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국선도 수련기 모음

호흡으로 병을 넘고

작성자현제(안영식)|작성시간19.04.29|조회수203 목록 댓글 0
호흡으로 병을 넘고 


부산서면전수장 안용우(부산 국제신문 게재) 

신체 건강했던 내게 병마의 먹구름이 덮친건 1992년 10월. 조짐은 월초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것이 그토록 심각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철인이었다.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는 건강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확신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날도 나는 동료교사와 함께 배드민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면서 주저앉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몇 분이 지나면서 다시 정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시 3,4일이 지났다. 공중에서 스매싱을 때리고 떨어지는데 왼쪽 무릎 아래 부분에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정말 강렬한 아픔이었다. 이것 역시 몇분 후에는 사라졌다. 

그 주 토요일에는 해운대 여중에 근무하는 친구와 그의 동료 교사들과의 친선 테니스 시합이 있었다. 한 세트가 끝나고 두 번째 세트로 들어섰을 때 다시 왼무릎에 통증이 느껴지면서 그 아픔이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불행하게도 이번에는 그 고틍이 쉽게 사라져 주지 않았다. 

그날밤 나는 친구의 집에서 하루를 지냈다. 그 다음날 나와 친구가 속한 테니스 동아리의 월례대회가 있었는데 아픈 다리를 이끌고 다시 집에까지 갔다가 나올 엄두가 나지 않아 친구 부인에게는 커다란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던 것이다. 

친구의 차로 양산에서 열리는 월례대회에 참석은 했으나 다리가 너무 아파 시합은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필 그 날 내가 처음으로 가입시킨 후배와 짝을 맞추려는 회원이 없어 나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월례대회 시합을 모두 마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저녁에 있었던 회식에서도 계속 격렬한 고통에 휩싸여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대하며 지냈다. 

일주일이 넘게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병명은 조인트 마우스(joint mouse)로서 연골이 파열되어 그 조각이 무릅에 머물러 통증을 유발시키는 것이니 일주일 정도만 약물과 물리치료를 병행하면 쉽게 나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지. 그 순간만큼은 의사가 하느님처럼 보였다. 정말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고 스스로 기쁨에 차 어쩔 줄 몰라 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오히려 증세는 더 악화되었다. 이주일이 지났다. 왼쪽 무릎의 통증이 오른쪽까지 전이되었다. 다시 의사와 만남을 주장하여 상담을 했지만 의사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갑갑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나에게 그는 짜증으로 응대했다. 그 후로 겨울 방학이 오기까지 수많은 병원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의사는 없었다. 그저 주사나 약 장수가 있었을 뿐이다. 

두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나는 심한 경제적 부담만을 안은 채 이제는 버스 정거장 하나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있었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출근을 준비하던 어느 날 아침, 바지를 갈아 입던 나는 갑자기 허리를 몽둥이로 두드려 치는 격렬한 통증과 함께 장작나무처럼 무너져 내렸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굽히지도 펴지도 못하는 처참한 상태였다. 이제 모든 게 끝이구나 싶었다. 다리에 허리마저. 숨마저 가빠왔다. 아! 한스러운 나이 이십 구년이여 "어머니 어머니 나 좀…" 출근도 못하고 하루종일을 고꾸라진 채로 지냈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기력을 되찾아 어머니에게 부축을 받으며병원으로 갔다. ”디스크 초기증세네 한 일주일 치료하면 되겠는데.” 난 이제 그 말을 믿지않았다. 얼마나 많은 의사가 완치를 장담했던가?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슬그머니 물러나 앉던,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오히려 짜증과 불친절로 은근히 병원에도 못 나오게 처신하던 그 의사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절망이었다. 앞이 깜깜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스물 아홉. 한창 정력적으로 일 할 나이에 나는 다리 병신이 되어 버렸다. 그럭저럭 두 다리 넘는 시간이 흐르고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그 동안에 많은 침과 주사 그리고 투여한 약과 무수한 물리치료, 이것들은 그저 하나의 헛된 몸짓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기나긴 방학에 걸어 보기로 했다. 

무리해서 온 병이니 쉬면 나을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바램이었다. 동료 교사의 친척이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관절에 좋다는 한약을 지어 놓고 40일이 넘는 시간을 오로지 요양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방학이 다 끝나 가는데도 호전은 커녕 병은 악화 일로에 있었을 뿐이었다. 

