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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다가오네요~!

작성자roky|작성시간26.06.15|조회수23 목록 댓글 0

 

 

                    6.25전쟁에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썼다?
-                     국군과 미군의 핑계거리
'                       인해전술'의 신화를 파헤친다





우리는 6.25전쟁하면 떠오르는 것이 북한의 남침,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인해전술 등이 있다. 여기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중공군하면 '인해전술'을 떠올릴 정도로 한국전쟁에서 그 이미지는 확실히 각인되어 있다.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설이나 대화 같은 일상생활에서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소재이다.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 중에 있는 중공군 제40군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넓은 땅에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니, 전쟁에서 무한에 가까운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전술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신화에 가깝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인해전술'을 썼다는 말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던 시점에는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 병력이 투입되지 못했다.


미국 측에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는 1950년 10월 말 투입된 중공군의 규모는 18만이고, 중국 측에서 밝히고 있는 규모는 26만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 중국 측 자료는 북한을 돕기 위해 자신들이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 위해 약간의 과장이 있었을 것이므로 더 작아진다.


그렇다면 이때 아군의 수는 어땠을까? 미군과 국군 위주의 유엔군은 총 42만 명에 달했다. 미군만 따져도 3개 군단 6개 사단 12만여명이었다. 미군과 국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부대는 1만 2천이었다.









세계인의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명시된 6.25전쟁 총참전 인원, 별 다른 차이는 없어 보인다


지상군만 비교해도 유엔군 측이 그렇게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 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던 때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초지일관 '인해전술'을 썼다는 신화가 생긴 셈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휴전에 대한 말이 나올 때 즈음에는 중공군 병력이 많이 늘어난다. 미국 측에서도 70만 가량이 투입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 즈음에는 국군까지 포함된 유엔군도 50만가량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압도적인 병력은 아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
 
사실 당시 중공군은 인해전술이라는 것을 내세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규모 병력 이동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십만 단위의 병력을 국경지대로 집결시켜 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보급체계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중국의 상황도 이 문제에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발달되지 못한 보급체계는 단순히 병력이동에만 악영향을 줄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투입된 병력을 유지할 보급선을 확보하는 데에도 애로사항을 더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군 항공기들의 공습으로 보급은 더 어려워졌다.


여기에 정치적이 부담도 컸다. 미국과의 대결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은 "나라가 아니라 정의감이 강한 중국인들이 북한을 돕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나섰다"는 입장을 취했다.


사실상 중공군이 조직적으로 참전하면서도 군대 이름은 '의용군'이라고 붙였던 것도 국가가 아닌 개인차원의참전이라는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공군력조차도 마음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제한이 생겼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중국은 참전 초기에는 알려진 만큼 많은 병력을 한국에 투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인해전술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해전술'이 아닌 '착시현상'
 
당시 기록이나 참전했던 사람들의 기억에는 개미떼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과 전투를 치른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중공군이 나오는 한 장면으로 착시현상의 대표적인 예


실제 전투 상황에서, 특히 전투를 치루는 병사들에게는 전체 병력 규모 따위는 크게 느껴지지 않으며, 느껴질 수도 없다. 병사들에게 생생하게 각인되는 것은 적의 전체 전력이 아니라, 눈앞에 몰려오는 적이다. 병사들에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달려드는 중공군과의 전투 경험이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에도 똑같이 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접 중공군과 전투를 치른 입장에서는 중공군의 전술이 인해전술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군의 병력이 그다지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는데도 어떻게 해서 '미군 역사상 가장 긴 후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신화라면, 그들의 무기와 장비나 전략이 뛰어났나?
 
전근대 전투에서는 대개 병력의 숫자가 승부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전략-전술적 운용에서 특별한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게 된다.


현대전은 이에 비해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무기나 장비의 차이가 워낙 커지기 때문이다.


무기와 장비가 압도적으로 우수하면, 병력이 훨씬 우세한 적이라 할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 회고록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지만, 당시 중공군의 무기와 장비는 인민군보다도 나을 것이 없었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실토했다.




