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회] 청록집(靑鹿集)과 청록파(靑鹿波) / 아버지 조지훈- 삶과 문학과 정신/ [8장] 아버지문학 歷程, 20대/2017/08/29/08:00 조광렬

작성자曉泉|작성시간17.08.27|조회수784 목록 댓글 0


[42회] 아버지 조지훈- 삶과 문학과 정신/ 조광렬


[8장] 아버지문학 역정(歷程)

       20대


#청록집(靑鹿集)과 청록파(靑鹿波)


    무렵 박목월 선생의 시 15, 박두진 선생의 시 12편 그리고 아버지의 시 12편을 모아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게 된다. 1946, 내가 한 살 때였다. 이 시집의 장정은 서양화가 김용준(金瑢焌)이 맡았고, 시인의 얼굴 소묘는 김의환(金義煥)이 그렸다. <청록집>은 출간되자마자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이념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에 출간된 순수시집이 의외로 문단과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훗날 회고하시기를 <청록집> 간행을 을유문화사에서 요청 받고 이를 연락한 분은 박두진 시인이었고, <청록집> 원고를 서로 뽑아주던 것은 어느 눈 오는 밤의 성북동 우리 집에서의 일이요, <청록집>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목월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우리 세 사람뿐이다고 말씀하셨다. 또 아버지께서는 청록집에 대해 이렇게 말씀 하셨다.

  

    

<청록집> 출판기념회, 꽃다발을 든 청록 3인, 우측부터 아버지, 박목월, 박두진 시인(1946년)

   

    

<청록집> 출판기념회, 꽃을 들고 앉은 청록 3인 뒤로 소설가 김동리가 보인다. 문인들중 뒷줄 맨 우측이 <문장>로 함께 등단한 이한직 시인. 


   <청록집>은 우리 세 사람 공동의 첫 시집이라는 것과 거기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 해방되기 직전 주로 발표의 길이 막혔던 암흑기에 쓰여진 것들임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우리 세 사람은 같은 시기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또 같은 무렵에 <문장>이라는 같은 문예지의 추천시인으로 시단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발표할 수 없었던 시를 발표하게 된 해방의 감격, 혼란한 정치조류 속에서 시의 바른 길을 제시하려는 의욕, 우리 시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교량으로서의 전통의 집성, 이런 것이 어울려서 <청록집>을 엮게 한 객관적인 기연(機緣)이 되었지만, 이러한 의욕이 어째서 하필이면 우리 세 사람을 한데 묶음으로써 시도된 것일까. 우리 세 사람은 해방 전 시단의 최후의 사람이요 문단 전체가 좌경했던 당시에 그 사상의 격류 속에 반립(反立)하여 시의 고독을 같이 지키고자 했고 작품경향이 다같이 민족애를 기조로 한 전통적 율격이 짙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연은 이 세 사람이 같은 잡지의 추천 동인이었다는 정의(情義) 라 할 수 있다. 같이 시단에 등장한 김종한(金鍾漢)은 요절했고, 이한직(李漢稷)은 학병에서 안 돌아왔으며, 박남수(朴南秀)는 아직 북한에 있을 때인 당시에 만난 사람이 세 사람인데다가 이들은 본래 시세계에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세 사람의 시에서 공통점을 요약한다면 민족과 자연, 모어(母語)에 대한 애정과 기다림의 정서라고나 할까, 향토에 대한 애착과 슬픔의 목가(牧歌), 자연에 대한 관조(觀照)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정한(情恨), 자연 속에 마음의 빛을 찾는 생리와 신념의 기도, 이것들은 모두 다 그 공통된 에스프리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민족적 현실의 초극을 위한 저항을 노래하진 못 했으나 붓을 꺾고 숨어서 시를 씀으로써 치욕의 페이지에 이름을 얹지는 않았고, 쫒긴 이의 슬픔 속에 잠겨서 시를 썼으나 퇴폐에 몸을 맡기지 않아 희구(希求)하는 슬픔으로 빛을 삼았던 것만은 확언할 수 있다. 

