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나의 할아버지 조헌영(趙憲泳) 어른과 형제분들 / 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과 정신/[5장]아버지의 고향 주실 이야기/2017/08/13/8:00 조광렬

작성자曉泉|작성시간17.08.03|조회수1,464 목록 댓글 1


[26회] 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과 정신 / 조광렬

*[5장]아버지의 고향 주실이야기

   #나의 할아버지 조헌영(趙憲泳) 어른과 형제분들


의 조부님은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유학시절 아내가 있는 당신을 혼자서 짝사랑했던 일본 여인(나는 여지껏 그리 알고 있었다. 이에대한 설명은 뒤에 하기로 한다)이 있었다고 한다그 여인이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이었던 폐결핵(3)에 걸렸는데 이를 고치기 위하여 동의보감을 공부하다 동양의학에 심취하여 한방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한의학의 대가가 되시었다.

그 여인 이야기가 나오니 어릴 때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동경 유학 시절의 사진이 많았는데 학생차림의 할아버지 곁에 우아한 숙녀가 있어 아버지께 이분이 누구예요?하고 여쭈니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너의 작은 할머니시다하며 농담을 하셨다그리고 앞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여인을 주실로 데리고 와서 한방처방으로 병을 고쳤다고 한다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 후 영남 유림 가에서 할아버지의 한방 화제(和劑)를 받기 위해 주실이 한때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들으셨다고도 하셨다본처가 주실에 살고 있는데 외간 여인을 데리고 와 병가료에 열중한 아들과 남편을 용서와 이해로 관대하게 대한 나의 증조부와 할머니의 국량은 우리 고장의 전설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서로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산다지협(山多地峽)한 작은 마을이지만 넓은 마음과 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이 주실마을이라는 말과 함께.

 나아가 나의 할아버지는 통속 한의학원론을 비롯한 한 의학서를 저술했고 동양의학과 서양 의학을 비교 연구하기도 하는 등 한의학 체계화에 공헌하기도 했으며 이 저서들은 훗날 경희대 한 의과 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경희대 한의학과학장 김병운(金秉雲)교수는 이 저서들에 대해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으로서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인문서였다고 평한바 있다.

나의 할아버지는 동경 유학생회장 시절1925년 3월1에 3.1운동 6년을 기념하는 대대적 시위를 이끌다가 체포되기도 했고 1926 2월 아나키스트 박열(朴烈)이 옥중에서 입었던 사모관대를 마련해 준 적이 있는데 이에는 사연이 있다.

 박열이 재판을 받던 도중 일본 판사가 법정에서 법복을 입는 것 같이 자신도 조선의 관복을 입고 서겠다고 주장하여 이에 일본인 후세 변호사가 사모관대를 구하러 다니다가 나의 조부님으로부터 구했다고 한다고향집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그 사모관대를 보며 당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구절을 아버지의 어느 수필 속에서 본적이 있다.


의 조부님 조헌영 어른의 본래 함자(銜字)는 예경(禮慶)이라 하였는데 1916년 4월 24일 경북도지사에 의하여 개명되었음이 호적상에 나타나 있다. <한국민족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할아버지에 대해 수록(집필자:역사학자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된 것을 나의 이야기식으로 기술해  본다.

       

     할아버지의 자는 응문(應文), 호는해산(海山)으로 어릴때 의병대장이셨던 할아버지 승기(承基)어르신과 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 등의 한학을 익히고 대구 보통학교에 다닌 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셨다. 와세다대학에 재학중이던 1927년 민족 협동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동경지회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셨다. 

