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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 축복의 예화 모음

작성자ks618|작성시간26.06.06|조회수90 목록 댓글 0
축복 예화 모음 
                                                                                                                                                                                                                             봉서방
     





하나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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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사역의 “성공”을 교인 수, 성전건축, 새로운 프로그램, 전국적인 명성과 위신, 혹은 교회 좌석 수 등으로 평가하려 한다. 결국 사업이 번창할 때는“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이고 반대로, 일이 잘 안되거나 활발치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거나 그 일은 대수롭지 않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신앙에 관계된 문제이며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성공”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기준은 뭔가 유형적이고 보다 매혹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지침을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7:23―24에서 자기 평가를 확신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시는데, 이는 외관상 “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주님의 뜻의 과녁을 완전히 빗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과녁이란 “성공”이 아니다. 그것은 충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 신뢰와 봉사에로 부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역의 공적을 측정하지 말라고 분부하신다. 우리는 씨를 뿌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거두실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기독교인의 “성공”의 기준이 되게 하자.



하나님의 사람이 받는 축복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3.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 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이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56:4.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욜2:26.

성경은 찬양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찬양은 우리의 삶에 어떤 유익을 갖다 줄까요?

첫째로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표정이 밝으며, 어려운 일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자극을 주어 마침내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축복들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당신의 삶을 활기차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찬양하는 삶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든 믿는 사람들에게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의 얼굴 표정은 어떻습니까?

무인도에 단 한 권의 책만 가지고 가라고 한다면 곡조 붙은 찬송가를 가지고 갈 것이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지미 카터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퇴임 후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망치를 들고 다니며 집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운동을 벌이고 있다.

먼지와 땀에 찌든 옷과 검게 그은 피부는 그가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미국의 최고 권력자였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보인다.

카터는 지금도 주일이면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자신이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한 유태인 의사가 한 말이 인상 깊다. 하나님은 결코 도움을 늦추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더디지 않다. 우리의 품성에 인내가 없어서 그 도움을 기다리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볼 때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교회를 없애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을 너무 잔인했다. 불로써 죽이고 짐승으로 죽이고 고문으로 죽였다. 그리고 교인들의 사유재산은 다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교회는 거기에 대항할 물리적 힘이 전연 없었다. 군사도 없고 무기도 없었다. 교회가 어려움 앞에 대항한다는 것은 참고 견디는 인내뿐이었다. 세상사람 보기에는 가장 어리석어 보였고 가장 무기력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참고 견디는 이 한 가지 힘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구원의 길은 좁은 길이다. 신앙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지식과 재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성경은 인내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했다.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이 인내가 있어야 할 수 있다. 기도에도 인내가 있어야 한다. 전도에도 인내가 있어야 한다. 봉사에도 사랑에도 다 인내가 필요하다. 교회 일 중에 인내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인내가 없는 복이 없다. 인내가 없는 상급이 없다. 인내가 없는 구원이 없다. 물론 성도의 인내는 도를 닦는 고행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인내 그 자체에 목적이 있음도 아니다. 성도의 인내는 죄에 대해서 끝까지 거부하는 인내를 말하며 선에 대해서 끝까지 추구하는 인내이다. 하나님 말씀이면 철저하게 순종하는 인내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인내를 말하고 있다.

신앙생활에는 빨리 인정받는 것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인정받게 되는 일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인정받아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오랜 후에 찾아오는 복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신앙인은 멀리 보면서 살기 때문에 오늘을 참으면서 사는 것이요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기 때문에 보이는 세계에 마음을 모두 주어 버리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내의 세계이다.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길이 참고 기다리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표현 중에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은 가장 적극적인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참으시는 사랑, 참으로 깊은 사랑이다. 참고 기다리는 믿음 상급을 받을 믿음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요, 환경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 시간이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참아 주는 시간 속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



지나친 풍요는 행복의 깊이가 낮아진다.

"우리들은 대개 필요치 않은 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수많은 물건들을 지나치게 갖고 있다. 한 번 마음먹고 모든 것을 버려 보는 것도 좋다. 그러면 비로소 무엇이 자신에게 있어 진정 필요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지나친 소유, 지나친 풍요의 불행"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순조로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 행복에 대한 감도가 그 만큼 둔화된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인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물건이 지나치게 풍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마움에 대한 감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불행한 것이다." 라고 어떤 학자는 말하고 있다. 극한적인 무(물건이란 원래 생명 그 자체조차도 상실하고 있다.)를 체험했던 김 선생이 이점을 말할 때 멋진 설득력이 있다.


