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 컨트롤과 마인드 컬처
‘마인드 컨트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柰났?것은 79년 마인드 컨트롤을 창안한 호세 실바 박사의 내한 강연회를 기점으로 해서다. 이후 봉준식 신부가 이끄는 마인드 컨트롤 한국지부가 설립되어 80년대 초반 수많은 사람들이 마인드 컨트롤을 익혔다. 마인드 컨트롤은 점진적 이완 방식을 사용해 최대한 육체를 이완시키는 한편 의식의 수준을 낮추어 잠재의식 수준까지 끌어내린 다음, 원하는 상태를 기억하게 하는 심리 조절법을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면 마인드 컨트롤은 이미 70년대 초반 ‘마인드 컬처’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교육되고 있었다. 당시 신학대학 교수였던 천년수 박사는 일본어로 된 관련 서적을 통해 마인드 컨트롤을 알게 되어, 종교적인 신앙심과 마인드 컨트롤, 여기에 우리의 전통적인 수련법 가운데 조심법(調心法) 원리 등을 배합해 ‘마음을 조절한다’는 의미가 아닌 ‘마음(잠재 의식)에 씨앗을 뿌린다’는 뜻의 컬처(culture)라는 이름으로 마인드 컨트롤 기법을 가르쳤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 수련법 이론인 ‘일지심(一止心)이 곧 정(正)’이라는 수련에 임할 때의 정신적 자세를 강조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수련의 정신은‘전통의 선도(仙道)’였고, 기술적인 테크닉은‘마인드 컨트롤’이었던 셈이다.
기수련의 기업화·대중화에 성공한 단학선원
우리 전통의 신선도(神仙道)와 단학(丹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철학, 새로운 가치관이 곧 인류의식이라는 커다란 화두를 내건 수련 단체가 ‘현대 단학’을 보급하는 단학선원이다. 최초의 단학선원이 신사동(현재 단학선원 강남센터)에 문을 연 것은 1985년 5월. 단학선원이 불과 십오년만에 오늘날 소위 신비주의와 함께 세기말 현상의 하나로까지 회자되는‘기(氣) 신드롬’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대외적으로 단전 호흡이나 수련이라는 용어보다는 ‘기(氣)’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선원’이라는 명칭인데, 같은 서울의 강남구 신사동에서 시작되어 폭발적 중흥을 이룬 불전(佛殿) 능인 선원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확하게 말해서, 전국의 단학선원 수련장에는 ‘단학(氣)선원’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국내 최대인 삼백 개의 수련장, 곧 지원을 보유한 단학선원의 시작은 바로 ‘기(氣)’라는 용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단학(氣)선원이 문을 열기 전인 79년, 국내 재벌기업의 하나인 선경그룹에서 새로운 경영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사원들의 ‘패기(覇氣)’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사실이 계기가 된다.
80년대 초, 고(故) 최종현 회장은 ‘氣’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졌고, 측근인 손길승 경영기획실장에게 “기(氣)가 있는지 알아 보라”고 지시하는 한편, 스스로도 각종 관련 서적들을 통해 기의 존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손길승 실장은 단학(氣)선원에서 ‘기’를 찾았고 삼 개월여를 직접 체험한 후, “회장님, 氣는 분명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단학선원과 선경그룹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 것은 86년, 최회장은 단학선원이 파견한 지도자의 지도를 받으며 매일 아침 워커힐의 자택에서 단학선원 방식의 수련을 시작했다. 세간에는 단학선원의 창시자인 일지 이승헌 선사가 직접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때부터 89년까지 단학선원은 물심양면에 걸쳐 최회장으로부터 그룹 차원의 지원을 받게 된다. 그룹 전체의 임직원은 물론 사원 가족까지 건강을 위해 단학선원 방식의 수련을 받게 되면서, 공식·비공식 경제적 지원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단학선원에서 지원을 설립하면, 지원 설립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선경그룹 사원들로 회원 수를 채워준다는 식이었다.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86년 한 해 동안 전국 주요 도시에 무려 열두 개의 지원이 설립된다. 그러나 단학선원이 선경그룹으로부터 받은 지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돈이 아니라 투자 과정에서 관련 임직원들로에게 직간접으로 배우게 된 경영 마인드다. 선경그룹으로부터 배운 경영 마인드로 일지선사는 단기간에 지도자를 배출하는 한편, 지원 설립을 늘려가면서 수련과 관련한 책자나 명상 테이프, 건강제품 등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상품화했다. 또한 회원들에게 건강을 판매하는 한편, 심성수련 같은 이벤트성 행사에 기존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계열사 제품을 그룹사 임직원들에게 판매토록 하는 재벌 기업의 경영 방식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또 기업체에서 사원들의 결속을 다지고 내외부인들을 향한 홍보 수단으로 사보를 발행하듯, 내부자용 소식지와 외부인용 월간지를 겸하는《건강 丹》(현재는 《힐링 소사이어티》으로 제호가 바뀌었음)의 발행을 시작했다. 이 같은 바탕 다지기를 거친 결과 93년에는 서른여섯 개의 수련장이 생겨났고, 96년 1월에 일백 개, 7월에 이백 개, 9월에 삼백 개의 수련장으로 확대되었다. 국내의 다른 수련단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전무후무한 대약진을 기록했으니, 기업적 관점에서 보면 전국에 삼백 개의 직영점을 갖게 된 것이다 . 99년 현재 단학선원은 이미 단순한 수련 단체라기보다는 거대한 재벌 그룹의 양태를 띠고 있다. 단학선원을 모체로 하는 한문화 운동본부가 중심이 되어 국내에 사단법인 한문화원, 도서출판 한문화, 천지인 상사, 한문화 기획, 야외 수련장 천화원(충북 영동), 천화 의원과 기의학 연구원, 인체과학 연구원, 한국 기공사 연합회, 단군 민족 일체화 협의회 등 여러 관련 조직을 갖추고 있고, 건설 및 여행업에도 손을 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공원, 약수터 등 무료 수련장이 이천여 개에다 백육십 개의 직장 단위 수련장을 운영하고 있고, 그 동안 양성된 단학 강사의 수만도 오천 여명에 이른다. 가히 국내 ‘기 신드롬의 주역’‘기 재벌’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일지선사와 단학선원
