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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마태복음

26마태복음 13강 -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작성자뻬드로|작성시간26.06.07|조회수46 목록 댓글 0

2026년 마태복음 13

말씀/ 마태복음 8:18-34

요절/ 마태복음 8:27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선거가 끝났습니다. 선거에서 제일 집중해야 할 부분이 인물입니다. ‘이이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런데 현실에서는 인물보다 지지 정당 혹은 한두 가지 느낌으로 표를 던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좋은 제도에도 불구하고 정치발전을 더디게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여정에 그대로 대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하시는가’,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말씀으로 와 닿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간청했습니다.(19)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비린내 풍기는 어부 출신도 아니고 돈 냄새 풍기는 세리 출신도 아닙니다. 성경연구 서기관 출신 제자지망생입니다. 저라면 당근 두 팔 벌리고 격하게 환영하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제자생활이 초기에는 조금 힘들어도 갈수록 은혜롭습니다. 먼저 온 제자들이 텃세 부리더라도 순종하다보면 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2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베드로에게는 두려워말라 내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소망을 심으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매우 까칠하게 대우하시는 모습입니다. 균형을 잡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제자로 결단했던 당시, 예수님은 거의 무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인기절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 가득할 수 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는 일생 집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만약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면, 결국에는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포커스를 두고 움직입니다. 그 길은 칭찬과 존경받는 길이 될 수도 있지만, 배척과 멸시받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길이든지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거기에 포커스를 두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배우는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두 번째 제자지망생이 등장하여 간청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칭찬 대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어마어마한 악플이 달렸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모도 없냐?’,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할 정도로 효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효는 세상 윤리의 최고 가치 중 하나입니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와 충돌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먼저 하나님 나라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의 여정을 걷다보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충돌입니다. 어떤 선교사는 선교지 개척자로 나갈 당시, 과부 어머니를 모신 장남이었습니다. 어머니 봉양이라는 가치와 선교사의 부르심이 충돌했습니다. 그 분만 그런 충돌을 겪은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부르심을 따라 주와 복음역사를 절대적으로 섬기기다보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충돌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이 가장 큰 충돌을 만났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대국의 오랜 수탈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무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쳐 쓰러져 죽을까봐,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여야 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을 목격하고도 주여, 이스라엘 회복은 언제입니까?’,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필요보다 만민구원역사를 앞세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신 이유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만민 구원역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절박한 기대와 요청을 해결하고 나서 제자로 살겠다는 사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지라도 제자로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중요한 일은 끝이 없습니다. 아버지 장례가 끝나면 어머니 장례가 있습니다. 지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자 결단하는 사람이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처음부터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두고 오직 그의 나라를 앞세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것저것 뒤섞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알고 체험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정과 존경도 누리고 싶습니다.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충성하지만 절박한 현실적 요구를 해결해가야 합니다. 그렇게 뒤섞여서 좌충우돌 부딪히고 깨어지고 연단받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는 방향입니다.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가는 것, 하나님의 부르심을 앞세우는 것, 그 방향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제자생활에 예수님을 배우고 체험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사 이 길을 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배에 오르사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가십니다. 배는 미끄러지듯 바다 위를 달렸습니다. 베드로는 옛날 생각을 하며 신나게 썰을 풀었을 것입니다. “나가 말이여, 이 바다에서 제자로 결단했당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는디, 워매, 물고기들이 거시기하게 그물에 뛰어드는 것이여! 물괴기들을 보다가 퍼뜩 한가지 생각이 내 후두부를 강타하는 것이여. 저 미물도 목숨 걸고 말씀에 순종하는디, 나는 뭐하고 있능겨, 나가 물고기만도 못한 미련한 인간임을 그때 알아부렀어! 그래서 결단해 부렀지다른 제자들이 웃고 박수치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24) 바다에 큰 놀이 일더니,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갈릴리 광풍이었습니다. 고막을 찢는 강풍과 함께 집채만 한 파도가 사정없이 뱃전을 두드렸습니다. 배는 순식간에 물로 가득해지고 침몰 직전이 되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은혜로웠던 베드로의 입에서 죽음의 공포가 튀어나왔고, 조용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마구 흔들어 깨우며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다 죽어요!”(25)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겠구나! 고난에 동참하지 못해 미안하다!’,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햐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이, 오랫동안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무서움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풍랑이는 바다에서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젊은 날 놀이공원 바이킹이나 건축현장 비계 타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케이블카만 타도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호르몬을 이길 수 없구나...’, 그런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책망하십니다. 이는 왜 무서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무서움의 밑바닥에 깔린 제자들의 생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망한거야, 괜히 제자로 살겠다고 따라왔다가 물고기 밥으로 끝나는구나!”,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느냐, 책망하신 것입니다.

