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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련문화 30년(퍼옴)

작성자바람소리|작성시간06.10.16|조회수5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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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련문화 30년 1 | 임경택교수의 강좌 2004/10/14 09:32
http://blog.naver.com/comppe/80006581858

글쓴이 김인곤 씨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78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건강인생 기(氣)를 살린다'와 같은 여러 시리즈 기사를 연재하는 등 '기와 건강 부문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다. 칠십년대 초반부터 여러 단체에서 수련을 했고, 중국에 유학해 소림 무술학교 청강생 과정, 북경 골상학원 객원 학생 과정, 왕리핑 선생에게 사사를 받고 돌아왔다. 현재 자신이 기획위원으로 재직중인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수람기공과 단전호흡'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의 수련문화 30년 1
김인곤의 취재파일
김인곤  (1999 년 9 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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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십대 후반의 남자 치고 태권도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없다. 혈기 왕성한 십대 또는 이십대 그 시절 동네마다 무덕관, 지도관, 청도관, 정덕관 해서 도장이 없는 곳이 없었고, 한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이른 새벽 골목길 아침잠을 깨우는 것은 태권도 수련생들의 구령 소리였다. 하긴 당시만 해도 군 입대 시 태권도는 테니스나 바둑과 함께 특기자 혜택을 받아 좀더 편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바로 ‘태권도 한국’의 한 풍경이다. 더구나 부대에 따라서는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의무적으로 검은 띠를 따야하는 곳도 많았던 그 시절.

이때까지만 해도 한학(漢學)을 하신 우리의 할아버지들께서는 아침에 일어나시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두 귀를 잡아당기는가 하면, 빨래 방망이 같은 둥근 통나무를 지근지근 밟으셨다. 또한 그저 앉기만 하면 발바닥을 주먹으로 때리거나 손가락 발가락을 주무르거나 한자 투성이의 책을 소리내어 읽으시면서 허리를 좌우로 흔들곤 하셨다.
바로 그런 동작들이 도인술·양생술이라는 이름의 건강법이라는 것을, ‘야 - 압!’ 하고 주먹을 내지르는 태권도 흉내에 바빴던 손주들은 알 리가 없었다.

 
수련 문화의 태동

중국 또는 일본이 원산지인 당수도 또는 공수도 체육관과 공존하던 수 개의 태권도 문파가 국기원이 설립된 72년을 기점으로 정부 차원에서 하나의 단체로 통합 정리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러자 일부 태권도 문파는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해 해외로 빠져나가 태권도 열기를 잠재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동네의 태권도장은 홍콩의 액션 배우 이소룡(73년 사망)의 ‘정무문(精武門)’이나 ‘당산대형(唐山大兄)’의 등장에 힘입어 합기도·십팔기·쿵푸 같은 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때쯤 일제 치하에서 교육을 받으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어에 능통하셨던 우리의 아버지들 가운데에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그저 틈만 나면 일본어 책을 읽던 분이 계셨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니시 가쯔조 같은 걸출한 인물이 등장해, 서양의학이 아닌 새로운 대안의학으로 운동요법인 모관 운동이나 붕어 운동 같은 니시식(西式) 건강법이나 인도의 요가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로 일본 책을 통해 소위 지식층이 들여온 요가는 신체 단련법 위주로 된 ‘하타 요가’여서, 그때 어린 우리들은 요가라는 말 대신 ‘꼰다리 또꽈’로 부르곤 했다.



소설 『단』의 실존 인물 봉우 선생

지금은 거의 일상 용어가 되어버린 ‘단전호흡’ 또는 ‘운기조식’이라는 용어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84년 기존 중국판 무협소설을 능가하는 재미로 채워진 소설 『단』이 신생 출판사인 정신세계사에서 출간되면서부터였다. 더구나 소설 속의 주인공인 권필진 옹이 실존 인물인 봉우 권태훈 옹을 모델로 했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소문이 돌면서 소설 『단』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에 이르렀다.

1900년 서울 종로구 제동에서 태어나 94년 타계한 봉우 선생은 한의사로, 그리고 단학을 보급하는 한국단학회 연정원(韓國丹學會 硏精院)의 창시자로도 유명했지만,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의 최고직인 총전교로도 이름을 떨쳤다. 소설 『단』은 제목이 의미하듯 상당 부분 실제 상황이 포함되어 있지만,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소설이라고 작가이자 당시 정신세계사 초대 편집장이었던 김정빈 씨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독립문을 한 걸음에 뛰어넘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나는 기러기가 떨어지는’초능력의 발현이 우리의 전통적인 수련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한 암시를 주었다.

