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의 문향, 주실마을, 1930년대' 꽃탑회'라는 ~ 조지훈의 형인 조동진 [56]문화유산 답사기 3 - 2 /양아치옮김 : 산과 사람들
작성자曉泉작성시간12.09.29조회수104 목록 댓글 0![]()
이름: 양아치 옮김 2004/12/4(토) | |
도산서원 건축의 변질과정 그러나 도산서원 건축에서 정말 건축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은 후대의 증축과 보수 과 정에서였다. 무엇보다 동서 두 채의 광명실이 그렇다. 서책을 보관, 열람하는 도서실인 이 광명실은 전교당 마당의 축대 바깥쪽에 누각으로 내어 지은 건물인데 전하는 바에 의하 면 19세기에 동광명실을 먼저 지었고, 1930년에 서광명실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도산서원 입면 계획을 여지없이 파괴했다. 병산서원으로 치면 만대루 같은 누각이 있어서 산과 강과 들의 경치를 여기에 다 모을 수 있는 전망을 가진 자리인데 그 탁 트인 공간에 두 채의 서고를 만들어 갑갑하게 만들 고 만 것이다. 지금도 도산서원을 답사할 때면 나는 이 광명실을 누마루로 생각하고 동광 명실 쪽마루 복도에 올라가서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고요한 아름다움의 옛 도산서당 시절을 생각해보곤 한다. 광명실 때문에 집을 버려놓았다고 주장하는 내가 도산서원 건축의 참맛을 오히려 광명 실 쪽마루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런 예는 세상에 아주 많다. 빠리 에 에 펠탑이라는 철근 괴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모빠쌍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빠리의 추악한 건물을 보지 않으려면 우리가 에펠탑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대한 20세기'에 들어와 도산서원은 1969년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으로 대대 적인 보수공사가 시행됨으로써 상처와 변질을 맞게 된다. 변질이란 진입로가 서쪽 기슭 천광운영대쪽으로 뚫림으로써 도산서원 진입계획 전체가 일그러져버린 점이다. 즉 정문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 채 곁문으로 들어갔다가 곁문으로 나오는 형상이 되고 만 것이다. 더욱이 마사토를 깔아 넓게 낸 진입로는 많은 관람인원을 배려한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낙동강과 안동호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강변 쪽 비탈에 일본식 정원수 가꾸기로 향나무를 빽빽이 심어 시야를 막은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상처란 지금 도산서원 앞마당을 무려 5m이상 높이로 흙을 북돋아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점이다. 그래서 서원 앞마당의 은행나무, 벚나무, 갯버들 등이 몸체 줄기는 땅에 묻히고 가지들이 지표에 들떠 있어 나무마다 기이한 모양이 됐다. 벚나무는 한 그루가 마치 네 그루로 보이고, 갯버들은 그 용틀임한 가지가 본 줄기 늘어진 것으로 착각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낙동강을 유유히 따라 걸어오다가 서원 입구 곡구암에 와서는 돌계단을 차곡 차곡 밟고 천연대 옆으로 올라 해묵은 갯버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원 문에 당도하던 그 그윽한 정취와 분위기를 우리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유물관의 신축으로 도산서원은 관람객의 관람 동선이 뒤엉키게 되었고 이로인 하여 유물관 위에 있는 상고직사나, 곁에 있는 하고직사 그리고 농운정사까지 건물들간의 유기적인 연결이 무너진 것이다. 가뜩이나 비좁은 공간에, 더욱이 유물보존에 문제가 많 은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 유물관을 지은 당시의 안목이 차라리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1969년의 정화작업에서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은 기와돌담이다. 지금 도산서원에 서 서당영역은 돌흙담으로 소담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서원 사방으로는 번듯한 기 와돌담이 높게 둘러 있어서 결과적으로 돌담이 건축을 압도하는 주객전도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특히 서당과 서원 영역 바깥쪽인 산비탁에 경복궁 돌담 같은 장한 담장을 두르니 여기가 과연 도산서당이고 도산서원인가 의아스럽기도 하다. 이 점은 이른바 도산서원 성 역화 사업 이전 사진을 보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니 우리 시대 문화의 허구성을 보는 것만 같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1969년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은 속된 관광화 사업이 되고 만 것이다. 도산서당의 원모습 그러면 퇴계가 지은 도산서당의 건축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건축적 의도에서 위치 가 설정되었고, 건물이 지어졌고, 정원이 만들어졌고, 원림이 경영되었던 것인가? 이에 대 해서는 다름아닌 퇴계 자신이 쓴 '도산잡영 병기', 풀이하여 '도산에서 이것저것 읊은 시 에 붙인 글'에서 자세히 살 필 수 있다. 처음에 내가 퇴계 계상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 짓고 책을 간직하 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러 삼으려 했는데,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 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 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도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골이 있는데 앞으로는 강과 들이 내다보이고 깊숙하고 아늑하면서 도 멀리 트였으며 산기슭과 바위들은 선명하며 돌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서 이른바('주역' 에서 말한바) 비돈할 곳으로 적당하였다. 어떤 농부가 그 안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것을 내가 샀다. 이렇게 해서 구한 것이 지금의 도산서당이다. 이 글만 보아도 퇴계가 궁벽하고 외진 곳 을 싫어하고 밝은 기상이 감도는 진짜 '좋은 터'를 얼마나 갖고 싶어했나를 잘 알 수 있 다. 이렇게 터를 잡은 퇴계가 도산서당 건물을 짓는 과정에 대해서는 퇴계의 제자인 금난 수(1530~1604)가 지은 '도산서당 영건기사'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리하여 중 법련에게 그 일을 맡아보라고 청하였는데 준공이 되기 전인 1558년 7월에 선생은 나라의 부름(대사성)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시면서 건물의 설계도 '옥사도자' 한 부 를 벗 이문량에게 주면서 법련에게 시켜 일을 마무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법련이 갑자기 죽고 정일이란 중이 계속 일을 맞아 집을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건물은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 두 채였다. 서당 건물은 부엌, 방, 마루가 각각 하나씩 있는 세 칸 집이다. 이 최소 단위의 세 칸 집은 '초가삼간'이라는 말 이 있듯이 자족의 상징이며 겸손의 발현인데 초가가 아닌 기와삼간을 금난수는 '양지바른 터 세 칸 집'이라는 뜻으로 '양용삼간'이라고 했다. 퇴계 연구가인 권오봉 교수(포항공대 정년퇴임)의 해설에 의하면 퇴계의 외할머니의 외가댁이 부내에 있었는데 거기서 본 집을 본뜬 것이란다. 외할머니의 외가댁 집. 그러나 도산서당 건물은 현재 세 칸이 아니라 부엌 쪽으로 반 칸, 마루 쪽으로 한 칸을 내어 지었다. 마루 쪽 증축은 성글게 짠 평상을 붙박이로 붙이듯 이어놓았고 지붕은 경사 가 급하게 매여달렸으며, 부엌 쪽은 역시 정지간을 넓힐 뜻으로 반 칸을 내어 지으면서 모자챙 같은 지붕을 얹었다. 살평상은 한강 정구가 안동부사로 있을 때 기증한 것이고, 골방은 완락재의 부엌에 붙은 작은 온돌로 수직하는 중의 거실이다. 거기엔 70년대 가정 집 식모방만한 것이 달려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증축 부분을 빼고 볼 때 비로소 조촐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퇴계는 이 세 칸 집에 자족하며 방과 마루에 완락재, 암서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당과 함께 준공을 본 기숙사 건물은 여덟 칸으로 방과 마루에 시습재, 지숙료, 관란 헌이라 이름붙였는데 모두 합해서 농운정사라는 현판을 달았다. 그런데 이 집은 공자형으 로 일반 건축에서는 아주 꺼리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공자형 집은 우선 뒷방 쪽의 채광 이 큰 문제이며, 그 의미가 공격한다는 뜻이 있어서 기피했던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오 히려 공자형 집은 기숙사 건물로는 적합하며 공자에는 공부한다는 뜻도 있으니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듯이 이 집을 고집하였다. 그것은 공사감독을 부탁했던 이문향에게 보낸 편지 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다. 이번 집의 제도는 당을 반드시 정남행으로 해서 예를 행하기 편하도록 하고 재는 반드 시 서쪽에 두고 뒤뜰과 마주하도록 하여 아늑한 정취가 있도록 할 것이며 그 나머지 방, 실, 부엌, 곳집, 문, 마당, 창호가 모두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그 구조가 바뀌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렇게 하면 뜻이 너무 작아 됫박처럼 아주 좁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칸은 비록 지붕이 아주 낮지만 짧은 처마를 사용하기 때문에 빛을 받아들 일 수 있으니 뜰이 좁은들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당과 재를 (동시에) 이용할 때는 (등 불은 )모두 뜰 양쪽으로 향하게 하지 말고 다만 부엌등만 밝게 하면 될 듯싶은데... 퇴계가 건축에 얼마나 세심한 관심을 표현했는가는 이 편지 한 통만으로도 알 수 있으 며, 그가 종래의 관행을 부수고 가운데 부엌이 있는 도투마리 집을 응용하여 공자형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식견과 당당한 소견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이 건축에 어린 퇴 계의 정신은 얼마나 숭고하게 느껴지는가. 도산서당의 정원과 원림 제1회 퇴계학술상 수상자이며 '퇴계평전'(지식산업사 1987)의 저자인 고 정순목 교수가 '도산서원의 연혁'('도산서원 실측 조사보고서',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91)에서 그 사례 를 예시하면서 단호히 말했듯이 "퇴계는 여느 학자와 달리 건축적 관심이 컸던 분"이다. 터 하나를 잡는 데도 서너 번을 옮겼고, 집을 지을 때도 설계도를 그려 그대로 짓게 했으 며, 손수 정원을 만들고 원림을 경영하면서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실 퇴계가 절원을 어떻게 경영했는가에는 그의 취미와 성품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과 자연관이 그대 로 나타나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도산잡영 병기'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서당 동쪽 구석에 조그만 못을 파고 거기에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고, 또 동쪽에 몽천이라는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추녀와 맞대로 평평하게 쌓아 단을 만들 고는 그 위에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라 불렀다. 서당 앞 출입하는 곳 을 막아서 사립문을 만들고 아름을 유정문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모두 인공을 가한 조원으로 서당 주위로 사철 꽃을 보면서 자연과 계절을 느끼며 살기 위한 배려였고 그 자취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그것이 도산서원 답사에 서 한차례 볼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도산서당의 정원은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에는 원림이 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집 안에 자연의 모습을 인공으로 만드는 정원과는 정반대로 자 연 속에 집이 들어가고 정자와 대를 설치하여 자연 전체를 정원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이 다. 퇴계는 도산서다에서 당연히 이런 원림을 경영하였고 또 이 언림을 위하여 도산서당 을 이 자리에 잡았던 것이다. 퇴계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밖의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 마을 어귀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 대하여 있다. 그 동쪽 기슭에 바위를 부수고 터를 쌓으면 조금나 정자를 지을 만한데 힘이 모자 라서 만들지 못하고 다만 그 자리만 남겨두었다. 마치 산문과 같아 이름을 곡구암이라 하 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몇걸음 나가면 산기슭이 끊어지고 탁영담에 이르는데 그 위에는 큰 돌이 마치 깎아세운 듯 서서 여러 층으로 포개진 것이 10여 길은 될 것이다. 그 위를 쌓 아 대를 만들고,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고 위로 하늘에는 새가 날고 아래로 물에는 물고기가 뛰며 좌우로 취병산이 물에 비친 그림자가 흔들리어 강산의 훌륭한 경치를 다 볼 수 있으니 이름하여 천연대라 한다. 저 서쪽 기슭 역시 이를 본떠서 대를 쌓고 이름하 여 천광운영이라 하였으니 그 훌륭한 경치는 천연대 못지 않다. 반타석은 탁영담 가운데 있다. 그 모양이 평평하여 배를 매어두고 술잔을 서로 전할 만하며 큰 홍수를 만나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은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지금도 도산서원에 가면 우리는 이 모든 원림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도산 서원 답사에서 한차례의 산책 코스가 되고 있다. 아만 반타석만이 수몰하여 다시는 세상에 모 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퇴계가 이런 정원과 원림을 경영한 마음은 어떤 것일까? 선생은 여기에 사는 뜻을 이렇게 술회하셨다. 나는 항상 오래 병으로 시달려 괴로워했기 때문에 비록 산에서 살더라도 마음을 다해 책을 읽지 못한다. 깊은 시름에 빠졌다가도 숨을 고르게 하여 때로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상쾌해지면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본다. 그러다 느끼는 바가 생기면 책을 덮고 지팡이 짚고 뜰마당에 나가 연못을 구경하고 절우사를 찾기도 하고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한다. 또 혹은 돌에 앉아 샘물 구경도 하고 대에 올라 구 름을 보며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면서 마음대로 시름없이 노닐 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홍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 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나는 도산서원에 오면 퇴계가 이런 마음으로 명아주를 다듬어 만든 청여장을 짚고 유 유히 거닐었을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절우사로 처연대로 옮겨다니며 선생의 자취 를 더듬어본다. 