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회] 芝薰 趙東卓 가족이야기 / 아버지 조지훈 삶과 문학과 정신 / [19장]부록 /2017/12/01/08:00 조광렬
작성자曉泉작성시간17.12.01조회수2,283 목록 댓글 0[136회] 아버지 조지훈 삶과 문학과 정신 / 조광렬
[19장] 부록
# 芝薰 趙東卓의 가족이야기
지훈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지훈의 가족이야기' 판넬
조동탁(趙東卓)이란 이름을 가진 조지훈(趙芝薰)은 그의 아호(雅號)이다. 그 외 아명(兒名)이나 별명 등은 없다.
출생과 출생지
芝薰 趙東卓의 생년월일은 1920(庚申)년 12월 3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음력이라 하니(가족의 증언) 양력으로 환산하면 1921(辛酉)년 1월11생이다. 그의 본적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 202번지다. 父 조헌영(趙憲泳)이 1928년 3월 20일에 伯父인 趙根泳으로부터 분가한 뒤의 주소며 분가 이전의 주소는 201번지다. 따라서 지훈의 출생지는 201번지(壺隱宗宅)임을 알 수 있다. 이 일월면 주곡동 일대는 1519년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훈구파 세력에 맞서서 개혁정치를 주도하다 끝내는 목숨을 잃자 (기묘사화) 지훈의 선대 조상들은 멸문의 위기를 피하기위해 전국 각지로 흩어져 피신했는데 芝薰의 14대조 호은공(壺隱公) 조전(趙佺)이 자리잡아 漢陽趙氏 일색의 씨족마을을 일구었다. 芝薰의 본가는 종가로서 5백여 평 대지에 건평 50여 평의 기와집인데 아직도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가족
芝薰의 증조부 남주(南州) 조승기(趙承基) 는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하여 의병을 모아 영양의병장을 지낸 당대의 영남 퇴계 학파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주실(注谷) 조씨는 강제단발을 당하는 치욕을 당하지않기위해 단발령이 시행되던 1895년 11월 이전에 자발적으로 단발을 한 개혁적이고 자존심이 센 집안이었다. 조부 내은(乃隱) 조인석(趙寅錫; 1879 ~ 1950)은 이조 말 성균관과 사헌부 대간(大諫)을 지내냈다.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한일합방 당시 귀향하여 집필에만 전념하다가 항일운동에 가담, 독립투사로 활동한 학문과 덕망이 높은 분이었다. 일제하에서 마을 전체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유일한 마을은 영양, 주실(注谷)마을뿐인데 이는 그의 지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정에서는 인자하였으나 교육에는 엄격하였고, 밖에서는 강직하였으며, 개혁을 단행하여 일찍이 개화하였다. 지훈의 조부 조인석(趙寅錫)은 슬하에 근영(根泳), 헌영(憲泳), 준영(俊泳) 아들 삼형제와 딸 애영(愛泳) 삼남일녀를 두었는데 아들 형제(근영, 헌영)를 외국 유학까지 시켰으며 딸도 서울에서 신식 교육을 시켰다. 그는 근대적 사립학교인 '영흥학교'를 설립하고 호은종택에 '영진의숙'을 열어 큰 아들 조근영(趙根泳)과 함께 <초등독본>이란 교재도 저술하여 청소년들에게 구학과 신학문을 함께 교육시켰다. 지훈의 큰 숙모 김종진(金種振)도 이 학교 선생이었다. 그녀는 경기여자 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최은희(한국 최초의 여기자)와 더불어 3. 1운동에 참가하여 유관순 열사 그리고 이아주[(이애주라고도 함. 석방후 상처(喪妻)중이던 김성수 선생과 결혼했다)] 씨와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지훈의 집안은 유교를 신봉하였으나 조부가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등 다른 종교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주곡마을에 일찍 교회가 들어서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조부는 스스로 ‘삼불차(三不借)’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즉 세가지를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을 빌리지 않고 돈을 빌리지 않고 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삼불차를 내세운 것은 대대로 인물과 재력과 문한(文翰)이 끊이지 않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조부 조인석은 제정(祭亭)을 비롯한 선조 누대로 내려오며 지켜오던 가문의 몇 가지 인습을 과감히 개혁한 선각자로서 박식과 언변의 지기(志氣)를 함께 갖춘선비였으나 6.25 동족상잔의 시기에 인륜이 무너지는 것을 개탄하여 (북한군에 의해 마을이 전부 포위되고 불태워질 때 세 아들이 모두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생각하며 학살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며 7월 27일 물에 뛰어들어)자결하였다. 또한 지훈의 증조부도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조일합방(朝日合邦)의 소식을 듣고 자결한 분이었다.
