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국술'과 '합기도'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매우 난감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세계국술협회(서인혁)와 대한국술원(서인선)의 주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국술협회를 이끌고 있는 서인혁 총재는 완강히 '국술'은 '합기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에 대한국술원의 서인선 총재는 '국술'도 '합기도'의 한 분파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주관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먼저 세계국술원(서인혁)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면, 국술원의 모든 술기는 서인혁 총재가 창시했고 무술 가문인 집안의 내력을 내세운다.
"20여 년동안 전국을 두루 순방하며 오늘의 국술원 270기법에 3608수란 거대한 무술 체계를 집대성 하게 되었다." - 초판발행 국술교본 30페이지 29째줄 참조-
우리 나라의 전통 무예에 대해 섭렵하고 1958년 국술원을 창립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전설같은 이야기라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객관성을 갖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국술원 창립년도가 1958년(공식출범은 1961년도)인데 서인혁 총재가 1939년생이니 20년간 전국을 다녔다면 갓난아기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다는 계산이다.
한편, 대한국술원 서인선 총재가 무예신문에 2006년 3월부터 12월까지 기고한 인터뷰 내용 중에 서인혁 총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나는 형과 함께 합기도를 배웠다. 형도 누구못지 않게 열심히 운동했고 당시 몇 안되는 합기도 고수 중에 한 명이었다. (중략) '국술'은 합기도와 권법 무기술을 아우러는 종합무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국에서는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다."
서인혁 총재와 합기도를 함께 익혔다는 내용이다.
물론 서인혁 총재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에 합기도장을 다닌 것은 배우러 다닌 것이 아니라 친분 차원에서 방문한 것이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 두 분(서인혁.서인선)은 '대구상업고등학교' 학생 신분이었다.
과연 당시가 무질서한 시대라쳐도 한 체육관을 이끄는 오너가 고등학생과 동등한 위치를 인정했을까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합기도'의 발생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국술'과의 비교를 위한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2008년도 한민족합기도무술협회가 발행한 교본의 내용 중 관련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우리 고유 무술의 하나인 합기도가 한민족의 유술이라는 것은 민족의 최고 경전인 '삼일신고' 진리훈편의 기화. 지면. 합혜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합기도 술기는 고구려. 신라. 백제 시대를 거쳐 일본까지도 보급 되었다는 것은 여러 역사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합기유술은 190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에서는 '다케다 쇼가쿠'라는 일본 무예가의 후손이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현재 일본 유술의 본가인 대동류 아이키도 유술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일본 무인인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계승하여 직기유술과 방원유술을 혼합하여 현재의 아이키도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중략)
한국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당수도. 공수도. 태견. 유도. 검도. 합기도 등 자유와 함께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이때 합기유술은 최용술이라는 걸출한 분이 1950년 초반에 서복섭씨를 만나 합기도장을 개설한 것이 아마도 합기도 전파의 첫장을 연 것이다.
그 후 배출된 제자들 중 서복섭씨가 1956년 합기도장을 두 번째로 개관하였으며 지한재씨는 1958년 안동에서 도장을 개관하고 몇 년 후 서울에서 '성무관'을 개관하였다.
1961년 부산에서는 서인혁과 서인선이 '국술원'을 개관하였고 1961년 김무홍씨도 서울에서 '신무관'을 열었다. (중략)
이렇게 대구를 중심으로 최용술선생. 서복섭씨. 장인목씨.신상철씨. 강문진씨. 송중회씨. 김정윤씨가 활동을 하였고 서울에서는 지한재씨와 김무홍씨가 그리고 부산과 경남에서는 서인혁과 서인선이 활동을 하였다."
요약컨대 '국술'은 이같은 '합기도'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합기도의 한 분파임을 추측할 수 있으며 합기도의 술기에 권술과 족술 그리고 무기술을 더해서 새로운 무술형태를 갖춘 우리 나라의 전통무예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