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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다종교 사회

작성자ksunipar|작성시간13.12.29|조회수22 목록 댓글 0

한국과 다종교 사회

출처: NAVER 지식iN 비종교론 (boolingoo)

               -2008.04.12-

 

          이러한 세계적 정황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이라고 하는 특수 지역만을 한정적으로 살펴보면 다종교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경우 등록된 종교 단체만 해도 수 백여 개에 이르고 종교 공동체임을 표방하고 활동하는 단체들은 수 천여 개가 넘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공신력 있는 가장 최근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의 50.7%가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종교 인구 중에서 불교 신자가 23.2%로 제일 많고, 19.7%의 개신교, 6.6%의 가톨릭이 차례로 그 뒤를 잇는다. 유교 신자의 수가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사 방법의 한계 때문이다. 종교에는 다른 사회 조직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조직을 가지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제도 종교가 있는 반면에, 그런 조직을 갖지 못하지만 사회생활과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교 무속 아프리카 종교 등의 확산 종교가 있다. 확산 종교는 발휘하는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종교 소속감은 훨씬 낮게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인의 종교적 열정은 조사 수치로 나타난 50.7%보다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여하튼 한국의 종교 인구 50.7% 중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49.5%를 차지함으로써 한국의 종교인들은 대체로 불교 신자가 아니면 기독교 신자임을 알 수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 4명 중에 한 명은 불교 신자이고 나머지 3명 중에 한 명은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소수이지만 유교와 같은 전통 종교, 원불교나 증산교 같은 한국 종교, 그밖에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신흥 종교의 신자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먼 듯 여겨지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수 만 명에 이른다. 그래서 흔히 종교학자들은 한국을 두고서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가 사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친족 등의 소규모 단위 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모두 다종교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인간 사회의 최소 기초 공동체인 가정마저도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다. 부모와 자식은 물론 형제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요즈음은 부부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주말이면 서로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사찰이나 교회로 따로 가거나 아니면 격주로 번갈아 다닌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다종교 현상은 우리들에게는 이미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특별한 정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사람들에게 한국 가정의 이러한 다종교 현상은 지금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교 사회나 이슬람교 사회에서는 한국 사람들처럼 개인 각자가 주체적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그 사회의 종교에 의해 선택 당하게 된다. 기독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국가는 이제 흔치 않지만 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제국주의적 종교였다. 그 시대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성 종교를 거부하는 것은 곧장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다종교 상황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다종교 사회가 된 오늘날에도 가정의 기성 종교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종교 선택에 거의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가정이 핵가족화 되면서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다종교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더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필연적 문제

          이처럼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장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다종교 사회는 문화적인 은혜와 기회의 현장이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종교 문화가 차지하는 양은 압도적이다. 종교 문화가 인류의 삶에 갖는 중요함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물론 그 이전과 이후까지 걸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만일 단일 종교 사회에 산다면 다양한 종교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그만큼 폭넓게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을 지도해 온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서구 문명을 형성한 두 뿌리 중의 하나인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선택하여 누리거나 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이슬람교까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 이외에는 접촉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이슬람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문화 선택의 폭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다종교 사회는 다양한 인류 문화의 유산을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는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한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종교인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절대적 확신과 함께 그것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란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 혹은 최고시하는 반면 남의 신앙은 오류 혹은 열등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성격을 말한다. 종교는 신앙을 결코 기호(嗜好)의 문제로 남겨 두지 않는다. 음식의 경우라면 된장을 좋아할 수도 있고 치즈를 좋아할 수도 있다. 또한 상대방의 기호품에 대한 우열을 논할 일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렇지 않다. 신앙이란 기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신앙이란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나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나 기독자가 아닌 사람은 불행한 사람 혹은 적어도 덜 행복한 사람이다. 불자나 기독자들은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짐으로써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종교인이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권면(勸勉)하지 않는다면 그는 덜 성실한 종교인이다. 사랑이나 자비심이 부족한 사람을 성실한 기독자나 불자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 들지 않는 불자라면 그는 자비심이 넘치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하려 하지 않는 기독자라면 그는 사랑이 충만한 기독자는 아니다. 성실한 종교인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성실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반드시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 즉 종교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갖는다. 문제는 모든 종교인의 이러한 "태도"는 같은 반면에, 전달하고자 하는 그 "내용"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내용을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고 할 경우 긴장과 갈등은 예상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독선주의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종교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남녀 간의 애정 관계처럼 어느 정도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 간의 갈등과 알력이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의 반목과 겹치게 될 때, 그것은 심각한 분쟁이나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갈등과 알력은 동서양의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거의 예외 없이 존재했었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을 한 종교가 독점하지 못하고 여러 종교가 나누어 갖게 될 때 종교 간의 알력과 반목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은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남달리 더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소개되면서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왔다. 한국에서 다종교 상황이 야기(惹起)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엇비슷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 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해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던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서면 대체로 점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타종교를 향한 4 가지 태도

