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필휘지]
ㅡ무가지보ㅡ
지난 8일 손창근(91) 선생이 추사의 세한도(국보 제 180호)를 국가에 기증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다(無價之寶). 제주도 유배 시절 명작을 탄생시킨 추사 김정희의 솜씨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에 선행한 기증자는 존경받을 만하다.
내가 그림과 서예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오래 전이다. 붓을 잡은 건 20년이 넘는다. 서법에 대해 전혀 모르고 달려들었다.
동진東晉 시대에 활약한 왕희지王羲之는 서예의 대가다. 그는 종요鍾繇와 장지張芝의 글 솜씨를 이렇게 평한다.
"나의 글솜씨를 종요와 장지에 비한다면, 종요와는 어깨를 견줄 만하거나 넘어섰다고 하겠고, 장지와 비교한다면 그래도 그의 초서가 나보다 앞서 있다 할 것이다." 대작가의 겸손한 표현이다.
장지는 연못가에서 연습을 아끼지 않았다. 붓을 자주 빨아 연못의 물이 시커맸다. 왕희지도 장지만큼 열심히 하면 못 따라갈 이유가 없다. 평론가는 말한다. "종요의 해서楷書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 장지는 초서草書에 능했다. 왕희지는 모든 서체를 두루 갖추었다." 타고난 재능이 남다르다.
나도 닮아보려고 붓질을 열심히 해본다. 예전 사람들의 기법에 못 미친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눈 파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예전 사람들 서예는 질박質樸하지만 근래 서예가들은 그들의 형식만 따르기에 발전이 없다.
그나마 붓으로 지낸 이력이 있어 나를 이만큼이나마 숙성시켰다고 본다. 아직은 갈길이 멀다.
한자체漢字體 특허를 받아놓고도 부담이 크다. 활용도의 부족함 때문이다. 볼품없는 솜씨를 어디에 내놓기가 부끄럽다.
추사체에 반해 붓을 들고 글솜씨를 닮으려고 하는데 곤혹스럽다. 명인들의 서체를 못 따라갈 땐 절필絶筆할 생각을 했다.
그림이나 글은 나름대로 특성이 있어야 한다. 까치발로 오래 설 수 없다. 달인이 되기까지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격 수양은 실천의 반복이다.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대가 여초 김응현 선생으로부터 필체를 이어받은 제자가 있다. 환산 정덕훈 선생이다. 서체에 능하고 글꼴이 살아있다. 환산 선생으로부터 서법을 익히는 중이다. 코로나가 바쁜 걸음을 가로막는다. 나름대로 필체를 만들었는데 어색하다. 개성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데 건방진 행동이다.
ㅡ잡동사니ㅡ
한국화, 현대묵화, 수채화, 보타니컬(색연필 세밀화), 스켓치 등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보니 특별히 남은 게 없다. 독자생존은 쉽지 않아 숨고르기 중이다. 체력이나 시력이 따르는 한 열심히 하다보면 이루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다.
어느 예술이나 나름대로의 기법이 있게 마련이다. 원초적인 것은 실종되고 미사려구만 가득차 있으면 낙제점이다. 이 싯점에서 나의 작품 수준이 궁금하다.
장자의 말을 귀에 담는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버섯은 한 달의 시간을 알지 못하고, 여름이 지나면 죽는 매미는 한 해의 일을 알지 못한다."
작가들이 경력 짧은 내 작품에 대해 비웃을 일이다. 그래도 씩씩하게 대중 앞에 졸작을 불쑥 내밀어 본다. 잘못 된 부분에 대한 평을 듣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 아직도 거문고 소리의 대가 종자기鍾子期나 서예와 그림에 능한 채옹蔡邕과 말馬 감별사 백락伯樂이 있듯이 시ㆍ서ㆍ화에 능한 인재들이 많다.
서예는 필법부터 다져야 한다. 스켓치는 명과 암을 구분하기 위해 필압이 중요하다. 수채화나 유화는 원근법을 손에 익혀야 한다. 어찌 나라고 명작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
타고난 재능을 능가하려면 노력이 최선이다. 다만 붓을 탓할 따름이다.
2020.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