무기력한 다리는 허리로 옮겼다가 온몸으로 퍼져 전신 무기력증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근육의 여기저기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머리에는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 일고 눈에는 언제나 시뻘건 핏발, 온 몸의 여기저기에서는 핏덩어리 같은 것이 손에 잡히고, 책 한 권을 5분도 지탱해 내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팔의 근육, 다리를 갈퀴로 긁어내는 것 같은 이상한 가려움, 피부가 터져 버리는 듯한 통증이 자주 엄습하고, 조금만 목청을 높여도 피가 머리로 솟아 현기증에 눈앞이 깜깜해지며 실신 일보직전까지 가는 나는 살아있는 송장이었다. 

겨울방학을 아무런 소득 없이 보낸 나는 드디어 관통침을 맞으려는 결심을 했다. 우리학교 체육선생님이 관절염으로 몇 년을 고생하다가 한 방에 나았다는 그 관통침. 맞는 것이 끔찍해서 그렇지 맞기만 하면 틀림없이 나으리라는 장담을 하던 동료교사의 말을 쫒아 드디어 나는 어머니와 함께 광안리에 있는 관통침쟁이를 찾아 나섰다. 

다리를 약간 저는 할아버지가 나의 증세를 듣고 진맥을 하더니 병도 아니란다. 자기의 침 한방이면 벌떡벌떡 뛰어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란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침술이라 잘못되면 병신이 되지만 시술에 성공만 하면 이제 아픔은 끝이 날 것이라고 한다. 

그러더니 아픔이 시작된 왼쪽 무릎을 내라더니, 무릎 바로 위 허벅지에서부터 반대편 허벅지를 향해 젓가락같은 침을 찔러넣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묘한 오기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병신이 되든 완치가 되든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리라. 침은 다리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밀어 넣기를 멈추더니 침의 위치를 설명해 준다.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금. 진행을 계속한 침 은 잠시 후 반대편 허벅지에서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고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는 나보고 다리를 움직여 보라고 했다. 겁이 났다. 

신경이 잘못되어 다리가 안 움직이며 어쩌나 떨리는 가슴으로 발까락에게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발가락을 볼 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이제 됐어요. 꽝꽝 디뎌도 끄덕 없으니 걱정 말아요." 그가 나의 눈에는 마치 구세주처럼보였다. 이제 나의 고통도 끝이 나는구나. 오십 만원이 넘는 침 값과 한약 값을 치루고 문을나설 때 어머니와 나는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느꼈다. 

그토록 괴롭히던 병이 나를 떠나다니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그 할아버는 돌아가시면 안되겠다. 오래오래 살아서 사람들을 치료해 줘야지.”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미쳐 버스 정거장에도 못 가서 끝이 났다. 

나는 여전히 다리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며칠 뒤 나는 허리가 고장인 것 같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허리에 같은 침을 맡았다. 그 침은 오히려 왼팔의 가장 굵은 힘줄 하나를 겨드랑이 밖으로 퉁겨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왼팔을 45도 이상 들어올릴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부작용에 대해 말을 하자 그느 또 나의 왼팔을 침으로 뚫어 버렸다. 

그 할아버지도 역시 다른 의사와 같았다. 짜증, 불친절, 자신의 무능을 그런 식으로 표시하고는 침 값도 약 값도 그냥 받아 챙겼다. 

양약에 불신을 가지게 된 나는 고양이, 지네 닭, 소뼈, 개소주 등 민간 요법에 주로 의지하며 한약도 끊임없이 지어다 먹었다.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 채, 학교에서 필기는 학생들에게 대신 시키고, 언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겨우겨우 설명을 해가며 버텨가다가 다시 여름 방학을 맞이하였다. 

떠들거나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어도 나에게는 그들을 제지하거나 선도할 육체적 능력이 없었다. 그 해 여름, 매스컴에서는 포도요법으로 온통 떠들썩하였다. 류머티스, 신경통, 관절염, 대장염 심지어는 암이 포도요법으로 나았다느니,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포도요법 2주만에 완치되었다느니 정말 굉장하게도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떠들어대었다. 

