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한국의 풍류인10傑과 주도유단(酒道有段) / 아버지 조지훈- 삶과 문학과 정신 / [3장] 아버지의 풍류(風流) 와 멋 / 2017/07/28/08:00 조광렬

작성자曉泉|작성시간17.07.27|조회수1,125 목록 댓글 2


[10회] 아버지 조지훈의 - 삶과 문학과 정신 / 조광렬

*[3장]아버지의 풍류(風流)와 멋 

 

# 한국의 풍류인10傑과 주도유단(酒道有段)

 

비 같은 넥타이를 매고 막걸리를 마시는 것은 멋이다

몬지밖에 남은 것이 없는 주머니 속에서 의리(義理)를 얘기하는 것은 멋이다.

낯선 저자를 떠다니며 이름도 모를 약()을 파는 사람들. 낡은 깽깽이와 하늘이 무거운 물구나무 --       끝내 고향(故鄕)은 버리는 게 멋이다

썩은 멋에 사는 세상에 새우젓 며루치젓만 먹는 것이 멋이다

산에 가도 너를 생각한다. 바다에 가도 너를 생각한다. 시사일비(時事一非) 왜 이렇게 쓸쓸하냐.

산에도 가지 말고 바다에도 가지 말고 슬기롭지도 말고 어리고 못나게 돌아앉아 흐렁흐렁 막걸리나 마시     면서 살꺼나.

하이얀 탈지면(脫脂綿)에 싸문 서릿발 --죄고만 짜개칼로 손톱 발톱이나 깎고 피 한방울만 내며는 멋       이.

원수가 많아서 원수가 없는 날에는 원죄(原罪)는 내가 지고 죽는 것이 멋이다.

아니 채약(採藥)을 해 먹고라도 사는게 멋이다.

                                        

                                                              <풍류원죄(風流原罪)>

 

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습작으로 써 놓으신 시이다.

 

아버지는 세상에 알려진 멋쟁이셨을 뿐 아니라 한국 풍류사(風流史)에 손꼽히는 풍류인이셨다. 몇 년 전 뉴욕 라디오서울(14800AM)의 언론인 박무일의 고향소식( 1660AM; 한국은 지금) 이라는 프로에서 지식인들이 뽑은 한국의 풍류인 10() 이란 신문기사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몇년 전 어느 연말에 쓴 나의 졸문 한편이 생각나 여기에 소개한다.


                                          

송년회다 뭐다하며 술자리가 잦아지는 12월, '바른 음주문화'와 '주도(酒道)'가 화두가 되고있는 연말이다. 매년 이맘때면, <한국의 주선(酒仙) 10걸(傑)>이란 기사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수필이 SNS나 각종 미디어매체상에 자주 거론되고 주석에서 많이 회자(膾炙)되곤 한다. 그럴때마다 나의 어린시절, 서울, 성북동 사랑방에서 아버지가 문우나 제자들과 술을 드시며 흥취를 즐기시던 훈훈하고 멋진 장면이 엊그제 일처럼 펼쳐지며 문득 아버지가 그리워지고는 한다.


1998년 이맘때쯤이었던 것같다. 뉴욕 라디오(현재 1660AM: 언론인 '박무일의 '한국은 지금'이라는 프로) 방송을 듣던중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의 주선(酒仙) 10걸(傑)>기사의 소개가 전파를타고 흘러나왔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그 10걸()’가운데 나의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10걸 중 당당히 3위에 올라있는 사실이었다.


결과는 대강 이랬다. 우선 추천 기준이되는 주선의 자격은 한국의 古今에 있어 두주불사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한 당대의 호걸에 해당하는 인물로서 그 고상한 품위와 더불어 낙주종생(樂酒終生)의 생애를 산 사람에 한했는데 여기 해당하는 인물로 추천된 사람은 모두 140명이었다고 한다. 


이중 10걸 순위에 들어있는 인물을 순위대로 보면 1위에 황진이, 2위에 변영노, 3위에 조지훈, 4위에 김삿갓, 5위에 김시습, 6위 임제,7위 김동리, 8위 임꺽정, 9위 대원군공동 10위는 원효대사연산군,박종화이었다(인터넷으로 <한국의 주선(또는 주당) 10걸(傑)>을 검색하면 내용을 좀더 볼 수 있기에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나는 그 선정과정과 선정된 다른 9걸들의 면면과 선정과정이 궁금해서 어느날 그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추천인들이 모두 몇명이었는지는 모르나 장덕순, 김정옥, 김종길, 이어령, 조경희, 최일남등 현역 교수, 연극인, 소설가, 언론인, 출판인, 문필가등 각계 유명인사들이 포함되어있던 것으로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여류(女流)인 황진이가 많은 남자 주선들을 물리치고 1위에 올라있는 것이 어쩐지 이상해 보이고, 그 당시 생존 인물인 김동리가 끼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원효까지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라면 이규보, 권필, 정철, 권덕규 수준의 인물들이 왜 10위권에 들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아버지가 마흔여덟의 짧은 생애를 사시고 가신지도 어언 4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길지않은 생애동안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셨다. 태어나실때부터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실때의 병명은 '기관지확장'이었으나, 아버지가 평소에 병고로 시달린 것도 술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고, 아버지의 단명또한 결국 술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천 년 동안의 주당 10걸 중, 제 3걸에 뽑히신 아버지의 술 실력과 주력(酒歷)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가 독자들은 궁금하실것이다. 