지훈의 백부는 조근영(趙根泳, 1896 ~1983)이요, 호는 정파(靜波). 경성제일고보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고 귀국 후, 보성고보 재직 중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반대하며 교직을 떠나 귀향하여 부친과 함께 주실마을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8.15광복 후 경북치안유지회장, 서울시경무국장, 적산(敵産) 관리처장을 지내면서 정부수립의 기반을 다지는데 일익(一翼) 담당하고 정부수립 후에는 문교부 문화국장 재임 중 국립도서관을 설립, 초대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하고, <국전(國展>제도를 처음 만들어 교육입국과 문화창달의 터를 닦았다. 그리고 국립도서관 관장 재임 중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맞서 <동아일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낸 뒤 사표를 냈다. 공직을 떠난뒤에는 종회의 발전에 힘썼다. 1967년 11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4년 여를 병참공파 종회장을 지내면서 부당하게 빼았긴 압구정동 병참공 묘소와 그 부속 토지인 8필지 12정보를 4년여의 긴 송사끝에 1969년 대법원에서 승소해 환수함으로써 병참공파 종회와 한양장학회의 기반을 다지는 등 종친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기고 1983년 1월 18일 서울 자택에서8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지훈의 둘째 숙부는 조준영(趙俊泳, 1903 ~1962)이다. 그는 일찍이 서울에 가서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45년 광복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 시행위원(施行委員)에 선출되어 역사적인 환영행사를 주관하였다. 그 후 문경 경찰서장, 상주 대구 경찰서장을 역임하였고, 1950년 1월 경북경찰 서장에 취임하여 4월에 사퇴했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조병옥(趙炳玉) 내무부장관이 그의 치안 및 전투경찰의 역량을 높이 인정하여 8월 11일 다시 경북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대구 사수와 수복후인 경북의 치안을 확고히 한 후 취임 1년 만에 사직하고 재야인사로 돌아갔다.
당시 자유당 독재정권의 부패와 악정으로 민주 조국이 도탄의 와중에 빠져드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어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9월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0월에는 중앙위원회에 피선되어 민권회복 투쟁에 헌신하였다.1958년 10월 2일 대구시장 선거에 민주당 공천입후보자로서 총투표수의 2/3 이상 절대다수 득표로 압승 당선되었다. 그는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적폐(積弊)에 병든 시정쇄신에 심혼을 기울였으나 집권당 고위층의 압력과 여당 시의원의 횡포 그리고 홍연천(洪淵天) 의원의 매수 당한 변절로 인해 1표차로 시장불신임안이 통과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한 4.19 학생 혁명 후에 그는 경상북도 도지사로 임명되어, 악정이 누적된 도정(道政)의 쇄신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얼마 뒤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지훈의 부친 해산(海山) 조헌영(趙憲泳)은 1899년 (호적신고일:1901년 1월 8일)에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 20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본래 이름을 예경(禮慶)이라 하였는데, 1916년 4월 24일 경북도지사의 허가에 의하여 개명되었음이 호적상에 나타나 있다. 전주 유씨(全州柳氏) 父 유진희와 母 강수(?)의 딸 유노미(柳魯尾,1897년 10월 2일 생)와 혼인(1928년 3월 20일 한양조씨 호적에 입적)하여 슬하에 동진(東振), 동탁(東卓, 아호(雅號): 芝薰), 동민(東敏), 동위(東衛) 삼남일녀 사남매를 두었다. 이들의 모친 유노미(柳魯尾)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부(李婦) 열녀(烈女)라 일컬어졌다.
