홍종기洪鍾起·조충구趙忠九· 이규성李奎成·이병은·김선월·박용진朴容眞·이정례李貞禮· 박기채朴基采·정광혁鄭光赫·이대우李大宇·강극주 검사위원 : 권유상·이원섭·김 일·김영수·오순엽吳順燁 집행위원후보 : 박상현朴商賢·신영식辛英植·최우식崔宇植·마 호·진강제陳江霽 본부대표위원 : 박희도朴熙道·윤충식 경동지회는 1929년 12월 1일 제2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장을 이석李奭으로 개선하고 부서임원을 바꾸었다.註46)그리고 토의사항으로, ⑴ 지회세칙 제정 ⑵ 분회, 반班조직 ⑶ 간이문고 설치 ⑷ 순회강좌 개최 ⑸ 한글강좌 개최 ⑹ 무산아동 교육 ⑺ 신간경기연합회 촉성 ⑻ 노동운동·여성운동 촉진 ⑼ 경동지회 회관 건축 ⑽ 동부 공회당 건축 등을 토의 의결하였다. 경동지회는 1931년 1월 24일 제3회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집행위원장에 박희도朴熙道를 선출하고 신임위원을 선정한 후 다음의 ‘의안’을 토론하였다. 註47) 一. 신간회 해소문제 비판의 건 “해소문제 연구부”를 설치하고 해소의 가부를 충분히 연구하기로 함. 一. 중앙간부 신임 여부에 관한 건 조사부로부터 다소 조사한 것이 있으나, 확실하다고 인식치 못하므로 신임위원에게 일임하여 조사 결정키로 함. 一. 중앙본부 대 경성지회간 문제에 관한 건 이것도 또한 신임위원에게 일임하여 충분히 조사하기로 함. 경동지회는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 때에도 신중한 입장을 취해 끝까지 ‘해소 반대’를 주장한 지회였다. 4) 평양지회 평양지회는 1927년 12월 20일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여 설립되어 다음과 같이 처음 임원을 구성하였다. 註48) 회 장 : 조만식曺晩植 부회장 : 한근조韓根祖 선전부 : 총간 설명화薛命和, 간사 서정일徐正日·백응현白應賢·김광○金光○ 서무부 : 총간 김병연金炳淵, 간사 김구현金龜鉉·김정덕金正德 조사연구부 : 총간 김형식金瀅植, 간사 송석찬宋錫燦·이제학李濟鶴 정치문화부 : 총간 임형일林炯日, 간사 오학수吳學洙·백덕수白德洙·김영기金英基 재정부 : 총간 지창규池昌奎, 간사 김경빈金景彬·김건형金健亨 대표위원 : 조만식·한근조·최윤옥崔允鈺·임형일·염구화廉求華· 김유창金裕昌·송석찬·주요한朱耀翰 기타간사 : 김봉준金鳳俊·지창규·설명화 평양지회는 설립 직전12월 12일에 준비위원이 23개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조직한 평양 재만동포옹호동맹平壤 在滿同胞擁護同盟 : 위원장 조만식 활동을 주도하였다. 註49) 평양지회는 1929년 경북지방에서 큰 기근이 들어 신간회 중앙본부가 기근 동포 구제운동을 호소하자 이에 호응하여 19개 단체 연합으로 1929년 6월 3일 평양의 ‘경북기근구제회慶北饑饉救濟會’를 조직하였다. 註50) 그러나 일제는 모금운동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5일에야 일제 평양경찰서의 기부금 모집 허가가 나왔다. 구제회 활동에 대한 시민의 호응이 열렬하여 6월 17일까지 단 2일간의 모금액이 무려 523원 50전에 달하였다. 註51) 평양지회는 1930년 7월 평양에서 회사측의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이 대동맹파업을 시작하자, 이를 지원하면서 업주 ![]() 신간회 평양지회 활동관련 기사 와의 교섭에 나섰다. 평양지회의 고무공장 노동자파업 후원에 대해 일제 경찰은 1930년 6월 15일 평양지회 간사 최윤옥을 불러 평양 고무공장 파업노동자에 대한 후원과 개입의 중단을 요구하고 경고하였다. 註52)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되어 전국적 논쟁이 전개될 때, 평양지회는 1930년 12월 27일 개최된 정기대회에서 해소론이 제기되어 갑론을박 끝에 투표에 붙인 결과 18대 13으로 해소론이 가결되었다. 註53) 이에 평양지회는 해소문제를 집행위원회에 일임했으나, 집행위원회에서도 해소·비해소의 논쟁이 치열하여 처리하지 못하고 대회를 소집하여 재론하거나 집행위원이 총사직 하자는 의론이 분분한 상태에서 해소대회를 맞게 되었다. 註54) 5) 부산지회 부산지회는 설립준비위원회의 활동 결과로 1927년 7월 30일 부산 청년회관에서 설립대회를 거쳐 창립되었다. 지회 설립 당시의 간부는 다음과 같았다. 