아버지의 글 <주객(酒客아니라는 성명(聲明) >에서 당신은  "....하기는 술을찾아 어울려다닌 것이 20년이다. 일배주 안마시는날이 없고보니, 하루 한잔씩해도 칠천 삼백잔인데 어디 한잔으로 끝나는 술이있던가. 풋술로 거드럭거릴 때는 막걸리는 大斗 한말도 무난했고, 약주는 선술로 대충 스물 석잔을 쾌음하여 입상한 기록도 있다. 게다가 여행을 좋아해서 도처에 酒名을 얻었고, 글까지 술이들어간 것이 태반이고보니 他稱으로 酒客이 되는것은 容或無怪이라 할 수 있다....  당신 자신의 주력(酒歷)과 주량(酒量)을 단적으로 언급하고 있어 아버지의 음주 실력을 대강 추측해볼 수 있다.


위의 글은 아버지가 36세 때(1956) '신태양지'에 발표한것이다. 그 때 술마시기 시작하신 것이 20년되었다고 하셨으니 아버지의 술은 결국 16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고 그 후 한잔도 안드신 날이 없다고 하셨고 또 풋술이라고 했지만 그정도라면 그 술실력도 대단한 수준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16세로부터 비롯된 아버지의 술은 건강이 나빠져 마침내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22세때는 오대산 월정사에 들어가 불교강원에서 승려들을 가르치던 사찰생활중에도 술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나라잃은 슬픔과 폭음이겹쳐 피를토하고 졸도한 아버지는 급전(急電)을 받고 내려오신 나의 할아버지에 이끌려 서울로 오시게되지만, 몸이 회복되신 후 조선어학회 시절, 경주에서 박목월 시인과의 첫만남, 은거, 해방후의 문화활동으로 이어지며 그 이후 20년가량의 세월을 아버지의 술은 중단없이 계속되었고, 그러는동안 아버지의 건강은 아주 나쁜 상태로 악화되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주 조숙하셨고, 그러기에  짧은 생애임에도 凡人이 70평생에나 할 수 있는 업적을 남기고 가셨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술도 매우 일찍부터 무르익었고, 남들이 평생에 마실 술을 짧은 생애동안 멋있게 마마시고 짧고 굵고 멋지게 사시다가 남들보다 먼저 훌훌히 이승을 떠나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있는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아버지의 수필은 어떤 내용의 글인고 하니 바둑에 급수와 단이 있듯이  "주도(酒道)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 "술을 마신 연륜, 같이 술을 마신 친구, 술을 마신 기회, 술을 마신 동기, 술버릇을 종합해 그 단의 높이를 정한다"며 무릇 열여덟의 계단을 설정하여 단을 매기시며 쓰신 글이다.  그 글에서 아버지는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이 글 또한 인터넷에서 <주도유단>을 검색하면 내용를 볼수있고 웬만한 술꾼이면 이를 알고 있기에 여기서 그 18계단의 설명은 생략한다)


아버지는 스스로 주선이라 자처한바는 없다. 오히려 아버지 자신은 1급인 酒卒로서 學酒의 경지에 있음을 여러번 강조한 바 있으셨다. 당신 자신의 술의 단(段)과 경지를 위의 <주도유단>이란 수필에서 " ...내 비록 학주(學酒)의 소졸이지만 아마추어 주원(酒院)의 사범(師範)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20년 정진에 겨우 초단(初段)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지에 있으니 돌돌(咄咄) 인생사 한도많음이여...."라고 스스로 익살스런 고백을 하고 있기때문이다. 


즉, 주력 20년의 연륜에 주도는 1단이나 건강이 나빠서 몸은 이미 관주(8단, 酒宗)로 즐거워할뿐 마실수없는 사람의 경지에 이른 당신 자신을 한탄하고 있는데 이 글을 쓰실때(1956)의 나이가 36세(장남인 내가 11살)였으니 30대 중반에 이미 아버지의 건강이 술을 마시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아버지는 40대 초까지도 술을 많이 드신것으로 알고 있다.