조헌영은 민족운동가, 근대한의학의 개척자로 제헌의회 의원, 2대 국회의원을 지내던중 6.25 동란 때 납북되었다. 와세다 대학 영문학도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회장직을 맡기도 했는데 이 때 독립투사 박렬(朴烈)에게 옥중 투쟁용으로 사모관대(沙帽冠帶)를 빌려준 일이 있다.
신간회 동경지회장, 신간회 중앙간부(총무)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5년 3월 1일에 3.1운동 6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 중 친구의 병을 고치려다 한의학에 심취하여 한의학을 연구하여 <통속한의학원론> 등 한의학 서적도 낸바 있으며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및 큰사전 편찬 전문위원,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을 역임했으며, 한민당 창당에 참여, 선전, 지방 조직부장으로 활약하다 제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반민특위위원에 선임된 후 한민당과 결별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면서 한의학의 제도권 진입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납북 직후에는 안재홍등 재북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남북한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을 축구하기위해 결성된 재북 평화통일촉진의회 집행위원 및 서기장으로 활동한바 있으나 이 제안이 김일성의 거부로 무산되자 그후부터는 오로지 동양의학연구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는 북한 최초의 의학 박사(고려의학계 1호 박사)가 되어 동양의학의 체계를 수립하고 후진 양성을 하다가 1988년 5월 23일에 89세로 서거했음을 북측 적십자사로부터 남측에 알려왔다. 그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재북인사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차남인 관계로 문전옥토(門前沃土)에서 떨어진 땅을 상속받았다. 예로부터 차남에게는 분전을 잘 하지 않는 습관 때문인지 그의 생활도 중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박사는 당시 이들 조씨 삼형제를 삼호(三虎)라고 불렀다 한다.
지훈의 고모 은촌(隱村) 조애영(趙愛泳, 1911 ~ 2000)도 서울로 가서 배화여고를 다녔는데 재학시절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다 발각되어 투옥되기도 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배화여고 주동자로 입건되어 무기정학을 당했고 그 때 감옥에서 읊은 <그리운 내 조국>이 교과서를 통해 전해오고 있다. 그녀는 시조 시인으로 <슬픈 동경(憧憬>이라는 시조집과 <은총내방가사집>을 남겼다. 성균관 여성유도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훈의 형제는 모두 넷이다. 형 조동진(趙東振)은 1917년 2월 28일에태어나 1937년 2월 18일 오전 7시 사망했다. 지훈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형의 아호는 세림(世林)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고 <꽃탑>이라는 소년 문화단체를 이끌며 어린 나이에도 항일운동을 했으며 <세림시집>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그는 이를 뽑고 술을 마신 것이 잘못되어 파상풍을 앓게 되고 그 결과 고향에서 20세로 아깝게 요절한 천재 시인이었다.
