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귀의가 성불이르는 첫 걸음
매화 한 그루를 선물 받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분재 농원을 하는 분이 매화꽃 같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가지고 왔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차 한 잔을 대접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 보살님으로부터 매화꽃 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그 보살님은 장애인이었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각박한 세상살이의 온갖 풍상을 겪으며 두 딸을 키웠는데
그 중 한 명은 출가를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본인의 의사도 물어보고 좀더 진지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지요. 왜 따님을 출가시키려고 하느냐고.
그 보살님은 5년쯤 전에 우연히 반야심경을 해설한 책 한 권을 얻게 되었는데
왠지 마음이 끌려 한 번 읽어 본 것이 두 번, 세 번 연거푸 읽게 되었고
나중에는 달달 외울 수 있을만치 그 책을 읽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도 조금씩 이해가 가고 마음이 즐거워 지더랍니다.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농사꾼이 그토록 간절하게
반야심경을 읽었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게 발아(發芽)된 불심이 딸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두 딸 중 한 명은 비구니가 되고자 하는 마음까지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보살님이 가고 난 뒤 나는 매화 향기를 맡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그 불성이라는 씨앗을 성불의 꽃으로 피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불심이 싹튼 그 보살님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중생들에게 가장 좋은 인연은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歸依)하는 것이야 말로
중생고를 여의고 밝은 광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귀의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어디서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누구에게 어떻게 의지하라는 것일까요?
불성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불성은 우리의 본래 자리입니다.
부모님이 낳기도 전의 본래 그 자리, 우주적 근원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중생심을 여읜 곳입니다. 오랜 업장을 통해 형성된 온갖 악습을 떨쳐 버리고
가장 청정하고 순진무구한 자연의 자리가 바로 우리들의 본래 자리입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성불 하는 것입니다.
귀의란 자신의 본래자리, 성불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내는데서 시작됩니다.
현실적으로 중생이 귀의 하는 곳은 바로 삼보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 귀의하고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의지의 집합체인 승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삼보란 바로 세상이 돌아가는 원동력과 같은 것입니다.
요즘같은 컴퓨터 시대에 비유하자면, 불보는 하드웨어이고 법보는 소프트웨어 입니다.
그리고 승보는 바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운용하는 운영자가 되겠습니다.
불보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스승으로서의 자리에 항상 그대로 여여하게 존재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존경하고 의지하는 대상으로서의 불보는 모든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의지처인 것입니다. 법보는 불보에 이르는 다양한 길,
즉 성불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팔만사천의 경전과 수행법 그리고 방편으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거기에 의지하여 법다운 생활을 하는 것이 올바른 법보에의 귀의라 할 수 있습니다.
승보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귀의해야 할 대상입니다.
초기 불교에 있어서 승보는 승가공동체, 수행공동체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함께 수행하는 무리로서의 승보는 청정성과 부단한 정진이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승보는
스님들의 집단 즉 승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시류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승보가 중생들의 진정한 귀의처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세간인 승단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세간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나는 여러 지역에서 살아 보았는데 불교에 대한 인식이 지방마다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도시의 길에서 스님과 재가자가 싸움을 하면 지나 가는 사람들이 재가자를 나무라며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스님에게 그러면 되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도시에서는 같은 상황을 두고
“세상 말세다. 중이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고…”라며 등을 돌립니다.
언뜻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경우 그 지역 사람들은 귀의심이 있고 뒤의 경우는 귀의심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중생이 스스로 삼보에 귀의하려는 마음이 움트지 않으면 불법인연을 만날 수 없습니다.
스님과 재가자의 싸움을 눈으로 보느냐 자신의 불성에 반조한 마음으로 보느냐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재가자가 귀의의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공덕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공덕의 인연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인간답게 양심적으로 정갈하게 사는 가운데 수시로 귀의의 인연이
다가오고 형성되는 것이니 그 찰라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숙세의 인연을 통해 불법에 귀의한 승단은 과연 중생들의 귀의를
받을 자세가 바르게 갖춰져 있는가에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오늘의 한국불교, 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비판을 함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긴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면을 얘기하는 것은 접어두고 비판 받는 대목들을 점검해서
병든 곳을 치료해 보다 건강한 승단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요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쉽게도 우리 승단은 스스로에게 냉철한 점검의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큰스님이라고 추앙 받는 분들은 많은데 진정 큰 감동과 감화로
세상을 밝게하고 중생고를 덜어주는 큰스님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원 지대방이나 강원 강단에서 큰스님 노릇 백년 하는 것도 좋지만 세상의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하루를 헌신하는 실천적 의지가 세상을 더 밝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고승들은 해외의 고승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갖습니다.
달라이라마나 틱낫한, 대만의 성운스님 등이 세계적으로 존경 받는 분들인데,
그 분들은 모두 세상속에서 중생들과 함께 호흡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단박에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법문을 하거나 친견을 위해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는 권위적인 공간에 들어가 있지도 않습니다.
낮은 곳을 찾아 다니고 고통이 있는 곳에 더 많은 눈길을 주는데서
세계인들이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세상 속으로 자비를 회향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칠보사 조실 석주스님처럼, 평생을 한글대장경불사, 어린이 포교, 복지사업에
헌신하신 분들입니다. 내가 종단 행정을 할 당시 친한 스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석주스님에게 ‘도시 종정’이라는 애칭을 붙인 적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함께 하면서도 스스로 출세간의 위의와 정신을 잃지 않는 분이야 말로
이 세상에 힘이되는 큰스님일 것입니다. 그런 스님이 많아야
보다 많은 중생들이 귀의할 곳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스님들이 스님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중생들은 귀의할 곳을 잃게 됩니다.
요즘 일부 지식인들이나 직장인 불자들이 스님을 모시지 않고 법회를 하고
나름대로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행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모시고 가르침을 받을 스님이 없다는 답답함을 그렇게 항의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귀의는 사랑과 존경입니다. 귀의하는 중생에 대한 승가의 한량없는 사랑과
귀의하는 중생의 변함없는 존경심이 어우러질 때 이 세상은 불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자리, 본래 성품 그대로의 청정으로 돌아가 부처님 법에 의지하는데서
정토의 새벽은 열리는 것입니다. 승단과 재가자들이 함께 여는 정토의 새벽에
‘즉견여래(卽見如來)’의 기쁨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보와 법보는 3천년전부터 항상 여여하게 그 자리에 있습니다.
세상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기에 그 보배를 쓰는 방편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 방편을 가장 잘 쓰는 지혜를 얻기 위한 진정한 귀의가 없다면 세상은 바로
악마의 소굴로 변합니다. 세상과 사람들 의식의 변화가 빠르게 변하는 지금이야말로 승가와 재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절이어서 승가의 반성과 개혁이 절실합니다.
이미 우리는 삼보에 귀의한 부처님의 제자들입니다.
다시한번 귀의의 참 뜻을 되새기고 정진의 고삐를 가다듬으면
누구나 즉견여래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