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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기) 우리는 하나
부푼 꿈을 안고 일망무제의 雲海를 바라보는 데에 유달리 갖는 감회는 없지만 광복의 달 8월에 연강학술재단의 해외학술시찰단 일원으로 눈물의 역사를 간직한 대한 해협 위를 날아가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커다란 획을 더하는 일이다. 일본, 언젠가는 꼭 가고 싶은 나라이기에 그 기쁨은 더 한지도 모른다. 조용히 명상에 잠겨 지난날 왜적의 침입을 방호하기 위해 축조된 내 고향 지미봉의 봉수대, 그리고, 임진왜란, 한일 합방, 2차 대전, 독립 등 시공을 넘어 역사의 단면과 9일 여정에 일본․대만․태국의 3개국을 시찰하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고 하나 둘 엮다보니 어느덧 일본 열도가 눈 아래 와 닿는다. ‘가깝고도 먼 나라․재창조의 문화를 이룬 일본’에는 서울을 떠난 지 1시간 20분만에 발을 디딜 수가 있었다.
풍요 속에 빈곤, 빈곤 속에 풍요
’89년 8월 9일 14시, 오사카 공항을 뒤로 하고 안내자를 따라 오사카 시내에 있는 동양도자미술관으로 향했다. 첫눈에 비친 오사카 거리는 너무나 한적하였다. 인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차선을 따라 움직이는 차량들만이 주인인냥 활보하고 있었다. 일본의 ‘제2의 도시이며 경제의 현관’이라 지칭됨이 무색할 정도여서 흡사 어느 읍내를 찾아가는 착각에 빠졌다. 유서 깊은 도지마와 도사보리강 사이에 아담하게 위치한 이 미술관은 1982년 11월에 개관, 7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약 1,300점이 收藏되고 있는데 주종을 이루는 것은 고려․조선시대의 陶瓷였다. 국내에서도 접하기 힘든 상감청자, 분청사기들을 대하니 ‘예술의 구원성은 제쳐두고 일본, 그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나고 오사카성을 찾아가니 그 의문은 더하기만 했다.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년이나 걸려 축성했다는 오사카성은 이중의 수로로 굴을 형성하고 직선적인 석담으로 날카로운 경사를 이루면서 견고함을 이루는 것이 이채로웠다. 누각 입구의 거석은 이 시대의 영화를 잘 대변해 주었고 천수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사카시는 잘 정돈된 모습이었지만 고층 빌딩이 예상외로 많지 않았다. 신사이바시 거리는 퇴근 인파로 길을 가득 메웠다. 문명의 첨단을 만끽하는 일본인들의 힘찬 발걸음, 질주하는 차량들의 뒤엉킴 속에는 길 한구석에 쪼그려 앉은 히피족도 보였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제주 출신 여학생과 길거리에서 이름표를 보고 인사를 나눈 부산 출신 한 가족과의 만남에선 하루만에 애틋한 향수가 살아나고 오사카성 출구에서 마주친 서울특별시 보이스카웃 대원들에게선 대한 남아의 당당한 기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튿날 교토로 출발할 즈음 차창밖에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맨 출근길 시민이었다. 건널목에서도 줄을 맞춰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하기보다는 얄미울 정도였다. 저들의 자세, 그것이 곧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原動力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따라 1시간여 달려가니 교토 북단에 들어섰다. 차창에 비친 정경은 한마디로 古風스럽다고나 할까. 시내를 관통하는 전차와 낡은 공중전화기를 보면서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교토는 794년 간무(桓武)천황이 수도로 정한 이래 천여 년 동안 일본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린 곳으로서 1,300여의 절과 신사가 현대 문명과 어우러져 일본 정신의 원류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 곳에선 평안신궁, 금각사, 이조성 등을 시찰하였는데 일본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으니 퍽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TV에서는 꿈의 제전․열기의 제전 고시엔 야구 대회 예선전이 중계되고 있는데 응원하는 고교생들의 모습은 潑剌함과 一體感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 선인들의 숨결을 뚜렷이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하는 아쉬움을 남겨 두고 야마토 대로에 있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옆 耳塚을 찾았다. ‘…도요토미 휘하의 무장은 전통적으로 일반적 戰功 표시로 首級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首級대신 조선 군민 남녀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이것들은 도요토미 명령에 따라 이 곳에 묻고 공양에 예를 가졌다고 한다. 