또 제자 오탁번시인(한국 시인협회회장 역임)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의 글('기쁘고도 슬픈 잔'. 詩話)에보면 아버지가 자신을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시켜주신 뒤 한잠이나 지나 인사차 성북동 집으로 문우 김명인(시인)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갔을 때 병환중이셨음에도 자기들이 들고간 정종을 함께 마셔주시고 이도 모자라 술을 더내 오셔서 함께 취한 후 대문을 나서서 돌아오면서 "지훈과 대작을 했으니 우리도 이제 대 시인이다"라고  떠들었었는데, 그런 일이 있은지 3개월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너무나 죄스럽고 애통하고 후회된다는 추모의 글을 썼으니 한창때 같이 많이는 아니었더라도 방문객이 술을 들고 오면 함께 마시셨고 결국 가시기 3개월전까지도 술을 드신셈이다. 



여기서 잠간 아버지의 주도유단론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아버지는 음주에 모두 18계단이 있다고 하면서, 이를 다시 1~9급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1급(學酒卒)에서부터 반주(飯酒), 수주(睡酒), 색주(色酒), 상주(商酒), 은주(隱酒), 민주(憫酒), 석주(惜酒)를 거쳐 9급 불주(不酒)에 이른 9단계는 술의 진경과 진미를 모르든가 술의 목적을 왜곡하는 경우여서 논의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정하고 , 술의 진체(眞諦)를 깨달은 경지에 이르는데, 여기서부터 유단자(有段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단에서부터 9단까지의 차례를 매기고 있는데 이를보면 1단(주호酒豪) 2단(주객酒客), 3단(주걸 酒傑), 4단(주광酒狂), 5단(주선酒仙), 6단(주현酒賢), 7단(주성酒聖), 8단(주종酒宗), 9단(명인名人.즉 술로인해 세상을 떠난 사람). 이중 아버지가 올라있는 주선(酒仙)은 5단이니 꼭 중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 처럼 아버지는 스스로 주선(酒仙)이라 자처한 바가없다. 오히려 자신은 1급인 酒卒로서 學酒의 경지에 있음을 여러번 강조하신 바 있다. 


어쨋거나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주선인가? 주도가 몇단 몇급이냐? 하는 문제보다는 그 술의 멋과 풍류와 호방함인데, 나는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버지가 오대산 월정사 시절에 즐겨마신 삼도주(三道酒)얘기를 꼭 하고싶다. 다음은 아버지의 수필 <멋설: '신태양' 1958>의 일부이다. 


"...나는 항상 삼도주(三道酒)를 마신다. 이 술은 사람사는 마을에는 없는 곳이 없다. 무엇으로 만든 술인고하니 국화주, 매실주 죽염주도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이다. 그런데 삼도주란 어디서 왔는가? 仲尾先生(孔子=필자註)이 애써 가꾸신 쌀과 老聃翁(老子)이 손수 만든 누룩으로 悉達多(석가모니) 상인(上人)이 길어오신 샘물로 빚은 술인 연고(緣故)다. 컬컬한 막걸리지만 청신한 맛이 천하일품이다. 나는 반(半) 40에 삼도주를 배운다. 몇해나 취해서 나를 볼른지 알 수 없다. 


머루 맛에서 노자(老子)가 웃는다.

솔잎 맛에서 불타(佛陀)가 웃는다.

당귀(當歸) 맛에서 공자(孔子)가 웃는다.


삼도주를 마시고 도(道)를 잊고 만다.


                      

                                         대산 월정사 시절(22세)


