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다가올 사건과 지나간 일에 늘 분주하다. 멈춤이 없어보인다.
동의 반복적인 일상속에서 생각은 지칠만도하고 이제 그치기를 바래보지만 그생각이 또 나를 분주하게 만든다.
생각을 없애 버릴 수 있겠는가....내자신이 스스로 엾애버리기가 난망이다.
생각의 소멸, 번뇌의 소멸을 위해 고인과 선지식들은 무수한 수행과 방편을 설하셨으나 온전한 소멸을 증득한 이는 드물다.
해서 생각과 번뇌의 근원을 선정으로 또는 알음알이로 파 헤쳐보니 실체의 없음 즉 我法俱空이라는 가설에 부닥치게 되고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수미산만한 말씀과 경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체적으로 교학과 실천 수행에서 내려지는 결론은 나라는 개체성의 해체를 통해서만 생각의 미발지인 근원 자리를 겨우 볼 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가행을 하지 않으면 다시 제자리 걸음이라고 이바구 한다.
이 생생한 '나'라는 실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놈에게 쥐약을 먹이는 것과 같다.
해체와 부정이라는수단을 통해서 그자리를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생각이라는 놈은 재빨리 다른 좋은 방법 즉 대긍정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고 항변한다. 대부분 이 지점에서 또 도돌이표이다.
실제 부처님 수행당시 부정관 수행이 있었다. 공동묘지에 가서 이 몸이 죽고 썩어가는 시체를 보면서 이 생각을 담고 있는 나라는 육신의 허망함을 보며 임사체험 수행이 그것이다. 문제는 계속되는 나라는 항상성과 생생한 현존성을 어떻게 부정활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부터 수행과 공부의 시작이다.
쥐약을 먹어야겠다는 발심이 신심화 되어야한다.
살아 생전에 죽어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야 이제 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죽기가 싫다의 강렬한 집착심은 늘 생생하지만 그넘을 오뉴월 땡볕에 그대로 드러내어 놓아 빠싹하게 말려야 하는데 이 생각이라는 놈은 이번달 카드막을 걱정과 지난번 헤어진 애인 생각에 춤을추고 있으니 여하튼 생각이라는 넘의 힘을 빼야한다.
늘 삼가고 조신하여 죽은 듯이 차수하고 허망함이 없음이 체화되기를 바란다.
생각은 지금과 찰나를 제일 무서워하니 지금약과 찰나탕을 장복 해야 할 것이다.
알지만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