현대 도산서원의 진풍경 둘 요즈음 도산서원에 퇴계 선생 당년엔 없던 두 개의 진풍경이 있다. 모두가 영광과 상처 를 함께 지닌 것으로 혹자는 영광을, 혹자는 상처를 먼저 생각한다. 도산서원 앞마당에 당도하면 제일 먼저 우리의 눈을 끄는 풍광은 호수가 된 낙동강 한 가운데 섬으로 솟아 있는 시사단이다. 이것이 그 하나이다. 수몰되기 전 여기는 백사장과 솔밭이 시원스레 펼쳐진 강변이었다. 그러던 1792년 3월, 정조는 규장각 대신인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 치제하고 별과를 보게 했는데 응시자가 너무 많아 서원에서는 볼 수 없 어 과장을 강변으로 옮기고 시험문제는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는 시험을 보니 답안지 제출자만도 3632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봉해서 서울로 가져와 채점하여 7명을 뽑아 시 상하고. 이때 왕이 전하는 말씀과 제문은 전교당에 게시하고 그때의 일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니 그것이 시사단이다. 비문은 유명한 재상 번암 채제공이 지은 것이 다. 이 유래깊고 자랑스러운 시사단이 물에 잠길 처지에 놓이게 되자 1976년 높이 10m의 둥근 축대를 쌓아 그 위로 옮긴 것이다. 이리하여 축대 위의 시사단은 안동호의 물이 빠 지면 축대 바닥까지 다 보이고 물이 차면 축대 가슴께까지 출렁거리니 옛날 서당시절에 있었다던 반타석이 변신한 듯 우리의 시선을 사뭇 거기에 붙잡아둔다. 그것은 상처는 상 처로되 영광어린 상처이다. 도산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우리는 먼저 키 큰 금송과 마주하게 된다. 이 금송은 도산서 원 성역화 사업 입안자였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던 금송으 로 70년 12월 8일 도산서원 경내를 빛내기 위해 손수 옮겨 심은 것이다. 그 금송이 초겨 울에 심었는데도 저렇게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박대통령의 원력이 크심인지 퇴계 선생의 신통력이 작용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는데, 소나무, 전나무는 집의 울 앞에는 안 심는다는 조상의 뜻을 거스른 것 그 또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 는 침엽속성수 금송은 이제 도산서원 건축의 공간분할을 변형시켜 사립문 너머 어리어리 비치는 서당 마루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광은 영광이로되 상처로 박힌 영광 이다. 안내원이 말하는 퇴계의 일생 그러나 도산서원의 답사는 무엇보다도 퇴계 선생의 삶과 사상을 기리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참뜻이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건물도 풍광도 다 변한 이곳에서 우리가 새겨 갈 것 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도산서원 유물관이 제 기능을 하려면 주차장 한쪽 넓은 터에 지어놓고 거기에서 퇴계의 생애와 사상을 도표와 사진과 유물과 비디오로 설명해주 고, 도산서원의 옛모습을 겸재 정선, 표암 강세황의 그림과 옛 사진으로 보여주고, 그런 연후에 여유롭게 서당과 서원, 정원과 원림을 두루 살피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에야 우리는 거기서 퇴계와 도산서원을 답사하는 제대로 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퇴계, 퇴계 하지만 퇴계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이 있는 가. 생각하자니 한심하고 부끄럽고 억울하기도 하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퇴계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조금 더 입시적 지식을 익힌 사람이라면 이기론자 주리파 정도를 말할 뿐이다. 그 외에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1천원짜리 지폐에 그 얼굴이 나온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상식으로는 도산서원을 답사할 수 없고 또 이런 천박한 상식을 넘어서고자 도산서원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도산서원 매표소에는 '안내를 원하는 방문객에게는 해설을 해드립니다'라는 친절한 안 내문이 붙어 있다. 그래서 항시 도산서원에서는 유물관에서 혹은 전교당 마루에서, 도사 서당 살평상에서 핸드 마이크를 쥐고 열심히 해설하고 열심히 경청하는 흐뭇한 광경을 대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청중 곁에 슬쩍끼여 귀동냥을 하기도 했고, 나의 학생들과 함께 갔을 때는 전교당 대청에서 특별 주문으로 길게 듣고 가기도 했다. 안내원들의 해설 의 유창함도 있었지만 모든 공부엔 장소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집 책상에서는 퇴계의 삶 과 사상이 읽어지지 않던 것이 도산서원 마루에서는 귀로 들어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집 에서는 뉴욕 지도를 아무리 봐도 모르지만 뉴욕에 가서 뉴욕 지도를 보면 한눈에 잡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도산서원 안내원의, 녹음테이프처럼 풀어가는 퇴계의 일생은 이러하 다. 퇴계 선생은 1501년 예안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 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타고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선친의 책을 밤낮으로 읽었는데 젊은 나이로 과부가 된 어머니의 애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않게 예의바르고 열심히 공 부하라는 가르침을 깊이 새겼다. 자라면서 12세 때는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고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며 스무살 에는 벌써 '주역'을 홀로 탐구했다. 이때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으로 평생 고생하고 채식만 했다. 스물한살에 결혼하고, 스물셋에는 서울로 올라가 과거를 공부했는데 과거에 세 번이나 떨어져 크게 자책하다가 이때 '심경'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깨친 바가 있었다. 결국 스물 일곱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서른세상에 문과에 합격하여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관리 가 되어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됐다. 과거 공부에 열중하는 동안 가정에는 부인이 둘째 앋르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 못해 세상을 떠났고 전처 사후 3년 뒤 재혼을 하는 변고가 있었다. 이후 퇴계는 관리로서 출세길을 걸어 42세 때는 암행어사가 되고 43세엔 성균관 대사 성에 이른다. 그 사이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잠시 돌아온 적도 있었지만 평탄한 길이었 다. 그러나 퇴계는 날이 갈수록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하고 싶어했다. 사표가 수리되니 않아서 불려가 관직에 머무르기를 한 5년 더 하는 동안 무고로 관직 이 박탈됐다가 복직되기도 하고 둘째부인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46세 때는 고향 시냇가에 양진암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다. 이때 토계를 퇴계로 고치고 퇴거 의 뜻을 다졌다. 그러나 48세에 단양군수로 발령받아 다시 나갔고 이어 풍기군수가 되며 이때 조정으로부터 백운동서원의 지원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지방교육기관으로서 서원제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리고 군수직 을 사직하고 50세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서암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7세 에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여 61세 때 완공했다. 이에 덕망 높은 학자로 전국에 알려져 각지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제자인 기고봉과 8년간 논쟁한 사단 칠정론은 퇴계의 학문과 사상르 단적으로 모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조정의 부름 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해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69세에 우찬성이 될 때까지 부임과 사퇴를 거듭했고 물러나서는 도산서당에서 학문의 탐구와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1570년, 70세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리학자로서, 뛰어난 이론가로서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론' '심경후론' '성학 십도'등을 지었고, 교육자로서 서애, 학봉, 월천, 한강 같은 직접 제자와 율곡 이이 같은 간접 제자를 무려 360명이나 배출했으며, 빼어난 시인으로서 '도산십이곡' '매화음주시'등 2천여 수를 남겼다. 퇴계의 허상과 실상 그러나 이런 행적으로써 퇴계를 알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왕에 나와 있는 퇴계의 전기는 이상은의 '퇴계의 생애와 학문'(서문당 1973)과 정비석의 '퇴계 소전'(퇴계 학연구원 1978)이 가장 일반적인 것인데 내용이 어렵고 한결같이 위대한 분이라는 설명이 넘쳐서 어떤 점이 위대한 것인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나는 모든 인식이라는 것이 객 관성을 잃어버리면 진실조차 파묻혀버린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사랑하고 존 경하는 대상일수록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퇴계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또는 도산서원을 답사하면서 거의 맹목적인 퇴계 광신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고소를 금치 못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표적ㅇ니 예를 둘만 들어본다. '퇴계전서'에는 '언행록'이라고 하여 문인들이 퇴계 선 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증언한 것이 실려 있다. 거기에는 인간 퇴계의 참모습과 스승으로서 의 자세가 아주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중에는 "도란 가까이 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한다. 어찌 일상생활 밖에 다른 도가 별도로 있겠느냐"(김명일 증언)같은 도학 자적 면모부터 "밥상에는 가지, 무, 미역 등 세 가지뿐이었다"등 일상의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 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덕홍의 '계산기선록'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이다. 퇴계 선생은 뒷간에 갈 때는 반드시 새벽이나 저녁, 음식을 입에 대기 전에 갔다. (정순 목 '퇴계평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면 뒷간에 두 번 간 것, 그것도 비정상적 인 일을 그렇게 당당하게 문자로 남겨놓은 것인가. 또 한번은 도산서원 전교당에서 안내자의 해설을 듣고 있는데 퇴계가 과거 시험에 떨 어진 대목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과 웃음을 금치 못했다. "퇴계 선생은 과거 같은 출세보다 오직 학문을 닦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시 험을 보러 가서 세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시험 같은 것은 우습게 생각했으 니까요." 청중은 그렇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과거를 우습게 생각한 인생이면 과거를 보러 가지 말았어야 할 것 아닌가. 이 점에 대하여 어느 책, 누구도 제대로 설명한 구절이 없다. 그 모순을 다 알면서도 그것을 얘기하자면 인간상이 구차해지니까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퇴계 종택의 종손 아드님인 이근필 온혜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이 문제를 아주 명쾌히 대답해주시고, 또 퇴계의 삶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얘기하려고 노력해서 나는 그 게 놀라웠다. "퇴계 선생이 왜 공부하다 말고 과거 보러 성균관에 입학했나요?" "아, 그거요. 과거를 보러 가지 않으면 군대를 가야 했거든." "그래요? 그러면 병역기피인가요?" "아니지, 병역면제지." 사실 이쯤 대답할 줄 알 때 우리는 퇴계를 말할 자격도 있고 들을 만도 하다느 생각이 든다. 퇴계 청문회(1)-처복과 주량 이런 식으로 퇴계에 대해서 책에는 안 나오지만 그 방면 전문가에게 물으면 쉽게 풀리 는 것이 많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문학, 사상, 역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퇴계에 관해 물은 일종의 청문회 기록을 그대로 옮겨놓겠다. 아마도 옥자들은 여기서 퇴계의 실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난 봄, 한글세대에게 동양고전을 번역, 보급하는 대구의 동양고전연구소(이사장 조호 철, 053-754-0025)의 도산서원 답사 때는 퇴계 시와 서간을 편년으로 재구성한 퇴계 행적 고증의 일인자라 할 권오봉 교수가 안내했다. 그때 권교수에게 퇴계의 처복을 물으니 대 답이 명쾌했다. "퇴계는 처복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던데 어떤 게 맞나요?" "많기도 하고 적기도 했어요. 첫째부인인 허씨 집안은 부자였는데 외동딸로 친정 재산 을 모두 상속받고 일찍 죽는 바람에 모두 퇴계 차지가 되어서 의령, 영주에 산재한 재산 이 영남대 국사학과 이수건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700석을 했대요. 그래서 아들 채 가 의령에 가서 농감한 얘기도 나와요. 그게 퇴계가 공부하는 데 큰 밑천이 됐지." "둘째부인은요?" "가일 권씨를 재취로 맞아들였는데 이분이 문제라. 요즘으로 치면 싸이코였나 봐요. 퇴 계 문중에서도 이 권씨 부인은 바보할매로 통해요. 그래도 그분을 데리고 서울 가서 벼슬 살이할 정도로 퇴계는 무던했던 모양이에요." 영남대 중문과의 이장우 교수는 퇴계의 시 2천 수를 모두 번역할 뜻을 세워 첫째 권으 로 '퇴계 시 풀이'(중문출판사 1996) 한 권을 이미 펴낸 바 있는데, 이 교수는 영해 재령 이씨 집안 후손으로 그의 형수가 퇴계 종택의 종녀이니 퇴계 종가와 시돈이 된다. 내가 학교식당에서 이교수에게 심심파로 퇴계의 주량에 대해 물으니 역시 대답이 명쾌했다. "이선생님, 퇴계는 술을 좀 했나요?" "'언행록'에 나오기를 선생은 술을 마셔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고 약간 거나하면 그만두 었다고 했어요. 그래도 도연명의 음주 시 20수에 모두 화답한걸 보면 술을 많이는 안 자 셔도 즐기기는 꽤 즐긴 모양이에요. 