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위의 예술
최승호
진흙밭이다 지렁이들이
꾸물꾸물 기어다닌다
온몸으로
문자도 없이
길도 없이
눌러찍는 힘도 없이 지루하게 몸을 끌면서
진흙 위에 희미하게나마
길들이 태어난다
몸과 하나가 되어
꿈틀거리는 길들이
알몸의 문자가
행위의 시가
저렇게 태어난다
그러나 장마가
지워버리는 얼기설기한 선들
하늘의 예술이라고나 할까
다시 깨끗해진
진흙밭이다 물렁물렁한 지렁이들이
또다른 지렁이겠지
온몸으로
문자도 없이
길도 없이
꾸물꾸물 꾸물꾸물 꾸물꾸물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 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럽게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뿔 돋친 벽
죽음은 뿔과 같다, 딱딱한 것,
뾰족한 것, 노려보는 것, 속이 텅 빈 것.
느닷없이 죽음과 마주쳐
처음엔 얼마나 놀랐는 지,
증기탕에서 털투성이 음부를 보고
울어버린 소년의 공포 그것이었다.
죽음, 뿔 돋친 벽,
죽음을 벗어나는 일은
코뿔소가 제 코뿔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써 먼 길을 뛰는 것과 같고
뿔 돋친 벽에 머리를 찧으며
피 흘리는 수고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제 머리를 끊어
구르는 두개골로 축구를 하며
‘나는 이제 죽음에서 해방되었노라’고 외치면서
머리 없이 광장을 가로지르는
광인을 상상해 보셨는지?
죽음, 뿔 돋친 벽,
그 벽에 먼저 덤빌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그 벽이 달려들기야 하겠지만
그때는 온몸에 뿔이 박힌 채
구멍투성이로 울부짖어야 하겠지만.
**최승호시인 :춘천출생 1977년 『현대시학』에 비발디 등이 추천되어 등단
첫시집 『大雪注意報』(1983)이후 『고슴도치의 마을』(1985)『 진흙소를 타고』(1987)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등의시집
**시집 『고해문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