註55) 회 장 : 김국태金局泰 서무부간사 : 최천택崔天澤(상임)·김한규金漢圭(상임) 재무부 : 이강희李康熙(상임)·김영식金永植정치문화부 : 김홍권金弘權·심두섭沈斗燮 조사연구부 : 노상건盧相乾·백용수白龍水 선전부 : 오 택吳 澤·김하현金夏鉉 부산지회는 동래지회 설립대회에 참석하려고 내려온 경성지회 특파위원 이관구李寬求를 초청하여 1928년 4월 24일 ‘신간운동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성대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註56) 부산지회는 1929년 11월 20일에도 부산지방 각 사회단체 대표 14명을 연사로 한 “5분간 연설대회”를 개최하였는데, 한 연사가 5분씩 사자후를 토하여 부산사회에 큰 각성과 경종을 울렸다. 註57) 부산지회는 1929년 12월 8일 정기대회에서 회장 체제를 집행위원장 체제로 바꾸고 ① 한재旱災구제, ② 차가인借家人동맹 촉성, ③ 전국대회 및 도道연합회 설치금지 대책, ④ 언론·집회의 자유 획득 및 동맹 조직 촉성, ⑤ 도일渡日노동자 자유획득 등을 토의·결의하였다. 註58) 부산지회 제5회 정기대회에서 1930년 12월 6일 김봉한金鳳翰이 처음으로 신간회 ‘해소’를 제창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해소문제를 충분히 연구하여 1931년 전국대회에서 맹렬히 해소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한 후, 집행위원장에 임용길任龍吉, 집행위원장 후보에 김봉한, 그리고 집행위원 5명, 검사위원 2명을 선출하였다. 註59) 부산지회는 1931년 3월 29일에는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신간회 해소’를 결의하고 전국 전체대회에 이를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註60) 6) 대구지회 대구지회는 1927년 7월부터 설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무려 2개월이나 만반의 준비를 하다가, 드디어 1927년 9월 3일 성대하게 설립되었다. 신간회 중앙본부에서 파견된 총무간사 안재홍이 신간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홍명희가 신간회의 현재의 총상황을 설명이 있은 후에, 신간회 동경지회장 조헌영趙憲泳의 축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회단체의 축문 낭독이 있은 뒤에 임원선거에 들어가 회장李慶熙과 부회장崔允東은 회원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고, 25명의 간사들은 7명의 전형위원이 선택하도록 하였다. 註61) 대구지회는 1929년 9월 6일 제1회 간사회를 열었는데, 이 때 선임된 간사와 그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註62) 회 장 : 이경희李慶熙 부회장 : 최윤동崔允東 서무부 : 송두환宋斗煥·정 찬鄭 贊 재무부 : 곽진영郭振榮·장적우張的宇 출판부 : 김하승金夏昇·이상화李相和 정치문화부 : 최익준崔益俊·김이룡金利龍 조사부 : 서만달徐萬達·송하찬宋賀贊 조직부 : 박해돈朴海暾·김월천金越天 선전부 : 장인환張仁煥·허홍제許弘濟 대구지회는 1927년 12월 9일 총무간사회를 열고 박해받는 재만동포를 위해 다음을 결의하였다. 註63) ⑴ 중국관헌의 재만동포 폭압의 건은 대구지회에서 ‘항의문’을 중국 영사에게 발송하는 동시에 ‘경고문’을 중국인 상회에 발송하며, 또는 대구지회 주최로 각 계급을 통하여 중국 관헌의 재만동포폭압 대책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함. ⑵ 중국관헌 폭압사건의 내용을 조사 인쇄하여 대구에 있는 각 단체에 배부할 것(이하 생략) 대구지회는 1927년 12월 17일 조양회관에서 ‘중국 관헌의 재만동포 폭압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註64) 대구에서 1928년 4월 신학기부터 대구고보 학생들의 ‘조선사’ 등 민족교육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시작하였다. 대구지회는 이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성원하였다. 