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 박용철(龍兒 朴龍喆)생가를 찾아가다
일전에 송정공원역 내에서 용아 박용철이 이 동네 출신이란 것을 알았고, 기회 닿을 때 한번은 가보겠다는 생각은 6월 13일 남도한바퀴의 '무안-목포 나들이여행'을 마치고 성사되었다. 광주송정역(또는 송정공원역)에서 용아생가까지는 약 2.0km 정도다.
* 용아 생가 : 광산구 소촌동(광산구 소촌로 46번길 24 / 소촌동 363-1)에 있는 가옥이다. 용아생가는 시인 박용철(朴龍喆, 1904~1938)이 태어난 집으로 그의 고조부가 19세기 후반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 등이 남아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로 개량했으나 1995년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막돌바른층 쌓기를 한 2자 높이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주두 위에 납도리를 올렸다. 5량 구조이다. 맨 왼쪽은 부엌이며 전면에 부엌방을 두었고 중앙 2칸은 방이다. 전면에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으나 측면과 내부는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랑채도 5칸으로 우측부터 부엌, 방, 방, 마루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집이며 서재는 원래 초가집이던 것을 시멘트 기와로 이었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가옥이다. 광주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1986. 02.)되었다. 박용철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아호는 용아(龍兒)다. 박용철은 우리나라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눌재 박상의 후손으로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배재고등학교, 동경 청산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31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을 발간해 창간호에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지었다.
시문학 활동 뿐 아니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입센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희곡을 번역하는 등 해외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6세 때 김회숙과 혼인하였으나 1929년 이혼하고 1931년 누이동생의 친구였던 임정희와 재혼했다. 1938년 후두결핵으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우산동에 안장되었고, 송정공원, 광주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 '광산구청' 홈페이지에서 모셔옴
* 떠나가는 배 :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일제 강점기 때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의 슬픔을 담고 있으며,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 인생을 비유한 작품이다. “나 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 짓는다” 정든 고향을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떠날 수밖에 없는 식민지 백성들의 처지는 다를 것이 없으며, 시인은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한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용아의 두 형이 모두 몸이 약해 일찍 죽고, 그 역시 부모님의 각별한 애정 속에서 보호를 받고 자랐지만,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몸은 약했지만 그의 나라 사랑은 바다 같이 넓고 크게 표현되었다.'라 평가하고 있다.
용아생가 건너편에는 '용아 박용철 자료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박용철 연보를 비롯해 여러 자료들을 사진과 함께 게시하고 있다.
* 시문학 : 1930년대 창간된 시전문지. 1930년대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 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주도했던 시인들을 시문학파라고 한다. 시 문학파의 핵심인물은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며, 여기에 정지용,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의 참여로 창간호가 발간되었고, 뒤이어 수주 변영로ㆍ김현구가 제2호에, 신석정ㆍ허 보가 제3호에 동참하였다. '시문학'은 1930년 3월 5일 창간하여 그해 5월 20일 제2호, 1931년 10월 10일 제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풍미했던 카프문학과 감각적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은 채 이 땅에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시문학파의 문학사적 의의는 첫째 1920년대의 이데올로기 문학의 근본적 결함을 극복하고 시의 자율성을 확보한 점, 둘째 시적 기교와 전통적인 가락을 통해 순수시의 새 경지를 개척한 점, 셋째 1920년대와 1930년대 시문학의 분획점으로서 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룬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박용철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일제 강점기 ‘민족문예운동가’ : 1923년 4월 동경외국어학교 본과 독어부에 진학하고 일본 관동지방 대지진 이후 국내에서 김영랑의 권유로 문학활동을 하면서 기존 문학세계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순수문학의 시대를 여는 등 ‘민족문예운동’을 펼침
- 시인 : 자유시 71편 시조 12수, 한시 13수 총 100여 편의 시를 남김
- ‘시문학파’ 창립 : 사재를 털어 자본을 지원하여 1929년에 ‘시문학파’ 창립
- 번역가 : 독일 문학과 문학이론을 번역하고 영국, 미국의 시와 희곡을 번역 - 시 342편, 소설 2편, 희곡 7편
- 비평가 : 1938년 삼천리 문학 창간호 ‘시적변용에 대해서’를 비롯해 당시 비평(평론)의 극치를 보여 문학인을 깨우고 문학 작품의 완성도를 높임
- 극예술 운동가 : ‘극예술연구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공연자금을 지원하고 창작희곡 4편과 번역희곡 7편을 쓰고 연극에도 출연
- 발간문화의 선구자 : ‘시문학’(창간~3호), ‘문예월간’(창간~4호), ‘문학’(창간~3호), ‘극예술;(창간~6호), ’정지용 시집‘(1935), ’영랑 시집‘(1935) 등
- '(사)용아 박용철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모셔옴
어렵사리 찾아간 용아생가, 광주송정역(송정공원역) 또는 <상무대로> 등 적당 지점에서 용아생가까지 안내(이정표 포함)가 우선되어야 할 것 같았다. 늦은 시각에 도착해 담당 문화해설사로부터 안내는 받지 못했지만 생가와 자료관을 둘러보면서 시인 박용철의 자취들을 만남은 기대 이상이었다.
생가 견학을 마치고 <송정떡갈비거리>로 걸어나와 막걸리를 곁들인 저녁을 먹은 후 <공항로>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용보교차로~공항역까지 1.53㎞구간에 800그루가 식재)로 들어서 광주공항에 이를 즈음 서녘 하늘을 곱게 물들인 아름다운 노을은 거닒이 준 선물이었다.
(2023. 0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