거기에 멋있는 시가 있지. 18번째 시가 좋아요. '주중 유묘리이나 마필인인득이라.' 즉 술 속에 오묘한 이치 있으나, 사람마다 다 깨닫는 것은 아니라네. 유선생도 퇴계 시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첫구절만 좋아해요." "그건 왜?" "퇴계 시 첫구절은 언제나 서정적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 구절은 꼭 공경하라, 공부해 하로 끝나거든요. 그렇죠? 그 음주시 끝이 어떻게 돼요?" "'임풍환괴묵이라.' 바람 맞으니 또한 부끄러워 묵묵히 있네." "그것 보세요." 퇴계 청문회(2)-사상사적 위치 교과서적 지식에 의하면 퇴계는 이기이원론의 성리학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기이원 론은 송나라 주자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그러면 퇴계 사상의 아이덴티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금 퇴계학연구원장과 국제퇴계학회 회장을 맡고 계신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의 상 허 안병주교수는 나의 논문 지도교수이시다. 내가 10여 년 전에 수업을 들을 때 동양사상 사에서 퇴계의 위치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때 상허 선생의 열 강이 지금도 내 귓가에 쟁쟁하다. "유학의 역사는 한마디로이론보완의 역사입니다. 유학은 공맹시대에 도덕규범이라는 당 위적 가치 문제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시물의 존재방식을 파악하는 인식논리에 대해서 는 따로 준비된 것이 없었죠. 이에 반해 노장의 도가와 불교의 선학은 웅대한 논리로 이 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유학은 콤플렉스를 갖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나 유학자들은 이 이단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발전을 이루어 갔습니다. 도가, 불가 적 사유를 유가적 사변 전개의 데이터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학은 겉은 유 가이지만 속은 도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사자 뱃속에 들어간 토끼는 더 이상 토끼가 아닙니다. 북송의 유학자들이 '주역'의 태극 논리로 존재론, 인식론을 펴기 시작했는데 존재론의 핵심은 이기론과 성정론이었습니다. 이것을 주자가 그야말로 집대성하면서 성리학이 성립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자가 선대 학자들의 이론을 보완해서 이룩한 것이 성리학이 죠. 이를테면 정이천은 마음의 문제에서 심즉성이고 성즉리라고 말하면서도 심즉리라고는 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근본 이치라면 당연히 마음도 곧 근본 이치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마음은 선으로도 나타나고 악으로도 나타나 니까 마음이 곧 이라고 말 못한 것이죠.이것을 주자는 기의 작용으로 해석하여 이기이원 론으로 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는 이와 기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습니다. 이 이론을 보완한 것이 퇴계의 유학의 이론보완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동양사상사에서 퇴계의 위치를 가늠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퇴계가 왜 퇴계인지 알 만하지 않은가. 사단칠정론이란 인성론에서 인간의 본 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즉 인의예지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 즉 희로애락 애오욕이 어떻게 일어나느냐를 설명한 것인데 퇴계는 주자 이래의 학설에 따라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제자 고봉 기대승이 여 기에 문제제기를 하여 장장 8년간의 왕복서한으로 이루어진 논쟁 끝에 퇴계는 자기 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하여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고 이가 거기에 올라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논리의 심오함을 나는 아직 다 따라잡지 못하지만, 지금 하바드대 옌칭학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뚜 웨이밍의 '주희의 이 철학에 대한 퇴계의 독창적 해석'('퇴계학보' 35집, 1 982)이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어림 짐작할 수 있다. 퇴계로 하여금 주희의 철학을 해명하고 재정립하는 데 있어서, 다시 말해서 참으로 독 창적인 해설을 하는 데 있어서 방향을 결정하게끔 한 중요한 요인은 사단과 칠정에 관한 기고봉가의 유명한 토론으로 몰고 간 그의 체계적인 탐구이다. 퇴계가 고봉의 사려깊은 연구를 받아들여(자신의 학설을 정정한 것은)중국의 선유들에 있어서는 거의 볼 수 없었 던 특징적 전개였다. 1175년 아호사에서 있었던 주희와 육상산 사이의 역사적 토론조차도 퇴계, 고봉 간에 오간 서신과는 문답의 질로 보나 두 사람 사이의 진지하면서도 개방적인 마음자세의 교환으로 볼 때 거의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퇴계와 고봉의 8년간 논쟁은 그 논쟁의 결과보다도 그 논쟁 방식과 태도 에서 더 많은 것은 배운다. 무려 26세 연하의 제자와 논쟁을 하면서 제자의 지적에 의거 해 학설을 수정하는 퇴계의 자세는 정말로 위대한 것이다. 논쟁을 하다 보면 감정도 격해 지고 자기 논리에 집착하게도 되는 법인데 퇴계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퇴계의 편지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찌 성현의 말을 자기의 의견과 동일한 것은 취하고, 동일하지 아니한 것은 억지로 동 일하게 만들고, 어떤 것은 배척하여 그르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천만 불가한 것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온 천하 사람이 다 나와도 그 시비를 겨루지 못하게 할 수도 있 습니다. 그러나 천만세 뒤에 어떤 성현이 나와서 나의 흠을 지적하며, 나의 숨은 병폐를 간파하는 이가 없다고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군자는 뜻을 겸손하게 가지고 한때에 한 사람을 이기기 위하여 감히 꾀를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고봉이 자기 논리만 앞세우는 것을 보고 '너 자꾸 네 머리만 믿고 까물래'라는 뜻으로 쓴 것이었다. 참으로 퇴계는 논쟁에서는 일인자였던 것 같다. 특히 퇴 계 문장의 참맛은 서간체에 있다는 세평이 있듯이 그의 편지는 진지하면서도 호소력이 뛰어나다. 퇴계 청문회(3)-퇴계의 발병과 학문 발전 한림대 철학과의 이광호 교수는 내 친구이자 퇴계의 방손으로 '도학적 문제의식의 전개 를 통해서 본 퇴계의 생애'('동양학'22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92)라는 아주 흥미롭고 뛰어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퇴계의 병부터 물었다. "퇴계 선생이 왜 그렇게 몸이 아파 골골했냐?" "공부를 급히 하다가 체했어. 밥 먹고 체한 것은 약이 있지만, 공부하다 체하면 약도 없나 봐. 퇴계가 19살 때 '성리대전'을 처음 빌려 보았는데 전30책 중 첫책과 마지막 책만 보게 된 거야. 첫책에는 주렴계의 택그도설이 실려 있고 마지막 책에는 정이천 같은 도학 자의 시가 실려 있는데 이걸 보고 나니까 '주역'의 원리만 알면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 가 당장 다 풀릴 것 같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20세부터 침식을 잃고 '주역'을 공부하다가 얹힌 거지. 이때부터 평생을 고생하는 병에 걸렸어요. 옛날에 왕양명이 주자의 격물치지 를 잘못 이해하여 뜰 앞의 대나무를 바라보고 도통하려고 했다가 나중엔 대나무만 보면 병이 일어나서 '성인은 종자가 따로 있나 보다'고 탄식했다는데, 퇴계는 작대기만 보면'주 역'의 괘가 생각나서 소화가 안됐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다스려갔지." "그래서 어떻게 풀어갔나?" "성균관에 과거시험 준비하려 갔다가 '심경'이리는 책을 황진사-이름은 몰라-에게 빌려 보고는 비로소 심학의 연원을 알았다는 거야. 그래서 '심경'을 신주처럼 받들면서 부모처 럼 공경했대. 문제의식을 확실히 잡은 거자."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벼슬하느라고 정신 없었어요. 집안에 일도 많았고, 그러다가 43세에 임금 명으로 '주자전서'를 인쇄하게 되는데 그걸 교정 보게 되었어요. 이게 큰 행운이었고 여기 서부터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래서 퇴계의 주요 논저를 말하라고 하면 '심경후 론'과 '주자서절요'를 꼭 들게 되지." "그래서 도가 텄나?" "아니지, 이제 앞이 보였다고 했잖아. 그래서 공부만 하고 싶어 죽겠는데 벼슬이 자꾸 주어지니 스스로 안타까웠지. 그래서 도산으로 갔다가 또 불려 나왔다가 하기를 반복했 지." "퇴계가 사직서 많이 쓴 것은 기네스북에 종목이 없어서 못 올랐다더니 그게 그거군." "최곤지는 몰라도 스무 번이 넘어." "그래서 언제부터 자기 목소리를 내었나?" "퇴계는 53세 이전엔 논문 발표를 안했어. 자넨 책을 너무 일찍 썼어. 퇴계는 53세에 '천명도설후서'를 쓴 게 처음이지." "그래서 그가 도달한 인식의 경지는 어떤 것이 되었나?" "한마디로 도와 이가 하나가 되는 경지지. 자신의 마음과 태극이 일치하는 거야. 그래 서 이렇게 말했어. '진실은 오래도록 쌓고 오래도록 노력하면 저절로 마음이 진리와 더불 어 서로 함양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융합함을 얻게 된다'고. 그게 퇴계야." 퇴계 청문회(4)-한국지성사에서 위치 전공이라는 것이 좀 애매한 데가 있어서 내 전공은 조선 후기 회화사라고 믿고 있지만 남이 보기엔 미술사 전체가 내 전공으로 비칠 때도 있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미술사에 관계되는 사항이면 백제건 고려건 무조건 나한테 묻곤 한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안병욱 교수다. 그의 전공은 조선 후기 사회사 쯤 되지만 나의 어떤 질문에도 그는 핵심을 꼭 집 어주는 탁견이 있다. 그러나 워낙 신중하고 꼼꼼하고 따지는 게 많고 질겨서 그 소견을 끌어내는 데는 좀 시간이 걸린다. "병욱이, 퇴계는 어떤 분이었나?" "어떤 분이라니? 그걸 내가 아나. 광호한테 물어봐." "물어봤는데, 광호는 철학자잖아. 그는 퇴계를 무슨 도통한 학자처럼 얘기하던데." "그러면, 그런 줄 알지 나한테 묻는 건 뭐야?" "퇴계가 개인사적으로 학문을 닦든 도가 트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그가 한국지 성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있을 거 아냐. 그걸 역사학에선 어떻게 보는지 그건 내게도 중 요한 의미가 있거든." "그게 자네에게 어떻게 의미가 닿는가?" "어차피 한 시대는 그 시대 지성의 방향이 있는데 그것을 가늠하는 하나의 데이터베이 스로서 말야." "그렇담 누구나 하는 얘기 있잖나. 학문을 위인지학에서 위기지학으로 전환시켰다는 거. 그러니까 출세하려고 고시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격의 완성을 위해서 공부한다 는 것, 그것이 진실로 퇴계가 조선시대 지성사에 끼친 큰 공로라 하겠지." "그건 나도 아는 것이고, 요컨대 퇴계가 인식한 성리학은 앞시대 선비들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 "그런 각도에서 한 질문이라면 이렇게 답할 수 있겠지. 조선시대의 주도적인 이데올로 기는 성리학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그러나 조선 초 사대부들은 성리학이 무엇 인가보다도 그런 세계관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데 마음을 쓰고 있었어요. 마치 우리 현대사회가 서구화, 민주주의, 모더니즘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인정한 것처럼 말야. 그런데 그렇게 하기를 한 100 년 하다보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제도와 인식태도 등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 하게 됐는데 퇴계에 이르러 비로소 성리학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지. 한마디로 퇴계는 성리학 TOEIC시험에서 만점을 맞을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 지." 퇴계청문회(5)-퇴계, 율곡 비교론 퇴계의 사상과 학문은 으레 율곡 이이와 비교하여 얘기되곤 한다. 그러나 두 분을 비교 한다는 것은 매우 미묘한 논쟁거리로 심지어는 어린애처럼 '누가 더 세냐'는 근수 비교까 지 낳는다. 이런 질문을 나는 도산서원 답사에서 심심치 않게 받는다. 그럴 땐 내가 증인 이 된다. "퇴계와 율곡은 어떻게 달라요?" "내가 알 게 뭔가. 나는 퇴계가 율곡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하고, 퇴계는 1천원자리에, 율곡은 5천원짜리에 나온다는 것밖엔 몰라요." "그러면 율곡이 더 높고 센 거네요." "꼭 그렇지가 않아요." 이 점에 대하여 안동의 한 퇴계학통의 서생이 한국은행에 항의성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 난처한 질문에 대하여 은행측에서는 기막히게 피해갔다고 한다. "더 훌륭한 분을 더 많은 사람이 자주 뵈어야 하기 때문에 퇴계 선생을 1천원권에 모셨습니다." 퇴계와 율곡을 비교할 때는 퇴계가 이기이원론의 주리론을 편 데 비해 율곡은 이기일 원론의 주기론을 폈다는 것을 큰 차이로 꼽는다. 우선 퇴계 쪽에선 율곡은 퇴계보다 35년 아래로 일찍이 퇴계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 갔으니 퇴계의 제자일 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율곡측에선 퇴계의 학문을 더욱 진일보하게 완성시킨 것은 오히려 율곡이니 율곡은 퇴계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갓다고 한다. 그러나 영남의 퇴계학파들은 이런 논리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것이다. 성리학은 퇴계에서 완성되었으니 율곡은 퇴계라는 호수에서 갈라져나간 한줄기 갈래에 불과하다면서 '퇴계는 퇴계고 나머지는 나머지'라며 퇴계와 율 곡의 비교는 '베드로와 바울'의 비교가 아니라 '예수와 바울'의 비교 같은 것이란다. 이에 대하여 율곡학파는 또 조금도지지 않고 퇴계의 이론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보완한 정도 의 것이지만 율곡의 이기이원론은 중국에도 없는 조선 성리학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다. 그러면서 영남학파들이 퇴계 모시는 것 못징낳게 극진하게 모신다. 예를 들어, 제상의 진설 순서가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홍동백서와 조율이시만은 전국 어디나 공통이다. 빨간 것은 동쪽, 하얀 것은 서쪽, 대추, 밤, 배, 감 순서이다. 그런 데 기호학파의 어느 집안에서는 조율이시로 율조이시로 바꾸어 실시한다. 율곡이니까 밤 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퇴계가 하루 뒷간에 두 번 갔다는 것 못지않은 절대적 신몽의 결과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퇴계는 결코 영남의 퇴계가 아니고 율곡은 결코 기호의 율곡이 아니다. 조선의 퇴계이고 조선의 율곡인 것이다. 대한의 퇴계와 율곡이며, 세계의 퇴계와 율곡인 것이다. 일찍이 박세채가 말했듯이 "성리학에 깊이 침잠한 것은 퇴계였고 경세제 용의 학을 담당한 것은 율곡이었다." 이론적 지성의 퇴계와 실천적 지성의 율곡이다. 