"보병은 박격포 몇 문을 보유한게 고작이었다. 대형야포는 모두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인데, 노새가 끌고 다녀 기동성이 떨어졌고 은폐가 어려웠다. 결국 소총과 수류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과 마주친 인민군, 소련군은 그들이 가진 장비에 대해 모두 실망했다. "열악한 장비를 가진 중공군이 현대화된 장비를 갖춘 미군과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역력했다.


중공군 자체적으로도 이런 점을 감안하고 계산했다. 결국 중공군 스스로도 "장비가 별로 좋지 못한 국군을 상대로 5배 정도, 장비가 좋은 미군을 상대로는 10배의 병력을 투입해야 이길 수 있다"고 보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군은 어찌해서 미국이 굴욕을 느낄 만큼의 타격을 줄 수 있었을까? 중국이 구사했던 전략 지침이나 실제 움직임을 살펴보아도 상식 이상으로 특별히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무식한' 전술인 것이다. 사실 이런 전술은 '전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병사들을 돌격시키는 것 이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중공군이 최고의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있는 미군을 상대로 세계 전쟁사에 자랑삼을 수 있을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가 아닌 이길 수있는 전투에서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 때문


내세울 것 없었던 중공군이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가 이렇게까지 수수께끼처럼 남게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세상일이란 상대적이다. 중공군이 전과를 올릴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공군이 잘했다기보다 미군 측에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측에서 보면 처참한 결과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맥아더의 전략적 실책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50년 10월 24일 내려진 명령이었다. 맥아더는 이날, 미 제8군 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휘하의 전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선까지 진격하라"




이 명령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을 향해 제한 없는 총공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진급과 출세에 눈이 먼 각 부대들은 앞다투어 압록강이나 두만강으로 진격해나갔다.


각 부대들 사이에 경쟁이 붙여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대 사이에 협조가 이루어질 탁이 없다. 먼저 국경에 도착해서 출세해야겠다는 각 부대 지휘관들이 다른 부대의 진격에 협조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편제상의 문제도 작용했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미 제8군단장 워커 중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반면,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동경에 있던 맥아더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아몬드 소장이 지휘했는데, 그는 맥아더의 명령을 직접 받는 인물이었고, 반면 서부전선의 워커 중장은 명령계통이 별개로 협조가 제대로 될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맥아더의 조치가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현대전에 있어서 전선의 균형 유지는 기본 중이 기본이다.


그래서 최고사령관은 부하들이 공을 세우려다 부대 사이의 협조가 깨어지고 전선의 균형이 무너지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애를 쓰는데, 맥아더는 도리어 그런 절대 금기를 자신의 손으로 나서서 취해버린 것이다. 맥아더이 명령은 황당한 조치답게 황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장비를 잘 갖추어 기동력이 좋은 부대들은 상태가 좋은 해안도로를 따라 신속하게 북진했다. 뒤따라 북진하는 부대들 입장에서는 같은 길을 따라 진격할 명분도 없고, 따라 잡기도 곤란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 다른 길이란 상태가 좋지 않은 내륙의 산길이다.


가뜩이나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대가 좋지 않은 길로 진격하기 부대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게 될 수 밖에 없다. 이 바람에 동, 서 양쪽 전선 상에 80km가 넘는 커다란 틈이 생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엔군의 상태가 이러했음에도, 11월 24일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11월 말에 시작된 작전의 이름이 '크리스마스'인 것부터가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엔군 부대들은 북진하는 데만 신경 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당연히 유엔군의 공세는 며칠 못 가 실패했고, 11월 30일을 기하여 모든 부대가 철수해야 했다.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의 결과와 '인해전술'의 해프닝


애초부터 중공군이 유엔군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 때문에 유엔군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을 뿐이다.


유엔군은 분산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포위당하기도 쉬웠다. 앞서 국경까지 진격한 부대와 뒤따라가는 부대 사이의 간격이 크게 떨어져 병력의 공백지대가 생겼으니, 중공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앞서 진격한 유엔군 부대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보급선 차단에 포위공격을 할 수 있는 위치까지 거저 얻은 셈이다.




