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14강
말씀/ 마태복음 9:1-17
요절/ 마태복음 9:13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캠퍼스에 전도하러 나가보면, 누군가를 불러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저녁 명숙사모와 윤선사모는 캠퍼스에서 의대생을 불러 전도하고 결국 전화번호까지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전설 같은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양들에 대한 심정이 비결이었을 것입니다. 심정이 없으면 죄인은 커녕 의인을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같은 죄인을 불러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을 새롭게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생명구원역사에 쓰임받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 본 동네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입니다.(1) 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침상 채 누운 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침상 채 데려올 정도로 심각했으니, 병자도 힘들고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참조하면, 몰려든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자라면 당연히 간절하고 당연히 겸손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병자이기에 더 힘들 수 있습니다.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쳐다보는데, 스스로는 조롱당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존심 더하기 자격지심으로 인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병자와 그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질병을 타고 들어오는 온갖 어두운 생각을 붙들기보다 예수님 소문을 타고 들어오는 믿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작은 자야’, 우리식으로 하면 ‘아이야’ 정도의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믿음을 붙들었다는 것은 자기 경험이나 계산을 내려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안심시킬 뿐만 아니라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전까지는 병을 고쳐주었는데, 이번에는 죄 사함을 선포했습니다.
일단 ‘죄사함이 병 고침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아울러 그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도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리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사함’-용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시스’(ἄφεσις')는 사람에 대한 법적 의무나 관계의 짐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경민 목자의 차를 긁어 상처를 내었다면 배상 의무 또는 미안한 마음의 짐을 집니다. ‘용서합니다. 어차피 도장하려고 했습니다’, 말해준다면, 경민목자가 그렇게 말해줄 때 저의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님 말씀은 인간적으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가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본문 말씀에 대해 언급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서라는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 그런데 자기 밟을 밟히지도 않았고 자기 돈을 도난당하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친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한다 해도 얼간이 짓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런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를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일 경우에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머리 좋은 서기관들은 예수님 선포에 담긴 메시지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들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3) 그들의 치명적인 문제는 예수님을 ‘탁월한 인간’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수많은 인간 중의 하나로 알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짜 신성모독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찌하여 무지한 생각을 하느냐’라고 말씀하지 않고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 라고 책망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 선포는 ‘믿거나 말거나’식의 말잔치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를 드러내십니다. 5,6절을 읽겠습니다.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어느 것이 쉽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죄사함 선포가 더 쉽게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기에, 아무 말이나 던져도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반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는 말씀권세는 당장 눈앞에서 증명이 됩니다. 물론 죄사함을 선포하는 말씀이나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는 말씀이나, 모두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말씀 선포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 중풍병자를 치료하십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7) 무리가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8)
예수님이 죄사함을 드러내기 위해 질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핵심 사역이 죄사함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죄 사함보다 현실 문제 해결에 주목합니다. 질병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기에 최우선적으로 주목합니다. 우리 또한 거기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하나님은 세상 죄를 해결하는 거기에 모든 것을 집중하십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증거하는 메시지가 그러합니다. 창세기부터 그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저지름으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가 가인의 살인의 죄로, 그리고 노아시대 정욕과 폭력으로 그리고 바벨탑의 불신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패역함으로 커져갑니다. 커져가는 죄 문제는 홍수심판을 불러오고 유황불 심판을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비하십니다. 율법을 주시고 성전을 주심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사함의 원리를 알게 하십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해 유다이즘을 깨고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시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대속제물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 나타난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고통의 문제, 현실 문제가 절박할지라도 거기에 모든 생각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죄사함의 권세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이길 힘과 용기를 덧입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신앙명입니다. 본명은 레위,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본래 이름이나 새 이름이나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하나님의 실패, 하나님과 연합이 아닌 하나님의 대적 같은 인생입니다. 그가 왜 부모의 기대 혹은 목자의 기대와 정반대로 걸었을까요! 기억조차 하기 싫은 가난을 만났던 것일까요! 일단 부자가 되어야 무엇이든지 꿈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쉽지 않은 각오를 거쳐 세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태가 기대했던 행복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잘못된 인생 방향은 행복을 담을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 말씀은 마태 맞춤형 초청입니다. 일단 어제까지 세리로 살아온 과거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은혜의 초청입니다. 