결국 첫번째, 두번째 삼도주란 모두 그 흔한 막걸리요, 다만 두 번째는 머루, 솔잎, 당귀를 재료로 빚은 막걸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우리의 토속주 막걸리의 양조에 공자, 노자, 석가모니를 동원하고 그 취흥의 진미에다 유교, 불교, 도교 삼교의 진수를 계합시켜 '삼도주'라 명명하고, 이 도주(道酒)의 흥취속에 자적하는 22세의 조숙함, 그런 나의 아버지의 멋과 풍류와 호방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서 노닐었던 아버지의 술에 대하여 몇단이냐 몇급이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1956년 아버지와 사제의 인연을 맺은 이래, 196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때까지 12년동안 존경하는 스승으로, 또 지도교수로 곁에서 모셨기에 더욱 가까운 관계를 맺어오면서 수없이 술자리를 같이한 인권환(작고, 전 고려대 교수)선생에 의하면 주석에서의 아버지는 "일관된 음주습관과 중심을 잃지 않는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술이 주는 장점과 덕(德)을 최대한 터득하고 있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술자리에서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고담준론과 호방하고 호해한 웃음, 음담까지 겻들이는 거침없는 해학으로 항상 좌중을 매료하였고, 그런 가운데서도 엄격하고 법도있는 대인(大人)의 자세를 잃는 일이 없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앞서언급한 <주도유단>에서 단을 매기는 조건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다섯가지 조건은 당신 자신이 실천하는 음주의 엄격한 법도이기도 했다. 즉 "음주의 경력, 항상 어울리는 술친구, 음주의 기회와 동기, 술자리에서의 자세와 버릇을 보면 그 인간의 품격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아버지는 이것을 항상 유의하면서 조금도 소홀히 함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의 제자들은 물론, 막역한 술친구들까지도 술과 술자리에 관한한, 아버지를 거스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미츄어 주원의 사범쯤은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음이 허언(虛言)이 아니었고, 그만큼 엄격하고 법도있게 주도를 터득하고 지키고 그리고 주석을 리드하는 인물이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음주 스타일은 거침없이 들이키는 폭주(暴酒)요, 쾌음(快飮)이었다고 한다. 어떠한 술, 어떠한 경우도 잔을 거절하는 법이없으셨다고 한다. 내가 본 주석에서의 아버지도 항상 쾌활, 명랑하셨는데 취흥이 고조되면 도도한 언변과 거침없는 해학으로 좌중을 휘어잡는데 아버지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시인 박남수(좌측)선생과, 아버지우측) 30대 후반

                           

                                                            

아버지는 술 자체보다도 술마신 흥취를 좋아하셨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화풀이로 술마시는 법이없었고 따라서 주석에서 화내는 일도 없으셨으며, 주정하고 싸우는 일은 더욱 없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술이 강해서 그런지 술마시고 정신을 잃거나 횡설수설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밤새 눈 한번 붙이지않고 통음을 해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를 생생하게 기억한다"('한국의 주선 10걸' 추천인. 백인호, 이광훈 등)고 증언했다고 한다.


"..지난 20년동안 만여(萬餘)번의 술좌석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버린 것이 태무한 정도로 불행하고 속스러운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주객이 아니라는 성명>이란 글에 밝히신 바와같이 신통할 정도로 아버지는 술이취해도 정신이 명료하셨고 술이 깨신뒤에도 주석에서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의 소유자셨다고 한다. 이렇게보면 아버지는 음주의 대가(大家)로서 당당히 자처할 수 있었으련만, 그러나 당신 스스로 "영원한 학주졸"이며 "주객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글로써서 내놓기까지 하셨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이유는 두가지였다. 이에대해 <주객(酒客)아니라는 성명(聲明)>의 수필을 통해, 그 까닭으로 첫째, "오랜 주력(酒歷)은 있지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마시고 싶어 못 견디는 일이 없으신 것"을 꼽으셨다. "그러나 마시면 통쾌히 마시되 장취불성(長醉不醒)의 경지는 취하지 않은 까닭"이라 하셨다둘째아버지는 "절대로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이 없음을 꼽으셨다. 그 이유는 취하는 과정의 진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이라 하셨다그러하기에 당신 스스로를 "주객은 아니지만 확실히 술을 좋아하는 사람임" 자인하셨다. 다만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신 흥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셨다. "술에 뜻이 있지 않고 흥에 뜻이 있음"에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스스로를 "영원히 주객이 못 되고 한 학주배(學酒輩)로서 주졸(酒卒)의 이름을 감수하고 싶다"고 하셨다.


                      앞 왼쪽 안경 쓴이가 아버지(30대후반) 왼쪽에서 세번째 모자쓴 분이 마해송선생(아동문학가)


아버지는 술 때문에 정신을 잃은 적은 없으셨고남들이 보신을 위해 즐기는 반주(飯酒)조차 혼자서는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술은 언제나 즐겁게 드시는 편이었다아버지는 희로애락 애오욕(喜怒哀樂 愛惡慾)의 칠정(七情)에 흥분 되었을 때 술을 마셔선 안 된다는 도리를 배웠다고 하시며 화풀이 술을 비롯한 일체의 잠재감정을 술로써 풀거나 선동하는 것은 술의 사도(邪道)라는 것을 알았다술은 언제나 무료(無瞭)와 권태(倦怠)의 극복을 위해서 마실 때가 상책이라 글에 쓰셨다.