여동생 조동민(趙東敏)은 1927년 4월 14일 생이다. 1948년6월 20일 경주시 외동면 괘능리 506번지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채우(李采雨)와 영천정씨(永川鄭氏) 정남희(鄭南嬉)의 둘째 아들 이상달(李相達)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6.25 동란 때 납북된 후 홀로되어 슬하에 아들 이창훈(李昌勳, 사업가, 1949년 8월 12일生)이 있다. 창훈은 1979년 4월 14일 인천 채씨 채원식(蔡原植)과 진성 이씨 이보희(李普姬)의 딸 채영교(蔡瑛嶠)와 결혼하여 이재호(在浩, 1981년 3월 28일 生, 2012년 12월 16일 혼인), 이재상(在祥, 1983년 11월 15일 生, 2016년 11월 12일 혼인) 아들 형제를 두었다. 동민은 해방직후에는 국민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했으며 가사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지훈과는 사 남매 중 가장 가까웠으며 지훈의 생존 시에는 사 남매 중 단 둘만이 생존해 있었다. 평소 지훈은 그녀에게 세심하고 자상하게 대했다. 옷 입을 때의 배색에 대해 얘기해 주고 정서적인 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훈은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먼저 동민에게 읽어 주었으며, 평소에 삼 남매 시집을 내자고 한 적도 있었다. 그 일을 잊지 못해 그녀는 생전에 <꽃이 지기로 소니 바람을 탓하랴> 라는 삼 남매 시집과 <누이야 오늘도 바람이>라는 수필집을 펴내기도 했다. 제헌국회의원 유족회 이사, 대한 주부클럽연합회 부회장, 중앙부인회 이사를 역임하고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이사, 성균관 여성 유도회 연수원장, 삼성노인대학 학장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다 2011년 1월 8일 서울 성모병원에서 86세에 별세했다.
동생 조동위(趙東衛)는 1930년 2월 20일 생인데 사망일은 호적상에 잘못 기재되어, 1969년 12월 21일로 나타나 있으나 사실은 경성중학(京城中學) 4년을 마치고 사망(1953년)하였다. 그는 부친의 납북 소식을 듣고 비관하며 지내다가 학도병에 자진 입대했다. 그러나 곧 고향에 돌아와 조부가 자결한 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지훈 조동탁(東卓)은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하게 태어났다. 지훈이 어렸을 때 그의 집안은 대가족제도하에 있었고 증조모까지 생존해 있어서 그는 대부분 증조모 조부모의 품에서 키워지다시피 했다. 어렸을 때 모친이 마마를 앓았기 때문에 옮을까 봐 돌이 지나서부터 격리하여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했음에도 지훈이 돌이 지날 무렵에 마마를 앓아 코 언저리에 약간의 마마자국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로인하여 그의 모친은 지훈이 어렸을 때 거의 돌보지 못하였다. 그의 모친은 대구 피난 시절에 부군(夫君)이 납북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서 사망하였다. 호적상의 사망 일자와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당시에 사망신고를 하지 못했다가 1969년 12월 21일에 芝薰의 첫째 아들 조광렬(趙光烈)이 사망신고를 함에 따라 기재된 것이다.
지훈이 어렸을 때부터 조부 조인석은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후에까지 정규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지훈은 어려서는 조부의 감화(感化)를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훈이 그의 백부나 엄친만큼 정규적인 신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 조부의 의도 즉 가학(家學)의 필요성과 손자들이 식민교육 받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훈이 나이 들수록 조부는 지훈을 슬하에 두고 한학을 공부시켜 한의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지훈의 재질을 이내 알아차리고 “이놈도 내 옆에 붙어 있을 놈이 아니구나” 하고 할 수 없이 본인의 뜻에 맡겼다. 지훈은 곧 상경하여 와세다 통신강의록으로 독학하여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문장(文章)>지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혜화전문 졸업 후 일본인 교수의 취직권유가 있었으나 일본인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하고 강원도 월정사로 들어가 외전강사를 지내다 해방이 되자 상경하여 부친을 도와 조선어 학회에서 큰사전 편찬위원을 했다. 그 후 경기여고 교사, 수도여의전 교수, 동국대 강사를 거쳐 고려대 교수(27세)로 재직하였다. 6. 25전쟁이 나자 종군문인단 부단장으로 평양까지 다녀왔다. 휴전 후에는 자유당 독재정권의 3.15 부정 선거 직전 <지조론(志 操論)>을 발표하였는데 그 글에 나타나는 추상 같은 질책은 민족전체의 생존을 위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양심의 절규였다. 또 그는 4. 19 학생 혁명에 불꽃을 집혔으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지훈은 5.16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4.19가 민권 혁명이라면 5.16은 민생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초기에는 <군사혁명에 부치는 글>로 혁명정부의 갈 길을 제시하며 그것을 지켜나가기를 기대했으나 점차 실망감이 더해가자 마침내 이 나라지식인 사회를 모독한 박정희 대통령의 '진해발언'에 대해 1965년 5월 5일의 조선일보를 통하여 "이는 학자와 학생과 기자를 버리고 정치를 하려 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 지훈은 그로 인해 정치교수로 몰렸고 늘 사직서를 지니고 다녔다.