      귀국하여 신간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으셨으며,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뒤에는 한의학에 몰두하여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개설하였다. 이때의 연구로 근대한의학을 개척하여 현재 우리나라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고 한의학의 제도권 진입을 위해서 노력하셨다. 1935년 조선어표준말사정위원회 위원 및 큰사전 편찬전문위원으로 일하셨다.1936년에는 인사동에 일월서방(日月書房)을 설립하기도 하셨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을 역임하셨다. 8월 원세훈(元世勳)등과 조선민족당을 결성하였는데 홍명희(洪命喜) 계열에 속하셨다. 조선민족당이 그 해 9월 4일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한 뒤 지방부장에 이어 조직부장으로 역임하셨다.1948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민주당을 탈당하셨다.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강력히추진하셨고 , 이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약하셨다. 그러한 성향이 한민당을 탈당한 이유일 것이다. 1950년 5.30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김동성(金東成)과 함께 무소속구릭부를 이끄셨다. 당시의 무소속은 중도파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하지 않고 계시다가 납북되셨다. 북한에서는 주로 한의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한국 최초로 동양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으셨으며,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의회 집행위원과 1980년 7월 서기장을 맡으셨다.1988년5월 23일 평양에서서거하셨다.

     

     활동사항으로는 근대한의학 개척자로서,1930년대 <신동아>에 한의학의 학술논문을 연재하여 1934년부터는 <한의학원론(漢醫學原論)>에 이어 <폐병치료법> <신경쇠약 치료법> <위장병치료법> <부인병치료법등을 간행하였다.

      한편, 민족운동이나 정치활동의 경력을 보면 신간회, 조선민족당, 한민당 가입과 할아버지의 의 탈당, 무소속구락부, 6.25전쟁 때 피난하지 않은 점 등의 이력으로보아 중도적 민족주의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한 사상이 당신의 장남(나의 큰 아버지)동진(東振)의 <세림시집(世林詩集)>이나 차남(나의 아버지) 지훈(芝薰-본명(東卓)의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에도 영향을 준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나의 할아버지 / 제헌국회의원 시절


     할아버지께서는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독립운동가,임시정부 외무부장), 안재홍(군정청 민정장관, 국회의원)등 민족주의자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구하기위해, 위에 언급된 바와같이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의회 집행위원과 서기장을 맡았으나 이 제안은 김일성의 거부로 무산돼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오로지 동의학 연구소장으로 계시면서  동양의학연구에만 전념하셨으며 남북한 최초로 동양의학박사가 되시어 동양의학의 체계를 수립하고 후진을 양성하시다 1988년 5월 23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음을 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알게되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시 내가살던 압구정동 집에 빈소를 모셔놓고  49제를 지내고  백일동안 상식을 올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찍이 한국 최초로 동양의학과 서양양의학을 비교 연구도 하셨는데 위에 언급된 책들과더불어 할아버지의 많은 한의학 저서들은 훗날 경희대 한의과 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오늘날 모든 한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필수서적이 되었다. 경희대 한의과 대학장 김병운(金秉雲)교수는 이 저서들에 대해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으로서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인문서였다"고 평한 바 있다.


      한의학과 북한이야기로 되돌아 왔으니 앞에서 뒤로 미루어 두었던 여인[할아버지가  한의학을 공부하게된 계기를 제공했던 일본 여인(?)]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최근까지 위에 서술한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 여인의 이름이나 생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올해 봄(2017년 5월), 북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이복동생 김정은에게 독살당한 직후 인터넷에 올라있는 관련기사를 읽다가 나의 할아버지와 그 여인에 관한 내용이 조금 언급된 것이 있어 스크랩해 놓았다. 그 기사의 일부를 여기 옮긴다.

 

... 김정일의 장인 성유경은 정년퇴직 후 일본 유학시절 친구 조헌영과 말년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조헌영은 경북 영양 수비면 주실마을 사람으로 시인 조지훈의 부친이자 박준규(朴浚圭) 전 국회의장의 장인이다.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를 나와8.15 후 제헌 국회의원, 6.25당시 국회부의장으로 납북됐다. 그는 북에서도 선비의 몸가짐을 간직하여 올곧게 처신하며 뜻밖에도 북한동의학 연구소에서 활약했노라고한다.

조헌영은 일본 유학시절 영어학원에 다닌 애인 김재량이 폐결핵을 앓게 되자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여 그녀를 치료했다. 그러나 왜경의 잇단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고 한다. ...  

