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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아시나요

[스크랩] 등개떡(보리개떡)

작성자容王(禮山,容,40世)|작성시간08.10.23|조회수401 목록 댓글 2

서민가정에서 만들어 먹었던 등개떡(보리개떡)

 


 

 

 

‘보릿겨’로 만든 ‘개떡’은 뜨거울 때는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지만, 식으면 딱딱해져서 별맛이 없었다. 필자들이 초등학교(初等學校) 시절 소풍(消風)을 갈 때는 전날 일찍 학교(學校)에서 돌아와 논두렁과 밭둑에서 쑥을 뜯어오면 어머님께서 절구에 이를 찧고 ‘등개’를 버무려 아침밥 솥에 찐 후 콩고물을 무쳐 ‘초백이’에 담아 주시기도 했다. 특히 ‘단등개’로만 만든 '개떡'은 ‘단등개떡’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 어머니께서 사주신 ‘단등개떡’ 도시락을 얘기한 '도시락 1962'부터 먼저 감상한다.



 

     

 

 

                        도시락 1962

 

 

점심시간

루핑을 얹은 교실 뒤

수돗물은 사철 표백분 냄새가 났다.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날마다 묻히는 잉크 손 씻고

얼룩진 쑥떡 베 바지, 물 비비고

돌아서 두껑을 열었다.

 

서서 먹었다.

젓가락 없이 손으로 먹었다.

 

바쁘게

목젖에 걸린 단가루 개떡

수돗물로 넘겼다.

이번엔 표백분 냄새가 안 났다.

 

 

 


 

 

 


시(詩)에서 말한 ‘단가루 개떡’은 외동읍(外東邑)에서 말하는 ‘단등개 떡’을 말하는 것이다. ‘단등개’는 ‘겨’의 맛이 달작지근하다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디딜방아에 벼를 찧으면 처음에는 왕겨가 나오고, 맨 마지막에는 분말(粉末)같이 보드라운 ‘겨’가 나오는데 이것이 ‘단등개’다. ‘단등개’에는 벼의 배아(胚芽)가 디딜방아의 공이에 부딪혀 부셔진 ‘싸라기’ 토막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냥 먹어도 달작지근한 맛이 난다.


부잣집의 경우 소를 살찌우기 위해 ‘쇠죽’에 섞어 ‘소먹이’로 먹이거나 ‘닭모이’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서민들은 하나 같이 사람이 먹는 양식(糧食)으로 보충하였다. 이 ‘단등개’에 ‘이스트’를 넣고 반죽을 하여 밥솥에 찐 것이 ‘단등개 떡’으로 서민(庶民)들이 먹는 ‘개떡’ 중에는 제일 맛있는 ‘개떡’에 속했다.

 

 

단등개 떡

 




 

 


서민가정의 경우 이 ‘단등개 떡’을 학생(學生)들의 도시락으로 사주기도 했고, 원족(遠足) 갈 때는 ‘쑥개떡’과 함께 도시락으로 사가기도 했었다. 지금은 이런 도시락을 갖고 가면 대단한 인기(人氣)를 끌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동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시(詩)에서와 같이 남의 눈을 피해 학교 우물가에 가서 부리나케 먹어치우곤 했었다.



단등개 떡 도시락

 


('양대'가 들어가야 제맛인데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그 당시의 ‘개떡’은 요즘 ‘6.25음식 체험하기’ 행사 등에서 만들어 팔고 사먹는 호화판(豪華版) 개떡이 아니었다. 당시의 ‘개떡’에도 재료(材料)에 따라 그 종류(種類)가 다양했다.



부잣집에서나 만들어 먹던 쑥 개떡

 




 

 

 


부잣집에서나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고급개떡’이 있었고, 서민(庶民)들이 만들어 먹던 ‘보리개떡’, 그리고 별미(別味)로 만들어 먹던 ‘밀개떡’이 있었다. 부잣집 ‘개떡’은 ‘노깨(밀가루를 뇐 찌끼)’나 메밀의 ‘속나깨(메밀가루를 체에 쳐 낸 속껍질)’와 ‘보리 사래기’를 반죽하여 ‘반대기’를 지어 큰솥에 ‘정그레’를 놓고, ‘체반’에 베보자기를 깔고 쪘는데, 이런 ‘개떡’은 고급에 속했다. 필자들은 이런 ‘개떡’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



6.25 기념 때가 되면 만들어 '음식체험하기'를 하는 호화판 개떡

 



 

 

 


 

필자들은 ‘보리개떡’, 즉 ‘등개떡’을 주로 먹었다. 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서민(庶民)들은 구경조차 못했던 고급(高級) ‘개떡’을 만들어 놓고 그런 것들을 마치 1940~50년대 ‘보릿고개’ 때 서민(庶民)들이 먹기라도 한 것처럼 너스레를 떨고 있으나, 필자의 경우 그런 ‘개떡’은 구경조차 못한 고급음식(高級飮食)이다.