나 는 우리 지성사에서 이 두 분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이자 복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때로는 이론에 침잠하여 사리를 가늠해야 할 때도 있 지만, 실천에 매진하여 힘있게 추진하는 지성이 필요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개 인 속에서도 수없이 반복되는 현상일 수 있다. 80년대의 실천적 지성이 90년대에 와서 이 론적 지성으로 자신을 추스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퇴계와 율곡 둘을 모두 간직할지언정 어느 한 손을 들지는 않는다. 청량산과 퇴계의 묘소 퇴계 선생의 족적을 찾는 답사가 아니라도 도산서원 답사는 창량산으로 이어갈 만하다. 청량산은 작지만 크고, 아담하지만 웅장한 기상이 있는 영남의 명산이다. 청량산 육육봉 의 계곡물을 다 받아내어 제법 장한 물살을 이룬 낙동강이 산자락 낮은 곳을 타고 유유 히 흐르는 자태에는 차라리 장중한 교향악의 울림이 있다. 사정이 허락지 않아 내청량사 에서 외청량사로 잇는 등반과 퇴계가 공부하던 청량정사까지는 답사치 못한다 할지라도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며 청량산의 청량한 기상을 대하는 것은 북부 경북 순례의 한 클라이백스이다. 특히나 5월 초, 연둣빛 신록이 산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여린 자 태를 작동강 푸른 물이 남김없이 받아내어 천지가 초록 물결로 가득할 때 이 길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드라이브 코스가 된다. 그때만은 늦가을보 다도 늦봄이 더 곱다. 평생을 관광버스 기사로 살아온 우리 답사회의 마기사님이 우리나 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고 있는 곳이란다. 그러나 도산서원의 답사가 퇴계 이황 선생의 답사로 이어지게 되면 우리는 퇴계 태실, 퇴계 종택, 퇴계 묘소로 그의 족적을 따라 답사하며 전생에 대한 사모의 정을 키우게 된 다. 퇴계 태실은 도산 서원에서 온혜리로 나아가면 온혜초등학교 안쪽에 있다. 퇴계 종택 은 여기서 더 올라가다 토계로 들어가야 되는 데 도산서원에서 보자면 산 너머에 있는 셈이다. 퇴계 태실이고 퇴계 종택이고 우리가 거기서 건축적으로 크게 살필 것이 따로 있는 것 은 아니다. 그러나 퇴계 태실은 본래 퇴계 할아버지 되시는 이계양의 고택으로 보통 노송 정 종택이라고 하고 퇴계 종택은 또 퇴계의 종택으로 각각 불천위를 모시는 종갓집으로 종손 되는 분의 가족이 이 유서깊은 집을 지키고 계신다. 사정이 허락되어 그분들의 허락 을 얻고 종택 마루에 앉아 종손 아니면 '젊은 종손'(종손의 아드님을 그렇게 부른다)되는 분께 퇴계 선생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위대한 가문을 지킨다는 것의 힘겨움을 전통의 무 게와 함께 체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두 종택에 소리 소문 없이 네 번씩 들렀고 두 번씩 '젊은 종손'되는 분의 존경과 온정이 가득 든 퇴계 선생 얘기를 들었다. 퇴계 종택의 답사는 당연히 퇴계의 묘소, 나아가서 그의 후손인 이육사 생가가 있는 원 촌리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번은 답사회에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퇴계 연구가를 모시 고 묘소를 참배 아닌 답사했는데 그때 한 장난기 많은 착한 회원이 짓궂은 질문을 했다. "퇴계 선생은 무슨 로맨스나 스캔들은 없었나요?" "왜요, 단양의 기생 두향이하고 연애한 것은 유명하잖아요. 정비석의 '명기열전'에 나오 는 두향이 얘기가 반은 사실이죠." "왜 반만 사실인가요?" "반은 그야말로 소설이니까." 단양군수 퇴계를 사모하다 수절한 관기 두향이의 두덤은 본래 단양 강선대 기슭에 있 었는데 강산대가 충주호로 수몰되는 바람에 지금은 옥순봉과 마주하는 제비봉 산기슭에 이장되어 '두향지묘'라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해마다 퇴계 묘소의 시월 시묘가 끝나면 퇴 계 산성의 소임은 여기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고 정순목 교수는 '퇴계평전'에 서 증언하였다. 강난기 많은 착한 회원이 또 퇴계 연구가를 물고늘어진다. "이런 질문 드려도 돼요?" "뭔데? 괜찮아." "낮퇴계와 밤퇴계가 달랐다면서요?" "그런 속전이 있기는 있지." 퇴계연구가는 당혹해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덤덤히 답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자네, 퇴계 선생의 '매화음'이라는 걸 들어봤나?" "아뇨." "퇴계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알고 싶으면 퇴계의 매화에 관한 시를 읽어봐요.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다'라는 시가 있지. '밤기운 차가워라 창을 기대 앉았자니/두등실 맑은 달이 매화가지에 오르누나/수다스레 가는 바람 불러오지 않더라도/맑은 향기 저절로 동산에 가득한걸.'퇴계의 가장 큰 사라은 매화였을 거야. 낮퇴계와 밤퇴계가 다르다는 얘 기는 퇴계선생이 엄격하고 멋없는 도학자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인간적인 분이었고 섬세 한 감정의 소유자였다는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일 거야. 퇴계의 섬세한 인간적 면모는 무엇 보다도 임종에 잘 나타나 있지."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1570년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4일 전에 조카에게 유서를 받아쓰게 하면서 비 석은 조그만 돌 앞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쓰고 자신이 지은 명문을 새길 것이며, 기고봉 같은 사람이 비문을 쓰면 장황하고 없는 것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그냥 간단히 쓰라고 했지. 그리고 하루 전날에는 제자 이덕홍에게 '책은 네가 맡아 관리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당일 아침 '저 매화나무를 물 줘라'하셨고, 내내 아무 말 없다가 저녁에 일으켜 앉히니 앉은 채로 서거하셨지." 결국 '저 매화나무 물 줘라.' 그것이 선생의 최후의 말씀이다. 지금도 퇴계 선생 묘소에는 조촐한 비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써넣고 그 옆에 선생 스스로 찬한 명문이 이렇게 새겨 있다.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아 중간에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나가서는 넘어지고 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 나라 은혜 부끄럽고 성현 말씀 두렵구나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깊고 또 깊어라 ... 조화 타고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랴 북부 경북 순례(5)-임하, 영양 "지례보다야 많겠지" 안동에 답사 와서 잠잘 곳이란 하회마을 민박, 지례 예술촌, 아니면 시내 여관밖에 없 다. 기왕에 한옥 맛을 즐길 요량이라면 하회 병산서원 서원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에 지례 예술촌(0571-858-2590)에 가서 자면 좋겠지만 가는 길이 험하고 험해서 하룻밤 묵 자고 거기까지 가기는 좀 억울하다. 그래서 비록 운치는 없지만 시내 안동문화회관(0571- 859-6101)에서 하루를 이용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이것은 관광안동의 큰 문제이기 도 하다. 안동문화회관은 본래 가톨릭회관인데 나 같은 무신론자도 재워주고 먹여준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심사를 하는데 현관 접수대에는 "부부가 아닌 남녀의 같은 방 투숙은 거절합니다."라는 팻말이 놓여 있다. 안동문화회관에서 묵게 되면 좀 썰렁하지만 시내 복판인데도 시끄럽지 않고, 무엇보다 도 아침 산책으로 중구동의 태사묘, 역전 동부동의 오층전탑, 법흥동의 임청각, 군자정, 칠층전탑을 두루 다녀올 수 있어서 답사일정 운용에도 이롭다. 안동 시내 태사묘 태사묘는 중종 때(1541) 안동부사 김광철이 건립한 것으로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다 6.25동란 대 불탄 것을 1952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선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묘당과 재 실이 격식과 규모를 갖추었고, 보물각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 유물도 전시되어 있으며, 또 차전놀이에 쓰던 동체도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몇차례 가봤지만 보물각이 열 려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또 건물 자체도 큰 매력도 관심도 없지만, 안마당이건 뒤뜨락 이건 툇마루건 정겹지 않은 것이 없어서 혹은 점심때 혹은 저녁나절에 혹은 아침 산책으 로 곧잘 들렀다. 태사묘에서 내가 가장 깊은 정을 주는 곳은 안쪽의 작은 사당 안묘당이다. 대갓집으로 치면 뒷간 자리에 뒷간만하고, 절집으로 치면 산신각, 칠성각 자리에 또 그만한 크기이다. 그러니까 대접을 해준 것이로되 옳게 해주지는 않은 곳이거나, 옳게는 아니어도 대접은 해준 것이다. 안묘당에 모셔 있는 위패는 분명 순흥 안씨인데 이게 누구의 위패냐에 애해서는 두 가 지 설이 있다. 하나는 삼태사가 왕건을 도와 싸운 고창전투때 안중구 또는 안구라는 할머 니가 고삼으로 술을 빚어 적장에게 먹여 취하게 한 것이 결정적인 공이어서 그 안구 할 머니를 모신 것이란다. 그런데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삼태사의 위패를-임하댐 수몰 때 은행나무를 제자라에서 번쩍 들어올려 심어 화제가 된-갈안용계리 어드메에 숨겨 무사히 피신시켰다가 다시 모셔온 안씨 성을 가진 묘지만 내 생각엔 서민들의 선행이 흔히 지배 층의 논리로 차츨되거나 둔갑해버리는 설화의 숙명적 변질과정을 그렇게 겪은 것 같다. 어느 설화가 진짜든 50여칸 태사묘에 있는 두 칸짜리 안묘당은 안동 양반의 위세에도 끝 까지 붙들고 늘어진 서민의 저력, 민속의 힘을 당당히 보여준다. 겨울 한철 빼고는 태사묘 동재, 서재는 언제나 노인장들이 햇볕과 한담을 즐기는 경로 당 판이 되는데, 어쩌다 눈인사를 올리고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여지없이 통과의례를 치러 야 한다. "어디서 왔니껴?" "서울입니다." "성씨는?" "은진 송씨입니다." "으음..." 이쯤 되면 노인은 여기서 대화를 칼같이 끊는다. 송가면 송가지 송씨도 가당치 않은데, 저자는 필시 노론 송시열의 후손일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딱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는 곁에 있는 나에게 묻는다. "곈 어디서 왔니껴?" "대구서 왔심더." "성씨는?" "유가입니다." 이쯤 되면 대답할 줄 아는구나 싶은지 말씨도 자못 느리고 준엄하게 문어채를 썪어 쓴 다. "관향은 어디로 쓰시는지?" "기계입니다." "기계 유씨라...으음, 으음... 내 이종아우의 작은 며느리가 기계 유씨요." 친족의 먼 촌은 물론 처갓집, 외갓집, 고모집의 사돈집을 다 헤아려본 끝인지라 좀 시 간이 걸린 것이며, '본관이 어디냐'라는 식으로 묻지 않고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이름 이 뭐냐고 묻지 않고 '함자는 어떻게 쓰시는지?'와 같은 문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향 이 안동이라면 대화는 숨가쁘게 진행된다. "관향은?" "전주입니다." "그러면 무실 사오. 박실 사오?" "한들에 있습니다." "조선의 당호는?" "수졸당입니다." "그러면, 류길동과 어찌 되오?" "저의 재종고모부의 맞사위 됩니다." "아, 그라요. 그 사람이 우리 삼종질(9촌조카)이라." 웬만한 사람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렇게 먼 촌도 촌수인가 싶지만 말하기 따라서는 가깝다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골치 아픈 족보 때문에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이 무덤에 계신 분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장인이다'에서 이무덤은 누구의 무덤인가? 정 답은 어머니이다. 종가건축의 대표작, 내앞 종가 이제 아침 산보를 마치고 안동문화회관에서 경상도 백반으로 가볍게 한끼를 때우고 안 동을 떠나게 되니 이번 답사 땐 안동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우리 는 안동의 반의 반도 살피지 못한 것이며, 이제 일정에 따라 반변천을 거슬러가는 환상의 드라이브를 위해 안동ㅇ르 떠날 뿐이다. 우리의 버스가 법흥교를 성큼 올라서니 차창 왼쪽으로는 영남산자락에 장하게 자리잡 은 임청각이 환하게 들어오고 답사해본 대로 눈길을 짚어가니 고성 이씨 종택 앞 법흥동 칠층전탑이 전통의 금자탑으로 이쪽을 보며 웃음을 보낸다. 이때 서울서 내려오는 통일호 기차가 바퀴마다 콧바람을 날리며 전탑과 고가를 가로막는데 우리의 버스는 느린 포물선 을 그리는 법흥교 다리를 사뿐히 내려온다. 이제 드디어 안동 시내를 벗어난 것이다.법흥 교를 지나 용상동 아파트단지를 빠져나오면 곧 왼쪽으로 새로 단장한 안동향교가 보이고, 또 조금 지나면 왼편으로는 산자락을 높이 올라타고 자리잡은 안동대학교가 나오는데 이 를 뒤로 제치고 우리의 버스는 계속 반변천을 줄기차게 따라간다. 마침내 임하댐 조절 보 조댐이 나오면 강 건너편으로는 수몰 전 송림이 섬으로 된 진풍경과 함께 이내 천전동, 여기 말로 내앞에 다다르게 된다. 내앞은 '택리지'에서도 가거처로 지목한 계거의 명당으 로 의성 김씨 대종가와 소종가를 비롯한 의성 김씨들이 큰 동성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의성 김씨는, 집현전 학사였던 휴계 김한계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보고는 안동으로 내려왔는데 그의 아들인 망계 김만근이 임하에 살던 오씨 집안으로 장가가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그후 그의 손자인 청계 김진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오자 등과댁이라는 영광을 안으며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내앞 대종가는 바로 천계공을 불천위 로 모시는 곳으며, 그의 작은 아들인 학봉 김성일은 검제로 분가했고, 또 청계공의 손자 로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운천 김용의 종가가 바로 옆집 소종가이다. 이 내앞의 의성 김 씨는 만주서 독립투쟁한 일송 김동삼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안동에서 명문 중의 명문임을 자랑한다. 더욱이 이 집안 출신 여인들은 다른 문중에 널리 퍼져 내앞의 의성 김씨와 연줄이 닿지 않는 안동의 대성이 없을 정도다. 열녀도 많이 나왔고, 큰 학자 의 어머니도 많이 나왔다. 의성 김씨 내앞 소종택은 사랑채가 돌출한 미음자 집으로 규모가 당당하고 체제는 단 정하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반가인데 다만 제사를 위한 공간 확보로 안채가 약간 발달했 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에 반해 내앞 대종택은 보물 제450호로 지정될 정도로 건물이 오래되고 또 달리 유 례를 찾아보기 힘든 웅장한 규모와 복잡한 공간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건축가들에 게는 한옥의 다양한 공간변용의 예를 연구하는 데 가장 좋은 모델로 지목되고 있다. 집 정면으로는 행랑채가 한 일자로 길게 뻗어 있고 그 안쪽에 미음자형 안채와 별당의 사랑 채가 뒷마당으로 빠지는 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데 사랑채는 긴 복도로 행랑채와 연결되어 뱀 사자형 평면을 그리고 있다. 게다가 사랑채에는 넓은 제청이 붙어 있어서 그 공간의 운영이 아주 다양하고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또 안채를 보면 대청마루가 3단 으로 단을 이루고 부엌 위로는 2층을 달아매어 그 위용이 당당하다. 