                      

                     - [만석꾼 패가망신기]창녕성씨, 김일성 왕조 충성- 이코노미톡뉴스 / 이코노미톡뉴스 회장 배병휴


우선 위의 기사중 잘못 기술된 내용이 있어 그것부터 바로잡고 넘어가기로 하자. 위 기사에서 붉은 글씨 '장인'은 나의 큰 할아버지 조근영 어르신이시다. 나의 할아버지가 동생이시니 '처삼촌' 이어야 맞고, 당시'국회부의장' 은 나의 할아버지가 아니고 김약수기에 바로잡는다.


이 기사로 인해 나는 바로소 그 여인은 일본 여인이 아니라 동경에서 유학했던 신여성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항일 운동을 했던 '김재량'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왜경의 잇단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기사에 언급된, 김정일의 장인 성유경은 나의 할아버지와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같이 했던 모양이다. 그후 귀국하여 재산(조상이 남긴 만석꾼 창녕성씨의 재산)을 풀어 해방공간 좌우 갈등기에 종로 YMCA 건너 박문서관 골목에 있는 서양요리집 백합원(白合園)을 인수하여 2층을 고급 사교장으로 활용하며 좌우익 '사교정치'를 했다고 한다. 그의 장남 성일기는 훗날 빨지산으로 활동했고, 성유경은 이강국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에게 충성하며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있었는데 좌익검거때 마다 발각되었으나 이 사교정치덕에 몇번은 모면하다가 결국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본가 성유경의 친형은 "빨갱이짓하다 재산을 다 탕진했다"며 조상 제사 때 동생 성유경이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성유경이 장남 성일기를 먼저 북으로 보내놓고 마침내 사회주의 이론에 심취한 운동가로 남조선 민주여성동먕 문화부장을 하던 부인 김원주(월간 개벽지 기자)와 전가족 5명을 데리고 월북하였다. 그들은 김일성의 집권을 뒷바침해 주며 준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결국 재산마저 다 탕진했다. 그랬음에도 숙청기에 죽을 고비를 맞았던 그 집안이 딸 성혜림이 김정남을 출산하면서 급회생하여 잠시 로열페밀리 대우를 받으면서 가문의 몰락위기에서 회생했다가 그 뒤 재산 다 날리고 암살, 망명등 패가망신, 풍비박산으로 결말나는 성유경 일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김정남의 죽음을 주제로 김일성 일가에게 버림받은 과정을 소개했다.


이 기사중 성유경에 관한 내용이외의 대부분 - 김정일과 성혜림의 아들 김정남, 성혜랑 그리고 그 아들 이한영(97년 경기도 분당에서 피살됨)과 김정남의 이복 동생 김정은, 그의 어머니 고영희 등에 대한 이야기는독자들도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내용은 나의 이야기와는 연관이 없기에 줄이기로기로 한다. 다만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탈북, 망명하여 저술한 '소식을 전합니다'라는 책을 언론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96년 탈북한 성혜랑 씨 "서울 올 생각없다"는 제목의 기사 -문화일보: 1999.12.23)그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 가자. 

기자가 성혜림 씨를 인터뷰한 내용중에 그녀가 나의 할아버지의 북한생활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기사의 일부를 여기 옮긴다.


