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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마태복음

26마태복음 15강 -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작성자뻬드로|작성시간26.06.21|조회수42 목록 댓글 0

2026년 마태복음 15

말씀/ 마태복음 9:18-38

요절/ 마태복음 9:29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한국 축구가 아쉽게 멕시코에게 졌습니다. 그럴지라도 32강에 능히 진출할 것을 믿습니까? 이리 외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아니며, 32강 진출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상징하는 믿습니까?’라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습니까?’의 줄임말입니다. 본문에서 죽은 딸이 살아나고 혈루증 여인이 고침 받고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누리고 영생을 얻고 건강한 삶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고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한 관리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지만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나겠습니다중풍병자도 아니고 나병환자도 아닌 죽어버린 사람입니다. 어찌 살아날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어마어마한 믿음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을 참조하면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관리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을 싫어하는 세리출신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마 예수님에게 집중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관리가 회당장 야이로였다고?, 어느 동네 회당장이야? 그렇게 잘나가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을 찾았어?’ 그렇게 곁길로 빠지는 것을 차단하고 오직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관리의 죽은 딸을 살리러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열두 해 혈루증 앓고 있던 한 여자가 예수님 뒤로 몰래 다가와서 겉옷 가를 가만히 만졌습니다.(20) 너무나 소극적인 액션입니다. 12년이나 고통받은 만성 고질병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나병환자처럼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온다든지, 중풍병자처럼 수치와 조롱의 시선을 참아낼 용기 정도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인의 액션은 극히 작지만, 여인의 믿음은 크고 분명했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여인이 로또 복권을 사는 심정으로 겉옷을 만진 것이 아닙니다. ‘혹시 낫게 되면 좋구요. 안 나으면 어쩔 수 없구요’, 패배의식으로 만진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갈만한 곳도 없구요. 집에 있으면 괜히 가족들에게 눈치 보이니까 한번 와봤어요’, 온 몸으로 비비든, 겉옷만 만지든, 어떤 모습으로든 예수님과 연결되기만 하면 낫게 될 것이다, 그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예수님이 감동하십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딸아’, 자녀처럼 귀하게 영접하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비난하든 걱정하지마라, 안심을 시킵니다. 그리고 칭찬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칭찬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고 액션은 보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믿음으로 했는가보다 어떤 방식으로 했는가에 주목합니다. 복권판매소에서 1등 당첨자가 나오면, 한동안 사람들로 붐비게 됩니다. 같은 장소에서 복권을 사면 당첨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입니다. 스포츠 의류업체가 유명 스타를 모델로 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가 입은 대로 나도 입으면 웬지 운동이 잘될 것 같습니다. 신앙 여정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했더니 성적이 좋아졌대. 금식을 했더니 취업이 되었대, 성경 말씀을 암송하니까 진급했대’, 그런데 액션을 아무리 크게 할지라도 믿음이 없다면, 100일 새벽기도 하고 40일 금식을 할지라도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떠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어떠한 믿음으로 금식하고 어떠한 믿음으로 말씀을 암송하는지, 믿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은 치열한 내적 싸움입니다. 의심과 두려움에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의와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자 금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절망하기보다 주님의 긍휼을 믿고 도전하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인은 이렇게 기도하며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을 것입니다. “태양이 개미 같은 하찮은 미물에게도 빛을 비추어 주듯이, 예수님의 크신 긍휼은 나같은 자에게도 베풀어질 것을 믿습니다.” 12년의 반복되는 실패에도 주저앉지 아니하고 다시 도전하는 꺾이지 않는 믿음을 가진 용사입니다. 우리들도 믿음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이 관리 집에 도착했습니다. 곡하는 소리, 슬픈 피리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함께 슬퍼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소녀의 아빠가 가장 듣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초상집 하객들은 감동 받기보다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웃은 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믿음 있는 자들만 남도록 했습니다. 그 후에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25) 그러자 잠에서 깨어난 모습처럼,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린 사건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부활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이며, 주 안에서 잠자는 자들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6)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거기서 떠나가실 쌔,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후손 가운데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압축해 놓은 말입니다. 앞 못보는 맹인들이 예수님의 진짜 정체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맹인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집까지 좇아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물으셨습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지금까지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꿰뚫어 보시고 고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믿음을 체크했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최고난도 기적이었기 때문일까요? 실제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신유의 기적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기록은 있는데 말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능한 사역이었습니다.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이는 단순히 눈 뜨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공자 석가 같은 4대성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는 거기에만 빠져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환기시킨 것입니다. 질병은 고침받아도 다시 병듭니다. 눈이 좋아졌는데, 귀가 안 좋아지고 목은 좋아졌는데 허리가 아픕니다. 그러다가 늙고 죽습니다. 병 고침으로 끝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현실 문제를 해결 받았을지라도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된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믿음을 지킨 맹인들을 축복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29)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믿음의 중요성, 믿음이 하늘의 복을 가져온다는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 최고의 선물은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은 믿는 자가 누릴 복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하늘의 곳간을 열고 믿음으로 은혜와 진리를 누리고 믿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갑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 주신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빼앗기지 않고자 깨어 기도해야 겠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맹인들이 눈을 뜨자, 이번에는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셨고 그 사람은 입이 열려 말하게 되었습니다. 33절 무리들이 놀라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감동은 커녕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34.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악성 댓글을 달았습니다. 아니, 귀신의 왕이 누구 좋으라고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줍니까! 그들이 감동받기보다 비난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의 구원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변화의 역사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되고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이 말하게 되었다면, 천지개벽의 기적입니다. 사람을 돕고자 씨름을 해 본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마땅히 보아야 하는데 보지 못하고, 마땅히 들어야 하는데 듣지 못하는 사람을 돕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숨막힙니다. 그런 영혼이 귀가 열리고 입이 트이며 건강해지는 것만큼 놀랍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마음 열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눌리지 아니하고 전진하십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가지에 힘쓰셨습니다. 가르침, 복음 전파 그리고 고침이었습니다. 구원은 teachingpreachinghealing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도록 전도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배우지 않으면 1등급 우등생도 선악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배워야 회개할 수 있고 배워야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믿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인간의 본성은 의심과 불신과 어둠에 익숙합니다. 핸드폰 충전하듯이, 복음전리를 충전해야 합니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오해하고 쉽게 교만해지고 쉽게 병듭니다. 상처가 난 곳에 약을 바르듯이, 사랑과 교제를 통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36절을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성경은 인간을 양에 묘사했습니다. 세상은 사나운 이리처럼 영혼을 해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의인 요한을 죽인 헤롯처럼 의를 멸시하고 악을 조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단의 교주처럼 교묘한 속임수로 미혹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탐욕과 정욕처럼 악한 문화가 이리처럼 순수한 영혼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나 혼자의 힘과 의지만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해줄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돈 없다고 불쌍한 존재가 아닙니다. 병이 있고 장애가 있다고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목자 없는 양이 불쌍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집니다.(40:30)

