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메시지
사 53:4-6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멸시 받고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종을 그리고 있는 내용으로, 이는 메시아의 사명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이사야서에서는 초라하고 연약하고 위엄과 존귀도 없는 볼품없는 메시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그리고 양털 깎는 자 앞에 양으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그에게 전가시켜야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종의 노래’라는 노래가 4개가 나옵니다.
첫 번째 노래는 이사야 42:1~4절로,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과 이방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노래는 이사야 49:1~6절로,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과 열방에 빛을 비추어 구원을 베풀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노래는 이사야 50:4~9절로, 하나님은 그 종에게 원수의 공격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견딜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노래가 바로 이사야 52:13~53.12절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모욕과 멸시와 능욕을 받으시고 대속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오늘의 내용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가 당하는 징계는 맞을 짓을 해서 받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할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700 년경 입니다. 그때 이사야 자신도 그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는 몰랐을 것입니다.
단지 ‘고난 받는 종 – 메시아’라는 것을 어렴풋이 추측했을 것입니다. 예언은 그 후 현실이 됩니다.
이사야가 살던 그 땅에 그대로 메시아가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사야의 대본을 들고 온 배우 같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이사야가 말한 그대로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평화가 너희의 눈에 가리워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평화의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그 눈이 가리워져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첫째 : 예수로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절)
본문에서 “그”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실로.” “진실로”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지신 질고는, 외적이고 신체적인 고난을 뜻합니다. 반면에 이때의 슬픔은, 내적이고 정신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고발하였지만, 빌라도나 헤롯까지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그들의 생각은,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질고를 지셨고, 자신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죄의 질병을 지고 있음에도, 죄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은, 괜찮은 사람인양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 평화를 누리게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절)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그 징계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 죄를 지은 사람이 받아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그 징계를 받으심으로,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그 대가를 치르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하나님과 저와 여러분들의 관계를 평화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자리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자리, 화목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의 모습을 보면 그 관계들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사자가 그 발톱을 쓰고 날카로운 잇발을 사용해서 소를 잡아 먹지 않고,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사자가 다른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은 본성입니다. 뱀이 사람을 무는 것은 악한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악한 본성까지도 변하여서 함께 평화를 이루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셋째 : 죄악을 전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
보통, 양이라고 할 때에는, 좋은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양의 의미는, 좋은 뜻이 아닙니다.
양에게는, 양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은 그 본성에 따라서, 양처럼 살며, 또한 양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양의 본성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릇 행하여”입니다. 양은 바로 눈앞에 있는, 풀만 봅니다. 저 너머에, 낭떠러지가 있는지, 사나운 맹수가, 있는지 개의치 않습니다.
양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릇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각기 제 길로 갔거늘”입니다. 소들은, 떼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충동에 따라, 각기 제멋대로,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목자가 양을 보살피지 않으면, 양은, 각기 제 길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양은 본성을 따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제 갈길로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습성은, 부패하고, 타락했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올바른 길이 있어서 그길로 가도록 하였음에도, 인간은 그 길을 가지 않았고, 가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없이,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각 제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8절 말씀과 같이,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아예 거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겼으나, 마지막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그릇된 본성을, 깊이 자각하고 회개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힘써 세우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때, 그들은 회개하면서, 다시 한번, 놀라운 고백을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우리의 그릇된 행동과, 우리의 그릇된 본성까지도 다 담당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