요즘 만들어 '음식 체험하기'를 하는 고급 쑥 개떡

 

(보릿겨가 아닌 밀가루로 만든 것이다)


 


 

 

1950년대의 ‘보리개떡’은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떡’과는 전혀 다르다. ‘개떡’은 여러 가지 재료(材料)가 들어가지만 ‘보리개떡’, 즉 ‘등개떡’은 경주(慶州) 지방의 경우 ‘보릿겨’만으로 반죽을 하여 밥솥에 쪄서 먹었다. 많이 만들어 밥 대신 먹을 때는 큰솥에 찌기도 한다. ‘보릿겨’로 만드는 보리개떡은 뜨거울 때 먹지 않으면 딱딱해지거나 부스러져서 먹지 못한다.

 

한편 ‘밀개떡’은 맷돌로 밀을 갈아 가루를 ‘얼기미’에 치고 남은 밀기울로 만드는데, 논두렁에 심은 논두렁콩이나 감자를 섞어 ‘반대기’를 지어 찌면 맛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나들이할 때나 먼 거리를 여행(旅行)할 때는 호박잎에 싼 ‘참밀개떡’ 몇 조각을 ‘괴나리봇짐’ 속에 넣고 길을 떠났다. 이 정도면 끼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 만들어 먹는 밀개떡(호박 밀개떡)

 



(필자들이 외동읍에서 만들어 먹던 '밀개떡'과는 모양도

색깔도 다르다. '양대'나 감자조각도 들어가지 않았다)

 

 

 



어쨌든 1940~50년대의 ‘개떡’은 가난과 배고픔의 상징(象徵)이었지 지금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먹어보고 싶어 하는 별미(別味)가 아니었다. 생명(生命)을 연장(延長)하고, 농사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무엇으로든 배를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배가 너무 고프면 흙을 파먹기도 했었다.


지금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1940~50년대에는 흙으로 현기증(眩氣症)을 달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보릿고개 시절 가난한 집 국민학생(國民學生)들이 ‘쪼대흙’을 캐어 주머니에 넣고 등교(登校)하여 점심시간에 흙을 먹으면서 현기증(眩氣症)을 달랬다는 얘기는 거짓말이 아니다.


한해에 8조원어치나 되는 기름진 음식물(飮食物)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버리는 지금 사람들이야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믿지도 않겠지만, 당시 ‘쪼대흙’이 생산(生産)되는 지역에서는 이 흙으로 떡을 만들어 보릿고개를 넘겼다는 얘기가 대수롭지 않게 들리기도 했었다. 최근 어느 지방에서도 황토(黃土) 흙으로 ‘황토국수’를 만들어 먹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참고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지금 세대(世代)들이 당시의 ‘보릿고개’ 때나 6.25동란(六二五動亂) 당시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 ‘풀대죽(풀떼기)’을 만들어 먹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 못 전해진 얘기다.


우선' 풀대죽', 곧 ‘풀떼기’는 보릿고개 때는 그 재료(材料)조차 나올 때가 아니다. 사전적 의미의 ‘풀떼기’는 잡곡(雜穀)의 가루로 풀처럼 쑨 죽이나, 잡곡의 날것을 매에 갈아 물을 짜내어 다른 잡곡(雜穀)의 날것을 넣어 쑨 음식으로 ‘범벅’보다 묽고 죽보다 되게 쑨 죽을 말한다. 그리고 그 재료는 호박, 강냉이, 밀가루, 팥 등이었다. ‘수수풀떼기’의 경우는 찰수수가루를 뿌려서 쑨다.


밀가루는 보릿고개가 마감되는 여름에 재료(材料)를 구할 수 있지만, 온상(溫床)이나 온실(溫室)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 호박과 강냉이, 팥 등은 가을이나 돼야 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보릿고개’에서는 ‘풀떼기’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추수(秋收)가 모두 끝난 후 초겨울이나 돼야 ‘풀떼기’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풀떼기’는 어느 정도 잘 사는 집이라야 자주 맛을 볼 수 있었을 뿐 필자네 같은 영세민(零細民)은 한 두 번은 몰라도 거의 만들어 먹을 수 없었다. 풀떼기의 재료(材料)로 한 끼라도 더 끼니를 늘려 양식(糧食)에 보태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개떡’얘기로 돌아간다. ‘개떡’의 ‘개’란 말은 ‘개살구’니 ‘개나리’니 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假)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꽃’, ‘개살구’, ‘개머루’ 등 우리말 가운데는 그 첫머리에 ‘개’라는 말이 덧붙여진 낱말들이 상당히 많다.


우리의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은 ‘개’라는 말을 앞에 붙여 뭔가 변변하지 못하거나, 참 것이 아니라는 의미(意味)를 강조해 온 것이다. '개소리'도 정상적(正常的)인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경상도 방언(方言)에 '개쪼가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도 정상적(正常的)인 '쪼가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보릿고개 시절 배고픈 것이 너무 싫어 '이쁜이'와 '금순이'가 말만 들은 서울로 '단봇짐'을 싸고, 그 뒤를 따라 '삼돌이'들이 '개쪼가리'를 놓았을 때 쓰인 말이다.