위키피디아에서의 6.25전쟁 상황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전세가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1950년 11월에 갑자기 북진한 것을 볼 수 있다. 북한도 비슷한 케이스로 밀렸다고 볼 수 있다 


중공군은 전선의 틈을 간신히 메워주고 있던 국군부터 집중 공격한 다음 미군을 포위하는 작전을 펼쳤다. 작전에 따라 분산된 국군과 유엔군 부대에 집결된 중공군이 달려들었다. 연대, 사단 정도 규모의 국군과 유엔군 부대에 군단, 군 단위의 중공군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국군과 유엔군 병사들에게는 "중국이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인해전술'을 쓴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애초부터 전선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틈을 메워야 할 국군부대마저 궤멸되자, 무모하게 공세를 펴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정상적인 상태에서라면 중공군의 화력이나 장비를 가지고 탱크를 비롯한 중장비를 잘 갖춘 미군을 상대한다면 우리나라가 북한에 의해 기습적인 남침을 당한 상태와 아주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을게 뻔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맥아더 덕분에 중공군은 예상외의 전과를 올렸으며, 반대로 유엔군은 보지 않아도 될 피해를 봤다.


유엔군의 전선이 정비되고 난 이후 다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는 점만 보아도 유엔군의 전선의 틈이 얼마나 큰 악영향을, 그러니까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이 얼마나 큰 악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참고자료>


<625 미스터리(이희진, 고려대학교 사학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 후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함)>, <아메리칸 시저 2(윌리엄 맨체스터, 미국의 저명한 대중 역사 저술가)>, <중국이 본 한국전쟁(홍학지, 중공군 부사령관)>

 

 

                    6.25전쟁에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썼다?
-                     국군과 미군의 핑계거리
'                       인해전술'의 신화를 파헤친다





우리는 6.25전쟁하면 떠오르는 것이 북한의 남침,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인해전술 등이 있다. 여기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중공군하면 '인해전술'을 떠올릴 정도로 한국전쟁에서 그 이미지는 확실히 각인되어 있다.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설이나 대화 같은 일상생활에서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소재이다.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 중에 있는 중공군 제40군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넓은 땅에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니, 전쟁에서 무한에 가까운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전술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신화에 가깝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인해전술'을 썼다는 말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던 시점에는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 병력이 투입되지 못했다.


미국 측에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는 1950년 10월 말 투입된 중공군의 규모는 18만이고, 중국 측에서 밝히고 있는 규모는 26만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 중국 측 자료는 북한을 돕기 위해 자신들이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 위해 약간의 과장이 있었을 것이므로 더 작아진다.


그렇다면 이때 아군의 수는 어땠을까? 미군과 국군 위주의 유엔군은 총 42만 명에 달했다. 미군만 따져도 3개 군단 6개 사단 12만여명이었다. 미군과 국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부대는 1만 2천이었다.









세계인의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명시된 6.25전쟁 총참전 인원, 별 다른 차이는 없어 보인다


지상군만 비교해도 유엔군 측이 그렇게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 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던 때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초지일관 '인해전술'을 썼다는 신화가 생긴 셈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휴전에 대한 말이 나올 때 즈음에는 중공군 병력이 많이 늘어난다. 미국 측에서도 70만 가량이 투입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 즈음에는 국군까지 포함된 유엔군도 50만가량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압도적인 병력은 아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
 
사실 당시 중공군은 인해전술이라는 것을 내세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규모 병력 이동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십만 단위의 병력을 국경지대로 집결시켜 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보급체계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중국의 상황도 이 문제에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발달되지 못한 보급체계는 단순히 병력이동에만 악영향을 줄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투입된 병력을 유지할 보급선을 확보하는 데에도 애로사항을 더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군 항공기들의 공습으로 보급은 더 어려워졌다.


여기에 정치적이 부담도 컸다. 미국과의 대결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은 "나라가 아니라 정의감이 강한 중국인들이 북한을 돕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나섰다"는 입장을 취했다.