전하는 바로는 학봉 김성일이 병나라 사행길에 북경의 상류주택 도본을 그려다가 완성하였기에 일반 한옥과 다른 점이 많다고도 하고, 또 전하기로는 학봉이 독창적으로 구상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 것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르지만 이 집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채가 주인의 거처라는 사유공간적 성격보다도 제청이라는 공유공간적 성격이 훨씬 크게 부각되어 있는 점이다. 그래서 이 집은 여느 민가와 달리 표정이 많고 또 다양하며 드나드는 사람의 동선이 복 잡한 듯 엄연히 구별되는 질서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을 건축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니 학봉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건축가, 아니면 설계가의 한 분으로 지 목해도 좋을 것이다. 안동 양반은 누구인가 내앞에 오면 답사객들은 안동의 양반문화 전통이 얼마나 강한가를 실감하면서 X세대 말로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싶어지고, 안동의 양반은 누구이며 또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렇게 끈질긴 전통고수의 풍조가 남아 있는가를 물어 보게 된다. 이제까지 여러 동성마을을 살펴보았듯이 안동 양반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입 향조는 대개 세조찬탈 또는 무오 깁자사화 때 수절하여 낙향한 분이라는 점, 둘째 문중의 중흥조는 본인이나 그 자제가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낸 분이라는 점, 셋째 문중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석학이 된 분이나 넷째 임진, 병자 양란 때 의병을 일으킨 분이 있는 점 등 네가지 유형을 다 갖추었거나 최소한 하나를 갖고 있어야 안동에서 양반 반열에 들었다. 그리고 17세기로 들어서서 정국이 노론 전권시대로 들어가면 안동의 튀계학파 남인계 열은 출세의 길이 끊어지면서 오직 학문만으로 자신들의 위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 는 한편, 이른바 혼인을 잘 치름으로써 반가의 품격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벼슬로 나 가는 사람이 없게 되니 가산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어 나중에는 벼슬도 돈도 없 이 이름만 양반으로 남는 접안이 많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명색만 남은 양반은 양반의 규범을 경직될 정도로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왜냐하면 벼슬도 돈도 있는 양반은 양 반의 규범과 체통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행동을 해도 누가 그를 양반이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일도 없으며 다시 양반으로 복귀할 여지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벼슬 없는 안동 양반은 달랐다. 그들은 한번 양반의 룰을 어기면 다시 는 복귀할 근거가 없었으니 죽으나 사나 그 규범을 고지식하게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렇다고 내놓고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니 그들 나름대로 명분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래 서 안동의 양반들은 벼슬보다도 학문과 인격의 완성이 더 중용하다는 학자적 긍지, 선비 의 높은 도덕률로 양반의 체통을 지켜왔던 것이다. 자식으로 하여금 그것을 고수케 가르 쳤고, 문중이 이를 감시했다. 이것이 개화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이다. 이런 경직된 사고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스스로를 자멸케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안동 양반들이 세상에 대고 다시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일제시대에 항일의병과 애 국계몽운동, 독립운동을 적극 벌였다는 사실에 있다. 조동걸 교수가 '안동 유림의 항일운 동'에서 소상히 밝힌 대로 안동 출신 항일의 병에는 권세연, 김도화, 김흥락, 곽종석, 강육 등이 있었으며 협동학교를 설립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킨 법흥동의 석주 이상룡, 내 앞의 일송 김동삼, 무실의 동산 류인식이 혹은 상해로 혹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 였고, 일본 궁성에 폭탄을 투척한 오미동의 풍산 김씨 김지섭열사와 항일시인 진성 이씨 이육사를 비롯하여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한다. 이것이 안동 양반의 자랑이자 자부심인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몸바쳐 나라를 도운 사람들에게 물질적 보상보다 더 크게 돌아 가는 것은 자긍이며, 그런 긍지에서 안동 양반은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특수한 역사적 성격으로 인하여 안동 양반들은 지금도 문중이나 마을을 자랑할 때면 어느 회사 사장이나 정계, 관계의 벼슬보다도 박사, 교수를 먼저 내세우고 문필가를 손꼽고 그 다음엔 고시 패스를 꼽곤 한다. 그러나 안동 양반들이 요즘에는 옛날만큼 큰소리를 못 치고 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자 유당 시절부터 3공, 5공, 6공에 이르기까지 독재정권에 대항한 안동의 민주인사 내지 재 야인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몸바쳐 나라를 도와온 안동의 전 통을 이어가지 못한 대가이기도 하다. 무실, 박실, 지례를 지나며 내앞을 떠나 다시 34번 국도를 타고 반변천을 따라 영양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내 임하댐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를 무시하고 계속 동으로 달리면 차가 고갯마루를 올라타는 순간부터 오른쪽으로 장대한 산상의 호수 임하호가 따라붙는다. 인하호는 안동호와 함께 북부 경북의 양대 인공호수로 낙동강 수위 조절에 큰 몴을 하 고 있다지만 임하면, 임동면, 길안면 일대의 유서깊은 옛 마을을 몇십, 몇백 수몰시켰는지 헤아리기조차 힘들며, 미처 옮겨가지 못한 한옥이 또 몇백, 몇천이 물에 잠겼는지 제대로 아는 이도 없다. 수몰 전, 반변천을 따라가는 이 국도를 가자면 등근 산 아래 고가가 즐 비한 동네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정겹고 푸근하고 예스럽고 향수가 절로 일어나던 것이 이제는 산봉우리 목젖까지 물이 올라 인적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이 "아! 우리나라에도 스위스 같은 호반의 정취가 있구나"하는 실없는 감탄사 소리나 듣게 됐다. 가면 갈수록 호수는 넓어지고 끝도 없이 길게만 뻗어가다가 이윽고 호수가 큰 강처럼 보이는 지점에 이르면 강 건너 높고 긴 다리가 가로질러 이쪽과 저쪽을 하나로 이어준다. 이 다리는 수 곡교, 다리 너머는 수곡, 여기 말로 무실이다. 임하호가 반변천이던 시절엔 200m 아래쪽에 있던 마을이 무실인데 여기 살던 전주 류 씨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차마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전주 류씨 무실 종택을 비롯하여 무 실 정려각, 기양서당, 수애당 같은 국가지정 문화재 한옥들만이 새 마을을 형성하여 이 다리 아래가 그 유서깊은 무실이었음을 쓸쓸히 말해주고있을 뿐이다. 임동교 다리는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고 큰 차는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놓아 버스로 무실에 가자면 저 아래 가랫재 못미처까지 가서 비포장길로 족히 10km를 돌아야 한다. 무실과 항시 따라붙어 얘기되는 박곡, 여기말로 박실까지는 또 새로 난 비포장 산 길로 가야 하며 박실 너머 지례는 거기서 또 험한 길러 더듬어가야 하니 사정 모르고 이 길로 들어선 사람은 오도 가도, 빼도 박도 못하고 후회에 후회만 해야 한다. 그런 험악한 조건 속에서도 낡은 옛집을 옮겨 눌러앉아 살고 있는 고집은 또 어떤 고집들인가. 무실과 박실에는 전주 류씨 동성마을이 있었다. 입향조는 류성으로 그는 학봉과 처남매 부지간이었는데 처가인 내앞 가까이 자리잡고 살았으나 불행히도 나이 서른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났고, 학봉의 누님인 그의 처는 남편 상을 당하자 손수 삭발하고 3년 시묘살이 한 뒤 단식으로 자결했다. 그 열녀비가 무실 정려각이다. 그러나 그의 후손 중에는 석학 이 많이 나와 퇴계의 정맥을 이었다는 정재 류치명, 임란 때 의병장을 지낸 기봉 류복기 들이 이 집안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고 근래에는 지금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고 있는 류정 기 박사, 시인 류안진, 언론인 출신 정치인 류혁인 등이 박실 태생으로 그 간판 격 인물 로 꼽힌다. 그러나 박실 류씨들은 거의 다 선산 해평으로 집단 이주하고 지금은 몇채 남 지 않았다. 박실 너머에는 지례 예술촌이 있어서 요즘은 그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현위 치는 박곡동이며, 원위치는 200m 아래쪽 강변마을 이름이 지례였다. 지례의 입향조는 의 성 김씨 지촌 김방걸(1623~96)이다. 그는 청계 김진의 현손으로 문과에 올라 대사성을 지 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낙향하여 '나는 이제 말 않겠다'며 문 닫고 들언앉고는 그 방 이름을 '무언재'라고 짓는 기개를 보였다. 그리고 지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는데 그 후손들의 공부를 잘해서 그 전통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박사가 열 몇, 교수가 열 몇, 고시합격이 거의 열 하면서 전국에서 최고임을 자랑하며 얼마 전 돌아가신 김호길 박사, 그의 아우 한동대 김영길 총장, 시인 김종길 등 함자를 쭉 늘어놓는다. 그런 유서깊은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것도 세월의 아이러니인데, 지례의 전통과 고향을 지키겠다며 이 마을 출신 시인인 김원길이 지촌 종택, 지산서당을 비롯하여 건물 20여 동 을 옮겨놓고 창작을 위해 조용한 곳을 찾는 예술인들의 아뜰리에로 제공하는 뜻을 세웠 다. 그것이 지례 예술촌이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수곡교 옆 임동주유소에 버스를 세워놓고 다리 건너 무실 새 마을로 가니 아직도 집들 은 제자리가 잡히지 않은 듯 어설프기만 한데, 임하호 깊은 물은 무섭게 차올라 있다. 바 라보자니 왠지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보상이라고 받은 것이 꼭 교통사고 보험금처럼 허망할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고향을 남달리 사랑했던 무실, 박실, 지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포항공대의 신화를 창조한 김 호길 박사가 생전에 쓴 '나의 어린시절'('안동지', 고향문화사 1987)이라는 글에는 고향이 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실향민의 마음이 애잔하게 남아 있다. 나의 제2의 고향(고모집에 가서 도산초등학교를 다녔다)인 도산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수몰지구로 되었다. 그리고 도산 가기 전 내가 자란 제1의 고향 지례도 머지않아 임하댐 으로 수몰될 것이란다. 외국 체류시 꿈만 꾸면 나타나는 고향이었는데... 지난 구정 때 지 례에 갔을 때 가친, 중형, 장질 등과 수몰 후 우리 집의 이전 문제를 논의했지만 집을 어 디에 옮긴들 고향산천과 함께 옮기지 못하니 무슨 의의가 있는지 알지 못했으며 앞산 뒷 산에 계신 조선분묘는 어떻게 참배를 할 것인지... 고향을 통해서 고국이 생각되고 애국 비슷한 것으로 연결이 되었었는데 실향인의 마지 막 생애는 어디에 뿌리를 박아야 할 것인가? 애시당초 고향다운 고향이 없는 서울 사람인 나에게도 어려서 뛰놀던 뒷골목이 고향이 되어 어쩌다 꿈에라도 보면 반가운데 아름다운 산천에 고향을 둔자의 마음은 얼마나 행 복한 인생인가. 빠리에 가서 끝내 조국으로부터 버림당하여 망명객이 된 고암 이응노 화 백은 "지금도 붓만 잡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향땅 예산의 월봉산이다"라고 고백하였 다. 또 곡성 동리산 태안사 스님의 아들인 시인 조태일 형은 만해문학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한 첫마디가 "나는 살아가면서 슬프거나 어렵거나 판단이 가지 않을 때 면 언제나 내 고향 동리산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어제 기쁜 소식을 들으면 서도 먼저 떠오른 것도 고향이었다"라고 했다. 그런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국가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고 혹독한 피해만 주었다고 생각하다가도 그 잊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온정에 사무칠 때면 나라를 미워할 수도 없게 되며,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놓였을 때는 그 고향을 지키 기 위해서라도 나라의 부름에 앞서나서게 되니 그것이 애국심이고 또 애향심인 것이다. 그러니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보, 청송보호감호소를 바라보며 수곡교에서 다시 동쪽으로 임하호를 따라 차머리를 돌리면 옛날 임동면 면사무소 소재 지 위로 넘어가는 임동교 큰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가랫재라는 큰 고개를 넘어가게 되는데 여기부터가 청송군 진보면, 진성 이씨의 본향이다. 진보로 들어서면 우리는 시가지로 들어설 것 없이 외곽도로를 타고 영양 입암으로 빠 지게 되는데 그러자면 큰 산 아래 기대어 형성된 진보를 끼고 돌아야 한다. 가랫재라는 큰 고개를 넘어온 탓인지 진보들판은 꽤나 넓어 모이는데 무슨 선입견이 있어서가 아니 라 여기는 평지가 아닌 고원지대라는 인상을 쉽게 받게 된다. 그래서 진보들판은 더욱 야 성미가 넘친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그런데 진보를 받쳐주는 큰 산에는 무슨 산성 같은 설치물이 산허리를 감싸고 돌아간 다. 나는 처음엔 그것이 그저 진보산성이겠거니 생각하고 별 마음 쓴바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한국의 빠삐용 감옥, 청송보호감호소라는 것이다. 세상에 퇴계 선생 의 도산서당 앞마을은 안동호수가 삼키더니 퇴계 선생의 본관지는 감호소가 누르고 있는 것이다. 간석기반 답사 때 이 앞을 지나면서 우리는 열성회원인 박은수 변호사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저 20세기 유적에 대한 해설을 부탁했다. "1980년, 5공 권력은 사회보호법을 제정하여 누범의 전과자로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 자 는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보안처분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을 받고 형기 합계가 3년 이상인 자가 또다시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르 받고 형기 합계 가 3년 이상인 자가 또다시 유사한 죄를 범하게 되면 형기만료 후 7년 또는 10년의 감호 처분을 따로 받게한 것입니다. 이것은 재판에 의새서가 아니라 무조건 집행하도록 강제규 정 되어 있어서 나도 판사시절엔 아무런 판단과정 없이 꼭두각시처럼 7년, 10년 감호처분 을 내려야 했던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 감호대상자를 수용하는 시설이 이 청송보호감 호소인 것입니다. 