언제고 진리와 허위, 정의와 블의를 준엄하게 판별하였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과감하게 행동하였다 그 후 고려대 부설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하면서 국학연구에
매진하며 한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신시 6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임기 중 1968년 5월 17일 새벽에 지병인 기관지 확장으로 서울 메디컬센터(현 성모병원)에서 48세로 별세했다. 지훈 趙東卓은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222 - 9 송라산 기슭 가족묘지에서 모친 유노미(柳魯尾) 곁에 영면(永眠)하고 있다.
서울 남산(1971), 고려대학교(2006), 동국대학교(2012), 향리 경북 영양 주실마을(1982), 묘소인근 남양주시 마석역(2012 )등 전국 50여 곳에 시비가 세워졌고, 향리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는 '지훈문학관'(2007)이 건립되었으며 '지훈시공원'(2007)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또한 타계하기 전까지 30여년 살았던 서울 성북동 옛 집터 인근에는 '조지훈 기념건축조형물'(2013)이 건립된바 있다. 1982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1등급 추서)을 수훈(受勳)했다.
지훈의 저서로는 청록3인의 공동시집 <청록집(靑鹿集)>, 첫 개인시집<풀잎단장(斷章)>, <조지훈 시선(詩選)>, <역사 앞에서>, <여운(餘韻)> 등 시집과 시론집 <시의 원리>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 <돌의 미학>등 수상집, 번역서 <채근담(菜根談>, 논설집 <지조론>, 학술서 <민족운동사> <한국 문화사서설>등이 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장 재임시 <민족문화사대계>전 7권을 기획하고 그 중 2권을 간행하였다. <민속학 개론> <국학사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사후에 일지사(전 7권)와 나남출판사(총 9권)에 의해 두번에 걸쳐 <조지훈전집> 이 발간된 바 있다.
芝薰 趙東卓은 1943년 6월 30일에 영주신간회, 독립운동가 김성규(金性奎,1904년 2월7일 生~ 1946년 7월 6일 별세. 건국포장 추서 1993년)의 일남오녀 육남매중 장녀 김난 희(金蘭姬, 본명 金渭男, 1922년 5월 20일 生 ~ )와 혼인하여 슬하에 광렬(光烈, 홍익미대 건축미술과, 죠지아 공대 대학원에서 건축, 도시계획 전공, 재미건축가, 수필가), 학렬(學烈, 동국대에서 경영학 전공, 자영업), 태열(兌烈, 서울대에서 법학을 전공, 영국 옥스포드 대학원 졸업, 외교부 차관, 현재 駐 UN대사로 재직 중) 세 아들과 딸 혜경(惠璟, 성균관 대학에서 심리학 전공) 삼남 일녀를 두었다.