註65) 대구지회는 1929년 4월 14일 임시간사회를 열어 ‘경북지역 한재旱災구제’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우선 ‘한재구제 강연회’를 개최하고, 구제방법은 대구한재구제연합조직을 촉성하는 동시에 대구지회는 1주일간 단연담배끊기 및 금주권禁酒券을 판매하여 대금을 의연금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註66) 1930년 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대구에도 파급되어 대대적 학생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일제는 대구지회 간부들이 배후 성원을 한다고 보고, 신간회 대구지회 위원장 송두환宋斗煥, 서기장 유연술柳淵述을 검속했으며, 註67) 서울에서도 신간회 대구지회 위원 이강옥李康沃과 회원 이원조李源朝를 검속했다가 후에 석방하였다. 註68) 대구지회는 1930년 12월 14일 제4회 정기대회를 열고, 18개 조항의 추진결의를 했으며, 집행위원장에 김광진金光鎭, 서기장 겸 서무부장에 채충식蔡忠植 등 새 위원들을 선임하였다. 註69) 7) 광주지회 광주光州지회는 오랫동안 준비해 오다가 1927년 10월 29일 설립대회를 거쳐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았다. 註70) ![]() 신간회 광주지회 창립 기사 회 장 : 최흥종崔興琮 부회장 : 정수태丁秀泰 간 사 : 최종섭崔鍾涉·한용수韓龍洙·전용기全龍基·김봉오金奉午· 최장전崔張塡·김흥선金興善·김 철金 哲·최한영崔漢泳· 최당식崔當植·문태곤文泰坤·김경규金慶奎·정해영鄭海榮 광주지회는 설립 직전 광주지회설립준비위원회가 주도하여 10개 단체를 묶어서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시민대회’ 개최를 시도했으나 일제의 ‘금지’를 당했다. 註71) 광주지회는 1년 후인 1928년 12월 16일의 정기대회에서 회장과 부회장만 유임되고 간사들을 다음과 같이 다수 보충했는데, 이 임원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맞은 간부들이었다. 註72) 회 장 : 최흥종 부회장 : 정수태 간 사 : 김용기·정해영·이윤호李允鎬·장순기張順基·김재명金在明·김흥선· 국채진鞠採鎭·장석천張錫天·김봉오·문태곤·김 철·김 ○·최당식·최종섭·범윤두范潤斗·강해석姜海錫·김경규·한용수·최장전·최한영 광주지회는 1928년 12월 18일 간사회를 열고 간사들 가운데서 총무간사와 부서를 다음과 같이 선임하였다.註73) 서무부 총무간사 : 최종섭 재정부 총무간사 : 한용수 정치문화부 총무간사 : 최춘열崔春烈조사연구부 총무간사 : 장석천 조직선전부 총무간사 : 이영수李永洙 기금부 부장 : 정수태, 부원 이윤호·신경애申敬愛 1929년 7월에 광주지회는 서울 중앙본부와 갈등관계에 들어갔다. 서울 중앙본부가 1929년 7월 4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간담회’ 형식으로 열어 중앙집행위원장 허헌許憲을 선출하고 복대표複代表제의 선거방법을 결정한 후, 8월 15일까지 각 지회는 임시대회를 열어 개정된 규약에 의거해 간부와 복대표를 새로 선거하도록 지시했다. 광주지회는 중앙집행위원회를 ‘간담회’ 형식을 연 것은 신간회 ‘규약’ 위반이라고 보아 특파위원을 본부에 파견해 항의하였다. 본부는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광주지회는 1929년 7월 20일 임시간사회를 열어 “1929년 7월 4일 소위 간담회의 선거결의는 규약위반임으로 이를 부인하는 동시에 그 결과에서 발생하는 지휘와 결의를 일체 거부함” 註74)을 결정하여 본부에 통 고하였다. 함평지회도 광주지회를 지지하여 중앙집행위원장 허헌을 불신임 결의하였다. 註75) 중앙본부의 지휘와 결의를 거부한다는 선언이었다. 광주지회의 1929년 9월 3일 임시대회에서는 중앙본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소란이 있었다. 註76) 신간회 중앙본부는 1929년 9월 30일 광주지회를 1개월간 정권停權 처분하고, 회원 정수태丁洙泰는 ‘제명除名’했으며 최종섭崔鍾涉은 중앙집행위원을 해임하고 한용수韓龍洙는 1개년간 ‘정권’에 처분하였다. 