또 아버지는 되잖게 취하는 자에게 술을 건네는 법이없으셨다. "술을 마시는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吾道)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 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가화(人情佳話두 가지" <술은 人情이라>는 수필을 통해 남기기도 하셨다. (나남사. 조지훈전집 4 88쪽 참조)


앞에서 아버지를 한국의 주선 3위로 선정한 추천인물들은 아버지의 음주특징으로 '신출귀몰'의 주선', '행동형 주걸, '심야 주붕 방문' '철야통음' '새벽 귀가'을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대체로 크게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은 아니다. 아버지는 술을 즐기고 사랑하셨고 절대 사양하는 일이 없었기에 술자리에 한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셨다. 그러나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라 술집에서 술자리는 밤 12시 이전에 끝내야 했다. 일어나 가기는 해야하나 술은 아직 부족하고 촉박한 시간에 귀가하다보니 파출소를 들르는 일이 잦을 수 밖에 없었고, 아쉬운 주기(酒氣)를 달래기 위해서는 밤중이라도 주붕의 대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어울리다 보니 철야통음 새벽귀가가 다반사였을 것이라고 인권환 선생은 <시인 조지훈의 술 이야기. '주류산업'에 게제> 설명하고 있다.


우리집은 성북동이었는데 당시는 삼선교(현재 한성여대 전철역)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 길목에 송욱시인, 최문환(서울대 총장 역임)선생댁이 있었고 혜화동엔 조병화 시인댁이 있어서 귀가길에 통금때문에 그분들과 철야통음을 많이 하신것으로 알고 있다. 장좌불기(長座不起)의 아버지의 음주벽은 철야통음은 물론, 통금위반, 심야방문, 새벽귀가를 불가피하게하였을 것이다. 


          

                  우측으로부터 시인 이한직,조지훈,아동문학가 마해송,소설가 최인욱,최정희

                                   

아버지의 이같은 특징은 이와같이 좌불기(長座不氣), 철야통음, 격조있고 논리적이고 차원높은 고담준론과 호쾌하고 거침없는 동서고금의 야사(野史), 야담(野談), 소화(笑話)등을 두루 아우르는 폭넓은 해학(유머, 익살)로 꼽을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 예술, 사회, 인생등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신것도 어느 술자리에서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에 반한 이종우(당시 고려대 문과대학 학장)총장에게 발탁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고려대 인권환 명예교수의 증언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술이 강하여 웬만큼 마셔도 정신을 잃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마시면 마실수록 흥취가 고조되어 아버지의 하해같은 언변과 농도짙은 해학이 그칠줄 몰랐고, 이에따라 좌중의 사람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주석이 중단되는 것이 모두가 아쉬워 어떻게든 이를 지속 연장하려는 시도가 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와 술자리를 같이한 어느 누구도 조금도 얺잖거나 기분 상한 기억이 전무하다는 한결같은 이야기들이고 보면, 아버지의 높은 주도의 품격을 알게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아버지와의 술자리가 마냥 그립기만 하다고 제자들(인권환. 고려대 명예교수, 박노준. 한양대 명예교수)은 회고한다.


아버지의 주석과 술에 관련된 일화는 <대구병영 따귀사건> <술버리다가 또는 주불예로 따귀맞은 제자및 후배 시인>,<삼청동 제자집(인권환)에서의 철야통음>, <19세때 半白 노인과의 동침>, <왕학수(고려대 교수, 전 문화방송 사장역임)와 관련된 일화>, <노기남주교 설득위해 담배불로 손등지진 사건><경주, 대구, 통영등 여행중에 있었던 일화>등.... 많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궁금하신 분들은 나의 졸서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 - 아버지 조지훈의 삶과 문학과 정신. 나남사, 80쪽~111쪽),> 이나 인권환선생의 글 <시인 조지훈의 술 이야기 > 보기를 권한다.)


          

                                           중앙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술보다는 사람을 좋아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는 나이를 안가리고 늘 어울려 마시셨으며 이야기를 즐기셨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그런 아버지셨으니 당연히 우리 사남매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집 사랑방 술자리에서의 모습이 대부분일 수 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밖에서 술 드신 후에도 제자들이나 주붕(酒朋)들과 함께 집에 들어오셔서 밤새 드시는 일이 많으셨는데 그럴때마다 어머님이 다시 술상을 차려야 했던 적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주흥에 겨워 호탕하게 웃으시며 문우, 제자들과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멋지게 보였던 것이 지금도 흑백 사진처럼 또렷이 아직도 남아있다. 서로 댓귀를 이어가며 혹은 곡이 붙은 시암송(한국 시뿐 아니라 한시, 시조, 외국시)을 하시기도하고 동서고금의 유머와 해학과 문사철(文史哲)을 넘나들며 담론을 즐기셨는데 참으로 풍류와 낭만, 우애와 사제 지간의 정이 넘치는 장면이었다. 