부모가 자녀의 목자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신앙 선배가 신앙 후배의 목자가 되어주면 좋겠는데, 사람은 목자역할을 잠시 대행할 뿐, 목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모가 아무리 훌륭해도, 신앙 선배가 아무리 탁월해도, 자녀나 후배의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볼 수 없고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세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실은 부모에게도 목자가 필요하고 신앙 선배에게도 목자가 필요합니다. 제가 아버지로 살아보니까요 아버지로 사는 것이 정말 무겁고 두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책임져 주고 싶어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자로 사는 것도 그러합니다. 만약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라면, 기진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은 끈 떨어진 연처럼 하염없이 세상 풍조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과 성령으로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따르는 인생이 가장 복되고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내 가정의 가장이 되시고 내 교회의 목자가 되심을 믿을 때, 쓰러지지 아니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견디며 역전을 기대하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드린 고백이 아닙니다. 왕의 자리에 있든, 반역으로 인해 쫓기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든, 여호와가 목자처럼 때마다 인도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보호가 필요할 때 보호해주시고 훈련이 필요할 때 훈련했습니다. 회개가 필요할 때 회개하도록 책망하시고 지혜와 능력이 필요할 때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굴곡을 겪었었는데도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함께 했다는 고백에 담긴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여호와가 목자이심을 가르치고 여호와를 목자로 믿고 여호와의 치유하심을 덧입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7,38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하는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는 무슨 의미입니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제자들은 추수를 제대로 못하니까, 전문 추수꾼을 보내달라는 기도입니까!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심는 기도제목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한계적입니까! 목자와 양, 부모와 자녀가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소통의 어려움을 만납니다. 목자는 옳은 것을 가르치고 믿음을 심는데, 양은 이해받지 못하고 상처받습니다. 부모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했는데, 자녀는 지나친 간섭 때문에 괴롭다고 반발합니다. 가르치고 전도하고 치료해야 할 것은 많은데, 가르치기 어렵고 전도하기 어렵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추수하고 하나님이 도와줄 일군들을 보내신다는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목자의 탁월함이 양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극히 일부의 시간, 극히 일부의 공간만 공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럴지라도 추수하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길로 있으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목자의 입술에 권세를 부어주심으로, 부족한 목자의 말이라도 진리를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목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면, 또다른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친구를 통해 혹은 직장상사를 통해 격려를 주기도 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의 구원과 변화된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부족한 모습, 지금 어려운 상황에 주저앉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늘 새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을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좋은 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소망없다 생각했던 사마리아를 보며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4:35) 어느 자리에 있든지 희망으로 세상을 보는 것, 예수님 제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르치고 전도하고 치유하는 복음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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