최고 인기를 누렸던 중국판 무협소설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은 완전한 허구라고 생각했던 무협지의 주인공이 초능력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각종의 수련 관련 용어들, 다시 말해 운기조식이나 분골착근, 환골탈퇴, 전음입밀, 주화입마 같은 현상들이 실제로 우리의 전통 수련문화인 선가비법(仙家秘法) 속에 존재했고, 또 그런 과정을 거친 실존 인물이 있다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봉우 선생은 ‘평생을 통한 수련으로 얻게 된 통찰력’에 근거, 『백두산족에 고함』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 민족은 인류 최초의 동방문명(東方文明)을 건설한 백두산족이며, 사물 즉 물질문명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대인 정신문명으로 되돌아온다는 물극필반(物極必返)의 원리나 백두산족에 찾아온 삼천 년만의 대운이 연계된 황백전환론(黃白轉換論 : 지금까지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온 서구 문명의 선도적 역할은 이제 한 세대 안에 끝나고 황인종 특히 한국·인도·중국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명이 열린다는 이론)에 의해 머지않아 홍익인간 이념을 바탕으로 한 백두산족이 절대 평화의 세계 통일을 이룬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처럼 독특하고 신선한 사상 체계는 우리 것에 목말라 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열화 같은 독자들의 요구를 감지한 정신세계사는 85년 여름 류관순 기념관에서 봉우 선생의 특별 강연회를 열었고, 무려 이천오백 여명의 청중이 몰려드는 대성황에 힘입어 열흘 후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또 한 차례의 강연회를 개최, 역시 대인기를 끌었다.
이 같은 관심에 부응, 봉우 선생은 86년 2월 종로구 내수동 한국 빌딩에 한국단학회 연정원을 열었고 그 이후 ‘호흡법 곧, 조식법을 통해 단학을 수련한다’는 말의 줄임말인 ‘단전호흡’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섯살 때 모친으로부터 호흡법(調息法)을 배웠으나 열살 되던 해에 수명이 다해 이승을 하직하고 선계(仙界)에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서 봉우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권옹이 그토록 알리고 싶어했던 단학은 천부경에서 시작되어 조선시대 중엽, 정북창이 남긴 수단서(修丹書)인 용호비결(龍虎秘訣)을 논리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봉우 선생이 총전교로 이끌어오던 대종교는 92년, 후임 안호상 총전교의 쿠데타 사건으로 권 총전교가 비상 대권을 발동하는 등 파란의 내분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구한말 세도가의 외아들로 자라 일본에 유학했던‘상류층 자제’ 봉우 선생에 대한 다양한 재평가가 등장했는데 “원래 무협지를 광적으로 좋아했었다” “일본 유학시절 ‘오까다식 정좌법(精坐法)’을 배운 것이 전부” “칠십년대 중반 매일 아침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네시 삼십분쯤이면 청산거사가 창시한 국선도(그 때는 정각도) 수련장에 나타나 세 시간씩 수련을 하는 바람에 수련장 문을 닫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꼬리를 이었다.

수련을 시작할 때 중요한 점은, 맹목적으로 수련에 뛰어드는 것보다 어떤 수련법이 자신에게 적합한 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수련법을 찾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여러 가지 수련법을 경험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의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자신에게 적합한 수련법을 찾고 난 뒤에는 곁을 돌아보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다.‘무엇인가를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는 분심(奮心)이 수련의 경지를 높이는 근원적이고 또 결정적인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마라톤 선수에게 축지법 훈련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어 국내 체육계의 기대가 한껏 고조되고 있던 83년, 무교동 대한체육회 회장실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붓으로 직접 쓴 유려한 한문체의 편지는 ‘본인은 어려서부터 우리 전통의 심신 수련법인 단학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소싯적에 충남 온양에 살았는데, 축지법을 배운 관계로 아침을 먹고 온양에서 출발해 한양에 와서 볼일을 보고, 한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곤 했다. 말로 하기는 어려운 선배들의 엄청난 능력을 얘기하기는 무엇하지만 내가 배운 축지법을 마라톤 선수들에게 전수하면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편지는 당시 체육회를 출입하던 기자들에게 우스갯 소리로 공개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앙일보 기자였던 필자는 특별한 호기심을 품고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편지의 주인공은 밤 열한 시에 자신의 거처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 때 필자는 세검정의 계곡에 위치한 한의원으로 찾아가, 수 차례 대한체육회로 날라왔던 흥미로운 편지의 주인공 여해 권태훈 옹을 만났다.
장시간 축지법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으나 그 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이 많았다. 축지법에 대한 권옹과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 축지법이 실제 가능한 것입니까?
답 : 마라톤 선수가 최고 속도로 계속 달리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자신이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끝까지 달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문 : 가장 빠른 속도로 끝까지 달릴 수 없는 것이 문제죠.
답 : 왜 그렇게 못하는데?
문 : … . 아마 숨이 차고 힘이 들어서일 것입니다.
답 : 계속 달려도 숨이 안 차고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문 : 그렇겠죠.
답 : 숨이 차는 이유는 두 팔을 위 아래로 흔들기 때문이야. 두 팔을 좌우로 흔드는 주법을 익혀야 해. 아베베를 봐. 달릴 때 두 팔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어. 다음으로 발자국이 한 일자로 남아야 해. 호랑이를 봐. 발이 네 개지만 발자국은 한 줄로 나잖아.


결국 마라톤 선수에게 축지법을 가르치고 싶다는 권옹의 이야기는 지금은 폐간된 《주간 중앙》에 화제성 기사로 소개되었고, 이후 모 텔레비전방송에서 인터뷰와 함께 권옹이 직접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눈이 쌓인 집 앞마당에서 간단하게 축지법 시범을 보이는 모습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권옹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하던 육군사관학교 출신 L씨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대한 육상연맹은 축지법 훈련을 희망하는 꿈나무와 2진급 선수를 추천, 실제로 축지법훈련에 돌입했다. 권옹은 대표 선수들을 희망했으나 스포츠과학 연구소에서 2주마다 경기력 향상 측정을 받는 조건으로 훈련 결과를 보면서 결정하자는 쪽으로 합의를 이뤘다.
훈련을 실시하면서 스포츠과학 연구소의 의견은 “심폐 기능은 향상되고 있으나 근력은 오히려 퇴보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에 권옹은 특수한 약(한약)을 복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희귀 약재 구입을 위해 홍콩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희귀 약재가 국내로 반입되는 과정 중에 김포세관에서 말썽이 일기도 했는데, 결국 축지법 훈련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수 년 뒤 당시 축지법 훈련을 받았던 장거리 선수 가운데 종목을 경보로 바꾼 K모군은 세 차례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결과를 낳아 “축지법은 역시 달리는 법이 아니라 걷는 법인 모양”이라는 비아냥거림이 관계자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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