이 행형제도는 범죄에 대한 제재가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아 87년 6월항쟁 이후엔 5년 내지 7년으로 바뀌었고 검사와 판사에게 '재범의 위험성' 판단에 재량의 여지를 주고 있으나 과거 관행에 따라 기계적으로 보호 감호 처분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수형자의 인권 같은 것은 옹호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더욱이 청송보호감호소는 교도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규율이 엄하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생지옥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일어난 비인간적인 일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내부의 대강이라도 공개돼야 하낟고 주장하고 있습니 다. 그런 슬픈 얘기의 비참한 곳입니다." 박변호사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회원들은 거기에서 시선을 놓지 않았고 창안에는 오랫 동안 침묵이 낮게 고여 있었다. 영양의 국보, 봉감 모전석탑 진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영양, 남쪽으로 내려가면 청송, 동쪽으로 곧장가면 영덕이 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이 지역에 대하여 우리가 들어볼 기회는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청송엔 주왕산이 있고 영양은 고추가 특산물인지라 해마다 고추아가씨를 뽑는다는 귀여 운 소식이나 들어왔다. 그런데 요즘은 매스컴에 각종 기행 프로가 많이 생기면서 자주 등 장하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강 반변천, 음택의 명당이 있다는 일월산, 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의 고향인 청송, 이문열의 고향인 영양 석보 문학기행...내가 본 것만 해도 네 가지 이다. 그런데 영양의 국보인 봉감 모전석탑은 명색이 국보 제187호인데도 TV는 고사하고 도록에서조차 제대로 주목받아본 일이 없다. 심지어 미술사, 건축사 전공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를 찾아가는 동안 이정표라고는 산해리 마을 입구 표지석 밑에 작 게 괄호 치고 써놓은 것뿐이니 국보는 국보로되 국보 대접 못 받는 것으로 봉감 모전석 탑만한 것이 없을 성싶다. 입암에서 흘러내려오는 반변천이 절벽을 타고 반달 모양으로 흘러가는 자리에 우뚝 서 잇는 봉감 모전석탑은 분황사 모전석탑과 똑같은 아이디어로 쌓아올린 이형 탑이다. 전탑 의 고장에서 전탑의 전통을 변형하여 이어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영양 땅이 안동문화권에 속함녀서도 한편으로는 영양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비치는 것도 같다. 봉감 모전석탑은 그 자체의 건축적 조형미도 조형미이지만 주변 환경과의 어울림이 탁 월하여 앞으로 영양이 관광지로 알려질 때 별격의 답사처로 주목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 심치 않는다. 강 건너 절벽이 떡 시루결같이 수평으로 썰린 듯 보이는데 이 봉감의 모전석탑이 철추 를 내리듯 수직으로 곧게 뻗어 우뚝하니 그 힘차고 장중함이 더욱 당당하다. 절벽도 석탑 도 석질이 모두 퇴적암으로 검은 기, 붉은 기를 띠고 있는데 그 빛깔은 밝고 싱싱한 기색 없이 어딘지 우수의 빛깔이고 고독의 표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감리 마을엔 날로 폐가가 늘어 이젠 몇채 남지도 않아 언제나 한적하고 밭에는 봄이 면 산수유, 여름이면 담배, 가을이면 고추가 제철을 구가하며 봉감리 모전석탑의 배경을 바꾸어준다. 그럴 때면 그 곱고 연한 배경의 빛깔로 폐사지 석탑은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 다. 이런 생각을 늘 해온 것을 간석기반 회원들에게 사설 늘어놓듯 설명하고 있는데 지질 학을 전공했다는 자칭 백조-여자 백수건달-가 나의 해설을 보완한다. "능교형 지역에는 화강암이 많은데 니껴형으로 오니까 퇴적암이 많네요. 화강암은 열정 과 젊음과 화려함을 상징한다면 퇴적암은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낸 지고지순의 사랑 같은 것이니 안동의 고가, 영양의 모전석탑 모두다 퇴적암과 정서를 같이 한다고 하겠네요." 백조의 말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큰 박수와 함께 경상도식으로 "굉장하다, 굉장해"를 연발했는데 그 이후로는 답사 다닐 때면 그런 지질학 백조가 곁에 없는 것이 항시 아쉽 게 느껴졌다. 한국 정원의 백미, 서석지 입암에서 청기로 가는 길을 따라 얼마를 가다 보면 반변천상에 불쑥 솟은 선바위, 입암 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연당리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여기는 동래 정씨 동성 마을로 진흙 돌담이 집집마다 둘러쳐 있는 예스러운 동네이며, 그 한쪽 켠에 서석지가 자 리잡고 있다. 서석지는 이 마을 입향조인 석문 정영방(1577~1650)이 조성한 정원으로 조선시대 민가 의 연당정원으로 으뜸이라 할 만한 명작이다. 정영방은 예천에서 태어나 정경세에게 학문 을 배워 퇴계학통을 이어받았는데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광해군 때는 낙향하여 청기천변 자양산 기슭에 살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예 이곳에 은둔하고자 자리잡고 1636년경엔 서석지를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곳으로 오게 된 계기 는 처가가 무실의 전주 류씨인지라 거기에 출입하면서 보아둔 자리라는 것이다. 서석지는 서재인 주일재와 정자인 경재를 기역자로 배치하고 두 건물 앞마당에 해당하 는 공간을 큰 연못으로 축조한 정원이다. 그런데 이 정원의 설립과정을 보면 그 순서가 반대여서 정영방은 19개의 서석과 서석 사이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연못에 물을 댈 요량 으로 사방에 호안석축을 4자에서 5자 반으로 쌓아올려 방형 연당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작은 서쟁니 주일재와 단칸 마루인 서하헌을 소담하게 앉힌 대신, 북쪽으로는 남향하여 6 칸 대청에 넓은 툇마루를 붙인 경재를 지었다. 그리하여 주인의 사적인 공간은 아주 작 고, 손님 맞고 글 가르치는 공적인 공간은 딜럭스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극명한 대비를 통해 서재느 sejdnr 겸허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데 봉화 닭실의 권충재에도 이와 똑같은 정서가 나타나 있음을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조선 건축의 한 정신 이었던 것이다. 서석지에는 건축적 기교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우선 연못이 그냥 사각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일재 앞에 사우단을 내어 쌓아서 여기에 송, 죽, 매, 국을 심었다. 그래서 주일 재 툇마루에 앉으면 이 사우단이 앞의 시야를 막아주면서 공간을 아늑히 감싸준다. 그리 고 이 사우단으로 인하여 연당의 평면은 요철을 갖게 됐다. 즉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정원의 두 번째 기교는 대문을 동향으로 앉힌 것이 아니라 동향으 로 끄러들여 남향으로 냄으로써 진입공간이 한번 꺽인 다음 연당에 들어오게 한 점이다. 이런 대문 설정으로 서석지는 안팎으로 감칠맛나는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 대문이 비켜간 모서리 공간에 큰 은행나무를 심어서 모든 조원의 기준을 여기에 두었다. 그리고 연못의 연꽃과 울밑의 국화가 정원 원예의 대종을 이룬다. 이와같이 자연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 인공을 가하고 또 그렇게 가한 인공을 자연스럽 게 풀어주면서 조화를 꾀한 정원 설계는 우리나라 민간정원의 백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천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특히 서석지는 연당리의 고풍스러운 마을 분위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대부분의 다른 동성마을은 내앞처럼 멋진 고건축이 있어도 마을이 받쳐주지 못하거나, 주실처럼 마을 분 위기는 있지만 명작의 건축이 없어 아쉬운데 서석지는 연당리의 흙담 고샅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간석기반 답사 때 서석지에 다다르니 동네 어른이 나오셔서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시고는 동네를 함께 돌면서 마을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이 동네 부자가 누 구이고 누가 관직에 올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안동과 마찬가지로 공부 많이 했다는 것 이 큰 자랑인데 박사가 4명이고 일류대 출신이 8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집집마 다 가리키면서 이 집은 천안의 무슨 대학 교수 집이고 이 집은 무슨 연구소 연구원 집이 고 하며 설명을 하시낟. 그러다 끝의 집에 와서는 뭔가 머뭇거리더니 한 말씀하신다. "이 집 주인은 박사는 아니어도 책을 지은 저자라." "무슨 책인가요?" "'단기완성 새 국사'라는 학습서라." 일원의 문향, 주실마을 서석지에서 나와 영양읍으로 달리는 길은 더욱 맑고 맑은 반변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지나다 보면 '오일도 시비'도 있고, '문향영양'이라고 쓴 빗돌도 보이며, 또 들판 한가운데로는 현2동 삼층석탑이 보인다. 그 모두가 영양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인데 막상 영양 읍내는 크게 볼 것이 없다. 영양읍을 지나 봉화 쪽으로 어느만큼 가다 보면 경상도 산골이 아니라 강원도 산골처 럼 경사가 가파르고 산이 가까이 다가서는데 일월면이라는 멋진 이름이 나와, '아! 여기가 일월산이 있는 곳인가 보다' 생각하게 되고 또 어느만큼 가다 보면 갑자기 차창 오른쪽으 로 산자락 아래 번듯한 반촌이 나와 답사객을 놀라게 한다. 여기가 시인 조지훈의 고향으 로 알려진 주곡, 속칭 주실마을로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주실마을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마을에서 인물 많이 나오기로 여기만한 곳이 없을 정도 이다. 동자 돌림만 해도 고 조동탁(지훈, 고려대), 조동걸(국민대 역사학), 조동일(서울대 국문학), 조동원(성균관대 역사학), 조동택(경북대 미생물학), 조동욱(대구대), 조동성(인하 대 공학)등을 꼽으며, 조성환(안동공업전문대학장, 기계공학), 조성하(고려대 경제학), 조석 연(평택대 행정학), 조석경(평택대 컴퓨터공학), 조석준(경남대 국문학), 조형석(과기대 산 업공학), 등을 하염없이 손꼽으며, 내가 근무하는 영남대학교에만도 정년하셨지만 조봉기 (물리학), 고 조대봉(교육학), 조화석(기계공학)등이 이곳 주실 출신이다. 몇해 전 공군참모총장으로 헬기 사고로 타계한 조근해 대장도 여기 출신이고, 고려병원 원장을 지낸 조운해 박사도 여기 출신이니 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인물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이 캄캄한 산골, 고추밖에 알려진 것이 없는 영양 산골에 이런 문향이 있다 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영양 주곡의 입향조는 조전이다. 본래 한양에 뿌리를 둔 이 집안은 조광조 파동이 일어 나는 기묘사와 때부터 이리저리 피해다녔는데 조전이 이곳에 들어온 것이 1630년 무렵이 라고 하며 그분의 증손 되는 조덕순, 조덕린이 모두 대과에 오름으로써 명문의 기틀을 다 졌다. 그러나 조덕린이 영조 때 사약을 받아 비운에 세상을 떠나고 역적마을이 된 주곡에 서는 출세길이 막혀 자연히 학문에만 힘을 쓰는 문흥이 일어났다. 그래서 조덕린은 가문 의 추앙을 받아 옥천 종택에서 불천위로 모신다. 이런 주곡마을이 역사의 흐름 속에 용틀임하는 것은 1899년 단발령을 자발적으로 먼저 받아들인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조병희가 독립협회 무렵 서울의 개화바람을 보면서 고향 의 청년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신문명을 접하게 하고 개화시켰는데 이 개화 청년들의 다음 세대들은 토오꾜오, 빼이징,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런 개화운동의 쎈터가 마을 의 월록서당이었다. 1910년대에 종손의 자부를 재가시켰으니 그 개화바람을 알 만한데, 마을 한복판에 교회가 앉은 것도 그런 분위기를 말해준다. 이 무렵 조지훈의 증조부 되는 조승기는 의병장을 하였으니 주실에서 구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것인데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신간회 토오꾜오지회장을 맡아 1928년에 는 신간회운동의 일환으로 영양주곡을 양력과세로 바꾸는 파격적인 단안을 내린다. 그런 가 하면 주실은 마을 전체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러니 이 마을의 전통과 기개와 문흥 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또 1930년대에 주곡에는 '꽃탑회'라는 문화패가 있어서 회지도 만 들고 하여 나르 대로 활동하였는데 조지훈의 형인 조동진이 그중 인물이었고 주실에 처 가가 있는 오일도가 여기에 합세했다. 그러나 조동진은 스무살에 이빨 뽑고 술 먹는 바람 에 세상을 떠나고 옹일도는 그의 유작을 모아 '세림시집'을 냈으며 조동진의 시는 결국 아우 조지훈에 의해 계승되었다. 내가 남의 동네 이력을 이렇게 소상히 맑히는 뜻은 아무 리 궁벽진 곳이어도 전통과 의지와 열정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시범을 여기서 현실감있게 느끼기 때문이다. 한번은 연줄을 대서 영양군의회 부의장이신 조동시 어른의 안재로 주실마을을 두루 살 폈는데 마을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일부러 감주를 담가 40여 명을 대접하는 것을 보고 역 시 양반의 상징은 접빈객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주실 마을을 나오면서 아무리 양택이 밝기로서니 이렇게 많은 인재가 나올 수 있는가 싶어 신기해하면서 동네 어른과 인사를 하고 또 동네 얘기를 들으려고 동네 칭찬을 먼저 해올리니 이 어른이 기분 좋으면서도 겸양의 뜻으로 부끄러워하며 하는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 한 동네에서 이렇게 인재 많이 나오기는 전국에서 최고 아닐까요?" "뭐, 전국에서 제일이랄 거야 있겠소마는, 좀 마안치." "지례가 전국에서 최고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주실이 더 많은걸요?" "암, 지례보다야 많겠지, 지례야 맻 되나." 그러나 주실마을은 유감스럽게도 6.25때 오래된 집들은 불타고 지금은 몇채만 남아 옛 마을의 명색만 유지하고 있고, 대부분의 집들이 안동 양반들처럼 죽으나 사나 끼고 앉아 갈고 닦는 정성과 애착을 보이지 않아 때로는 황폐하고 때로는 스산해 보였다. 인재들이 다 잘되어 서울로 가니까 마을은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들을 주실이지 볼 주실이 아니다'라는 말도 나왔고 멀리서 보는 것이 아름다울 뿐 자세히 건물 을 살필 동네는 못 되었다. 그 대신 마을 어귀 '쑤' 솔밭에는 건축가인 조지훈의 조카가 설계한 견실한 구조미의 조지훈 시비가 있어서 답사객이 내려 이곳 주실의 저력을 새기 며 쉬어가게 한다. 조지훈 시비에는 그의 제자인 고려대 홍일식 총장이 쓴 비문과 그의 명작 '빛을 찾아가는 길'이 새겨 있다. ...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 봉화로 가는 길 반변천을 따라 일월산 턱밑까지 찾아온 나의 북부 경북 답사길은 이제 꿈의 바을 같은 봉화로 향하고 있다. 주실에서 가곡을 지나면 곧 청기면 산골을 지나게 된다. 