이것이 전해진 耳塚의 기원이다….’라는 비문 내용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의 코와 귀를 5만 여개나 이 곳에 묻혀 놓았다니, 더구나 건너다 볼 수 있는 저곳에 도요토미의 神社가 거창하게 세워졌음을 볼 때 일본인이 가증스럽고 미움만이 북받쳐 올랐다. 준비한 꽃을 선열들께 바치며 묵념을 올릴 때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의 마음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을 이기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다.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발길은 나라로 달려갔다. 교토에서 나라까지는 약 40㎞이지만 2시간 정도가 걸려 처음으로 교통 체증을 느꼈다. 가는 도중 해박한 안내원 ㅅ 여사를 통해 들은 일본의 역사, 사회 구조, 국민 의식, 생활, 교육, 민속, 신앙 등은 너무나 유익한 내용들이었고 일본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동경 올림픽 이후 현재까지 일본의 실상을 들으면서 우리의 현실을 견주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우리는 일본이 거쳐간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 ― 민주화의 욕구 분출로 인한 노사 분규, 정치․행정인들의 愚昧 등은 가치관의 昏迷를 가져오고 있으니 이러한 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어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본이 주는 좋은 교훈을 거울삼아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희망찬 조국․선진 한국’의 건설에 온 힘을 모아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불상인 비로자나불을 안치하고 있는 동대사는 백제인 구니나카노 기마마로(國中公麻呂) 등이 건축을 담당하여 752년에 완성한 화엄종의 대본산으로 36개의 사찰을 총괄한다고 한다. 밀려드는 차량 때문에 어렵게 찾아갔지만 5분의 지연으로 불상을 보지 못함이 못내 서운하나 일본인의 시간 관념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으며, 한가롭게 뛰노는 사슴들과 작별을 고하고 귀로에 올랐다. 사찰 3일째, 오늘은 아스카 지역 답사의 날이다. 아스카는 나라시 남서쪽에 위치한 야마모토 분지 일대를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백제의 고도 부여와 유사한 지역으로 우리 조상들이 이 곳에 정착하여 우리 문화를 이식시켜 놓았는데 아스카란 ‘渡海人이 安住한 땅’이라 해석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자료관, 석무대, 비조사, 다카마쓰 고분 등을 답사하였다. 가는 곳마다 선인들의 자취를 접할 수 있었으며 그 아름다움과 久遠性에 놀랄 뿐이었다. 그리고 석무대 곁에서 본 칠월칠석의 풍경과 마을 입구의 어느 가정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는 절차는 新鮮感을 주기도 했다. 비조사 경내에서 매미채를 든 소학교 4학년 학생과 대학 1학년 여대생을 만났다. 동료 선생님께 통역을 부탁하여 이들에게 ‘한국을 아느냐?’라는 질문을 했는데 소학교 학생은 ‘모른다.’, 여대생은 ‘안다.’라고 했다. ‘무엇을 아느냐?’라고 하니 한참 머뭇거리다가 ‘김치’라고 한다. 이외에도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이들의 답변을 들으면서는 서글픔만이 가득했다. 물론, 이들의 수준에도 문제가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에 대하여는 그런 대로 알고 있는데 한국을 모른다니, 가깝고도 먼 나라임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다까마쓰 고분에 외롭게 피어있는 무궁화와 이별하고 백제사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한 시각은 17시 50분이었다. 조용했던 거리는 서서히 人海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어느 10여 층 건물의 각 층마다에는 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사원들이 환한 불빛 아래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20시 30분에 동료들과 오사카거리를 활보했다. 모든 건물은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으며 인적은 끊겨 몇몇 차량들만이 달려가고 있었으니 마치 죽음의 도시를 연상하게 했다. 