사실상 중공군이 조직적으로 참전하면서도 군대 이름은 '의용군'이라고 붙였던 것도 국가가 아닌 개인차원의참전이라는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공군력조차도 마음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제한이 생겼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중국은 참전 초기에는 알려진 만큼 많은 병력을 한국에 투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인해전술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해전술'이 아닌 '착시현상'
 
당시 기록이나 참전했던 사람들의 기억에는 개미떼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과 전투를 치른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중공군이 나오는 한 장면으로 착시현상의 대표적인 예


실제 전투 상황에서, 특히 전투를 치루는 병사들에게는 전체 병력 규모 따위는 크게 느껴지지 않으며, 느껴질 수도 없다. 병사들에게 생생하게 각인되는 것은 적의 전체 전력이 아니라, 눈앞에 몰려오는 적이다. 병사들에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달려드는 중공군과의 전투 경험이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에도 똑같이 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접 중공군과 전투를 치른 입장에서는 중공군의 전술이 인해전술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군의 병력이 그다지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는데도 어떻게 해서 '미군 역사상 가장 긴 후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신화라면, 그들의 무기와 장비나 전략이 뛰어났나?
 
전근대 전투에서는 대개 병력의 숫자가 승부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전략-전술적 운용에서 특별한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게 된다.


현대전은 이에 비해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무기나 장비의 차이가 워낙 커지기 때문이다.


무기와 장비가 압도적으로 우수하면, 병력이 훨씬 우세한 적이라 할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 회고록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지만, 당시 중공군의 무기와 장비는 인민군보다도 나을 것이 없었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실토했다.




"보병은 박격포 몇 문을 보유한게 고작이었다. 대형야포는 모두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인데, 노새가 끌고 다녀 기동성이 떨어졌고 은폐가 어려웠다. 결국 소총과 수류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과 마주친 인민군, 소련군은 그들이 가진 장비에 대해 모두 실망했다. "열악한 장비를 가진 중공군이 현대화된 장비를 갖춘 미군과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역력했다.


중공군 자체적으로도 이런 점을 감안하고 계산했다. 결국 중공군 스스로도 "장비가 별로 좋지 못한 국군을 상대로 5배 정도, 장비가 좋은 미군을 상대로는 10배의 병력을 투입해야 이길 수 있다"고 보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군은 어찌해서 미국이 굴욕을 느낄 만큼의 타격을 줄 수 있었을까? 중국이 구사했던 전략 지침이나 실제 움직임을 살펴보아도 상식 이상으로 특별히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무식한' 전술인 것이다. 사실 이런 전술은 '전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병사들을 돌격시키는 것 이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중공군이 최고의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있는 미군을 상대로 세계 전쟁사에 자랑삼을 수 있을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가 아닌 이길 수있는 전투에서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 때문


내세울 것 없었던 중공군이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가 이렇게까지 수수께끼처럼 남게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세상일이란 상대적이다. 중공군이 전과를 올릴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공군이 잘했다기보다 미군 측에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측에서 보면 처참한 결과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맥아더의 전략적 실책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50년 10월 24일 내려진 명령이었다. 맥아더는 이날, 미 제8군 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휘하의 전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선까지 진격하라"




이 명령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을 향해 제한 없는 총공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진급과 출세에 눈이 먼 각 부대들은 앞다투어 압록강이나 두만강으로 진격해나갔다.


각 부대들 사이에 경쟁이 붙여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대 사이에 협조가 이루어질 탁이 없다. 먼저 국경에 도착해서 출세해야겠다는 각 부대 지휘관들이 다른 부대의 진격에 협조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편제상의 문제도 작용했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미 제8군단장 워커 중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반면,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동경에 있던 맥아더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아몬드 소장이 지휘했는데, 그는 맥아더의 명령을 직접 받는 인물이었고, 반면 서부전선의 워커 중장은 명령계통이 별개로 협조가 제대로 될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맥아더의 조치가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현대전에 있어서 전선의 균형 유지는 기본 중이 기본이다.


그래서 최고사령관은 부하들이 공을 세우려다 부대 사이의 협조가 깨어지고 전선의 균형이 무너지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애를 쓰는데, 맥아더는 도리어 그런 절대 금기를 자신의 손으로 나서서 취해버린 것이다. 맥아더이 명령은 황당한 조치답게 황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장비를 잘 갖추어 기동력이 좋은 부대들은 상태가 좋은 해안도로를 따라 신속하게 북진했다. 뒤따라 북진하는 부대들 입장에서는 같은 길을 따라 진격할 명분도 없고, 따라 잡기도 곤란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 다른 길이란 상태가 좋지 않은 내륙의 산길이다.