단학선원을 창시한 일지선사 개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50년 충남 천원군에서 태어나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고, 정신적 방황기에 깡패들에게 맞은 후 태권도와 합기도를 익혔다고 한다. 이후 야간 전문대학에서 임상병리학을 공부하고 단국대 체육교육학과에 편입, 졸업한 일지 선사는 학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장을 직접 운영할 만큼 일가견을 가진 무도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태극권에 관한 책을 통해‘천하무적이 될 수 있는 기의 세계’에 빠져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유일하게 대외적으로 밝힌 이력 사항으로는 한독병원 병리실장이라는 직함이 있다. 단학이라는 우리 고유의 수련 철학 체계를 배워 나름의 체계를 확립한 시기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백일 수련을 통해 “북두칠성이 백회혈로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을 했고, 또 다른 고행을 통해 “천지 기운이 결국 내 기운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한다. 이후 82년 경기도 안양의 충현탑 공원에서 무료 단학 수련을 지도하기 시작, 단학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일지선사는 기 수련과 스스로 말하는 ‘깨달음’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자신이 공부한 기초 의학 분야의 지식을 적절하게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70년대 후반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마인드 컨트롤을 배워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수련법을 체계화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수련장인 신사동 수련장을 운영할 당시까지 일지 선사는 쿵후나 십팔기, 합기도와 같은 무술도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영등포 모임’에 꾸준히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들 사이에서 “무술도장의 퇴조에 따라 건강 쪽으로 가야한다”는 논의가 활발했었다는 소문을 증명이나 하듯, 지압과 안마를 배우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알려져 이같은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단학선원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이다. 그러나 단순한 건강 외에 정신적으로는 전인류적 평화를 이루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지구촌 시대를 맞아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고, 그 실질적 대안으로 우리 민족이 가진 천지인(天地人) 정신을 내세운다.
전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정신, 동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단군의 건국 이념을 포함하는 인류정신으로서 ‘한 정신’을 주장한다. 그리고 ‘한 정신’을 깨닫기 위한 구체적 수단, 곧 수련법으로 신선도와 단학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단학이 아닌 ‘현대 단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동시에 지향하는 목표나 수련법 등을 우리의 전통적인 수련 지침서에서 인용하면서도 결코 어렵거나 깊이가 심오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알기 쉬운 현대적 감성어를 사용하여 일반화시킨다. 따라서 수련 방식의 논리나 체계가 미비하다는 지적을 받기는 하지만, 쉬운 것을 선호하는 젊은 층으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얻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일례로 현재 전국 오십 개 대학에 ‘바숨(바르게 숨쉬기) 동아리’가 결성되어 있다.
단학선원과 선경그룹의 최회장 사이의 밀월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88년 말, 단학선원 창설 멤버인 안동환(선경그?심신수련실장) 씨가 아예 선경 그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안씨는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지만, 최회장은 단전호흡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여 활기찬 실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수련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반해, 단학선원의 정신적인 방향이 단군 사상 쪽으로 강하게 기울어지는 데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단학선원이 확장 또 확장을 거듭하던 93년 6월, 신문 사회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서울 동부지청 특수부 박준모 검사는 3일 정력제, 죽염 등을 불법 제조, 단학 수련생들에게 판매한 혐의(보건범죄단속에 관한 법률위반)로 한국 단학협회 회장 이승헌 씨(41.단학선원 원장)와 사범 강기문(28), 이종화(24) 씨 등 3명을 구속했다. 이씨 등은 90년 5월부터 지금까지 단학선원 기숙사(포이동 184)에서 생강, 꿀, 감초 등을 섞어 만든 60개들이 정충단 1천6백여 갑과 시중의 죽염을 재포장한 천화 죽염 2천3백여 개를 단학선원 본부와 전국 32곳의 산하분원에서 수련생들에게 팔아 2억7백만 원 상당의 부당 이득을 챙긴 혐의다 … . '
이후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일지 선사는 93년 말부터 본격적인 미국 체류를 시작한다. 물론 91년부터 미국을 순회하며 교포들을 주대상으로 하는 강의 등을 계속해온 결과로서 이미 필라델피아에 수련장이 개설되어 있는 상태이기는 했다. 어쨌든 일지선사는 이후 해외수련장 개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 볼텍스가 있는 아리조나주 세도나에 미국 본부를 마련, 주로 그곳에 체류하고 있으며 미국 외에도 캐나다, 최근에는 남미의 파라과이에도 수련장을 여는 등 해외 지원의 수만도 삼십 개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