"96년 서방으로 탈출해 현재 유럽의 모체에서 은거중인 북한 김정일 총비서의 처형 성혜랑 (63) 자신이 북한에서 만나고 사귀었던 납북, 월북 인사들의 근황을 담은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지식나라)를 출간했다. 성씨의 신간에서 소개된 인사는 모두 2백20명으로 나이, 고향,직업, 그리고 생활상등이 적혀있다 ....납북, 월북 인사들의 근황을 정리한 책에는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을 비롯,....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의 북한 생활상이 담겨있다. 고 소개하며 성혜랑씨는 자신의 책 출간 목적이 다른 무엇보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스스로 이산 가족이기도한 그가 기억을 더듬어 밝힌 자기 주변의 인물들중 주요 납북, 월북자 명단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그 명단 맨 처음에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여성작가 이정수, 조선조말 학부대신 한규설의 서손녀 한만영과 김옥균의 조카 심태진,안중근의사 조카의 맏딸 안기애, 지리산 유격대장 이현상의 가족, 한라산 유격대장 김달심의 가족, 서울 여의전 출신 외과의사 이예근, 법조인 이인씨의 동생, 이응숙, 서울에 두고온 부인과 아들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산 치과의사 김선기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사들의 북한 생활상이 담겨있다"고 한다.등등 220명의 명단이 실려있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척 궁금하나 아직도 그 책을 읽어 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보고계시는 독자들중에 나와 같은 이산가족으로 위에 언급한 220명의 명단이 궁금하신 분들은  <"성혜랑 씨 "서울 올 생각없다"는 제목의 기사 -문화일보: 1999.12.23>로 검색해 보기 바란다. 생사(生死)를 모르던 가족이 그 명단에 혹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할아버지의 그동안의 북한 생활, 특히 가족 사항이 무척 궁금하다. 나의 할머니가 6.25 직후 대구 피난시절, 할아버지의 납북소식에 충격을 받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셨을(?) 할아버지께서는 북쪽의 여러 환경상그곳에도 또다른 가족이 생기셨으리라 추론해 본다. 


할아버지는 <재북인사묘>에 안장되셨다고 한다. (한국민족백과사전 <재북인사의 묘>아래 참고 자료 참조)북한은 남한의 정계, 실업계, 사회계, 학계 등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사들로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62명을 평양시 룡성구역 특별묘역에 안장했는데 이를 '재북인사의 묘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민족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들로 전쟁기에 납북 또는 자진 월북한 사람들이다. 이들중 대부분은 1956년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 하였다. 남한 출신의 명망가이면서 북으로 아동중 사망했거나 북한에 있는동안 조선로동당이나 정부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않으면서 외곽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우하는 차원에서 만든 묘역이라고 한다.'통협 특설묘지'란 <평화통일촉진협의회(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의 줄인말이다." 이 단체가 추진하던 활동을 북에서도 계속한다는 의미였다"고 묘지 관리 대표 김홍곤(작고. 안재홍의 비서였음)이 남측기자 (<민족 21>)에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6.25때 납북(자기네들은 '입북'인사라고 부른다), 또는 월북한 민족진영의 인사들로 평양 신미리(현재 형제산 구역, 1960년대 조성)와 삼석(평양시 삼석구역) 두 곳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재북인사의 묘> (사진 제공: 최재영)


안재홍(군정청 민정장관, 국회의원, 납북), 김경배(제헌국회의)송호성(광복군 제2지대장, 해방후 육군총사령관, 납북), 황윤호(국회의원, 월북), 조헌영(독립운동가,제헌국회의원,반민특위 특별조사위원, 헌법기초위원회 위원,한의학자, 납북), 김의한(독립운동가), 백상규(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납북), 박열(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김약수(부의장, 월북), 김병회(목포일보사 편),박윤일등 42분이 양분되어 안장되었다고 한다. 통협 결성전에 사망한 정인보, 백관우(동아일보 사장), 이종성(미군정 대법원장), 현상윤(고려학교 초대총장, 납북), 이춘호(2대 서울대 총장, 납북), 허영호김상덕(립운동가, 임정 국무위원,반민특위 위원장, 납북), 노익환(제헌국회의원등이 양 특설묘지에 양분되어 안장되어 있는데 신미리에 23 명, 삼석에 39명이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도 이곳 어딘가에 누워계시리라. 


