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회] 박목월 선생의 회상 "노상의 검은 장갑-지훈과 나"(1) / 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과 정신/[15장]문단에서 본 아버지의 시세계 그리고 인품/2017/10/13/08

작성자曉泉|작성시간17.10.05|조회수332 목록 댓글 1


[87회] 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과 정신 / 조광렬


[15장]문단에서 본 아버지의 시세계 그리고 인품


# "노상의 검은 장갑-지훈과 나 " - 박목월


음은 박목월 선생의 회상 "노상의 검은 장갑 - 지훈과 나"이다. 


1

여름의 눈부신 포양(暴陽)이 내리쬐이는 길바닥에 떨어진 검은 장갑 한 짝 - 그것은 지극히 불길한 운명을 암시하는 충격적인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그것을 응시하였다. 그러자,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그 자리에 스러질 것 같아, 얼른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 오래된 일이 지훈 영결식장에서 조시를 읽고 제자리에 돌아와, 가슴에 북받치는 명인(鳴咽)을 겨우 참고 있는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야말로 불의에 살아난 이 기억의 조각이 무슨 뜻을 가지는 것일까.

   그것은 틀림없이 1948년 8월 어느날의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8월 25, 6일경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날짜를 이처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그 무렵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내가 지훈의 기별을 받고 상경했기 때문이었다. 고려대로 옮긴 그가 후임으로 나를 추천하려는 뜻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전보를 받고 밤차로 상경하여 이튿날 정오쯤 그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나는 창경원 담이 막 끝나는, 햇빛이 쬐이는 눈부시게 표백된 노상의 전찻길에 까맣게 떨어진 그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검은 상장과 같은 한 짝의 장갑은 그 후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지훈을 잃게 되자, 앞으로 지훈을 생각할 때마다 그를 향하는 마음의 길 위에서 언제나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상징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창경원(현 청경궁) 돌담길

   

   위에서 지훈을 찾아가던 길이라 하였다. 그 당시만 하여도 성북동으로 가려면 버스나 택시가 거의 없었다. 종로 4가에서 바꿔타게 되는 돈암동행 전차를 이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젊은 우리들은 전차를 기다리기 보다는 걷는 편이 한결 상쾌했다. 창경원 담을 끼고, 가로수의 그늘이 덮혀있는 원남동 길도 좋았지만, 혜화동 로터리에서 보성학교 옆을 지나게 되는 고갯길은 혼자 걸으며 시상을 가다듬기에 알맞았다. 지훈도 시내로 나오려면 이 길을 이용하였다. 간혹 그의 집에서 내가 유(留)하고, 아침에 그와 함께 시내로 나오는 일이 있었다. 그는 그 당시에도 쿨룩쿨룩 기침을 하였한 편이었다. 늠름한 허우대에 비하면 몸이 약한 편이었다. 조금만 흥분하여도 눈가장자리가 분홍빛으로 상기되곤 하였다. 그는 고갯마루에 이르면 버릇처럼 걸음을 멈주고, 두루마기 앞자락을 한편으로 걷어붙이며 우이동 연봉을 우러러 보는 것이었다. 먼 산을 우러러보는 지훈의 모습, 그것은 가장 지훈다운 것을 느끼게 하였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러운 일 아직은 내게 없는데 머언 산을 바라보면 구름 그리매를 보면 나 수정같은 마음에 슬픈 안개가 어린다.

 

그의 <雲霧>의 1절. 이것은 성북동 그 고갯길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어서 그는


   성북동 넘어가는 성벽 고갯길 우이동 연봉은 말없는 石山 오랜 풍설에 깎이었어도 보랏빛 하늘 있어 장엄하고나.

 

하고 노래하였다. 이 <雲霧>에 있어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러운 일이 없다 - 는 이것이야말로 그의 생애를 단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봐도 부끄러운 일이 없기를 다짐하는 그의 신념은 그의 모든 처신에 의젓함을 가지게 하였고,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게 하였으며, 모든 일에 공명정대하기를 염원하고, 소인과 사귀기를 피하며, 항상 선비다운 지조를 지키려고 애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의 입버릇처럼 뇌이던 말을 빌리면, 대의명분이 서지 않는 일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이 정상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풍모를 가지게 하였다. 명동골목에서나 종로네거리에서 그 헌칠한 장신에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이 날리며 먼 산을 바라보듯 고개를 젖히고 걸어가는 그를 발견하게 되면, 그야말로 '山이 걸어가듯' 하는 의젓함과 믿음직스러움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지훈의 그와 같은 신념이 그 자신의 처신을 옹색하게 만들지 않는 것은 그의 깊은 도량과 선비다운 멋과 사리를 밝게 통찰하는 그의 탁월한 식견 때문이었다. 으로 그는 한갓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비범한 사람이었다.


   - 만일 그에게 나라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장례일을 살피던 어느날, 시인 김종길 씨의 술회. 나도 동감이었다.


종군 문인단 시절의 청록 3인


지훈의 풍모와 자세를 나는 "청록 세 사람의 그 것과 비교해보곤 하였다" 라는 것은 모든 일에 '우리 세 사람'을 비교해 봄으로 나 자신의 정확한 좌표를 찾으려 애썼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내게 있어서 대단히 유효한 것으로 30여년의 문단생활에 나 자신 '큰 허물'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지훈과 두진)의 인격적인 감화와 색제(索制)가 나의 행동에 하나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세 사람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항상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우러르는 것이 지훈이라 함은 이미 말한 바이지만 두진은 직선적인 자세로 눈은 정면만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그의 이념과 신앙 속에서 강인한 의지의 화신상처럼 꼿꼿하게 직립하여 정면을 노리는 것이 두진의 자세였다.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나는 고개를 숙이며 걷는 편이었다. 물론 나 자신의 모습이 남에게 어떻게 비치느냐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좀더 생활에 구애되고, 발 밑을 조심하고 정이 기울어지는 편이다.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훈의 의젓한 모습을 생각함으로 세속적인 누추한 일에 빨려들기를 삼가고, 소심한 나 자신을 경계하는 거울을 삼게 되며, 두진을 생각함으로 진실하기를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날개의 양편에서 날고 있는 두 마리의 비상을 눈여겨보며 자기의 길을 나는 새와 같은 것이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曉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2.04 의양 17.11.06. 10:29
    2017년 11월 6일
    메일 발송
    카톡 발송
    페이스북 공유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