인생 여정을 걷다보면 생각하지 못한 위기를 만납니다. 때로는 질병, 때로는 경제위기의 광풍을 만납니다. 때로는 가족이나 자녀와의 갈등이 광풍처럼 두려움을 몰고 옵니다. 그런 위기를 다 피해갈지라도 언젠가는 죽음의 광풍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두려움과 절망으로 침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상황을 맞이할수록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예수님을 새롭게 체험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사 바다를 꾸짖으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광풍까지도 잠잠케 하시는 자연 만물의 주관자이십니다. 인간의 경험과 상식을 뛰어넘어 일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만날수록 낙심할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쫓겨 경거망동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음으로 잠잠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해 나름 훌륭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단. 그랬으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엘리야, 어떤 이는 세례 요한, 최소한 선지자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광풍 사건은 그들의 판단과 예측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예수님에 대해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오래토록 따라다녔던 제자들이나 여인들의 판단과 상식까지도 뛰어넘는 모습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보여주신 모습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오빠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말씀했는데, 마르다는 오빠의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음을 알립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러면 안되겠구나!’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마르다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왔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맞이할수록 우리의 눈을 예수님에게 고정해야 합니다. 광풍 같은 위기가 우리에게 오는 것을 원치 않지만, 만약 광풍 같은 위기가 왔다면 끝까지 믿음싸움을 감당해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비하신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선교사수양회가 끝난 후 캐나다 선교사 한 분이 갑작스레 건강이 악회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많은 나이로 인해 갑작스레 찾아온 컨디션 저하였습니다. 에크모를 해야 할 정도로 생명의 위기였습니다. 본부 시니어목자들이 급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심방했는데, 놀랍게도 가족들은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이번 일로 밖에서 유랑하던 막내아들 사무엘이 집에 돌아왔으며, 선교사 남편의 누님 두 분도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선교사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는 다 알 수 없을지라도 선하신 주권과 능력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광풍 같은 위기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광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박해라는 거대한 광풍을 만났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형장에서 죽임을 당했고, 교회가 소멸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통해 더욱 순전한 복음을 정립하고 무너지지 않는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초대교회가 박해의 광풍을 만났다면, 중세교회는 권력 유혹의 광풍을 만났습니다. 근대교회는 세속화의 광풍을 만났습니다. 교회가 광풍가운데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며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경험, 우리의 계산을 까마득히 뛰어넘어 몇 차원 높은 세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만날수록 더더욱 예수님에게 눈을 고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승리를 확신하며 견디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풍랑치는 바다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당신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살도록 이끌어가시는 예수님께 날마다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광풍사건이 지나니 이제는 광인을 만납니다. 예수님 일행이 가다라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귀신들린 자 둘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밤낮 무덤에 거하면서 자기 몸을 자해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데도 반발심과 분노로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이 쇠사슬로 묶어 제어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습니다.(29)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도 알고 최후 심판의 날을 피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았고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도 않습니다.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는 것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마침 멀리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천 마리 정도였다고 기록했습니다. 귀신들은 사로잡은 자들을 떠나는 조건으로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31) ‘입 닥치고 꺼져!’라고 말씀하시면 안될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의 허락을 받은 귀신들은 두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은 귀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뛰어들어 몰사했습니다.(32) 돼지를 희생시키지 않고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요! 죽은 돼지들도 억울하고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를 잃은 주인들도 억울합니다.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영적 세계의 원리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영적 메시지가 오가는 것입니다. 귀신의 메시지는 이랬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돕고자 돼지 이천마리 희생할 수 있어요? 사람들에게 욕먹을 텐데요!” 찬미나 성경이처럼 훌륭한 청년들을 생각하며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몹시 사나와서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비행청소년 2명을 구하기 위해 돼지 이천마리를 희생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랬을 것입니다. “그렇다. 이들은 돼지 이천마리보다 소중하다,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욕먹을 수 있다”, 자기 돼지가 아닌 남의 돼지여서, 자기 희생이 아닌 다른 사람의 희생이어서 용감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돼지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돼지를 잃고 예수님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돼지치기 알바들이 시내로 달려가 모든 일을 주인에게 보고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달려와서 현장을 확인해보니, 직원들의 보고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귀신들린 두 사람의 정신이 온전하여져서 예수님 옆에 얌전하게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가다라 지방의 대표적 문제아 두 사람이 사람답게 변화되었으니 말입니다!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예수님을 환영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주기를 간구합니다. 두 사람의 구원보다 돼지 이천 마리가 중요했습니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돼지 귀한 줄을 알면서도 사람 귀한 줄 몰랐습니다. 이를 보면 귀신들린 사람만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체험 자체가 믿음을 보장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라운 기적을 보아도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가치관과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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