그토록 많은 시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의 귀는 왜 그리도 얇던지 나는 다시 희망을 안고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레몬 즙으로 대장을 씻어내고 이틀을 물만 먹으며 완전히 굶고 그 후로 4주간 3시간 간격으로 포도 반 송이씩, 변비를 방지하기 위해 씨와 껍질까지 먹어가며 정말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한 달 보름간의 투쟁을 했다. 

하지만 오로지 나아보겠다는 집념 하나로 다른 음식의 유혹을 견뎌가며 성공적으로 포도단식을 완성했다. 그러나 통증은 전혀 완화되지 않았고 몸무게만 77Kg에서 67Kg으로 줄었다.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도 잠을 못 이루고 얼굴은 살이 빠져 온통 주름 투성이가 되어 보는 친구들마다 10년은 늙었다고 걱정스러워 했다. 

게다가 오랜 시간의 단식으로 말미암은 대장 경직으로 인한 변비로 돌처럼 딱딱한 변을 몇 일에 한 번씩 항문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겨우 보게 되었을 뿐이다. 

드디어 통증은 내장으로까지 번져갔고 한 여름인데도 나는 엄청난 추위와 싸워야 하는 정말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남들은 더운데도 나는 추웠다.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여름에도 잠바를 입고 다닌다고 놀려대었다. 

그 당시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변명할 아무런 의욕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병마와 아무런 승산도 없는 싸움을 해 나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가을이 성큼 내 곁에 다가와 다친 지 벌써 1년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후 자연식으로 어느 정도 깨끗한 몸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어 몸이 무척 가벼움을 느끼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책에서 이도이치병(以道以治病)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도로써 병을 다스린다. 단전호흡으로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마음이 끌렸다. 나는 여러 도장을 찾아 다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의 마음을 끈 것이 바로 국선도였다. 그러나 처음 소개받은 부산대학 앞의 도장까지 다니기에는 거리적으로 너무나 무리가 있었다. 114에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국선도도장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었고, 그곳을 찾으면서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수련은 15분간 준비운동, 45분간의 단전행공, 30분간의 마무리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준비운동과 마무리 운동은 일반 체조와 비슷했고 45분간의 행공은 여러 동작을 취하며 고요히 단전을 통해 숨을 쉬는 그런 수련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국선도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뭐 이런 걸로 사람의 병이 낫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달리 해볼 방법이 없는 것을, 그저 나는 몇 개월을 아무런 확신도 없이 열심히 도장 문을 열고 닫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과 발에서 미세한 열기 같은 것이 감지되었다. 다른 사람보고 만져 보라고 하면 물리적으로 싸늘한 나의 손을 보고 그들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빈정대기만 했다. 그들은 느낄 수 없지만 나는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반응이 나의 몸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나에게 한 가닥 믿음이라는 것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 이 국선도라는 것에는 뭔지 모를 신비한 그 무엇이 담겨져 있나 보다.' 이제 도장을 가는 것이 그리 지겹지 않았다. 야릇한 어떤 설렘을 가지고 나는 부지런히 도장을 찾았다.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이었던가. 갑자기 수련 중에 나의 몸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절제하려해도 절제할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나의 몸을 뒤흔들고 펄쩍펄쩍 뛰게도 하고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내 몸을 강하게 내팽개치게도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얼굴의 근육은 마치 뇌성마비 환자처럼 뒤틀려 보는 사람을 끔찍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고 이거 내가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국선도 나부랭이 때문에 내가 드디어 완전한 폐인이 되는구나. 안절부절못하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사범은 너무도 태연하게 나의 반응이 당연한 것이니 그저 부지런히 수련이나 하라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고무호스에 물이 지날 때 호스가 꿈틀거리듯이 나의 막혔던 기혈에 기운이 통하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한달 가까이 그 진동이라는 것은 내 몸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범이 말했다. 

"너무 오래 진동에 몸을 맡기면 안됩니다. 이제 마음으로 움직임을 잡으세요."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서히 나의 마음은 나의 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진동이 나오기 시작하다가도 마음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내 몸은 다시 정적인 상태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제 그때 했던 사범의 이야기가 이해된다. 내가 건강을 되찾게 되면서 점차 진동이 찾아오는 횟수와 격렬함의 정도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훗날 나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이 같은 고민을 말해오면 나도 사범과 같은 대답을 하게 되리라. 