              다종교 사회가 노정(露呈)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즉,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은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타종교를 대하는 우리들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며, 종교인은 본성상 어느 정도 독선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타인의 신앙을 대하는 종교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좀더 자세히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주의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대략 네 가지로 일별해 보고자 한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서 먼저 배타주의를 들 수 있다. 배타주의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유일신을 믿어온 종교들이 타종교를 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 중에서 이제 한국 사람들 자신의 일부가 된 기독교가 가장 대표적이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종교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주의적 태도를 갖는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만을 유일한 참 종교라고 여긴다.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면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허위가 아니면 오류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앙만이 참이기 때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종교뿐이다. 즉, 자신의 종교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허위나 오류일 뿐이기 때문에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은 척결이나 처단의 대상이다. 그래서 배타주의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개종주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처단해버리고 마는 성전주의(聖戰主義)이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 적용했던 가치관을 자신이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타종교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제국주의는 획일화를 추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러나 탈현대의 포스트모던주의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원가치와 상대주의를 추구한다. 배타주의는 이러한 현대 사조와 평화적 공존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전제 앞에서 양식 있는 지성들에 의해 외면당하고 있다.

 

          포괄주의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을 예외 없이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포괄주의는 일단 다른 종교들을 송두리째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다르다. 이 입장은 다른 종교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어느 정도 참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인 참의 요소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자신의 종교에 궁극적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와 타종교를 우열 관계로 파악한다. 자신의 종교야말로 최고의 진리요 최종적인 진리인 것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표적 포괄주의자는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이다. 그는 교회 밖에서 비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자들의 경건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그리스도인으로 그것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자들을 두고 아주 낮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예수를 예수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불자들이 기독자들을 익명의 불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낮은 단계의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결국 자신의 종교로 수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다만 포괄주의는 배타주의가 내놓고 휘두르던 칼을 꽃다발 속에 숨겨 지니고 있는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종교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즉, 포괄주의 역시 자기 신앙의 완결성을 믿는다. 포괄주의는 어느 정도 개방적 태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그 개방적 태도는 자기 개방성이 아니라 타종교를 자기 종교로 흡수 통합하고자 하는 전략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Ernst Troeltsch)는 하느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 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放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정도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는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등이 대표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다양하여 그 성격을 한마디로 적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 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 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放棄)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끝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

                 대화의 불가피성

                 종교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분쟁의 문제를 결코 방치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세계적 유산을 한 줌의 재로 태워버리도록 놓아둘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지구촌의 현실은 세계 시민에게 결코 남의 문제일 수 없다. 다원주의는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문제들을 종교간의 대화로써 대처하고자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종교간의 대화가 갖는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해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종교간에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분명한 이유는 신앙이 서로 달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세계 시민이 지켜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전제이다. 평화로운 공존은 분명 대화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이다. 종교간의 심각한 분쟁이 몰고 올 눈에 뻔히 보이는 공멸의 길로 달려갈 수는 없다. 종교인들은 그보다 앞서 아직 남아있는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만큼 인류는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종교 외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종교적 선택을 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어쩔 수 없이 관용과 대화로 내몰린다면 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소극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일 수만은 없다. 이는 자기 개방을 기초로 한 열린 종교인으로서의 진리 추구나, 타종교인에 대한 이해나, 그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평화적 공존이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대화의 본래 목적들은 희생되고 만다. 배타주의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정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면, 평화적 공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평화적 공존이 우선적 목적이 되면 진리의 판단과 실천을 통한 행복 추구라는 종교 본래의 목적은 유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적 공존도 대화의 분명한 목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의 필연적 이유를 종교 자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

                      다원주의가 추구하는 종교간의 대화의 고민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고 했다. 종교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타종교를 향한 대화의 시도는 전략적 위장이기 쉽다. 열성적 종교인일수록 자신의 신앙을 타종교인 에게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화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떤 종교가 자기 완결성을 고집 하는 한 타종교를 향한 어떠한 대화의 시도도 전략일 수밖에 없다. 이때의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다.

 

                   진정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한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 인정이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은 정직하고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전제인 것이다. 즉, 전략적인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지만,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쇄신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본성상 진리에 대한 절대적 자기 독점권을 양보하기 어렵다.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 간의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종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의 고민이 자신의 신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하는 것이라면, 그 고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것으로써 쉽게 해결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심한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기독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기독자일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자비는 "세상 모든 존재를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는 헌신이라는 타동사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객의 이론적 분리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의 현실적 헌신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은 "자신이 해 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비나 사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위험하고 불행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행한 타자를 향한 헌신은 필연적이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다행이다. 아직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타종교인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반드시 타종교인을 위해 필연적인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도 유독 타종교인에게는 자비나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성실한 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랑이나 자비는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전제되며,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전제로 하며,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위해서는 정직한 대화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는 필연적으로 타종교인과 적극적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도모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기 위해서" 반드시 타종교인과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타종교인과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기피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불자나 기독자는 온전하고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남는다.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기 위해서 대화에 임한다 하더라도 정직한 자기 개방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지향하는 개종주의나 성전주의 역시 누구보다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략적 대화가 아닌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직한 자기 개방성이야말로 진지한 종교 간의 대화에 필요한 결정적 대전제인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한국의 다종교 사회는 물론 동서양을 대표하는 종교로서 종교간의 대화에도 주역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종교 간의 대화에 결정적 대전제가 되는 자기 개방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종교 간의 대화에 임하는 이들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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