한 동료는 변두리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라고 했지만 결코 변두리는 아니었다. 문득 안내자가 얘기했던 일본인의 생활상이 떠오른다. 국익을 위해선 나를 희생할 수 있는 자세, 가난하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는 일본인, 이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경제 대국이 되었구나 하니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 백두학원을 방문했다. 이 곳은 재일 동포 2~3세가 다니는 학교로 유치원, 초, 중․고가 한 울타리에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뜨거운 환영 속에 학교 현황을 비롯하여 각급 학교의 교육 제도와 일본 교육이 추구하는 명문교 육성 방침 ― 학력, 예절, 체육 ― 을 들었다. 재일 한국인의 아픔을 같이 하며 1946년 3월 개교 이래 혼란을 거듭하다 1976년에야 비로소 한국학교로서의 敎育路線을 확립하여 한국인의 自矜心을 잃지 않고 꿋꿋이 성장하여 이제는, 교원 76명과 학생 717명의 대규모 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교문 밖까지 따라나와 흔들어 주는 손길은 영영 잊을 수 없다. 해발 3,766m 의 후지산을 중심으로 3.4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일본은 오늘날 세계의 경제를 주름잡고 있다. 4일 동안의 짧은 여정 속에 오사카를 중심으로 교토와 나라 지방의 斷面만을 보고 일본을 논할 수는 없으나 하나하나 체험하다 보니 시사해 주는 바는 너무나 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타락과 무질서가 난무할는지 모르지만 가난한 삶을 영위하면서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 절약과 근면을 바탕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모습, 세계 제일을 지향하고자 하는 교육의 점진적인 변화, 수많은 차량이 왕래하는 데도 경적이 거의 들리지 않은 교통 문화, 하이(예) 문화, 상사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는 일체감을 형성하는 조직, 이 모두가 오늘날 일본을 이끌어 가는 힘이라 보아진다. 추석 연휴를 맞아 일본 개항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외국으로 休養次 떠났다는 소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난날을 되돌아 보며 8월 12일, 아리랑 합창의 여운을 남겨두고 제2시찰국 타이페이로 향했다. 잠시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다 보니 KE 613은 영광스런 나의 조국 대한 민국 상공 위를 날아간다. 단군 성조께서 이 나라를 세운지 반만 년, 오랜 세월 동안 동심 같은 백의 민족은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으니 이는 韓國民의 의지요 노력의 結晶임에 분명하다. 잠시나마 고국을 떠나보니 대한 민국이 위대함, 그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는 이번 시찰에서 얻은 최초의 수확이었다. 그런데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는 교원, 오늘날 한국의 교원들과 특성과 잃어버린 가운데 평준화 정책 속에 보충․자율 학습에 얽매인 학생들의 位相은 무엇이란 말인가? 20~30년 이상 오로지 2세 교육에 奉職한 교사들의 모습을 보며 10년 후 나의 위치를 投影해 본다. 최근에 교원들의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교원 지위법의 처리․개선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인 것 같다. 수당 몇 만원이 아니라 오 직 敎壇에서 떳떳이 가르침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한 것이다. 명예를 회복하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길이 이처럼 험난하단 말인가. 다른 방법이 있기도 한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난 13년, 나의 교직 생활이 하나 둘 走馬燈이 되어 스쳐간다. ‘한 학교 응시자 전원 예비고사 100% 합격의 영광, 1년 동안 한 학급 전원 출석 100%에다 육사 수석 합격, 명문 여고의 성장 기틀 마련, 승선 실습 등 모두가 사랑스런 제자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리고 10여 년 간 향토지 만들기에 정성드려 발간의 기쁨을 본 것은 내 생애 최고의 멋이라 하고 싶다. 말썽꾼 ㅅ, 재간동이 ㅇ, 총명한 ㄱ, 순진한 ㅎ, 사랑스런 ㅈ 등 이제는 모두들 삶의 현장에서 성실한 일꾼으로 그 책무를 다하고 있겠지.
