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득의 道로서 국선도
(김 내균)
제가 청산 선사님을 처음 뵌 것은 1970년 대학 1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지난 1987년에 뉴코아 스포츠 센터에서 오랫동안 벼르던 국선도를 처음 시작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를 처음 지도해 주신 분은 선사님의 자제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시작한 국선도 수련을 여유가 조금 생기면 그만두고, 건강이 나빠지면 다시 시작하기를 92년까지 몇 차례 반복하였습니다. 심적인 부담을 “나 홀로” 수련으로 덜어보고자 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수련을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관리소홀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저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시차를 두고 모든 것들이 하나 둘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버티던 건강까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천적으로 작은 심장에 부정맥, 저혈압, 항문 소양증과 치질, 지방간, 위궤양, 전립선 비대증, 디스크, 변비, 불면증 그리고 일주일이면 서너 차례 찾아오는 두통... 모든 희망을 하나 둘 다 놓아가고 있었습니다. 치질은 수술을 권유 받고 있었고, 전립선은 수술 직전의 단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방에 틀어박혀 한동안 이렇게 버티며 지냈습니다. 머리는 장발장 머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 견딜 수가 없게 되어 이발소를 찾았습니다. 달포만의 외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발사가 제 머리를 찬물로 감겨주는 사이 갑자기 질식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아, 죽을 때. 죽을 때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겠구나.” 하는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2002년 국선도 수련장을 이렇게 해서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건강회복보다는 고통스러울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1주일에 세 차례 수련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힘들어 수련이 끝나면 두어 시간 이상을 누워 쉬어야 했습니다. 여름이 지나면서 차츰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수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꼬박 3년을 개근하면서 사범님의 정성스러운 지도에 따라 틈나는 대로 수련을 했습니다.
국선도에 대한 고마움은 이때부터 제 가슴 속에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국선도 관련 책자를 사 읽기 시작했습니다. 청산선사님의 책도 그때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선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수련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몇 가지 내용들은 시쳇말로 좀 황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록 무협소설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일지라도 재미있게는 읽었습니다. 건강을 되찾게 해 준 국선도였기 때문에 국선도란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든든하였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국선도에 대한 관심은 1년 전 광화문 수련원의 초급지도자 과정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이곳에서 흰 띠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체계적인 호흡법과 행공동작 하나하나에 대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심신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소중한 내용을 몸의 변화를 통해 배웠고, 국선도에 대한 많은 편견을 여기에서 바로잡았습니다. 이 지도자 과정을 통해서 국선도의 가치를 조금씩 확인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평생을 철학을 한 사람입니다. 대학원 때에는 칸트를 연구했고,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양철학과 심리학도 나름대로 공부하였고, 종교 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만심으로 국선도 책을 접하였습니다. 칸트와 플라톤 철학이 넓은 바다였다면 저에게 청산의 국선도는 작은 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큰 대양은 상념과 사변의 바다이었고, 작은 샘은 생명의 샘이었습니다. 상념과 사변의 바다가 사이버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작은 샘은 물리적 공간, 생생한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은 샘, 옹달샘은 대양보다 더 컸습니다. 살아 숨 쉬는 대자연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 둘 포기해가며 삶의 끈을 조금씩 놓고 있던 때에 제게 희망과 용기를 준 것은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도, 절도, 심리학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제 몸에 변화를 가져다 준 국선도였습니다. 국선도에 대한 오만에 찬 인식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생각이 아닌 몸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국선도는 이론으로서가 아닌, 제 몸과 호흡 방식에 자극과 변화를 줌으로써 허물어져 가는 심신을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그것은 수신연성의 道였습니다. 국선도를 통해 몸과 마음이 서서히 강건해지면서 비로소 부모형제, 그리고 저에게 소중한 모든 것들이 다시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말과 이론에 의해 사람이 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실증적 체험이 수반되지 않는 사변이란 대체로 공허한 법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럴 수 있어 보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론과 신념, 신앙의 체계가 널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리를 주관적인 감정과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심신의 수련을 통해 몸소 체득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진리도 구체성을 떠나서는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구체성은 육신일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인식은 건전한 육체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국선도는 이렇듯 수신을 통해 마음을 바로 닦아가는 유일한 우리 민족의 수련법, 체득의 道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신과 수심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선도 수련의 목적을 청산 선사님은 극치적 체력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숭고한 도덕력을 지닌 전인적 인간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저는 왜 수련하는 일에 도덕이란 말, 그것도 숭고한 도덕이 필요한지를 몰랐습니다. 국선도의 훈에 대한 의미도 “바른 마음가짐으로 수련을 하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 국선도 수련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인 것처럼, 도덕력과 정신력, 체력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셋은 눈과 코, 입이 모여서 얼굴이 되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부분들의 집합이 아닌,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한 실체의 다양한 속성들과 같은 것으로서, 동질적인 氣의 변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心田善化가 왜 모든 수련의 기본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때늦게 국선도를 만나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건강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난해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모든 신념과 잡다한 이론 체계로부터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검증 가능한 실증적 수련을 통한 합리적 체득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 길을 일컬어 일찍이 청산선사께서는 “이입은 어려우나 행입은 쉽다.”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이입은 이론의 길이고 행입은 실증적 체득의 길일 것입니다. 국선도는 모든 종교와 사상, 이데올로기와 대립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다양한 문화와 사상, 이념이나 종교적 사유가 국선도를 통해 보다 실증적으로 견실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선도가 개개인의 자기수련과, 끊임없는 내적 성숙을 통해 국력신장과 국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이 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행복은 국선도로 통한다.”고 말하는 시대가 오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국선도 창립 39주년을 축하합니다. 국선도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한 층 더 단합되고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청산 선사님을 스승으로 받드는 모든 수련인들에게 보다 넓은 아량과 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국선도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는 모든 분들과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저를 지도해 주신 여러 사범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 말씀 드립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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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수련기는 국선도 창립39주년기념행사 시 발표된 내용입니다.
(김내균님은 전 중앙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