어느덧 여름방학에 시작한 수련은 벌써 초겨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날도 나는 수련을 하고 있었다. 45분 행공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내 몸에 내 자신이 스스로 혈도를 짚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뒤로 벌렁 넘어간 나의 몸은 가부좌를 튼 채로 일직선으로 펴지더니 무언가 뜨거운 물결이 허리를 강타하며 다리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다. 아! 그 빠르기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치 그 순간 나는 슈퍼맨 같았다. 2년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한 서러움을 풀어내려는 듯 뛰고 또 뛰었다. 집으로 들어선 나는 어머니의 품에 쓰러져 펑펑 울었다. 

이제 나의 한이 이것으로 마감되는 것 같았다. 

그 다음날 나는 여전히 통증을 느꼈다. 믿어지지 않도록 힘에 차 있던 어제와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고통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완전한 건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그 확신은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 후로도 계속 나의 몸은 진보와 후퇴를 되풀이했으나 긴 시간을 두고 볼 때 나의 몸은 계속 건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호흡에 취하지 않은 채로 아무런 고통 없이 테니스를 치게 되었고, 지난 교내 체육대회에서는 7년의 공백을 깨고 400m릴레이에서 전력질주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도장 사람들이 국선도를 세상에 펼친 사람을 보고 사부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것을 보면 참 우스운 사람들이라고 비웃었었다. 하지만 이제 사부님은 나의 신앙이 되어 버렸다. 

"저 놈이 저 것이 무당이 되려는 것이 아녀?"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는 내 모습에 거정이 많이 줄어드신 어머니께서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이상한 동작으로 몇 시간씩 수련을 하곤 하는 나를 보시며 하는 농담 섞인 말씀이셨다. 호흡에 취한 채로 미친 듯이 달렸던 그 감격의 순간이 있은 지 한 달이 채 지났을까. 

나는 또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잠을 자고 난 자형이 목에 디스크 증세를 느끼며 고통을 호소하기에 그저 안마나 해 주려고 했는데 놀라웁게도 나의 손은 저절로 자형의 혈맥을 찾아 지압을 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지압을 받은 후 자형은 금방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너무도 신기했다. 나의 몸 어느 구석에 이런 능력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 후로 나는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었다. 발목을 심하게 삐었던 제자가 지압 한 번으로 낫고 턱 관절염에 걸렸던 동료 교사가 한번의 치료로 낫고 3년 동안 고생했던 관절염 환자가 역시 한번의 시술로 뛰어다니게 되고, 몇 년을 끌어온 어머니의 허리디스크가 몇 개월의 연속된 치료로 정상을 되찾고 어느덧 나에게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치료에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치료가 영구적인 것은 더욱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다소의 개운함만을 느끼고는 끝이었고, 내가 치료해서 완치되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부위가 아파 오곤 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치료 후 손상된 나의 기를 보충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사부님(청산선사)께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기치료를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아픈 사람은 스스로 수련을 해야만 완치될 수 있다. 영원한 건강의 유지는 충분한 수면, 건전한 식생활, 편안한 마음, 적당한 운동 그 외에 가장 적극적인 건강의 유지법은 바로 수련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가능한 지압은 피하고 그저 수련을 권하기만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 수련을 꾸준히 해낼 정신적 여유가 없다. 그들은 너무나 빠르고 쉽게 병이 낫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들 인생의 그 어느 곳에도 그런 것은 없다. 일반적인 병원,한의학, 민간요법에도 완치는 없다. 그런 것들은 그저 잠시 병을 억누르거나 숨기고 회복에 다소 도움을 줄 뿐 생활습관을 개선하지 못한 사람에게 병은 다시 찾아든다. 

수련한지 팔 개월쯤 되었을까.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다닐 때도 선천적으로 뻣뻣한 체질을 타고난 덕택으로 허리를 구부려 손가락이 땅에 닿지 않아 언제나 시험에서 최하 점수를 받던 내가 손바닥이 자연스럽게 땅바닥에 닿게 되었다. 

건강하고 젊을 때도 고작 30개의 팔굽혀펴기에 그치던 내가 손바닥도 아닌 손가락으로 60여개의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구나무서기도 마찬가지였다. 