가뜩이나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대가 좋지 않은 길로 진격하기 부대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게 될 수 밖에 없다. 이 바람에 동, 서 양쪽 전선 상에 80km가 넘는 커다란 틈이 생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엔군의 상태가 이러했음에도, 11월 24일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11월 말에 시작된 작전의 이름이 '크리스마스'인 것부터가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엔군 부대들은 북진하는 데만 신경 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당연히 유엔군의 공세는 며칠 못 가 실패했고, 11월 30일을 기하여 모든 부대가 철수해야 했다.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의 결과와 '인해전술'의 해프닝


애초부터 중공군이 유엔군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 때문에 유엔군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을 뿐이다.


유엔군은 분산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포위당하기도 쉬웠다. 앞서 국경까지 진격한 부대와 뒤따라가는 부대 사이의 간격이 크게 떨어져 병력의 공백지대가 생겼으니, 중공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앞서 진격한 유엔군 부대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보급선 차단에 포위공격을 할 수 있는 위치까지 거저 얻은 셈이다.




위키피디아에서의 6.25전쟁 상황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전세가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1950년 11월에 갑자기 북진한 것을 볼 수 있다. 북한도 비슷한 케이스로 밀렸다고 볼 수 있다 


중공군은 전선의 틈을 간신히 메워주고 있던 국군부터 집중 공격한 다음 미군을 포위하는 작전을 펼쳤다. 작전에 따라 분산된 국군과 유엔군 부대에 집결된 중공군이 달려들었다. 연대, 사단 정도 규모의 국군과 유엔군 부대에 군단, 군 단위의 중공군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국군과 유엔군 병사들에게는 "중국이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인해전술'을 쓴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애초부터 전선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틈을 메워야 할 국군부대마저 궤멸되자, 무모하게 공세를 펴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정상적인 상태에서라면 중공군의 화력이나 장비를 가지고 탱크를 비롯한 중장비를 잘 갖춘 미군을 상대한다면 우리나라가 북한에 의해 기습적인 남침을 당한 상태와 아주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을게 뻔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맥아더 덕분에 중공군은 예상외의 전과를 올렸으며, 반대로 유엔군은 보지 않아도 될 피해를 봤다.


유엔군의 전선이 정비되고 난 이후 다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는 점만 보아도 유엔군의 전선의 틈이 얼마나 큰 악영향을, 그러니까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이 얼마나 큰 악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참고자료>


<625 미스터리(이희진, 고려대학교 사학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 후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함)>, <아메리칸 시저 2(윌리엄 맨체스터, 미국의 저명한 대중 역사 저술가)>, <중국이 본 한국전쟁(홍학지, 중공군 부사령관)>

 

 

                    6.25전쟁에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썼다?
-                     국군과 미군의 핑계거리
'                       인해전술'의 신화를 파헤친다





우리는 6.25전쟁하면 떠오르는 것이 북한의 남침,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인해전술 등이 있다. 여기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중공군하면 '인해전술'을 떠올릴 정도로 한국전쟁에서 그 이미지는 확실히 각인되어 있다.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설이나 대화 같은 일상생활에서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소재이다.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 중에 있는 중공군 제40군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넓은 땅에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니, 전쟁에서 무한에 가까운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전술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신화에 가깝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인해전술'을 썼다는 말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던 시점에는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 병력이 투입되지 못했다.


미국 측에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는 1950년 10월 말 투입된 중공군의 규모는 18만이고, 중국 측에서 밝히고 있는 규모는 26만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 중국 측 자료는 북한을 돕기 위해 자신들이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 위해 약간의 과장이 있었을 것이므로 더 작아진다.


그렇다면 이때 아군의 수는 어땠을까? 미군과 국군 위주의 유엔군은 총 42만 명에 달했다. 미군만 따져도 3개 군단 6개 사단 12만여명이었다. 미군과 국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부대는 1만 2천이었다.