어린 날,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도 얼른 대학생이 되어 스승님과 저렇게 대작을 해봐야지 하며 성년이 되길 기다리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으나 대학생이된 후에도 스승과 그런 낭만을 기대할 수도 없었음이 무척 아쉽고 서운하기만 했었다.


아버지 시(詩)에 <밤길>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도 우리집 사랑방 술자리에서 단골로 애송되던 시 중의 하나였다이 길로 가면 주막이 있겠지요. 꽃 같이 예쁜 색시 술도 판다오…”라는 첫 구절이 왠지 마음에 들어 나 또한 이 시를 외우게 되었다. 성년이 된 후 오늘 날까지 술을 마실때면 아버지의 시 <밤길>을 떠올리며 그날의 술자리를 유종의 미로 거두려는 노력을 다짐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도 큰 실수 없이 대체적으로 자기절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밤길>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다른 제자인 박노준(한양대 명예교수)선생도 20대부터 애송한 시로 알고 있다그 분이 어느 날 성북동 우리 집 서재에서 아버지와 대작할 때 거나하게 취하신 나의 아버지께서 자네 그 <밤길한번 읊어 봐.라고 요청하셔서 "그 시를 낭송한 적이 있다"고 내게 말씀하신바 있다그때 아버지께서는 제자인 박선생에게 그런 시는 여러 편 지을 수 있어 하면서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역시 제자인 인권환 선생박찬세(전 통일 연수원장고대 법과 출신. 4.18 선언문 기초선생 등 고려대학교의 여러 제자 분 들이 술을 마실 때면 마치 고정 애창곡인양 앞서 언급한 아버지의 시 <밤길>을 자주 흥얼거리신다는 정보를 나는 일찍이 들어 알고 있다.


                             

또 이런 일이 생각난다. 박찬세 선생이 4.19 혁명 이후 어느 날 밤 원고 청탁 차(당시 박선생은 고대신문 학생 편집장으로 아버지의 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를 박선생이 받아서 <고대신문> 1면에 큰 활자로 게재하였음정종 한 병을 들고 우리 집을 방문 하셨다당연히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새벽 한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통금 시간이었다들고 간 정종은 물론어머니께서 내놓은 술도 다 마셨는데나의 아버지께서 일어나시더니 술을 가지고 오겠노라고 하셨다 한다주전자를 들고 서재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박선생에게 다시 술을 권하시더란다박선생이 마셔보니 웬걸 술이 아니라 맹물이라서 놀란 나머지 선생님 이건 물이아닙니까? 했더니 그래물일세술로 알고 마시면 술이 되는 거지술은 인정인데그 물 속에 정이 담겨 있으면 술이 되는 거야.라고 하시더란다물잔을 주고 받으며 새볔 녘까지 마시고 나오면서 박찬세 선생은 역시 한국의 조지훈이야! 라고 감탄 했다고 한다아버지는 실제로 그렇게 정을 마시고 흥에 취하시는 분이셨다.


이런 얘기를 들으신 아버지의 끝물(?) 제자인 김인환(고려대 명예교수)선생도 한 말씀 하셨다. "대학 1학년 때 국문과 1학년 모두가 구자균(국문과, 작고선생님 묘소에 간 적이 있어요지훈 선생은 몸이 불편한 데도 같이 가셨고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술을 따라 주셨어요학생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하는데 선생님도 일어나 시를 두 수 읊으셨지요한편은 영어로한편은 한문으로 읊으셨지요지금도 기억하는데 영시(英詩)는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 오는 것우리 늙어서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은 이것 뿐이리"라는 예이츠의 <술 노래>였고한시(漢詩)는 "인생은 정이 많아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데 이 강물 이 강 꽃이 어느 날에 다하랴"라는 두보의 <哀江頭>였어요. 1학년 시절 그런 선생님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나도 영어 공부한문 공부 해야지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배운 것이 내가 배운 것의 모두라고 생각하는데 지훈이 없었다면 내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생각해도 조지훈 선생은 잊지 못할 스승이고 은인입니다."       


            

              벨기에(국제시인 대회 한국대표로 참가시)서 외쪽이 아버지. 이하윤 시인과 함께(41세)



아버지의 술이야기를 다쓰려면 책한권은 될것 같다. 언젠가 이를 한번 정리해 볼가도 생각중이다. 그때 시원히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만 줄일가 한다. 


화풀이와 고민 해결과 향락의 도구로 주도가 전락한 오늘 날 같은 난세에 술을 사랑할 줄 모르면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생각하며, 올바른 음주문화에 도움이 될가하여 아버지의 제자 인권환 선생이 아버지가 남기신 술관계의 글가운데서, 아버지의 평소의 주도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췌하였거나, 그 뜻을 살려 문장화한 <조지훈의 주도 명언(名言) 8조(條)>를 소개한다.