벽에 기대 물구나무를 서던 내 몸이 저절로 허공에서 똑바로 서지는 것이 아닌가? 수련의 효과는 육체만이 아닌 정신에서도 일어났다. 수련을 하기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약 15분여 걸어서 올라가는데 갑자기 파란 하늘에서 참희란 두 글자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의 30년이 넘는 인생이란 죄악의 덩어리였구나. 모르고 지은 죄 그리고 알면서도 저지른 죄는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나는 진정 죄인이로구나 우스운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하고 평온한 일이던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 때보다 훨씬 더 평화스럽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한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목사님도 찾아보고 스님도 찾아보고 불교 경전, 능엄경, 정토삼부경, 밝받는법(삶의길), 천수경, 선생경, 금강경, 혜명경, 참동계, 코오란, 성경, 진경, 도전, 아바타, 채근담, 명신보감 등 온갖 종교 와 선, 정신수양에 관계된 책들이 내 손을 거쳐간 뒤에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기독교의 십일조였다. 

기독교인이 하느님에게 바치는 십일조는 그들의 죄의 몫이다. 나도 죄의 대가로 십일조를 바치자. 그러나 그 대상은 종교 재단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인 불쌍하고 가난한 일반 민중 이어야 한다. 

난 병의 원인이 테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다. 병이 테니스를 치는 도중 표면화되었을 뿐 진짜 원인은 내 삶의 방식과 마음으로부터 온 것임이 분명하다. 

수련을 깊이 하는 사람은 자기 몸 속의 병을 볼 줄 안다. 그리고 그 병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의 과정에서 수련자는 병의 원인과 치유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국선도의 혜택을 혼자 누리기에는 죄스러운 마음이 들고 사부님의 뜻에도 어긋난다는 생각에 나는 우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선도 교실을 열어 3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한 반은 26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월, 수, 금 아침 8시에 수련을 하고,또 한 반은 25명의 학생들이 학부모 두 분과 함께 화, 목, 토에 수련을 한다. 우리나라의 체육교육은 절름발이이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건강해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경쟁해서 이기는 방법만을 가르치고 있다. 올림픽에서 따는 메달의 숫자는 많아졌건만 국민들의 체력은 더욱 약해졌다.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 고유의 기공이나 무술로, 인도인들은 요가나 명상을 통해 국민건강을 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그들을 배우자 하여 여러 종류의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있는가? 한국인의 체형과 정신에 맞게 짜여져 훨씬 우수한 우리의 도를 두고 어찌 외국인들의 전통만을 좋다고 받아들이는가?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한국인이 선조의 가르침대로 몸과 마음을 닦아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한국의 정신으로 무장했던 고조선이나 고구려 시대에 우리 민족은 만주벌판을 호령했었다. 그러나 외국으로부터 전파되어온 외래 종교가 한국의 정신을 지배하면서 우리 조선의 역사는 약소국의 역사가 되었다. 그에 따라 우리의 정신도 설자리를 잃고 산으로 숨어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우리의 정신이 세상으로 나와 밝은 빛이 되어야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여러 선조님의 뜻을 좇아 세상에 나와 국선도를 펼친 것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의 도를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동네란 동네에는 절 아니면 교회가 꼭 하나씩 있듯이 이제는 마을마다 도장을 짓고, 도장이 없으면 길거리에서 공원에서 여유만 생기면 모두가 전통 무예와 선(仙)을 수련하며 민족의 건강과 정기를 함양해야 하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대한민국은 틀림없이 세계의 강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그 날을 위해 나는 오늘도 학생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국선도를 한다. 지병을 앓게 된지 벌서 6년 6개월, 국선도를 시작한지는 5년이 지났다. 그 안에 겪었던 신비주의로 흐를 것 같은 경험은 써 보아야 무익할 것 같아 생략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위에 대충 적어 놓았다. 

수련 5년만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나의 몸은 결국 거의 완치가 되었고, 누구나 수련을 통하여 질병의 치료와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일부 국선도인들은 국선도를 통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물론 수련을 하다가 내 자신이 직접 부처가 된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지만, 내가 국선도를 통해 이루고 싶은 세상은 질병이 없는 건강한 인간세상과,수련으로 맑아진 인간의 심성을 바탕으로 우리의 것을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덕성을 통해 모두가 고르고 건강하게 잘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 세상이 열리는데 천만 분의 일조라도 하고 싶어 감히 이 글을 쓴다. 일반세상 사람들 특히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가슴 아픈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희망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장세민의 국선도에서 발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