세계인의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명시된 6.25전쟁 총참전 인원, 별 다른 차이는 없어 보인다


지상군만 비교해도 유엔군 측이 그렇게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 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던 때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초지일관 '인해전술'을 썼다는 신화가 생긴 셈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휴전에 대한 말이 나올 때 즈음에는 중공군 병력이 많이 늘어난다. 미국 측에서도 70만 가량이 투입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 즈음에는 국군까지 포함된 유엔군도 50만가량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압도적인 병력은 아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
 
사실 당시 중공군은 인해전술이라는 것을 내세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규모 병력 이동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십만 단위의 병력을 국경지대로 집결시켜 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보급체계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중국의 상황도 이 문제에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발달되지 못한 보급체계는 단순히 병력이동에만 악영향을 줄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투입된 병력을 유지할 보급선을 확보하는 데에도 애로사항을 더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군 항공기들의 공습으로 보급은 더 어려워졌다.


여기에 정치적이 부담도 컸다. 미국과의 대결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은 "나라가 아니라 정의감이 강한 중국인들이 북한을 돕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나섰다"는 입장을 취했다.


사실상 중공군이 조직적으로 참전하면서도 군대 이름은 '의용군'이라고 붙였던 것도 국가가 아닌 개인차원의참전이라는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공군력조차도 마음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제한이 생겼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중국은 참전 초기에는 알려진 만큼 많은 병력을 한국에 투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인해전술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해전술'이 아닌 '착시현상'
 
당시 기록이나 참전했던 사람들의 기억에는 개미떼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과 전투를 치른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중공군이 나오는 한 장면으로 착시현상의 대표적인 예


실제 전투 상황에서, 특히 전투를 치루는 병사들에게는 전체 병력 규모 따위는 크게 느껴지지 않으며, 느껴질 수도 없다. 병사들에게 생생하게 각인되는 것은 적의 전체 전력이 아니라, 눈앞에 몰려오는 적이다. 병사들에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달려드는 중공군과의 전투 경험이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에도 똑같이 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접 중공군과 전투를 치른 입장에서는 중공군의 전술이 인해전술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군의 병력이 그다지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는데도 어떻게 해서 '미군 역사상 가장 긴 후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신화라면, 그들의 무기와 장비나 전략이 뛰어났나?
 
전근대 전투에서는 대개 병력의 숫자가 승부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전략-전술적 운용에서 특별한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게 된다.


현대전은 이에 비해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무기나 장비의 차이가 워낙 커지기 때문이다.


무기와 장비가 압도적으로 우수하면, 병력이 훨씬 우세한 적이라 할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 회고록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지만, 당시 중공군의 무기와 장비는 인민군보다도 나을 것이 없었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실토했다.




"보병은 박격포 몇 문을 보유한게 고작이었다. 대형야포는 모두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인데, 노새가 끌고 다녀 기동성이 떨어졌고 은폐가 어려웠다. 결국 소총과 수류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과 마주친 인민군, 소련군은 그들이 가진 장비에 대해 모두 실망했다. "열악한 장비를 가진 중공군이 현대화된 장비를 갖춘 미군과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역력했다.


중공군 자체적으로도 이런 점을 감안하고 계산했다. 결국 중공군 스스로도 "장비가 별로 좋지 못한 국군을 상대로 5배 정도, 장비가 좋은 미군을 상대로는 10배의 병력을 투입해야 이길 수 있다"고 보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군은 어찌해서 미국이 굴욕을 느낄 만큼의 타격을 줄 수 있었을까? 중국이 구사했던 전략 지침이나 실제 움직임을 살펴보아도 상식 이상으로 특별히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무식한' 전술인 것이다. 사실 이런 전술은 '전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병사들을 돌격시키는 것 이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중공군이 최고의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있는 미군을 상대로 세계 전쟁사에 자랑삼을 수 있을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가 아닌 이길 수있는 전투에서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 때문


내세울 것 없었던 중공군이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가 이렇게까지 수수께끼처럼 남게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세상일이란 상대적이다. 중공군이 전과를 올릴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공군이 잘했다기보다 미군 측에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측에서 보면 처참한 결과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맥아더의 전략적 실책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50년 10월 24일 내려진 명령이었다. 맥아더는 이날, 미 제8군 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휘하의 전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선까지 진격하라"




이 명령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을 향해 제한 없는 총공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진급과 출세에 눈이 먼 각 부대들은 앞다투어 압록강이나 두만강으로 진격해나갔다.