정인보 선생은 1950년 9월 7일 황해도 시흥서 폭격 사망하셨고, 홍명희 부수상과는 사돈지간이라는 설명도 기자에게 해주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개성 송악산 뒤편 임꺽정의 첫 근거지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시신을 찾지 못해 안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광수의 묘소 삼석에 있는데 기자가 "친일을 한 그 사람이 특설묘지에 묻혀있는게 납득이 가지않는다"고 했더니 김홍곤씨는 "당시 북한에서도 그런 논의를 했습니다만 그가 말년에 진심으로 과거를 뉘우치고 참된 문학인으로 거듭나기로 했기때문에 안장했다"고 한다. 지난 1991년 미국에 살고있는 이광수의 아들이 묘소에 다녀갔다고도 한다.

이 묘지외에 <대성산 혁명렬사릉>(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유격활동을 한132명의 묘)과 <신미리 애국렬사묘>(지도부 9명의 인사가 안장되어있다)고 하는데 그 9명중 내가 알고있는 분은 조소앙, 김규식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뿐이다. 


 



내가 죽기전에 통일이 되어 할아버지 묘소에 참배하고 또다른  혈육의 가족들을 만나 볼 수나 있을른지? 아니면 자유롭게 오가며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수는 있을는지? 이 분단의 한은 언제나 풀릴 것인가? 누워서도 남쪽 하늘만 바라보고 계실 할아버지가 그립다.


큰할아버지(조근영) 회갑연 때, 맨 뒷줄 왼쪽 끝이 아버지이고, 그 옆이 대고모부(이담), 대고모(조애영)뒷줄 가운데 분이 4촌 고모부(박준규), 사촌 큰고모(조동원), 둘째줄 한사람 건너가 동생 학렬, 앞줄 왼쪽 한사람 건너 증조할머니, 큰할아버지(조근영)큰할머니(김종진) 바로 뒤가 어머니, 사촌 세쩨고모(조동옥), 그 옆이 여동생 혜경, 작은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조준영), 나머지 여자분들은 모두 사촌 고모님들.

                                                     

                                                    

                            큰할아버지 정파((靜波) 조근영 어른


당신의 형님이신 나의 큰 할아버지 정파(靜波) 조근영(趙根泳) 어른은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 현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셨으며 학업을 마치신 후 귀국하여 보성고보(普成高普)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이후 일제(日帝)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반대하여 교직을 떠나 고향 주실마을에서 뜻을 기르면서 후일을 도모하셨다. 이러한 중에도 항상 종친을 잊지 않았던 큰할아버지는 당신의 부친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초경독본(初徑讀本)」을 저술하여 주실 마을의 교육에 앞장 서기도 하셨다. 이 초경독본은 호은 종택내에 세워져 있던 영진의숙(英進義塾)에서 마을 청소년들에게 신문화를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 큰할아버지는 경북 치안유지회 회장, 서울특별시 경무국장, 적산관리처장(敵産管理處長) 등을 지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반을 다지는데 일익(一翼)을 담당하셨다. 특히 적산관리처장으로서 일제가 점유했던 재산을 우리나라로 귀속시키는 중대하고도 민감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일체의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아니하고 오직 부강하고 반듯한 국가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 하셨다. 그 결과 오히려 직무를 마칠 때에는 적지않은 빚까지 졌었다고 하니 실로 청렴한 선비라 아니할 수 없겠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큰할아버지는 문교부 문화국장 재임시 국립도서관을 설립하고 국전(國展, 현 대한민국미술대전)제도를 만들었으며 이후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의 교육입국과 문화창달의 터를 닦으셨다. 그리고 국립도서관장 재임 중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맞서 동아일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낸 뒤 사표를 냈다. 이 또한 큰할아버지의 강직한 성품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공직을 은퇴한 뒤에는 특히 종회의 발전에 힘을 써 1967년 11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4년 여동안 병참공파종회장을 지내면서 종친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기고 1982년 1월 18일 서울 자택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무엇보다도 병참공파종회와 한양장학회의 기반을 다진 분이셨으니 후손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일제시절 종중재산을 몰수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종중재산을 개인 명의로 옮겨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훗날 그 문제가 복잡해졌었는데 보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종회 재산 환수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셨다. 회장 취임 직후인 1967년 12월 큰 할아버지는 종회재산 환수를 위한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을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 재판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사재(私財)를 들여 상당한 경비를 부담하면서 재판에 매진하 승소판결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어렵사리 찾은 압구정동 땅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가 많이 상승하였고 후임 병참공파 종회장들의 훌륭한 운영으로 현재 신사동에 대지 1천 여평, 지상 7층, 지하 3층의 한양타운 빌딩을 소유한 실로 훌륭한 종회로 발전하였다. 또한 큰할아버지께서 다진 기반 위에서 시작된 장학사업으로 지금까지 장학금을 받은 문중 학생이 무려 연인원 5천여 명에 총액 18여 억원에 이른다.