청기는 70 년대 유신 말기의 미스테리 같은 오원춘사건의 오원춘씨 고향이다. 지금도 그분은 이곳 청기에서 농투성이로 살고 있다지만 독재권력이 그에게 준 상처를 어떻게 삭여 가셨는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죄스러운 마음이 일어날 때도 있다. 청기면은 지나면 봉화군 재산면, 재산면 지나면 명호면, 차는 사뭇 청향산 동북쪽 자락 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첩첩산중은 산중이로되 험하다는 생각도, 외지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편안한 정취가 살아나고 가을이면 경상도 말로 '천지 빛깔이 고추'인지라 그것이 볼 거리라면 큰 볼거리다. 그리고 명호에 다가서 우리는 다시 낙동강과 만나게 된다. 청향산 서쪽 자락을 타고 흐르면서 도산서원 앞을 지나 안동호로 흘러드는 낙동강 상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봉화군 춘양과 봉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지금 나의 답사기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나는 지금 봉화를 쓸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 도 아니고 지면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봉화를 첩첩산중의 태백산 아래 땅을 자연산 송이, 춘양의 춘양목, 토종 대추와 복수박 정도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는 사름은 우리의 양반문화 전통이 안동 못지않게 강하게 남아 있음을 먼저 말하는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고장이다. 봉화에 가면 봉성면의 향교, 법전의 진주 강씨 마을, 오록의 풍산 김씨 마을, 닭실의 안동 권씨 마을, 해저의 의성 김씨 마을, 황전의 안동 김씨 마을, 북지리의 봉화 금씨 마을이 우리가 안동 의 옛마을 답사하듯 두루 살필 명소들이다. 봉화엔 불천위 종가가 일곱이나 되며 전국에 서 한글 마을 이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전통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봉화 의 대부분 땅이 옛날엔 안동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안동에 비할 때 봉화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외지인의 상처를 받지 않고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하고 있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민속촌이다. 그래서 봉화를 진짜 사 랑하는 사람은 봉화의 전통마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나 같은 이의 답사기 를 오히려 두려워하고, 미워한다. 실제로 나는 그런 이유로 혼자서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잘도 둘러봤지만 답사객을 데리고 간 곳은 닭실 권충재와 석천정사, 그리고 북지리의 마 애불 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봉화 답사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는 봉화로 가는 길을 버리고 낙동강을 따라 다시 청량산으로 향하여 안 동으로 들어간다. 옛날엔 퇴계가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웠다고 하더니 나는 지 금 차라리 그 청량산으로 갈지언정 봉화엔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시심이 모자라 이 마음을 노래하지 못하노니 퇴계가 청량산을 사랑하여 부른 노래에 나의 마음을 얹어 본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부가 알까 하노라. 익산 미륵사터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 호남의 첫 마을 여산 남이 보기엔 어지간히 할 일이 없던 날이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공식적인 답사가 50회를 맞게 되니 나름대로 감회가 없지 않아 그간 나와 함께 답사회를 꾸려온 김효형 총무와 좋은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다가 재미삼아 그동안 우리가 가장 많이 간 곳 이 어딘가를 헤아려보았다. 그 결과 지역으로는 경주가 가장 많았지만 유물로는 익산 미륵사터가 압도적으로 많았 다. 그러나 미륵사터는 그 자체가 답사의 목표가 된 적은 한 번밖에 없었고 대신 우리의 호남행에는 거의 빠짐없이 여기를 들렀던 것이다. 서울에서 아침에 떠날 대면 여기에서 점심도시락을 먹기 안성맞춤이고, 휴게소에서 일없이 쉬어 가느니 하나라도 더 보자고 미 륵사터를 들러 갔고, 일정에 없으면서도 하행길 아니면 상행길에 답사의 보너스로 여기를 집어넣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 또 보아도 물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곳이 답사의 명소이긴 명소인가 보다. 그러나 미륵사터를 스치듯 들러 가는 곳으로만 삼았다는 것은 그 존대한 유적에게 참으 로 큰 실례를 범한 것이었다. 익산 미륵사터는 결코 그럴 곳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이 서린 곳이며, 한국미술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인 석탑의 시원양식이 지금도 그곳 폐허속에 금자탑보다도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익산 미륵사처를 찾아가는 답사의 첫 관문은 여산이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지만 호남고속도로에 있는 첫 휴게소가 생기기 전에 여산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마도 별 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산은 휴게소로 인하여 그 모체인 익산보다 더 유명해 졌다. 그런데 이 또한 공교로운 일이어서 여산은 조선시대에 역원이었던 곳으로 전라도 땅으 로 들어가는 첫 마을이었으니 여산휴게소는 여산 땅의 팔자소과으로 생긴 것인지도 모르 겠다. 판소리 '춘향가'중에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땅으로 출두하면서 역졸들에 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전라도 초읍 여산에 가서 기다려라!"했다. 거기는 지금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주막거리이다. 나는 여산휴게소에 올 때마다 작은 소망 하나를 말하곤 한다. 그것은 휴게소 안쪽 원수 리 참실골에는 가람 이병기(1891~1968)선생의 생가가 있는바, 여기에 가람의 시비를 하나 세웠으면 하는 희망이다. 가람 선생은 여기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익혀 한성사범학교를 마친 뒤 여산 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하여 해방 후 서울대학교까지 줄곧 교편을 잡으시며 국문학 연구에 전념하신 선비로 시조의 전통을 혁신하면서 우리말을 아름답게 갈고 닦는데 누구 보다 큰 공을 세웠다. 가람 선생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같은 당대의 문사를 배출한 선 생으로 이름높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이 당신의 문장이고 시조였다. 그런 중 내가 개인적 으로 가람의 글중에서 가장 감동 받은 것은 당신의 말년 일기이다. 가람 선생은 1957년, 66세때 뇌일혈로 쓰러진 것으로 연보에 나와 있다. 가람 선생은 늘 일기를 썼는데, 세상 을 떠나기 이태 전인 1966년의 일기는 처연하기 그지없다. 1966년 1월1일 하후 1시 40분, 대변을 보았다. 종이 맑다. 1966년 1월 28일 밤에 눈이 오다. 눈이 남지어 오다. 하후에도 오고 또 오다. 종희는 8시 여산을 갔다. 11시 20분 대변을 보았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일기 쓰는 법을 배울 때면 선생님께 누누이 듣는 주의사항이 밥먹고 똥 싼 것 같은 일상의 되풀이는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람의 말년 일기 는 오직 밥 먹고 대변 본 얘기로만 끝난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타계하기 직전 가 람 선생에게는 그것이 일상사가 아니라 하루일과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일기는 더욱 눈물겨운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세울 가람의 시비에는 어떤 시가 좋을까? 익산 미륵사터, 백제의 옛 자 취를 생각한다면 당신이 '대성암' 이라는 제목으로 백제의 향기를 읊은 시조가 제격일 것 같다.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서리 발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할 줄 모르겠다. ...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 볕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 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 산 머리에 비가 몰아 들온다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 금마 여산휴게소에서 불과 6km 못미처 익산 인터체인지가 있는데 여기서 익산쪽으로 꺾어 들면 비로소 우리는 정겨운 전라도 땅으로 들어선 맛을 만끽하게 된다. 구릉을 넘어가자 면 언덕길 양쪽으로 밭고랑마다 검붉은 황토의 흙가슴이 뜨거운 태양을 마다 않고 남김 없이 받아들인다. 타관땅 사람들은 저 진흙 같은 황토밭이 마냥 이채롭게 느껴지겠지만 감자고 고추고 무엇이든 길러내는 황토의 싱그런 생산력은 호남의 향토적 서정으로 살아 있다. 오늘날에 는 인삼 같은 고소득작물이 황토를 차지하고 말았지만 호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 은 저 붉은 땅에서 캐내던 육질 좋고, 수분 많고, 당도 높은 빠알간 물고구마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을 달리면 차는 반듯한 네거리 신호등 앞에 서게 된다. 곧장 가면 익산, 왼쪽은 왕궁리, 오른쪽은 금마 읍내와 미륵사지로 빠지는 길이 된다. 금마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유적이 밀집해 잇다. 미륵사지, 왕궁평 오층석탑, 고도리 석인상, 쌍릉, 기준 산성, 사자사터, 연동리 석불좌상, 오금산성, 태봉사 삼존석불... 익산군 시절에 발간한 향 토지 '미륵산의 정기'를 보면 모두 82군데의 유적지 해설이 들어 있을 정도이다. 더욱이 각 유물, 유적들이 차로 10분, 걸어서 30분 안짝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경주, 부여 같은 왕 도가 아니고는 드문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금마는 몇차례 왕도에 준하는 영광의 도시로 역사 속에서 명멸하였다. 마한의 월지국, 백제 무왕의 별궁, 후백제 견훨의 왕궁, 고구려 유민인 안승의 보덕국 등 어느 하나 오련 경륜을 펴지 못했으나 금마 땅 고도리 왕궁평 들판과 미륵산에는 미완의 왕도가 남긴 유적들이 폐허 속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이다. 금마는 마한의 중심지였다. 삼한시대에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큰 나라는 만여 호요, 작은 나라는 수천 호로 총 10여만 호인데, 총수인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렸다고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가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마한의 성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BC 1 08년 고조선이 위만에게 망하자 기자의 41대손으로 기자조산의 마지막 왕이 된 준왕, 즉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을 쳐 이기고 한왕이 되었다고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러나 '삼국유사'는 기준이 세운 나라가 바로 마한이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한 고증은 아 직도 역사학의 숙제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에서 "마한은 지금의 익산군으로, 금마는 마한 전체 총왕의 도읍이다"라고 말한바, 금마가 마한의 중심지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한은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이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북쪽에서 백제 가 강성하게 일어나면서 온조왕 26년(AD 8년)에 마한을 함락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래서 금마 땅에는 마한보다 백제의 자취가 더 진하게 남게 되었다. 백제 무왕의 탄생 백제왕조의 치하에서 금마는 김제평야의 경제적 부와 금강의 수로 때문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을 것이 분명하고, 수도가 점점 남하하여 성왕이 부여로 천도한(588) 이후는 더욱 비중이 커졌음은 기록이 없어도 알 만하다. 그러다가 금마가 다시 역사상 부상하는 것은 무왕의 탄생부터이다.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의 탄생과 등극 전설은 참으로 기묘하다. 이 전설을 어디까지 맏어야 좋을지 모르지만 그저 전설일 뿐이라고 무시해버리기에는 암시적인 내용이 너무 많다. 더욱이 미륵사 창건설화가 여기에서 나올 뿐 아니라 '삼국유사'에서 증언한 전설적 인 가람배치가 실제로 있던 일이었음이 발굴로 확이됨으로써 더욱 신비로울 따름이다.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조를 보면 이렇게 시작된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부여) 남쪽 못가에 집을 ㅇ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못의 용과 성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 동이다. 그는 재기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또 그는 마를 캐어 팔아서 생 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서동이라 불렀다. 서동은 또 마동이라고도 했고 그냥 맛동이라고도 했단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는 그 못이 익산 오금산 마룡지라고 했다. 그러면 용으로 묘사된 서동의 아비는 누구일 까? 일연스님은 글 끝에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주석을 붙여놓았 다. 그렇다면 법왕이 왕자시절에 미륵산에 드나들면서 서동모와 정을 통하여 낳은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있는 해석이 된다. '삼국유사'의 기사는 또 이렇게 계속된다. (서동이 성장한 뒤 신라)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 리르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갖고 동네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하나 짓고 아이들을 꼬여 무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는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 하였다. 동요가 서라벌에 퍼 져 대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강력히 주장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가게 하 였다. 