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란타 그늘
박상봉
세비야의 보랏빛이 눈동자를 먼저 삼켰다 꽃가루 번지는 질병에 걸
린 듯 보랏빛 증상만 토해내고 그림자도 보랏게 물들어 죽었다가 부활
한다 꽃잎은 발밑에서 터지며 작은 울음 울고 보라가 뼛속까지 들어와
나를 알 수 없는 형태로 휘게 만들었다 세비야 강 위로 떨어지는 햇빛
은 심장을 멍들이고 걷는 동안 그 멍이 자꾸 나에게로 옮겨붙었다
바람은 자카란타 잎으로 나의 상처를 덮었다 덮는 척하면서 더 깊이
헤집고 꽃잎 하나 흩날릴 때마다 나는 이름 모를 생물로 변해갔다 자
카란타 그늘에는 빛이 남기고 간 문장들이 가라앉았다 아무도 읽지 않
은 초안들, 미처 말해지지 못한 고백들, 파문 한 번 일으키지 못하고 바
닥에 닿은 감정들이 켜를 이루고 산다 그늘은 종종 잘못 이해된다 어
둡고 침잠한 곳이라고 쉽게 단정되지만, 빛이 닿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는 마음이 쉬는 자리, 자카란타 그늘에서 나는 오래된 표정을 꺼내
어 만져본다 꽃잎의 색을 닮아 변색된 표정이 보라 속으로 머리를 들
이민다
플라멩코 리듬이 골목을 흔들 때 손바닥의 열은 세비야의 사막에서
몰래 가져온 불씨 같다 손금은 불을 모방하여 같은 속도로 타오르고
벌레 먹은 잎사귀는 가장 많은 우주를 가지고 있다 뚫린 구멍마다 나
를 들여다보는 눈 이미 다른 문장이 되었다 나무 아래 아이들이 뛰어
다니고 꽃잎이 떨며 무수한 눈을 만들었다 그 시선 안에서 오래된 나
를 잃어버렸다 어쩌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보랏빛에 맡겨진 것이다
책갈피에 낀 잎사귀 눌린 채로 다른 얼굴을 만든다 잎맥은 뼈처럼
변하고 뼈는 문장처럼 삐죽 드러났다 시심은 그 삐죽한 것들에 자꾸
긁히며 안쪽 살을 얇게 벗긴다 발에 밟혀 부서진 잎들은 부서진 그대
로 더 많은 의미를 품는다 흩어진 꽃잎과 문장들이 서로의 그림자 겹
쳐 쓰는 동안 더 짙어지는 자카란타 마침내 내 이름 그늘에 얹는다
―계간 《시산맥》 202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