지금 출발해도 늦지 않았다는 소망의 초청입니다. ‘세리였다매?’, 세상은 과거를 따지고 정죄하는데, 예수님은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세리가 과연?’, 세상은 미래를 의심하는데, 예수님은 오로지 희망을 보십니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과거도 달라지고 미래도 달라진다는 믿음을 담았습니다. 지금 따르기만 하면 어두운 과거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간증으로 바뀝니다. 답답한 미래는 성령의 손길을 체험하고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비전으로 채워집니다. 마태는 결단했습니다. ‘저는 부족해서 안돼요’, 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돼요’,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를 제자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나 따랐습니다. 지금 결단하면 세리도 제자가 되고 사마리아도 제자가 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마태는 즉시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동료 세리들, 석세리, 최세리, 곽세리도 불렀습니다. 마태가 입을 여니 동료들에게 인생간증이 되었고, 예수님이 입을 여니 주제 강의가 되었습니다. 마태 집은 순식간에 여름수양회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은혜를 받기는커녕 분노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당시 율법사회는 죄인을 병자가 아닌 병으로 보았습니다. 세상을 오염시키는 바이러스, 세균 덩어리처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정죄하고 격리시켜야 제2, 제3의 세리가 나오지 않으며 유대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묵자흑이라는 속담처럼, 죄인들에게서 안 좋은 영향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병으로 취급하고 분리시킬수록 공동체를 치명적으로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독일 사회가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실행했던 것도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질병으로 보고 망가뜨렸는데, 결국 독일 사회를 망가뜨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 정당화 주장도 그와 비슷합니다. ‘저들을 쓸어버려야 우리가 안전하다’, 그런 생각이 주류를 차지하는 공동체는 결국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죄인을 짜르는 데 있지 아니하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회복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한 죄인을 소중히 여기고 회복시켜 의인의 길에 서게 하는 것, 거기에 천국이 임하고 소망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을 병자에 비유했습니다. 심판해야 할 완악한 자가 아닌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자로 보신 것입니다. 세리는 욕심 바이러스에 걸려 양심면역이 약해진 자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남자에게 상처 받아 윤리 골격이 부러진 환자입니다. 의사는 ‘왜 이런 병에 걸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느냐’, 정죄하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고쳐놓을 해법을 찾아 동분서주합니다. 예수님은 호세아서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인생목적을 증거합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구약의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긍휼히 충만하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지어진 우주의 신비가 분명한 증거입니다. 인류역사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그 증거입니다. 인간은 때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찾아오셨습니다.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인생목적입니다. 죄인의 모습이 드러나서 고통스런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 분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영접하기 힘들어 고통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 채찍에 맞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대신 대속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가 찔리심으로 우리의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그가 상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이유도 그러합니다. ‘세리로 살면서 마음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 예수님 안에서 죄의식 없이 편히 살라’는 그 정도 소망이 아닙니다. 죄인을 불러 회복시키는 그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린 지상명령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사람 안에 죄성이 있습니다. 교만, 탐욕, 정욕, 시기심, 비교의식 같은 죄로 꼬인 영혼은 너무도 쉽게 불신과 어둠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그로인해 부모의 심정으로도 혹은 목자의 지혜로도 어쩌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죄인을 돕는 것이 기쁨보다 고통으로 다가오는 때입니다. 그럴지라도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죄인을 도우면서도 죄인으로 새롭게 자기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처음 믿는 그때만 구원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목자인 나에게도 여전히 구원자가 되시고 치료자가 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목자로 살면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섬기는 자로 살면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세리같은 죄인만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심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누리고 죄사함을 나누는 믿음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전통대로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통을 해석해야 하는데, 그들은 전통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굳어진 그들의 해석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혼인집 신랑에 비유하십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입니다. 최고급 뷔페로 피로연을 준비해 놓았을지라도 신랑이 없다면, 그냥 꽝입니다. 금식을 해야 한다면 바로 그때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남아있는 때입니다. 그런 모습이 되었다면, 전통을 지킨 것으로 자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가 왔음을 인정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생베조각에, 율법사회를 낡은 옷에 비유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기워놓으면 생베조각의 강한 수축력으로 말미암아 낡은 옷을 당겨 망치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새 포도주에, 유대사회를 낡은 가죽부대에 비유하십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가 발효하여 부풀어 오르면 낡은 가죽부대는 터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생베조각은 줄어들고 새 포도주는 늘어납니다. 유대사회는 모든 것을 율법에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율법으로 고정한 것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것이 어떤 동기와 목적을 담았든 아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손 마른 자를 고쳤을 때, 저들이 죽일 듯이 분노했던 모습도 그러합니다. 박제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다윗 시대처럼 죽죽 확장되는 영광의 시절이 있고 바벨론 포로처럼 한없이 줄어드는 시절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시절을 거치며 믿음도 체험하고 연단도 받으며 거듭나고 성장하고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따라가려면 자기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역사하시는 날에는 이렇게 가고, 예수님이 저렇게 역사하시는 날에는 저렇게 움직여야 합니다. 원칙 없다는 불평으로 마음을 딱딱하게 할 것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는데, 예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적용하면, 잔치 집으로 인도하는 시간을 만나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금식하는 시간을 만나면 십자가 고통의 시간을 만나면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어느 때를 만나든지 오직 예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의 손길대로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생베가 되고 새 부대가 되어 생명구원역사에 쓰임받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