註77) 광주지회는 더욱 반발하여 1929년 10월 10일 ‘해산’ 결의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註78) 광주학생독립운동 봉기 직전의 일이었다. 목포지회는 본부의 징계가 가혹하다고 1929년 10월 23일 본부에 ‘항의문’을 제출하고 실무위원을 파견하였다. 註79) 며칠 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서 광주지회는 해산하지 않고 이를 성원하는 배후 활동을 하게 되었다. 본부에서도 변호사단을 광주에 파견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보호 지원하였다. 결국 광주학생독립운동 후에 신간회 중앙본부가 1930년 11월 19일 광주지회에 대한 ‘제명’과 ‘정권’을 무조건 해제하기로 결정하여 이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註80) 8) 전주지회 전주지회는 1927년 4월 1일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지회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즉시 회원 30여 명을 가입시키고 지회설립을 신청한 지회였다. 註81) 전주지회는 공식으로 1927년 5월 10일 설립되었는데, 설립 당시의 임원은 회장에 배은희裵恩希, 부회장에 최경열崔景烈, 간사에 임택룡林澤龍·주계상朱桂祥·송주상宋柱祥 외 6인이 선임되었다. 註82) 전주지회는 1927년 12월 정기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집회금지’로 무기연기되어 열지 못하였다.註83)전주지회는 1928년 2월 4일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이 임원을 개선하였다. 註84) 회 장 : 백용희白龍熙 부회장 : 배은희 서무부 : 총무간사 김동선金東鮮 간사 하준기河駿麒·오기성吳基成·김영호金永浩 재정부 : 총무간사 임택룡, 간사 박태호朴泰鎬·박원직朴元直정치문화부 : 총무간사 송주상, 간사 이성진李成珍·최태혁崔泰爀·한 탁韓 鐸 선전조직부 : 총무간사 이평권李平權, 간사 김흥수金興洙·김 균金 均·고득순高得恂 조사연구부 : 총무간사 신현창申鉉彰, 간사 박노수朴魯洙·유상원柳祥元·이원규李元奎 전주지회는 1928년 2월 9일 간사회를 열고 ① 신간회 본부의 전국대회 집회금지 해금, ② 경북 김천 금릉金陵학원 폐쇄에 대한 대책 수립을 결의하였다. 註85) 전주지회는 1929년 1월 27일의 정기대회에서는 ① 도道협의기관 설치, ② 산업통계 조사기관 설치, ③ 신간회의 발전, ④ 누에고치·면화 지정판매 반대, ⑤ 무보수 부역 반대, ⑥ 농민·여성·소년운동의 촉진, ⑦ 3총 해금운동 실시를 결의하였다. 註86) 전주지회는 1930년 9월 2일 회장 백용희 등 간부 8명을 일제가 돌연히 검속하여 서울로 압송해 가버림으로써 활동에 큰 장애를 받았다. 註87) 9) 대전지회 대전에서는 대전지회 설립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1927년 10월 31일 20여 명이 참석하여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15명의 준비위원이 다음과 같이 선출되었다. 註88) 제1차 준비위원 임덕순任悳淳·유해선柳海璇·민경식閔慶植·한원경韓元敬· 임봉철林奉喆· 조성창趙成昶·서재국徐載國·송녕재宋寧在·박헌영朴憲榮·이원태李源泰· 이강하李康夏·민병두閔丙斗·박노학朴魯學·권형채權衡采·권경득權庚得 일제는 대전지회의 설립을 불가능하게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과 공작을 강행하였다. 대전에 일본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호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대전군대에 불온 ‘격문’이 배달된 일이 있는데, 대전지회 준비위원회에 혐의가 있다고 구실을 날조하여 1928년 준비위원 전원을 검거해서 투옥한 소위 ‘대전신간지회 사건’을 조작해서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대전지회는 일제의 이러한 잔혹한 탄압으로 1930년 전반기까지 설립되지 못하였다. 