<조지훈의 주도(酒道) 명언(名言) 8조(條)> 


1. 목적이 있어서 마시는 술은 하지하품(下들支下品)이고 속주(俗酒)다.

2. 도주(道酒)가 따로없다. 술의 진미를 음미하는 심경이면 어느 술이건 다 도주다.

3. 감정이 흥분되었을 때 화풀이로 술을 마시는것은 사도(邪道)다.

4, 되잖게 취하는자에게 술을 주는 것은 차라리 썩히는 것만 못하다.

5. 술을 좋아하기보다 술마신 흥취를 좋아하라.

6. 술은 언제나 무료(無瞭)와 권태(倦怠)의 극복을 위해서 마시는 것이 상책이다.

7. 주정을보고 그 인품을 알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8. 인생의 길에는 취해서 가는 길이 옳고 바를 수도 있디.


이상 8조(條)의 명언(名言)은 아버지의 '음주신조(陰酒信條)'였고, 아버지가  일관되게 실천한 '주도의 강령'이라 할만하다어디서고 하나 하나에  아버지의 취향과 교양과 인품이 배어 있어 주석에서의 아버지의 언행을 방불하게 한다.

천하의 주당(酒黨)들이여! 깊이 음미하고 명심할 진저! 


아무리 맛있는 술이라도 사람 맛없으면 술맛이 없다. 마신 사람과 한마음이 되면 새벽 닭이 울든 말든 백잔도 모자랄 것같은 경험을 당신은 해 보았는가? 사람마시려 술을 마시다 같이 마신 사람에 취해 버리고 '영영 일어서기 아쉬운' 그런 사람이 그립다. 그 사람 생각만해도 술이 당기는 그런 사람이 이곳 뉴욕엔 없기도 해서겠지만 술을 입에대지 않고 지내온지 무척이나 오래되었다. 허나 그런 사람이 그리운 이 마음마저는 지울 수가  없구나!  


각설하고.....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제자 분들이 좋아하고 나 또한 대학 시절에 그분들 흉내를 내며 한창 술을 배울때, 간혹 흐트러지는 몸가짐을 추스르며 자주 읊던 아버지의 시 <밤길>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련다.


 이 길로 가면은 주막이 있겠지요


 나그네 가는 길에 주막이 없으리야

꽃같이 이쁜 색시 술도 판다오

 

얼근히 막걸리에 취하신 영감님

愁心歌 한가락을 길게 뽑으며

달구지 달달 산 모루를 돌아간다.

白楊나무 가지 우에 별이 피는데……


人生.. 한번…… 죽어지면.

萬樹..長林에..雲霧로구나.

구슬프고 아픈 가락 고요한 밤에

달구지꾼 영감님의 愁心歌소리 


여보 색시 나이는 몇살이오.

술상 앞에 앉은 색시 두 손을 쥐어 본다.

열 아홉…….

새빨간 두 볼이 고개를 들고서


임자는 어데까지 가시는 길입네까

서울로 가는뎁쇼 같이 갈까요

목화(木花)송이 터지듯이 꿈길이 피어나서

이 색시 이 저녁에 서울 길이 기룬게지!

 

어 졸려라 이 색시 하로밤 같이 자구 갈까 부다

자는 일 누가 말려..

   

내가 도루 색시처럼 부끄러웠다.

  

長明燈 달아 놓은 술집을 나오며

양산도 한가락을 날리어 본다. 



                                  2015년 12월 18일, 뉴욕, 더글리스톤 언덕의 작은 집에서 



아버지의 제자이자 전 고려대학교 총장 홍일식 선생은 한국일보의 이 주일(週日의 시라는 칼럼에서 엄격  풍류의 지훈선생 이라는 제목하에 위의 시 <밤길>을 소개하며 이런 글을 쓰셨다.

 

지훈의 성품은 실로 다채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호방한가 하면 치밀 섬세하고강직하면서도 질박(質朴)한가하면 온아하면서 순후(淳厚)하다엄격분명 한가하면 너그럽고휘고 감기는 멋이 있는가 하면 부지런하고소탈한가 하면 근엄하다그래서 함부로 소인배들이 접근하지 못하였다이것은 그가 언제나 시비선악과 미추(美醜)를 판별하는데 준엄 했고이 판별에 의한 행동이 또한 과감하였기 때문이다이로 보면 지훈은 진실로 대인의 금도(襟度)와 추상 같은 절도를 함께 지닌 인격자요 시인이었다나는 지훈의 그러한 풍모가 깃든 작품의 하나로 <밤길>을 애송한다.