물건 하나, 쌀 한 톨, 아니 살아 있는 그 자체의 고마움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럴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전쟁 중 아주 극심한 식량난을 경험했었다.
그러한 기억들을 지녔던 사람들은 당시를 회상하여 '괴로웠었다.'라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했었다.'라고는 누구 한 사람 생각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주 부족한 것을 이리저리 쪼개서 살아가던 창조적인 기쁨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한 기쁨이나 기백이 이 세상에 없다고 한다면 풍요로운 현재가 오히려 불행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복이란 근본적으로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 선생이 북한산속에서 한 마리 들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을 때, 결코 자기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히려 극한 상황 속에서 끝까지 기백과 긴장감으로 충만 되어 있었으며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할 틈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무엇인가 먹을 수 있었다. 오늘도 얼어 죽지 않았다라고 하는 원시적인 기쁨을 나날이 체험할 수 가 있었을 것이다. 지나친 풍요는 오히려 불행들과 맞싸울 힘이 약화된다. 그 약화되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마음이 약화됨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마음씨"라고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 될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나친 풍요에서 오는 마음의 이완상태야말로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의 감도를 결코 둔화시켜서는 안 된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신비만증 환자

옛날 희랍의 전제국가의 한 왕이 24시간 여색과 주지육림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도와 행복 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을 상금을 걸고 천하에 널리 구하게 하였다. 별별 기발한 새 아이디어들이 실험되었으나 그의 불만도와 갈증은 날로 가중되기만 했다.

새 아이디어의 제공자들은 그를 실망시킨 벌로 사형을 받았다.
어느 날 왕 앞에 행복의 새로운 제안자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왕 앞에 나타나서 꾸짖는 눈빛으로,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쁨과 행복을 원하신다면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왕의 표정은 숙연해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히며, “딸아 그대의 말이 옳도다.”하고 상을 내렸다 한다.


행복이나 기쁨은 주관적이어서 그 내용이 다양하지만 분명히 쾌락과는 다른 정신적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소박하고 가난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한 가요 가운데 “행복 하고 싶어라. 그러나 그대를 행복하게 못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네.”라는 것이 있다. 이 가요는 한 여인에게 속삭인 말이지만 행복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참 행복은 '같이 누리고 나누어 갖는'것이다. 미국의 사망 율의 54%는 비만증 고혈압계통의 병 때문이라고 한다. 사해는 하구는 있어도 유출구가 없어 죽음의 호수가 됐다.

나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정신의 사해(死海)요. 그러한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다. 남을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하여 냉수 한 잔, 티 없는 미소 하나일지라도 정성된 마음의 소모와 아픔을 가지고 나누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요, 사해 인생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비밀한 행복의 교훈인가? 남을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 진다는 것을 나는 예수에게서 배웠다.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어느 날 작은 개가 꼬리를 잡으려고 뱅글 뱅글 돌고 있었다.

큰 개가 물었다. "왜 그러는 거니?" "행복을 찾고 있는 중이야. 누가 그러는데 행복은 내 꼬리에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꼬리만 잡으면 행복을 얻는 게 아냐? 그래서 행복을 얻을 때까지 내 꼬리를 잡으려고 하는 거야." 작은 개의 대답이었다.

"나도 행복을 찾고 있는 중인데, 그런 말은 나도 들었거든. 그러나 꼬리를 잡으려 할 때마다 자꾸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어. 그래서 이제는 내 할 일만 하려는 거야. 그러면 내 뒤를 행복이 따라 다니니까 말이야." 큰 개의 경험이었다.

실로 행복이란 우리의 임무를 이행하고 이웃을 돕는데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행복은 받는데 있지 않고 주는데 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 "우리가 받은 것은 주는데 있고, 용서를 받는 것은 용서를 해주는데 있다. 그리고 영원히 생명에로 태어나는 것은 죽는 데에 있다."



일꾼의 삯

영국 왕이 시민들의 공의심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려고 밤에 길 가운데에 큰 돌을 놓아두었다.
날이 밝자 거리에는 관리, 학생, 회사원 등 많은 사람이 지나갔으나 누구 한 사람 그 돌을 치우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돌을 갖다놓은 사람을 욕했다.


한참 지난 후 어린 학생이 지나가다가 그 돌을 보고는 "이 돌이 왜 여기 있을까" 사람 다니기 불편할 텐데." 하며 돌을 길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돌 밑에는 '이 돌을 치운 자의 삯'이라고 쓴 돈주머니가 있었다.

그 때에 왕은 사람을 보내어 학생을 데려오라고 하여 "우리나라에 너 같은 학생이 있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 한다"라고 하면서 상장과 상금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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