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출산수련기]
‘내가 내 뱃속의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우듯이 하늘은 또 나를 그렇게 키워주고 있구나’
제가 아이를 가졌을 때는 1997년 5월, 중기 후편 수련을 할 때였어요. 처음에는 수련을 계속해도되나 걱정이 되더라고요.
임신 초기는 태아가 자궁에 착상을 하는 시기라서 조심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기혈순환법도 그렇고 정리운동도 그렇고, 동작들이 좀 과격하잖아요. 그래서 고민이 좀 되었죠. 그때 우리 국회에는 최낙규 수사님이(지금은 사범님이시지요) 오셔서 지도를 하셨는데, 총각이셨어요.
기본적인 것은 말씀을 잘 해주셨는데(예를 들면 배에 무리가 가지 않게 호흡할 것), 그래도 직접 수련을 해가는 저로서는 궁금한 것이 참 많더라고요.
그래서 본원전수장에 계신 정원법사님을 찾아뵈었어요. 정원법사님은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시지요. 정원법사님은 먼저, 수련을 계속해도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삼음교는 누르지 말고, 무리하게 몸을 비틀지도 말고, 무리하게 몸을 뒤로 제치지도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배에 힘이 들어가는 동작은 절대 금물이라고도 하셨고요.
정원법사님 말씀을 명심하면서 기혈순환법 한 동작 한 동작을 해봤어요. 모든 동작을 평소하던 것의 반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했어요.
그리고 행공은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를 원칙으로 세우고 했고요. 그러다보니 배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인심법(忍心法)의 하법(下法)과 중법(中法), 그리고 배를 땅에 대야 하는 사리정별법(事理正別法)의 수법(水法)과 화법(火法) 같은 동작은 못 했지요.
처음에는 이렇게 몇몇 동작을 빼가면서 후편을 하다가, 동작을 빼지 말고 그냥 전편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전편을 또 얼마 동안 했어요.
1997년 8월 29일 국회에서 여수에 계신 김광현 법사님을 초청해서 말씀을 들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개인적으로 찾아뵈었더니 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여수전수장에도 임신해서 수련을 한 사람이 있는데 임신해서도 계속 수련을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안 나와서 궁금해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더라, 아이를 낳았다고. 그렇게 출산 하루 전에도 나와서 수련했으니 걱정말라.’ 이런 말씀이셨어요.
그때 말씀이 저한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워낙에도 믿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그렇게 경험한 사람이 있다니까 더 안심이 되는 거지요.
그리고 김광현 법사님이 지금 무슨 수련단계냐고 물어보시길래 후편을 하다가 힘들어서 전편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후편을 하다가 왜 전편을 하느냐고, 후편을 그대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날부터 후편으로 다시 바꾸어서 무리다 싶은 동작은 그냥 넘어가면서 조심스럽게 했어요. 후편도 하다가 힘이 들 때는 그대로 누워서 쉬었어요.
그리고 배가 불러올수록 오래 서 있는 것이 무리가 되는 것 같아서 서서 하는 동작은 몇 개만 하고, 결가부좌를 조금 했다가 정리운동 들어가기 전까지 그냥 누워서 편하게 쉬었고요.
그리고 임신해서는 내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호흡을 했어요. 배에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요. 그랬더니 호흡에 변화가 오더라고요. 어느날 숨이 밑으로 툭 떨어지더니 시원하게 쉬어졌어요. 그 뒤로는 계속 그렇게 편한 숨이 쉬어졌지요.
‘아하, 내가 동작에만 신경을 쓰면서 호흡은 가슴이 콱콱 막히도록 했구나’ 하는 것도 임신을 하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리고 또 하루는, 대자연에 나를 맡긴다 생각하고 누워서 편안하게 호흡을 하는데‘내가 내 뱃속의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우듯이 하늘은 또 나를 그렇게 키워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이상하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인데 왜 이런 생각이 들지?’ 한편으로는 이상하면서도 뭔가 중요한 깨달음 같아서 지금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답니다.
그 전날 운동을 한답시고 저녁에 언덕을 오르내린 게 아무래도 무리였던가 봐요. 그때가 오후 세 시였는데, 약간 긴장되더라고요. 천천히 호흡을 시작했어요. 여섯 시 넘어서는 견딜 만큼 아픈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요. 의식은 단전에 두고 들이마시는 숨과 내쉬는 숨을 같게 하면서 호흡을 했어요.
아홉 시쯤부터는 배가 많이 아파 오기 시작했어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했지만 통증을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배가 어떻게 아파 오나 가만히 지켜봤어요. 갑자기 콱 아픈 게 아니라 서서히 아파 와서는 얼마간 굉장히 아프고, 다시 서서히 아픔이 물러가대요.
꼭 바다 저 멀리에서 파도가 밀려와서 해안에 철썩 부딪쳤다가 스르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요. 거기에 맞추어서 호흡을 해봤어요. 서서히 아파 올 때 숨을 들이마셨지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들이마셔지는 숨이 20초쯤 되었나?
그 다음에는 몇 초인지 셀 정신도 없어요. 그냥 들이마셔진 숨을 멈추고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아픈 게 물러나나 싶어 숨을 가만히 내쉬면서 숫자를 세어보니 열 정도 되었어요. 그렇게 했더니 아픈 와중에도 견딜 만은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아픔이 어찌나 정확하게 반복이 되는지 쉬고 있을 틈이 없는 거예요.
저녁도 못 먹어서인지, 점점 기운이 빠지면서 한번은 호흡을 놓쳐버렸어요. 그때 그 아픔이란…. 제가 간 곳이 종합병원인데, 보호자가 분만대기실에 들어올 수 없었어요. 혼자서 진통을 겪으려니 어찌나 외롭던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나 남편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 같더라고요.
안 그래도 힘든데, 울면 더 기운이 빠질 것 같아 외로움이고 뭐고 그냥 호흡에만 집중했어요. 조금 지나니까 들이마시는 숨이 점점 짧아지면서 대신 정신 못 차리게 아픈 시간이 길어졌어요. 숨을 멈추고 통증이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점점 힘이 부치는 거예요.
그러다가 “엄마, 같이 가요” 하는 헛소리까지 하고요. 저도 모르게 정신이 깜빡 나갔나 봐요. 언제 분만실로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정신을 놓쳤다가는 큰 일 날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마음을 강하게 먹었지요.
간호사가 와서 내진을 해보더니 그새 많이 진행되었다면서 분만실로 데리고 갔어요. 그때가 10시 40분 쯤 되었을 거예요. 정원법사님이 출산 때 숨을 들이마셨다가 그 숨을 아기가 나가는 쪽으로 강하게 밀어내라고 하셨거든요.
그 말씀을 기억했다가 분만실에 들어가서 그대로 했어요. 숨을 크게 들이마셔서 멈춘 상태로 있다가, 의사가 “힘주세요!” 할 때 있는 힘을 다해 아기가 나가는 쪽으로 숨을 강하게 밀어냈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 만에 아기가 나왔어요. 거짓말처럼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요. 아이를 낳다가 웃는 여자를 ‘푼수’라고 한다는데, 저도 까딱했다가는 푼수가 될 뻔했다니까요.
드디어 아이를 보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즐거워지는 바람에 웃음이 막 나오려고 했거든요. 입원실로 돌아와 미역국을 먹고 나서 휘영청 밝은 달을 보고 있으니 배불러서 수련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더군요.
옆에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봐주셨던 국회 국선도 회원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떠오르고요. ‘내가 어떻게 국선도란 걸하게 되었을까?’ 국선도와의 인연이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지던 밤이었답니다.
<이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