이 작품은 지훈이 오대산 월정사에 있던 1941년 무렵에 씌어진 것이다. (중략) 이렇게 월정사에서 세속의 번민을 조금이나마 떠나있던 지훈에게 뜻밖의 한가지 소식이 전해져 왔다. 당시의 우리 문학의 대들보 노릇을 하던 <문장>지가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의해 폐간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 마지막 호가 배달되어 온 것이다 지훈 자신이 <문장>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던 데다가, 이 문학지가 우리 말과 문학을 위해 기여해 온 바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 폐간 소식에 접한 지훈의 상심은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지훈은 우리 말과 시의 터전에서 또 한 모퉁이를 잃은 이 비분에 월정사 아래 시오리 쯤의 주막에 내려가 통음(痛飮)을 했다 한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이 작품을 쓴 것이다. 이 작품에는 그러한 비분을 삭이면서 인생을 지긋이 바라보는 지훈의 특유의 안목이 깃들어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골영감님과 주막집 색시는 현실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 소박한 인물들이다. 시인은 그들의 순박한 삶과 인정을 느끼면서 짐짓 세속의 정취에 젖어 들어 본다. 그것은 아마도 참담한 현실의 긴장 앞에서 느끼던 마음의 고통을 잠시 늦추어 보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심리적 균형과 위의(威儀)마저 내버리지는 않는다. 이 작품 마지막의 장명등(長明燈) 달아 놓은 술집을 나오며 / 양산도 한가락을 날리어 본다는 구절에 그러한 자기절제가 잘 나타난다. 나는 이 구절을 생각할 때마다 지훈의 흰 두루마기 자락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는 엄격함과 풍류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어울린 그의 풍모를 생각하고는 한다.               

                                       - ( 홍일식 / 엄격  풍류의 지훈선생 / 한국일보1995년 9월 25)

        

              

메마르고 험한 세상을 살아 가노라면 때로는 비분을 잠시 삭이기 위해현실의 긴장을 또한 풀기 위해 혹은 소박한 인정이 그리워 술집을 찾게 된다그러나 자칫 방심하면 도가 지나쳐 자제력을 잃고 다음날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럴 때 마다 나는 아버지의 시 <밤길>을 떠올리며 그날의 술자리를 유종의 미로 거두려는 노력을 다짐하게 되고 그래서 큰 실수 없이 대체적으로 자기절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어찌 술자리에서 뿐이랴우리들 삶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갖가지 유혹의 덫이 도사려있으며 우리를 실족시켜 다치고 삼켜버릴 함정들과 늪들이 산재해 있는가?

            

몇 해전 이곳 뉴욕의 어느 한국 음식점에 식사를 하러 들렸더니 그 식당 테이블 위에 종이 깔개가 놓여 있었는데 음식이 나올 때까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 흰 종이 깔개에 인쇄된 문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이 다름아닌 아버지의 수필 <주도유단(酒道有段)>에 나오는 그 열 여덟 단계를 적어 놓은 것이었다. 어느 소주회사에서 자기네 소주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홍보용 깔개였다. 음식점에 온 손님들은 저마다 그걸 보면서 서로 당신은 이 열여덟 단계 중에 어디에 속하는가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깔개에는 그 글의 출처를 명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위의 나의 글에서 생략했던 아버지의 수필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언급하신 '음주의 열여덟 계단'을 소개한다.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의 계단이 있다.


1. 부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2.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3. 민주(憫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서 마시는 사람.

5. 상주(商酒) …….. 마실 줄 알고 좋아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

6.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7. 수주(垂酒)………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8. 반주(飯酒)……… 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9. 학주(學酒) …….. 술의 진경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  

10.애주(愛酒)……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11.기주(嗜酒)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12.탐주(眈酒)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13.폭주(暴酒)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14.장주(長酒)…… ..주도 삼매에 든 사람 주선(酒仙).

 15.석주(惜酒)………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16.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주성(酒聖).

 17.관주(觀酒)………술을 보고 즐거워 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주종(酒宗).

18.폐주(廢酒)………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열반주(涅槃酒).


뉴욕 한국일보의 나의 칼럼 <음주유단(飮酒有段) >(2001년 12월 28)도 그런 아버지가 생각나서 써본 것이었다.


위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당신은 그 열 여덟의 단계 중 아홉 번째인 학주(學酒 술의 진경을 배우는 사람 즉 주졸(酒卒)이라 하셨다.그러시며 학주의 경()이 최고 경지라고 보신 당신은 이런 나의 졸견은 내가 아직 세속의 망념을 다 씻어버리지 못한 탓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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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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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曉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8.04 낙여옹 17.07.30. 07:50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曉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8.04 의양 (宜陽) 17.08.03. 03:14 new
    2017년 8월 3일 메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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