자유 속에 자율인가
2시간 30분의 飛行에 타이페이 중정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부터 부딪친 지루함은 시내 도착까지 이어져 불가피 계획을 수정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일본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몰라도 질서․교통․간판․시설 모두가 자유 그대로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중국이란 국명이 붙여졌다고 안내자는 웃음 섞인 내용의 말을 덧붙였다. 야시장을 돌아보고 숙소에는 24시에 도착했다. 이튿날 용산사를 거쳐 중정기념당, 국립고궁박물관, 충렬사 등을 시찰했다. 시내의 복잡함과 무질서와는 달리 거대한 중정기념당을 중심으로 주위의 관공서들은 대륙 기질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야자수로 가로수를 이룬 도심 한복판의 정경은 외국이란 걸 실감하게 했다. 38˚의 열기 속에서도 인파로 가득 찬 박물관은 타이페이 근교 외상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과거 천여 년의 예술품 70만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1925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궐할 때 고궁에 박물관을 설립했지만 戰亂과 反亂으로 북평, 남경, 사천으로 옮겨졌다가 對日抗戰의 승리로 남경, 1948년 중공의 反亂으로 여기에 옮겨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移送過程은 且置하고 모든 유물이 하나도 손상 받지 않았다니 실로 세계 박물관 사상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20여 개의 전람실에 전시된 도자, 서화, 청동기 등의 다양성과 정교함에는 완벽하다고 단정해 버렸고 그 威容에는 예술에 門外漢이지만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시공을 초월한 대가들의 예술을 감상하면서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음이 못내 서운하였다. 대만에서의 일정이 짧아 이들의 사회 생활, 학교 방문이 이뤄지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중정기념당과 충렬사를 지키는 초병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자유 민주의 堡壘를 확인하였다.
1세기가 함께 흐른다 8월 14일 0시 30분, 방콕의 돈무앙 공황을 나서는데 태국 아가씨가 다가와 시찰단 일행의 목에 꽃을 걸어 주었다. 쟈스민의 향기 속에 ‘관광 천국․미소의 나라’를 실감하며 숙소로 향했다. 08시 모닝콜에 피로함을 달래며 식사를 마치고 여정에 올랐다. 그 옛날, ‘고국에 계신 동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태국의 수도 방콕에 있는 국립 경기장입니다. 지금으로부터….’라는 목 메인 아나운서의 축구 중계를 기억에 더듬으며 왓트라밑과 독사 연구소를 관람하고 파타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시내 변두리 빈민촌에 잠시 머물었는데 6살 정도의 어린이가 오더니 손을 내밀면서 ‘완달라, 완 달라’를 요구하는데 1950년대 우리의 현실이 되살아남을 볼 수 있어 슬픔을 금치 못했다. 고층 빌딩과 판자 집이 어우러지고 신형 외제차와 삼륜차(일명 뚝뚝이)가 달리고 있으며, 초라한 차림에 맨발로 거니는 모습을 보니 100년 세월이 한꺼번에 공존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1시간 이상을 달려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넓다란 들녘에는 드문드문 공장 건물과 선전탑이 열대 식물과의 짝을 이뤄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 기술로 다져진 고속도로 위에서 한국 기업의 선전탑과 공장을 보니 뿌듯한 감회가 어려 왔다. 파타야 해변의 자유와 낭만, 산호섬의 아름다움, 한국 음식점에서의 정갈스런 맛, 민속촌에서 본 민속 공연과 코끼리의 재간, 유람선 선원이 부르는 '돌아와요 부산항․고향의 봄'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과도한 관광 정책은 국민들에게 無知와 蒙昧를 가져온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학업에 전념해야 할 청소년들이 外貨를 벌어들이기에 급급하여 관광지에 투입되어 장사를 하고 있으니 태국의 앞날에 먹구름이 가득할 뿐이었다. 내 고향 제주도도 1960년대 이후 관광지로 개발되어 현재는 국내 제일의 관광지가 되었는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얻음도 있었으나 대대로 지켜온 땅과 순수한 인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관광 휴양지 파타야를 보면서 관광 산업의 虛實을 피부로 느꼈다. 