장남 광렬은 1945년 5월18일 영양 주곡동 202번지에서 출생하여 1971년 11월 25일 제주고씨(濟州高氏) 고한중(高漢重)과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봉이(李鳳伊)의 이남오녀 칠남매중 막내 오녀 고수정(高秀姃, 본명:高富淑, 1945년 2월 18일 生, 홍익미대에서 공예학을 전공)과 결혼하여 장손녀 윤정(允偵, 뉴욕대학에서 현대무용전공, 재미 현대무용가)과 장손자 용범(容範, 본명: 均澈 , 뉴욕 호프스트라 대학에서 금융학 전공, 재미 금융인), 둘째 손자 용준(容晙, 뉴욕 파슨스 대학에서 패션디자인 전공, OTIS대학교수, 1980년 5월 26일 生) 이남일녀 삼남매를 두었다. 장손자 용범은 1979년 3월 11일 미국 죠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출생하여 2013년 6월 16일, 흥해(興海) 배씨 배정남(裵正男)과 경주(慶州) 김씨 김영숙(金永淑)의 삼녀중 이녀 배우진[(裵又瑱, 뉴욕 FIT 대학졸업, 1979년 7월 9일 生)]과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장손녀 윤정은 1976년 12월 3일 미국 죠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출생하여 2011년 6월 19일 스페인 가르시아(Galicia) 지역의 Carlos Calvo와 Maria Soledad Carballa의 장남 호세 카롤로스 팸보 카르발라(Jose Carlos Pambo Carballa, 뉴욕대에서 금융학, 법학전공, 재미 금융인)와 미국 뉴욕에서 결혼해서 증손자 준우[晙宇,루카스 제비어 팸보 조(Lucas Xavier Pombo Cho 2014년 8월 15일 生)]를 낳았다.
차남 학렬은 1948년 10월 1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60번지의 44에서 출생하였고 1979년 12월10일 우봉이씨(牛奉李氏) 이보녕(李普寧)과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재희(沈載?)의 이남사녀 육남매 중 삼녀 이명선(李明善, 1952년 5월 26일 생)과 결혼하여 둘째 손녀 민정(敏廷, 한동대에서 컴퓨터공학 전공, LG근무, 1980년 1월 20일 생), 세째 손자 재범(宰範, 세종대학에서 의상디자인 전공, 패션디자이너, 1981년 8월 7일 생) 일남일녀 남매를 두었으며
딸 혜경은 1952년 5월 17일 역시 서울 성북동 60번지의 44 에서 출생하여 1979년 6월 4일 김승교(金承敎, 서울공대 기계과 졸업, 현대중공업 근무)와 결혼하여 외손녀 김나영(奈映, 이화여대에서 컴뮤니케이션, 미디어학 전공) 외손자 김종욱(種旭, 호서대에서 영문학 전공, 시인) 일남일여 남매를 두었다.외손녀 나영은 손영삼(孫永三, BMW 한국지사 근무)과 결혼해서 둘 사이에 증손녀 손주아(孫株雅), 손윤아(孫潤雅) 둘이 태어났다.
삼남 태열은 1955년 11월10일 서울 성북동 60번지 44에서 출생해서 1982년 7월 6일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정규(金政圭)와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현숙(崔賢淑)의 둘째 딸 김혜경(金惠卿,1957년 4월17일 生)과 결혼하여 세째 손녀 은정(恩廷,미국 버지니아대학에서 미술사 전공, 삼성미술관 리움 근무), 네째 손자 상균(祥均, 미국 펜실바니아대학에서 최연소 분자생물화공학 박사취득, 1989년 1월 24일 生) 일남일녀 남매를 두었다. 세째 손녀 은정은 1984년 5월 4일 서울서 출생해서 2016년 9월 3일 부(父) 김원규(金元奎)와 모(母) 서영준(徐英俊)의 차남, 김홍연(金弘淵, 사업가)과 결혼하여 증손 김정범(金楨凡)이 태어났다.
장남 광렬은 2004년 <문예운동(봄호)>을 통해 한국문단에 등단하기도 했으며 부친을 그리워하며 쓴 책<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 : 아버지 조지훈- 삶과 문학과 정신>, <태초에 멋이 있었다>등의 수필집을 냈다. 삼남 태열이 쓴 책으로는 외교부 차관재직 일년 동안의 연설, 기고 선집인 <신뢰외교의 새 지평>이란 책이 2014년 4월 대한민국 외교부에 의해 출간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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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의 장인 김성규(金性奎) – 경북 영주 | 대한민국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