그래서 집에서 쫓겨난 선화공주는 서동을 만나 정을 통해 부부가 되었고, 공주가 떠날 때 어머니에게 황금 한 말을 받은 것을 보여주자 서동이 마를 캘 때 그런 황금을 많이 보았던 것이 기억났고, 이를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 신통력을 빌려 서라벌의 장인에게 보내니 진평황이 서동을 좋아하여 편지로 자주 안부를 물은 것, 그리하여 이후 서동이 인 심을 얻어 왕위에 오른 것 등등 그 긴긴 내용은 여기서 그냥 넘어가지만 거기에 서린 숨 은 뜻만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백제와 신라 양국이 전쟁을 치르는 적대국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냐, 과부 의 아들이 어찌 일국의 공주를 넘보느냐며 이 전설을 황당한 얘기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 나 당시 양국의 관계란 근대의 민족국가 같은 폐쇄성이 아니라 마치 유럽 근세에 왕통이 끊기면 이웃나라에서 왕을 모셔다 앉히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와 유사한 분위기로 이해 해야 옳다. 그가 법왕의 서얼이라는 것도 조선시대의 서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귀인의 소출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며,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어 스스로 귀인임을 내세운 것은 그 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해석될 사항이고, 끝내는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탁월한 정권창출 능력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튼 무왕은 금마에서 태어나 금마에서 자라고 금마를 배경으로 왕이 됐으며, 금마는 백제의 지정학상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됐으니 그것은 조선왕조 정조대왕 시절 수원이 갖 는 위치와 비슷한 것이었다. 무왕의 미륵사 창건 서동은 무왕이 된 다음 자신의 본거지인 금마로 천도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천도까 지 한 것은 아닌 것 같고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 익산군조에 "백제 때 금마지는 무 왕 때 축성하고 이곳에 별도를 두었으니 지금의 금마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 있 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별궁은 고도리 왕궁평으로 추정된다. 정조대왕이 노론세력을 견 제하기 위해 수원천도를 구상하고 수원성을 쌓았듯이, 무왕은 부여의 토착세력을 꺾을 요 량으로 금마천도를 생각하였고 그 전초작업으로 탄생한 것이 왕궁리의 별궁과 용화산 미 륵사였다. 이런 구상 때문에 무왕은 자주 금마를 찾았고 그러던 어느 날 왕이 되기 전에 큰 도움 을 얻었던 용화산(일명 미륵사)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뵙다가 미륵사터를 메우게 된 내력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건히 예를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되 나의 소원이 이곳에 큰 절을 이룩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을 메울 방책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어 미 륵삼존과 회전(법당), 탑, 낭무(화랑)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를 미륵사라하니 진평왕 이 백공을 보내서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그 절이 있다. 미륵사지 발굴 결과 이 얘기는 사실로 증명됐다. 미륵사가 늪지에 세워져 서쪽 금당은 경주 감은사터에서 본 바와 같이 높은 주춧돌로 받쳐 있고, 법당(회전), 탑, 회랑(낭무)이 각각 세 곳에 세워져 있음을 알게 됐다. 미륵사 가람배치의 슬기 미륵사의 3탑 3금당 3회랑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에 다른 예가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본 래 백제의 사찰은 1탑 1금당 식이라고 해서 남북 일직선 축선상에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으로 이어지고 중문과 강당을 미음자로 잇는 회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 다. 이런 가람배치는 모두 일곱가지 집으로 구성됐다고 해서 칠당가람이라고 하는 데 부 여의 군수리 폐사지, 정림사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구려의 청암사지, 정릉사지가 1탑 3금당 식으로 탑을 중심으로 디귿자로 돌려지고, 신라 황룡사지가 1탑 3금당 식으로 탑 뒤로 금당 세 채가 나란히 늘어서는 것과는 달리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명쾌한 구도 인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미륵사가 3탑 3금당으로 갑자기 화려해진 것은 무슨 연유일까? 미륵사는 말이 3탑 3금당이지 실제로는 1탑 1금당의 기본축을 포기하거나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존중했던 간결성의 미학은 그대로 살아 잇다. 다만 여기에 동서로 별원 을 붙여 규모를 확대한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럴 때 날개를 달았다는 표현을 쓴다. 그렇 게 함으로써 기본축을 존중하면서 장중하고 화려한 멋을 더할 수 잇게 된 것이다. 이 점 은 오늘날에도 깊이 생각해볼 미학적 성과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위엄있는 건물, 화려한 건물을 원할 수 있다. 그러나 딱딱하지 않게, 번잡스럽지 않게 그 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 대한 최상의 묘책은 기본축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 실을 지금 미륵사 마스터플랜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 서도 어울린다. 그 다음, 별원은 본원과 차별성을 두어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규모만 작게 해서 차별성을 부여하는 것은 초급자의 발상이다. 백제의 거장들은 이 문제에서 석탑을 고안하 게 된 것이다. 중앙 본원에는 높이 60m는 족히 될 거대한 목조건축의 탑을 세우고, 동서 의 별원에는 그 목조건축을 충실하게 모방한 석탑을 세웠다. 규모를 작게 하는 대신 돌로 쌓은 것이다. 따라서 미륵사지의 석탑은 수만 장의 돌로 짜맞춘 목탑형식이었다. 이것이 미륵사 가람배치의 특징이자 석탑 탄생의 기원이다. 미륵사의 위용과 몰락 백제 멸망 뒤 미륵사의 역사에 대하여는 단편적인 기록 몇몇이 종잡을 수없이 전해지 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조를 보면 "금마군 미륵사에 지진(또는 뇌진)이 있었 다"고 하였는데 조선왕조 영조 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성덕왕 29년(730) 6월에 뇌 진이 쳐서 서쪽이 반쯤 무너졌는데 그 뒤 누차 무너졌으나 더 이상 붕괴되지 않고 중간 에 옛 모습대로 고쳐놓았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미륵사 발굴 성과를 보건대 고려청자 도편이 무수히 수습되고 있는 것을 보아 고려시대에는 건재하였고, 조선 성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미륵사의 석탑을 언급하고 있으나 절 자체에 대한 기록은 없으니 조선 초에 이 유지하기 힘든 대 찰은 폐사가 되고 만 것 같다. 이 황량한 폐사지의 모습을 증언한 글로는 조선왕조 시절 인조 때 중추부사를 지낸 이 고장출신의 문인 소동명(1590~1673)이 지은 '미륵사를 지나 며'가 단연코 압권이다. 옛날의 크나큰 절 이제는 황폐했네 외로이 피어난 꽃 가련하게 보이도다 기준왕 남하하여 즐겨 놀던 옛터건만 석양에 방초만 무성하구나 옛일이 감회 깊어 가던 걸음 멈추고 서러워 우는 두견 쫓아버렸네 당간지주 망주인 양 헛되이 솟아 있고 석양의 구름 아래 저물음도 잊었어라 무너진 석탑의 아름다움 미륵사가 폐사지가 되어 목조건축은 모두 불타고 무너져버리게 되었을 때도 석탑만은 건재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에 의하면 동탑 서탑이 똑같은 구조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탑은 완전히 도괴디어 낱낱 석탑 부재들이 깡그리 없어지고, 서탑은 6층까지만 간신히 남아 그 형상의 뼈대만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일제시대 초 서탑의 서쪽이 크게 무너져내리자 일제 총독부의 문화재 조사를 전담했던 세끼노 타다스가 지금 보이는 바와같이 시멘트로 짓이겨놓고는 보존이 라고 했다. 그것은 토함산 석불사의 석굴을 보수한다고 바른 것과 똑같은 무지막지한 시 멘트이다. 전체의 반 이상이 무너져버렸지만 서탑의 동쪽면 6층까지는 원상이 온전하여 백제 건 축의 구조적 특징과 세련미를 우리는 실수 없이 읽을 수 있다. 이 미륵사탑이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임을 밝혀낸 분은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우현 선생은 미륵석탑이 부여 정림사 오층탑으로 정리되고 이것이 신라의 의성 탑리 오층석탑 으로 전파되어 통일신라의 감은사탑과 불국사의 석가탑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치밀한 양 식 분석으로 논증하였다. 그것은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양식사로서 미술사'의 길을 열어준 모범사례로 그의 '조선탑파 연구'는 영원한 우리의 고전이 되엇다. 미륵사탑은 석탑이지만 목조건축을 충실히 반영한 석탑이므로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을 여기에 빠짐없이 구현하였다. 압도하는 스케일의 중량감, 적당한 비례의 배흘림기둥, 정연한 체감률로 안정감을 주는 중층구조... 미륵사의 석탑 앞에 서면 장중한 축조물이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해낸 백제인들의 우아한 세련미에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을 밟는 답사에서 우리에게 가장 뜨거운 미적 감동을 부여하는 대상이다. 미륵사탑의 세부적인 아름다움의 백미는 추녀의 묘사에 있다. 거의 직선으로 그어가던 반듯한 처마가 추녀에 이르러서는 살포시 반전하는 그 맵시가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어 떻게 저런 선맛과 형태미가 가능했을까를 나는 여러번 생각해보았다. 요즈음 건축가 중에 서 전통을 계승한답시고 어거지로 한옥의 지붕선을 이용한 라인을 보면 추녀 끝을 슬쩍 올리긴 올렸는데 그것이 '살포시 반전하는 맵시'가 아니라 '벌렁 뒤집어지는구나'하는 불 안감만 감도는데 저 백제인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노하우는 추녀를 반전시키되 그냥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두께를 주면서 반전시킨 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위로 올라가려는 동세가 위에서 누르는 무게에 눌려 긴장 감 있고 안정감 있는 가운데 가벼운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는 곱고 멋지고 귀여운 미 적 가치로 전환된 것이다. 미륵사탑 앞에는 또 이 명작에 걸맞은 에필로스 같기도 하고 특별 보너스같이 망외의 기쁨을 주는 유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석탑 한쪽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석인상이다. 미륵사탑 네 귀퉁이에는 석인상이 모두 네 분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한 분은 없어졌고 두 분은 마모됐고 오직 서남쪽 모퉁이 석인상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나마도 얼굴의 형 체는 비바람 속에 거의 다 잃었지만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자세만은 역력히 보인다. 영낙 없이 제주도 하루방이나 전라도 돌장승 같은 포즈인데 아닌게 아니라 이 석인상은 그런 장승의 원조이다. 훗날 경주 분황사나 다보탑에서 보이듯 석탑의 둘레에는 네 마리 사자 를 모시는 것이 불교미술의 원리인데 불교가 아직 토속신앙을 흡수해가던 단계에서는 민 간의 수호신앙을 그렇게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통 흡합현상이라고 한다. 그러 니까 저 석인상은 우리의 토종 수호신이면서도 불탑을 지키게 되었는데 그 나이는 대략 1400살이 된다. 허망과 허상의 복원탑 그러나 1993년 봄, 미륵사터에 비극의 막이 올랐다. 미륵사지 발굴 조사작업이 '동탑 복 원작업'으로 이어져 5년간의 대역사 끝에 동쪽 석탑이 완공된 것이다. 총예산이 몇십억원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복원된 거대한 동탑은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애초에 복원이라는 발상 지체부터 잘못된 것이다. 한동안 미륵사지 석탑은 7층으로 추정되었었다. 그러다 컴퓨터 복원으로 여러 시안을 제시한 결과 9층으로 결론을 보게 되었고 여기까지는 아무 절못도 이상도 없었다. 뽀얀 볼빛은 시체보다 더 창백한 빛까로 변했고, 반듯한 느낌의 예각은 싸늘한 날카로움으로 변했으며, 거대한 양괴감은 둔중한 느낌으로 변했고, 정확한 비례감은 고지식한 면비례로 변했다. 컴퓨터를 동원한 과학적인 복원인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복원된 탑을 원상과 비교 해보면 형태상의 잘못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느낌상의 차이는 현저하게 드러난다. 나는 미륵사탑의 아름다움과 복원된 탑의 미움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를 곰곰이 따 져보았다. 그것은 실제로 돌이 죽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복원된 탑은 자연석이 아 니라 인조석으로 만든 탑처럼 보인다. 돌을 정으로 쪼은 것과 기계로 깎은 것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낱낱 부재를 이어맞춘다는 것은 돌 하나하나의 성격이 살아 있는 연결이 어야 하는데 복원된 것은 마치 긴 돌이 없어서 그랬다는 듯이 낱장 낱장의 성석을 죽여 버리니까 이같이 박제된 시체처럼 된 것이다. 그것은 기계만 과신하고 손의 묘를 가볍게 생각한 탓이다 요즘 유행하는 무덤 앞의 석물들이 옛날 것과 달리 멋도 없고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도 정으로 조은 것이 아니라 기계로 깎은 것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형식상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정신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는 공사 계획과 견적에 따라 석조물을 복원한다는 생각에서 한것임에 반하여 백제 사람은 절대자를 모신다는 종교 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사실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리 라. 그래도 이 미륵사의 20세기 석탑이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은 해 넘어간 어둔녘 희끄무레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다, 하기야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여인도 다 괜찮아 보이 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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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양아치 옮김
문화유산답사기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