아우 준영(俊泳) 어른은 보성고를 졸업하시고 신간회 영양지회의 총무로 일하셨다광복 직후 대한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장을 맡으셨으며 문경 경찰서장을 시작으로 관계에 투신경북 도경국장까지 승진했다가 50 4월 사임하셨다. 6.25 발발후 조병옥 내무장관의 특명으로 경북 도경국장에 재임명돼 일선에서 대구사수작전을 성공적으로 해내셨다. 자유당 독재가 심화되자 민주당에 입당 58년 초대 민선 대구시장으로 선출돼셨고 4.19이후에는 민선 경북도지사를 역임하셨다. 


여기서 나의 작은 할아버지 이야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대구사수의 날'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9)8·18 '대구사수의 날'

 1950년 8월 18일은 대구로선 최악의 위기이자 최후의 항전기회였던 ‘대구사수의 날’이다. 8월 15일, 왜관을 점령한 인민군은 17일에는 포항, 성주, 거창에까지 밀려왔다. 대구시내에 난데없는 박격포가 날아와 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나 하면, 밤이면 팔달교 너머로 먼 포성도 가끔 들렸다. 아군은 결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인민군의 공세가 워낙 거세어 임시수도 대구도 곧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이에 그동안 ‘천도불가’를 호언해오던 정부와 미8군사령부는 17일 밤 긴급회의 끝에 부산으로 ‘천도’키로 결정하고, 18일 새벽 은밀히 움직였다. 덩달아 “비전투원은 조속히 피난시키라“는 긴급 ‘소개령’도 새어나온다.

이날 밤 공교롭게도 만취 끝에 회의에 불참, 18일 아침 7시쯤 장관실(도지사실)로 달려온 조병옥내무부장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중대회의에 참석 못해 반대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놓진 자책감에 못지않게, 왜 이런 패배적인 결정을 내렸느냐는 반발심 때문인 듯 했다. 잠시 후 장관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뜻밖에도 조준영(趙俊泳)경북경찰국장의 목소리였다. “유석!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결정이오? 즉각 취소토록 하시오!”

도경국장이 내무장관에게 감히 “유석(維石)!”하고 호를 부르며 고함을 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망하고 나면 무슨 놈의 군대이고 경찰이냐”는 항변과 함께, 계급관계를 떠나 같은 한양 조씨로써, 일찍부터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유석은 조국장장형인 조근영(趙根泳. 미군정 경북경찰총수)과, 중형인 제헌의원 조헌영(趙憲泳. 조지훈시인의 부친)과도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이런 인연 등이 얽혀 전북보안과장이던 조준영은 불과 닷새 전인 8월12일부로 경무관으로 승진되면서 경북도경국장에 취임한 터였다.