각 부대들 사이에 경쟁이 붙여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대 사이에 협조가 이루어질 탁이 없다. 먼저 국경에 도착해서 출세해야겠다는 각 부대 지휘관들이 다른 부대의 진격에 협조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편제상의 문제도 작용했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미 제8군단장 워커 중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반면,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동경에 있던 맥아더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아몬드 소장이 지휘했는데, 그는 맥아더의 명령을 직접 받는 인물이었고, 반면 서부전선의 워커 중장은 명령계통이 별개로 협조가 제대로 될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맥아더의 조치가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현대전에 있어서 전선의 균형 유지는 기본 중이 기본이다.


그래서 최고사령관은 부하들이 공을 세우려다 부대 사이의 협조가 깨어지고 전선의 균형이 무너지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애를 쓰는데, 맥아더는 도리어 그런 절대 금기를 자신의 손으로 나서서 취해버린 것이다. 맥아더이 명령은 황당한 조치답게 황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장비를 잘 갖추어 기동력이 좋은 부대들은 상태가 좋은 해안도로를 따라 신속하게 북진했다. 뒤따라 북진하는 부대들 입장에서는 같은 길을 따라 진격할 명분도 없고, 따라 잡기도 곤란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 다른 길이란 상태가 좋지 않은 내륙의 산길이다.


가뜩이나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대가 좋지 않은 길로 진격하기 부대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게 될 수 밖에 없다. 이 바람에 동, 서 양쪽 전선 상에 80km가 넘는 커다란 틈이 생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엔군의 상태가 이러했음에도, 11월 24일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11월 말에 시작된 작전의 이름이 '크리스마스'인 것부터가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엔군 부대들은 북진하는 데만 신경 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당연히 유엔군의 공세는 며칠 못 가 실패했고, 11월 30일을 기하여 모든 부대가 철수해야 했다.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의 결과와 '인해전술'의 해프닝


애초부터 중공군이 유엔군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 때문에 유엔군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을 뿐이다.


유엔군은 분산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포위당하기도 쉬웠다. 앞서 국경까지 진격한 부대와 뒤따라가는 부대 사이의 간격이 크게 떨어져 병력의 공백지대가 생겼으니, 중공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앞서 진격한 유엔군 부대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보급선 차단에 포위공격을 할 수 있는 위치까지 거저 얻은 셈이다.




위키피디아에서의 6.25전쟁 상황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전세가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1950년 11월에 갑자기 북진한 것을 볼 수 있다. 북한도 비슷한 케이스로 밀렸다고 볼 수 있다 


중공군은 전선의 틈을 간신히 메워주고 있던 국군부터 집중 공격한 다음 미군을 포위하는 작전을 펼쳤다. 작전에 따라 분산된 국군과 유엔군 부대에 집결된 중공군이 달려들었다. 연대, 사단 정도 규모의 국군과 유엔군 부대에 군단, 군 단위의 중공군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국군과 유엔군 병사들에게는 "중국이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인해전술'을 쓴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애초부터 전선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틈을 메워야 할 국군부대마저 궤멸되자, 무모하게 공세를 펴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정상적인 상태에서라면 중공군의 화력이나 장비를 가지고 탱크를 비롯한 중장비를 잘 갖춘 미군을 상대한다면 우리나라가 북한에 의해 기습적인 남침을 당한 상태와 아주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을게 뻔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맥아더 덕분에 중공군은 예상외의 전과를 올렸으며, 반대로 유엔군은 보지 않아도 될 피해를 봤다.


유엔군의 전선이 정비되고 난 이후 다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는 점만 보아도 유엔군의 전선의 틈이 얼마나 큰 악영향을, 그러니까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이 얼마나 큰 악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참고자료>


<625 미스터리(이희진, 고려대학교 사학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 후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함)>, <아메리칸 시저 2(윌리엄 맨체스터, 미국의 저명한 대중 역사 저술가)>, <중국이 본 한국전쟁(홍학지, 중공군 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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