이튿날, 차오프라야강 위를 시원스럽게 달리는 쪽배에서 바라본 원주민들의 생활상은 形言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강물을 생활 무대로 하여 티크나무로 만든 소형 배나 수상 가옥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不可思議의 세계를 점한다고나 할까. 강가 위에 즐비한 현대식 호텔, 74m의 높이를 자랑하는 새벽의 사원, 연 3회 국왕이 스스로 금의 옷을 갈아 입힌다는 에머랄드사원, 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궁 이 모두는 아름답기보다는 호화스러웠다. 철저한 불교의 내세관과 열대 몬순 기후로 쌀과 과일이 풍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상식으로 도저히 통하지 않는 사회였다. 1인당 GNP가 1천 달러에 불과한 나라, 빈부의 차가 심한 나라, 부정 부패와 총기의 위협을 받는 나라, 역사상 단 한번도 異民族의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 그래도 국립박물관에서 만남 국민학교 1학년 학생의 미소는 해맑기만 하였다. 말로만 듣던 폭포수처럼 내리는 스콜을 잠시 피하고 나서 방콕 중심가에 위치한 SGC(Saint Gabrielis College)를 방문했다. 1920년에 세워진 전통 있는 학교로 초․중․고가 한 울타리에 있는데 4,660명의 학생을 거느리고 있고 상류 계층 자녀가 다녀서 그런지 컴퓨터, 과학, 자료, 상담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학교 운영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었으며 특히 교무실은 8명 내외가 근무할 수 있도록 하여 연구 의욕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학급당 학생수도 40명 내외이고 수업은 교사의 강의보다 학생 스스로 참여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음은 매우 鼓舞的이었다.
자랑스런 나의 조국 8월 17일 13시 50분,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방콕을 출발 서울로 향했다. 부푼 꿈을 안고 떠난 9일간의 여정 속에 異國의 풍물을 대하면서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가는 곳마다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한 수많은 한국인을 대할 때 자랑스럽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들을 보며 미덥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풍요로움 속에 어려운 삶을 영위하는 일본을 보라! 자유 속에 자율과 주체성만이 최상은 아니요, 한 시대를 살면서 1세기가 공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들이 주는 산 교훈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타이페이 어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제주 출신 ㅇ군의 희망찬 모습처럼 근면․검소․절약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다. 타이페이의 야시장에서 광란에 깃든 대만 젊은이들과 손을 내밀며 완 달라를 외쳐대던 태국 소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는 과거에 심취해서도 안 되고 현재를 享樂해서도 안 될 것이다.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자가 이 시대의 바람직한 인간상이요, 선도자이다. 최근 우리의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을 살펴보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느낌이 든다. 왜 이래야 하는지…. 한국인 모두는 나만이 최고이다라는 가치를 버리고 현실을 올바로 直視하여 難局을 슬기롭고 진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갖도록 하자.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목표까지 도달하는 일본인의 성실함을, 매사를 조급하게 처리하지 않고 주체성을 갖고 만만디(천천히)하는 대만인의 자세를 他山之石으로 삼도록 하자. 저 멀리 秀麗한 우리의 국토가 보인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자랑스런 나의 땅 나의 조국을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노력을 잠시라도 늦추지 말자. 세계 속에 雄飛하는 한국의 기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초가을의 상큼함이 몸에 와 닿는다. 연강학술재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이번 시찰을 거울삼아 새로운 국가관과 교직관을 갖고 가르침의 尖兵으로 그 책임을 다하고자 굳게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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