경상도(慶尙道) 사투리로 '쪼가리'란 '조각', 즉 '나누어지는 것' '분리(分離)되는 것' '해어지는 것'을 말한다. 요즘 말로는 '찢어지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삼돌이'들은 정상적(正常的)으로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고, '이쁜이'들을 따라 비정상적으로 야간열차(夜間列車)로 도망을 갔기 때문에 '쪼가리'가 아닌 '개쪼가리'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떡’이란 ‘진짜떡’이 아닌 ‘가짜떡’이라는 말이 된다. 시인(詩人) 이향아(李鄕莪)의 ‘개망초꽃 칠월’에서도 ‘개’에 대한 이러한 인식(認識)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향아의 ‘개망초 꽃 칠월’을 소개한다.



 

 

 

                         개망초 꽃 칠월

 

이향아

 

칠월 들판에는 개망초꽃 핀다.

개살구와

개꿈과

개떡과

개판.

 

‘개’자로 시작하는 헛되고 헛된 것 중

‘개’자로 시작되는 슬픈 야생의

풀꽃도 있습니다.

‘개망초’라는.

 

복더위 하늘 밑 아무 데서나

버려진 빈 터 허드레 땅에

개망초 꽃 여럿이서 피어나고 있다.

 

나도 꽃, 나도 꽃,

잊지 말라고.

한두 해, 영원살이 풀씨를 맺고 있다.

 

개망초 지고 있는 들 끝에서는

지평선이 낮게 낮게

흔들리고 있을 거다.

 

 

 




'개떡'은 욕설(辱說)이나 비난의 용어(用語)로도 사용되고 있다. "개떡 같다"라는 말이 그 말이다. 여기에서 쓰인 '개- '도 '아무렇게나 되어 변변치 못한'의 뜻으로 쓰인 접두사(接頭辭)다. 보릿겨를 반죽하여 아무렇게나 빚어 만든 떡을 '개떡'이라고 하는 것처럼, 하잘 것 없는 것 또는 마구 만들어진 물건이나 뒤엉킨 상황(狀況)을 '개떡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상적(正常的)이고 상식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개떡'은 일제(日帝) 때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하는 이민 행렬에도 양식으로 지참된 기록이 있다. 일제의 마수(魔手)를 피해 고국을 등진 함경도(咸鏡道) 지방 주민들이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頭滿江)을 넘어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멀고 먼 간도(間島) 땅으로 이주할 때 그들의 깨진 쪽박마다에는 시커먼 '개떡'조각이 담겨져 있었다. 그 시절 참상을 그린 홍용암의 '두만강'을 소개한다.



 

 

                            두     만     강

 

홍용암(조선족)

 

역사의 강 -- 두만강!

네 거울에 비친 흰옷의 그림자들

너는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를 건너오던

흰옷 입은 서러운 나그네

쪽박 차고

막대 짚고

지게 지고...

 

금이 간 쪽박 안엔 개떡 하나

휘여든 막대엔 휘친휘친 지친 몸

지게 우엔 배고파 우는 철부지아이

 

나는 그때

그 배고파 울던 철부지아이

아들의 아들의 아들

 

강아

너를 보러 너를 찾아 내가 왔다

못 박힌듯 묵묵히 네 기슭에 왔다

 

설음의 강 -- 두만강!

너를 한번 건너오기는 쉬워도

다시 건너가기는 쉽지 않았더라

 

너 도도히 감도는 물결이여

너는 예나 제나 다름없으련만

묻노니, 오늘따라

무슨 한 많은 설음 실었느냐...?!

 

 

 

 

 

 



이 시는 중국(中國) 길림성 연길시(延吉市)의 조선족 홍용암의 것이다. 시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해서 간도지방(間島地方)으로 이주한 함경도(咸鏡道) 지방 유이민(流移民)들의 참상이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지게 위에 철부지 아이를 짊어지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두만강(頭滿江)을 건너던 유이민의 형상이 사진처럼 각인되어 있다. 시인은 바로 그 서러운 나그네의 후손이다.


시인의 선조(先祖)가 되는 그 할아버지의 형상은 일제 강점기 대규모로 발생한 유이민(流移民)들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더구나 그것이 유이민 후손의 기억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 더욱 흥미를 더하고 있다. 때문에 이 시는 유이민문학(流移民文學)이 일제 강점기로 끝나지 않았음을 역역히 말해 주고 있다. 유이민 후세대에 의해 명징(明澄)한 기억으로, 그리고 삶의 현장 속에서 생생히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개떡’얘기 하다가 엉뚱한 얘기가 되고 말았다. 얘기를 맺는다. 그 시절 보릿겨로 만든 ‘개떡’ 한 덩이 먹어 봤으면 하는데, 이젠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들도 없어진 것 같아 안타까움이 더 한다. 언젠가 고향(故鄕)으로 옮겨가면 디딜방아를 만들어 보리를 찧고, 거기에서 나오는 ‘등개’로 ‘등개떡’ 한 번 빚어 먹을까 한다. 다행히도 필자는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디딜방아로 보리를 찧어봤고, 어머님을 도와 ‘등개떡’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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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수원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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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RkdkrRkdkr(中, 39世) | 작성시간 08.10.23 지도 먹어 봤어요.
  • 답댓글 작성자容王(禮山,容,40世)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0.23 맛있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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