                                                     -<세대> 창간호. 1963 6     


    

                    청록 3인, 왼쪽부터 아버지, 박목월, 박두진 


<한국일보> 고종석 객원논설위원은 그의 시집산책 <시인 공화국 풍경들>에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집- 풍진(風塵)을 피하는 법 이란 소제목을 붙인 글에서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청록집>의 저자들은 눈앞의 역사적 격랑에 눈감고 자연이나 민족전통이나 관념 속으로 퇴각함으로써 정치적 이성의 사나운 발톱으로부터 문학을 보전할 수 있었다. ... 이 세 시인의 공동시집 <청록집>(1946)에 묶인 시들은 식민지 말기의 전시체제와 해방 뒤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놀랍게도 이 시집에는 그 역사적 격동의 수레바퀴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시적 화자들의 생활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청록집>의 사회적 진공(眞空)상태는, 이 시집 보다 한달 늦게 간행된 오장환<병든 서울>이 정치적 자의식으로 충만 돼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또렸 하다. 이점을 지적하는 것은 이 저자들이 정치적으로 백치에 가까웠음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어떤 역사적 격랑 속에서도(경우에 따라서는 그 격랑이 거셀수록) 인간에게는 사적 정서를 향유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심미적으로 행사하도록 돕는 것이 문학적 욕망의 한 가닥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 자연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청록집>에서 드러나는 이 세 시인의 문학적 육질은 사뭇 다르다. 박목월이 두드러진 외형률을 형식적 근간으로 삼았던데 비해, 조지훈박두진은 특히 박두진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리듬을 선호했다. 박목월의 문학공간이 온통 시골 서정으로 채워졌던 데 비해(지나는 길에 지적하자면 그의 시에서는 경상도 방언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조지훈은 민족문화의 과거에도 눈길을 건네는 복고취향을 드러냈고 박두진은 어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정신의 거처로서 자연을 노래했다. 박목월 편에서 종교의 냄새가 나지 않는 데 비해 조지훈은 불교의 빛깔을 다소 띠고 있고 박두진은 사뭇 기독교적이다. ...

   화사하기로는 조지훈이 가장 앞선다. <승무><율객(律客)>은 전형적인 예인(藝人)의 시다. 거기선 자유당 정권 말기에 '지조론(志操論)'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선비 조지훈 지사 조지훈을 쉽게 떠올릴 수 없다. 하늘하늘한 예인과 꼿꼿한 지사를 동시에 보듬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지훈은 희귀한 정신이었다.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단 조지훈완화삼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지훈"이라는 제사(題詞)를 단 박목월의 나그네는 일종의 켤레를 이루고 있다.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완화삼에 박목월이 역시 시로써 화답한 것이 나그네. 두 시 모두 나그네의 풍류를 그리고 있지만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같은 시행에서 보듯 완화삼 쪽이 한결 을씨년스럽다. <완하삼>의 여섯째 행 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나그네>의 넷째 연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되살아났다. 조지훈은 이에 대해서 압운(押韻)이 없는 현대시에도 이렇게 절실한 심운(心韻)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정겹게 언급한 바 있다. ...

   청록파의 세 시인은, 48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조지훈을 포함해, 모두 복 받은 삶을 살았다. 그들은 대학에 자리잡고 대가(大家)의 위의(威儀)당당함으로 후진을 길렀고, 제자들(의 제자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존경은 이들의 시보다는 인격에 돌려지는 것이 더 마땅할 것 같다.

                                                                                                                   - <한국일보>, 2005,12.29

    

    

진해에서 부산으로 여행하는 배 위에서 아버지와 박목월, 박두진 청록 3인(1954년)



   이 공동시집 <청록집>에 실린 박목월 시인의 시 <청노루>를 소개한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 집


   산은 자하(紫霞)()

   봄 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 ㅅ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청(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노루>


                청록 3인 공동시집<청록집>(1946년, 을유뮨화사)

   

훗날, 아버지는 1963년 어느 날 밤에 쓰셔서 그것을 <나의 시작노트>라는 제목으로 <세대>지 창간호에 실으신 글에서 청록집 이후 25년여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적지 않게 시풍(詩風)이 달라졌음을 유의하는 이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엔 한 때 청록(청록(靑鹿)이던 우리들은 늙어갔다. 셋이서 가던 길을 혼자서 가는 것 같다. ... 시를 통해서 듣는 서로의 소식 속에서 아직도 두 벗의 체온과 향기가 남아있고 새로 마련된 공통의 세계를 발견하고 놀라기 까지 한다. 늙을수록 깊어지는 시의 우정은 어린 날의 꿈과 같다고 하셨다.

   다음은 목월 시인의 어느날의 일기에서 발췌한 글이다.


   . 두진의 <거미와 성좌>출판 기념회에 늦게 참석

   두진 옆자리에 지훈. 그 건너편 앞자리에 내가 앉았다. -동명 그릴 8층,

   두진은 자기 말대로 학처럼 여윈 모습이 화려한 불빛 아래, 더욱 정결해 보였다. 그 옆이 위풍이 당당한 지훈의 풍채 좋은 모습이 대조적이다.

    “청록파 두목들이 모인 이 자리에……. 사회자의 말이다. 청록파라는 말이 이런 자리에서는 더욱 우정을 돋우게 한다. 농담이면서도 농담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는 꼭 이루어질 것 같다.