이에 대전에서는 뜻있는 청년들이 1930년 7월 다음과 같이 새로운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제2차 준비위원 이성춘李成春·권경득·이화송李化松·유의영柳義永·우일모禹一謨· 임석남林錫南·김항규金恒圭·송재승宋在昇·심상무沈相茂·신 철申 哲 대전지회 준비위원회는 지회 설립에 만반 준비를 다하여 1930년 8월 14일 ‘설립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제 대전경찰서는 ‘설립대회’ 6일 전인 1930년 8월 8일 설립위원장 이성춘과 부위원장 권경득을 경찰서에 호출하여 지회 설치대회 중지를 강요하였다. 이성춘 등이 이를 거부하자 일제는 그날로 설립위원회 회원 30여 명을 모두 검거하여 잔혹하게 심문하는 등 탄압을 가해서 소위 ‘대전신간지회 사건’을 조작하였다. 註89) 대전지회 설립을 저지하기 위 한 탄압이었음은 물론이다. 신간회 중앙본부는 이 급보를 접하자 중앙상무위원 안철수安喆洙를 1930년 8월 12일 급히 대전에 파견하였다.註90) 일제는 대전지회 설립을 끝까지 저지하기 위해 1930년 11월 20일경 다시 가택수색과 회원 재호줄 취조를 자행하였다. 註91) 그러나 증거를 얻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증거도 붙이지 못한 채 1930년 12월 28일 이성춘·권경득·유의영·이화송·임대남·김항규 등 6인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하기 위한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는 구실로 전원 재판에 기소하였다. 註92) 그리고 1931년 3월까지도 공판을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며 지연시켰다. 註93) 일제의 이러한 ‘대전신간지회 사건’ 조작의 잔혹한 탄압으로 신간회 대전지회는 결국 해소 때까지 ‘준비위원회’로 활동하게 되었다. 10) 청주지회 청주지회는 1927년 12월 22일 설립되었다. 지회 설립 당시의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註94) 회 장 : 손현수孫顯秀부회장 : 정순방鄭淳邦 서무부 : 김 석金 析·허 경許 炅재무부 : 신설휴申卨休·신승호申承浩 정치문화부 : 김종태金鍾泰·전명식田命植 조사연구부 : 신영우申榮雨·최치환崔致煥 조직선전부 : 윤태용尹泰容·구연달具然達 기타 간사 : 최창남崔昶楠·황호연黃虎淵·이병식李秉植·박환규朴桓圭· 김태희金泰熙·이희동李熙東 청주지회는 신간회 창립 1주년인 1928년 2월 15일 ‘기념대강연회’를 개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기념강연은 ‘금지’하고 음악·무도회만 허가하였다. 註95) 청주지회는 다음달인 1928년 3월 17일 ‘춘기강연회’를 개최하여 대성황리에 최흥모·한치유·황호연·신영우·김태희 등이 열렬한 사자후를 토하여 청중을 감동시켰다. 註96) 일제는 이틀후인 3월 19일 돌연히 청주지회 사무실과 조선일보 청주지국을 수색하여 각종 서류와 문부를 압수하고, 연사인 김태희·신영우의 가택을 수색하였다. 일제는 신간회 청주지회장 이하 간부 5~6명을 경찰서에 호출해다가 새벽 3시까지 최조한 후 신영우는 귀가시키지 않고 유치하는 박해를 가하였다. 註97) 청주지회는 1928년 3월 간사회의 발의로 ‘소비조합’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실행방침 준비위원으로 김태희·윤태용·황호연·신영우를 선임하였다. 註98) 청주지회는 1929년 2월 5일 총무간사회를 열고 원산노동연맹에 격려 전보문을 발송하기로 결의하고, 원산총파업을 지지 성원하였다. 註99) 청주지회는 1929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 2주년이므로 ‘격문’을 인쇄하여 간사들이 총출동해서 시내 곳곳에 살포하고, ‘강연회’와 다를 바 없는 의미심장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註100) 11) 함흥지회 함흥지회는 상당한 기간의 준비 끝에 1927년 7월 9일 성대한 설립대회를 열어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고 토의사항을 결의하였다. 