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에게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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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작자 소개 |
조지훈 趙芝薰 [1920.12.3~1968.5.17] 본명 동탁(東卓). 경북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1962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요점 정리 |
성격 : 주지적, 담화적
구성 : ①기: 병이 생기는 때 (1, 2연)
②승: 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3, 4연)
③전: 인생에 대한 태도 (5, 6연)
④결: 병을 대하는 태도 (7연)
제재 : 병(病)
주제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자세
이해와 감상 |
참고 자료 |
청록파 시인들의 자연관 : 박두진,조지훈,박목월이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1946)의 시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에 씌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들은 어떤 질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시집의 발간으로 이 세 시인을 '청록파'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청록집>에서 보여 준 공통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자연'을 소재로 한 시들을 통해 가혹한 시대를 견디려는 의지를 엿보게 해 준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 시가에서 흔히 조화로운 이상 세계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지향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지닌 공통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적 지향이나 표현의 기교면에서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즉, 조지훈의 경우는 회고적,민속적인 제재를 통해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 및 불교적 선미(禪味)를 그려 낸 데 비해, 박목월은 향토성이 짙은 토속적인 언어, 정형적인 율격, 간결한 이미지와 섬세한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박두진은 기독교적 생명 사상에 입각한 자연과의 친화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청록파 시인의 시세계
1939년 이후 문장을 통하여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단에 나온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은 해방 후 함께 합동 시집 '청록집'을 냄으로써 '청록파' 또는 '3가 시인' '자연파' 등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들의 주요 관심은 자연이었다.
박목월은 흔히 향토적인 시인이라고 불린다. 그의 시의 소재는 흔히 자연이되 그는 그 자연 속에서 향토색이 짙은 용어 또는 사물을 찾아 내어 그것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그 배면에서의 이미지의 연결을 꾀한다. 그의 시에서는 동사가 거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시는 더욱 정물화라는 느낌을 준다. 사람의 숨결이 스며 있지 않음도 볼 수 있다.
조지훈은 문화적 보수주의에 바탕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그가 시에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잃어 버린 옛 질서요 옛 풍물이다. 그 옛 질서 옛 풍물에 대한 그리움이 때로 그를 우국적으로 되게도 하고 지사적인 풍모를 지니게도 만든다. 또는 그의 반근대화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반항하는 꼴을 취하게도 만든다.
박두진은 이 둘에 비하여 더욱 관념적이다. 그의 시는 언젠가 올 메시아에 대한 찬미로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박두진의 자연은 메시아의 도래에 의해 완성될 수 있을 뿐이며 이점에 있어 그의 자연은 조지훈, 박목월의 자연을 노래한 지난 날의 자연인 것과 전혀 다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이상주의자요, 뒤에 그가 사회적 불의에 항거해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시를 쓰게된 사실도 이 문맥에서 이해된다.
보충 자료 - 청록파의 작품 경향과 문학사적 의의
1) 시풍
조지훈 : 지사의 기풍을 지니고 고전적인 소재를 취재하여 회고적인 시정에 젖어들었다. 동양적인 선관(禪觀)를 보여 줌
박두진 : 자연에 대한 신선한 생명력과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친화한 시를 보여줌. 기독교적인 자연관을 지님
박목월 : 민요적 가락에 짙은 향토색을 가미하여 자연에 대한 관조를 보여줌. 전통적인 정관(情觀)를 보여 줌.
2) 시정(詩情)
조지훈 : 선미(禪美)가 깃들인 고아한 풍류
박두진 : 기독교적인 정결한 갈망이 착색된 자연
박목월 : 향토색 짙은 정결한 산수의 서경
3) 시형과 운율
조지훈 : 선운(禪韻)이 감도는 내재율
박두진 : 가쁜 호흡, 약동하는 생명의 호흡을 가진 내재율
박목월 : 전통적인 민요조의 율조가 혼연 일체를 이룬 연연한 비애의 가락
4) 문학사적 의의
자연의 실체 표현 : 한국의 신문학사를 통해서 한국의 자연이 실재 그 자체로서 부각된 것은 청록파의 공적이다. 이들에 의해 자연이 자연 그 자체로서 독립된 의미와 정서를 가지고 표현되었다.
시사적 맥락의 이음 : 순수한 우리말과 글의 특질을 잘 살려서 이를 통해 운율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왔다는 점과 공백으로 남을 뼌했던 광복 전후의 시사적 맥락을 잇게 해준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