준영은 일경출신 부하들로부터는 간혹 고지식한 인물로 비쳤으나 선비기질의 우국지사형 인물임은 누구나 인정했다. 당시 공석이던 과장을 대리해 도경사찰과 부과장으로 갓 부임해 있던 최석채(崔錫采·뒷날 원로 언론인)경감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조국장이 때마침 도경국장에 취임해 있었던 것이 대구로선 참으로 행운이었다.고 뒷날 회고한 바 있다. 조국장의 격정적인 항의에 자극받아, 조장관이 ‘대구소개령’ 취소요청을 위해 워커 미8군사령관에게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워커에게 유석은, “대구에서 철수하면 부산도 지켜낼 수 없다. 경찰력만으로 라도 대구를 사수할 테니 즉각 ‘소개령’을 취소하고, 8군사령부의 후퇴도 재고하기 바란다.고 애써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소개령’이 취소됐으니 즉시 취소사실을 공포하라”는 장관의 전화를 받은 조국장 “나는 수성교 쪽을 맡을 테니 최과장은 신암교 쪽으로 가시오” 하고 말했다. 최경감이 형사 2명을 대동하고 스리쿼터에 올라 신암교 쯤에 이르자, 공포에 질린 피란민들이 물밀듯이 밀려가고 있었다. 군중 속엔 밀짚모자를 눌러 쓴 국회의원들도 보였다. 그는 신암가도를 달리며 메가폰으로, “소개령은 취소되었소! 대구는 까딱없으니 모두들 귀가하시오!라고 거듭 외쳤다. 한 시간 넘게 외쳐대자 사태는 진정되었다.

이날 두 조씨의 발 빠른 반전(反轉)작전이 없어서, 시민들의 공황심리를 막지 못했더라면 대구의 방어망은 뚫렸고, 대구가 무너졌다면 전세의 역전은 불가능했을 거란 게 정설이다. 저마다 살려고 달아난 텅 빈 도시를 등지고는 아군의 ‘필사즉생식(必死則生式)’ 전의가 생길 리 만무했던 것이다. 8.18 ‘대구사수의 날’을 계기로 아군은 낙동강교두보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고, 이를 고비로 반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8.18을 기억하는 시민은 거의 없지만 조병옥과 조준영은 각각 휴전 후 야당으로 출마한 국회의원선거와 민선 대구시장 선거에서 대구시민들의 보답성 지지를 받아 가볍게 당선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9)8·18 '대구사수의 날' /매일일보


이 두 분의 누이동생나의 대고모이신 애영 할머니는 부모님 몰래 서울로 오셔서 배화여고를 나오셨다. 여고 시절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다 발각되어 투옥되기도 했으며결국 당신은 1929년 광주학생사건 때 배화여고 주동자로 입건되면서 무기정학을 당하였고 그 때 감방에서 읊은 연시조 <그리운 조국(祖國)>이 전해져 오고 있다.

저서로는 일제로부터의 광복과 함께 혼탁한 세상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그리워한 당신의 심정과 당시대에 여자로 태어난 운명으로 당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 아쉬움문학과 예술에 대한 동경을 잘 아셨던 당신의 조카나의 아버지가 책 제목을 지어주신 시조 집 슬픈 동경(憧憬)과 주실의 부녀자들이 읊었던 가사와 당신 자신의 창작을 모아 엮은 은촌내방가사집(隱村內放歌辭集)등을 남기셨다갑작스럽게 치른 혼사와 시집살이하는 여인의 정서를 담아낸 가사형식의 <신혼가(新婚歌)(1932)>등이 있다., 시조 시인으로 현 국정교과서에 당신의 시조가 몇 편 실려있다전 법무부장관 이호(李浩)님의 형수이시기도 하다.


선조어른들고향 이야기를 쓰다 보니 집안 자랑이 되어가는 느낌이다못난 놈이 집안 자랑한다더니 내가 그 꼴인가. 




* 관련 참고자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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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온다 - 제헌국회 회의록 속의 건국》 펴낸 권기돈 박사

      [재북인사의묘] - 한국민족대백과
     "96년 탈북한 成蕙琅씨 "서울 올 생각 없다" 문화일보 : 1999-12-2

      [만석꾼 패가망신기] 창녕성씨, 김일성 왕조 충성 / 성혜림, 김정남 출산후 .../...김정일의 장인 성유경은 정년퇴직 후 일본 유학시절 친구 조헌영(趙憲永)과

      [이상곤 박사의 한의학 이야기]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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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曉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2.10 낙여옹 17.08.14. 05:06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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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양 (宜陽) 17.08.23. 07:44
    2017년 8월 22일 메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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