註101) 회 장 : 한영호韓泳鎬 부회장 : 홍기진洪基鎭 서무부간사 : 김유성金裕聲·이순기李舜基·김능근金能根 재무부간사 : 정규회鄭奎會·이구하李龜河·최영학崔榮學 정치문화부 : 주관유朱觀裕·주 전朱 前·이리규李利奎 조사연구부 : 한장경韓長庚·김영숙金英淑·윤주尹柱·유명섭柳明燮 출 판 부 : 도관호都寬浩·김웅식金雄植 조 직 부 : 이수을李秀乙·한동죽韓東竹·한흥韓興 선 전 부 : 박 연朴 然·임정동林貞東·한병유韓炳琉 ![]() 신간회 함흥지회 설립 기사 ◇ 토의 사항 ⑴ 조선민족의 생활상태 조사 ⑵ 조선의 경제 및 정치정세 ⑶ 세계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조사연구 ⑷ 제국주의 치하에 있는 세계 약소민족 해방운동 상태조사 함흥지회는 1927년 12월 3일 정기대회를 열어 임원을 개선하고, 당면문제로서 ① 근우회 지지의 건, ② 언론기관의 건, ③ 숙명여자학원 유지의 건, ④ 함흥농민회의 건, ⑤ 함흥수리조합에 관한 건 등을 토의하였다. 註102) 함흥농업학교 학생들의 맹휴사건이 1927년 6월에 일어나 1개월 여나 해결이 안되자, 함흥지회는 간사 이리규·주전·윤주 3인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는 들어주도록 교장을 설득하 였다. 註103) 또한 함흥지회는 1927년 12월 14일 간사회를 열고 각 사회단체에 ‘재만동포옹호 함흥동맹’을 조직하여 재만동포를 보호 발의하고자 하는 공문을 발송하여, 주도적으로 재만동포옹호 함흥동맹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註104) 함흥지회는 1927년말부터 정기대회를 개최하려고 집회계를 제출했으나 일제의 ‘금지’로 연기되어 오다가, 1928년 3월 15일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임원을 개선하고 다음의 안을 토의 의결하였다. 註105) ⑴ 사립 함흥고등학교 동창회 기금 문제 ⑵ 도항渡航 체제 철폐의 건 ⑶ 악습 타파의 건 ⑷ 조선인 교장 채용의 건 ⑸ 만주 속栗 좁쌀 수입세의 건 ⑹ 민중도서관 발기의 건 ⑺ 구직 노동자 및 유랑농민의 배와 차 요금 면제의 건 ⑻ 강습소 및 야학 인가제 철폐 요구의 건 일제가 1928년 농민을 속여 인장을 새겨 동의서를 꾸며 함흥수리조합을 설치해서 농민 수취를 강화하려 하자, 함흥지회 간부들이 일제를 비판하고 농민들을 성원했다가 함흥지회는 1929년 1월 26일의 정기대회를 ‘금지’당하는 탄압을 당했다. 註106) 함흥지회는 여론을 환기하고 1929년 11월 24일 대규모의 ‘함흥수리조합규탄 연설회’를 개최하여 농민들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註107)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호응하여 1929년 말 함흥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흥지회 간부들이 배후에서 이를 지원했으며, 간부 가운데 윤주·이수을·방치규方致規·남상훈南相壎 등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었다. 註108) 함흥지회는 1930년 4월 12일 정기총회를 열어 임원을 개선하고, 註109) 8월 23일 위원회를 개최하여, ① 본부 전체대회 건의안 통과, ② 경제문제 강연회 개최, ③ 숙명여자학원 및 함산유치원 유지 후원, ④ 차가인借家人 동맹의 조직, ⑤ 단천 농민운동 및 신흥탄광 노동운동 보고, ⑥ 실업 방지대책 강연회의 개최, ⑦ 수재 구제대책 등을 결의하였다. 註110) 함흥지회는 1931년 1월 20일 대회를 열어 신간회 ‘해소론’을 장시간 토론한 후 관념적 해소론을 배척하는 동시에 해소론의 오류를 범하는 지회가 많으므로 결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기로 결의하였다. 註111) 12) 청진지회 청진지회는 오랫동안 준비회의를 하다가 1928년 1월 2일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임하고 설립되었다. 註112) 회 장 : 김창권金昌權 부회장 : 최문규崔汶奎 총무간사 : 한기황韓基璜·남윤구南潤九 상무간사 : 김창길金昌吉·이용주李容柱 서무부장 : 한순학韓舜鶴 재정부장 : 장지○張志○ 정치문화부장 : 방동일方東一 조직부장 : ○○○ 조사연구부장 : 김 훈金 勳 출판부장 : 유동수柳東秀 청진지회는 1928년 1월 31일 수백명의 참석리에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했으나, ‘토의사항’을 일제가 모두 ‘금지’하는 탄압을 받았다. 