           -박목월 시인의 어느 해 1 14일 일기에서./<아버지와 아들> (대산 출판사) 50~51.


    

박두진 시인의 시집 <거미와 성좌> 출판 기념회에서 축사하는 아버지(1963년)


   청록파 세 시인의 우정이 옅보이는 글이라서 옮겨 보았다. 아버님 말씀같이 옛날엔 한때 청록이던 이 세분의 시풍도, 관심을 갖는 분야도 서로가 점점 달라 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시 <혼자서 가는 길>도 이런 의미로 읽힌다.


   이제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 놓고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는


   저녁 노을만이

   무척 곱구나


   소슬한 바람은

   흡사 슬픔과도 같았으나

   시장끼의 탓이리라

   술집의 문을 열고


   이제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하던 사람들도

   다 떠나 버렸다.


   마지막 남은 것은 언제나

   나 혼자뿐이라서 혼자 가는 길


   배신(背信)과 멸시(蔑視)와 포위망을

   그림자 같이 거느리고

   나는 끝내 원수도 하나 없이

   이리 고독(孤獨) 하고나.


   이제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잃어버린 것은 하나 없어도

   너무 많이 지쳐 있어라

   목이 찢어지도록

   외치고픈 마음을 달래어


   휘정 휘정

   혼자서 돌아가는 길 위에는

   

   오래 잊었던 이태백(李太白)

   달이 떠 있다..

                       <혼자서 가는 길>


   이 세 분은 어느 날 만났을 때, 젊어서 청록집을 냈으니 우리 세 사람이 이다음에 머리가 하얗게 늙으면 꼭 <백록집>도 함께 냅시다.고 약속도 하셨다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키시고 나의 아버지가 먼저 마흔 여덟(1920~1968)에 타계하시는 바람에 <백록집>은 영 빛을 보지 못했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셨음이 (박목월 선생은 예순 셋(1916~1978), 박두진 선생은 여든 둘(1916~1998))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만나셨을 이 세 분은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백록집> 얘길 하고 계실까? 인생이 무상하니 문학도 덧없음을 나누고 계실까? 언젠가 내가 이 세분을 위해 <백록집>을 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어느덧 지난 2006년이 <청록집>이 나온 지 60년이되는 바로 그 환갑의 해였고 올해가 2017년이니 진갑도 지났다. 그 백록집을 못 내드린 채 71주년을 맞는 아쉬움에 젖어있던 터에 이를 안타까워하는 칼럼이 있어 그 일부를 여기 잠깐 소개한다.


    ... 박목월은 민요조의 리듬을 자기화하여 애틋하고 소박한 향토적 정서를 형상화 했다, 조지훈은 정적인 전통적 미학을 전아한 가락으로 표상화 했다. 박두진은 건강한 생명력의 표상으로 자연을 노래하면서 자연너머의 광명을 희구한다.  <청록집>은 모국어를 빼앗겼던 암흑기에 그것을 지켜주고 밝혀주는 일을 감당했다. 광복 앞과 뒤의 단절됐던 한국시문학을 이어주면서 청록파라는 유파로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청록집>이 올해 탄생 60주년, 환갑을 맞는다....<청록집’> 60주년을 주제로 그 흔한 세미나 하나 열린다는 소식조차 없는 것은 문학하는 사람들의 태무심이 정도를 넘어서서 한국문학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외국어의 홍수 속에 한국어는 짓밟히고 있다. 모국어를 비틀고 짓이기면서 말장난이나 하려 하는 한국 서정시의 오늘날 모습을 보면서 <청록집>을 펼친다. 청록파의 역사적 의미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김선학(문학 평론가동국대 교수) <조선일보>.2006.04.28.



그리고  작년 2016년에는 우리가 살던 성북동에선 성북문화재단(구청장 김영배)이 <청록집>발간 70주년을 맞아  '성북주민들이 바라보는 시인 조지훈'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취지의 기획전시가 <[조지훈 시인]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라는 제목으로 11월 30일 부터 12월 9일까지 개최되었다고 한다. 감사한 일이다.


     

이 전시회 개장식에 초청되어 '우리 형제들의 성북동 어린시절'을 그린 그림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이 막내 태열(1955년 생)오른쪽이 둘째 학렬(1948년 생)

내 바로 아래 동생 학렬이 우리 삼형제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이 전시회에 참석 못한 것이 아쉽다.

 

 *관련 자료 및 기념행사 더 보기

     <청록집> 발간 70주년기념 전시회

     아래 제목들을 클릭 하세요.

시인 조지훈 기리는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전시회


뉴스1  2016.11.30.  네이버뉴스
성북구, 교과서 너머 시인 조지훈을 기리다2016.11.30 | 여성종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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