註113) 청진지회는 1928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일을 기념하여 교육문제·부인문제·종교문제·신간회문제·경제문제·정치문제·노동문제·언론문제 등에 대한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註114) 청진지회는 수성輸成수리조합 설치에 일본인의 비리가 폭로되어 한국 농민들과 충돌 분규가 일어나자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농민들을 옹호 성원하였다. 註115) 청진지회는 1929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 2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토의 의결하였다. 註116) ⑴ 중앙본부 규약개정에 관한 건 ⑵ 신간회 기관지 발간 촉성 ⑶ 회기會旗 회가會歌회휘장에 관한 건 ⑷ 신간회 창립 2주년 기념 강연회 개최 ⑸ 청년운동에 관한 건 ⑹ 농촌문제에 관한 건 ⑺ 여성운동에 관한 건 ⑻ 3총해금三總解禁에 관한 건 ⑼ 미신타파에 관한 건 ⑽ 도道 협의기관 설치의 건 ⑾ 기근상황 조사의 보고 청진지회는 1929년 3월 1일을 기하여 신간회 창립 2주년 기념 강연을 개최하려 했으나 일제가 3월 10일까지 집회를 불허한다고 ‘금지’했으므로 3월 중순에 강연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註117) 청진지회는 주도하여 함북노동연맹 등 14개 단체와 연합해서 ‘경북기근 청진구제회’를 조직하고 구제금 모금활동을 하였다. 註118) 청년총동맹 함북도연맹의 청년맹원들을 일제가 검거 투옥하자, 투옥당한 청년동맹원 33명이 ‘단식동맹’으로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청진지회는 주도하여 근우회 청진지회, 신간회 함북도연합회, 청진청년동맹 등과 연합하여 강렬한 ‘항의문’을 일제 당국에 발송하고 일제의 압박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註119) 신간회 중앙본부가 ‘청진단식사건’을 조사하려고 중앙집행위원장 허헌許憲을 청진에 파견하자, 청진지회는 다른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300명이 청진역에 마중 나가서 ‘옥중 동지 건강 만세’를 부르며 사실상 항의시위를 전개하였다. 註120) 청진지회는 1930년 1월 9일 제4회 정기대회를 개최했는데, 일제가 운동방침 원안과 20여 건 토의 안건 가운데 10여 건을 금지시키고 이에 항의하는 위원장 김창권을 개회하기도 전에 검속하는 탄압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새 임원을 개선하고 다음과 같이 운동방침과 당면문제를 토의 결의하였다. 註121) ◇ 운동방침 (1) 농민문제, 노동문제, 어민문제, 소상인 문제, 조직문제, 훈련 및 교양, 동척東拓 이민 반대의 건 ◇ 당면문제 (1) 회관문제, 회비문제 (2) 노동자 및 농민 교양방침의 건 (3) 화전민 수침세水砧稅 반대 (4) 경기도 광주경찰의 방총 인명부상의 건 (5) 함흥학생 단식의 건 (6) 부정예매不正豫買 반대 (7) 누에고치 공동판매조합 촉성 (8) 예심豫審 지연 반대 (9) 학생맹휴 원인조사 비판 (10) 함흥수리조합 사건에 관한 건 (11) 재만동포 박해에 대한 대책 (12) 3총해금에 관한 건 (13) 길주 동해면 수리조합 사건 (14) 화전민 구제에 관한 건 (15) 민간 과중 부과賦課에 관한 건 (16) 조선미 이입 제한안 반대 (17) 태평양회의에 관한 건 (18) 청진부 경영 시장료市場料에 대한 건 (19) 청진감옥 단식사건 비평 13) 신의주지회 신의주지회는 1928년 1월 20일 회원 50여 명과 수백명의 방청객 참석 속에 성대하게 설치대회를 열어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고 설립되었다. 註122) 회 장 : 박영휘朴榮徽 부회장 : 박 립朴 立 간 사 : 백용구白溶龜·박은혁朴殷赫·송창엽宋昌燁·안병진安秉珍· 김경서金景瑞·전득현田得鉉·김성삼金聖森·백운성白雲成·김도익金道益·이윤근李潤根·김정서金正瑞·김병순金炳淳 신의주지회는 설립 당일 계속하여 임시대회를 열고 본부에 파견할 본부대회 출석대표로 안병진·박립을 선출한 다음, 다음의 사항을 결의하였다. 註123) (1) 조선인의 언론·집회·결사·출판 등 자유획득 운동의 촉성 (2) 동척 등 이민정책의 반대 (3) 모든 악법의 철폐 (4) 감옥제도의 개선 (5) 일체 가혹한 세금의 철폐 (6)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확립 (7) 노동자·농민의 금융기관 설치 (8) 최저임금의 제정 (9) 부녀·노인·유년노동자의 보호 (10) 파업권·소작권의 확립 (11) 노동조건 및 노동임금에 대한 민족적 차별 철폐 (12) 불가항력에 대한 손해의 소작인 책임 지지 않기 (13) 지주에 대한 무보수 노역의 철폐 (14) 조선인 본위의 상공기관 조직 촉성 (15) 여자의 공법·사법상 차별 철폐 (16) 여자의 인신매매 금지 (17) 강제적 공동판매 및 연초전매제도 철폐 (18) 조선인 본위 교육제도 실시 및 학교 교수에 조선어 사용 실시 (19) 학생의 과학사상 연구 자유획득 운동 촉성 (20) 의무교육의 실시 (21) 미신, 조혼, 기타 봉건적 악습 타파 (22) 재만동포옹호동맹 지지 (23) 생활개선 (24) 의약 구료기관의 일반화 (25) 실업자 방지책 (26) 억울한 죄 부당 구금에 대한 국고배상 및 고문의 사실상 폐지 (27) 농회비 강징 반대 (28) 농가부채에 대한 지주의 부당이익의 폐지 (29) 농촌 의무부역 폐지 (30) 단일 청년동맹의 조직 촉성 (31) 단일전선 교란운동의 박멸 또한 신의주지회는 ‘건의안’으로서 다음 사항을 의결하였다. (1) 행동강령의 제시 (2) 3총 해금운동 신의주지회는 1930년 12월 18일 정기총회를 열고 임원개선과 함께 ① 농민·청년·노동·부인운동 지원, ② 도연맹 촉성, ③ 회관 건립을 의결하였다. 註124) 14) 원주지회 원주지회는 1927년 10월 31일 설립대회를 열어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고 설립되었으며, 설립 당일에 다음 사항을 토의하였다. 註125) 회 장 : 남지훈南之薰 부회장 : 정동호鄭東浩 서무부 : 총무간사 이적우李赤宇, 간사 정영헌鄭暎憲 조사부 : 총무간사 원주묵元周默, 간사 홍충선洪忠善 선전부 : 총무간사 안준성安俊成, 간사 추경운秋慶雲 기타간사 : 이한흥李漢興·안사영安思永·김용준金鎔駿·김세원金世源·정호진鄭鎬振 ◇ 토의사항 (1) 전민족적 생활현상에 대한 조사연구 (2) 세계 약소민족 해방운동 조사연구 (3) 세계 자본주의 국가 식민지정책에 관한 연구·폭로 (4)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에 관한 건 원주지회는 1928년 4월 22일 간사회를 열고, ‘메이데이노동절’을 기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방식은 5월 1일 오전 10시부터 시내 일주의 ‘시위행열’을 거행하는 한편, ‘선전삐라’를 산포하고, 오후에는 ‘기념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註126) 15) 해주지회 해주지회는 1927년 7월 1일 설립대회를 거쳐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고 설립되었다. 註127)
회 장 : 황학집黃鶴集 서무부 : 총무간사 정길현鄭吉鉉, 상무간사 손태운孫泰雲·최상직崔相稷 조사연구부 : 총무간사 여덕현呂德鉉, 상무간사 정운영鄭雲永·전희철全熙哲 정치문화부 : 총무간사 최명현崔明鉉, 상무간사 이태직李泰稙·송남섭宋南燮 해주지회는 1929년 12월 18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해주청년동맹이 발기한 해주 각 사회단체합동위원회에 적극 참가할 것을 의결하고 대표 2명을 선정하였다. 註128) 해주지회는 1930년 12월 20일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① 재정확립, ② 도연합조직 촉성, ③ 미신타파를 결의하였다. 이어서 부산지회와 이원지회가 제기한 ‘신간회 해소문제’에 대해 양파로 분열되어 갑론을박 논쟁을 전개하다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회원 각자가 더 연구하여 다음 임시대회에서 결정한 안을 명년 2월에 개최될 전국전체대회에 제출하기로 의결하였다. 註129) 해주지회는 1931년 5월 9일 임시총회를 열고 갑론을박 논쟁을 하다가 해소파의 압도적 우세로 해소를 결의하였다. 註130) ![]() 신간회 해주지회 창립기념식 광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