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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역사이야기 (가야파형동기의 비밀)

작성자관장님|작성시간09.09.29|조회수1,279 목록 댓글 0


지금의 김해지역의 대성리 13호 고분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외계유물이 6점이나 출토

되었다. 그 발견은 지금까지의 역사적 학설을 뒤집어 버리는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그 발견을 일본 언론은 대대적인 뉴스로 다룰 만큼 충격적인 역사적 발견이었다.
그것은 파형동기였다.

파형동기는  4개의 돌귀가 바람개비처럼 휘감고 있는 독특한 형상으로 인해 바람개비형동기라고 불리운다.  
오직 일본에서만 100여개 출토되어 전형적인 외계유물로 알려진 파형동기가 어째서 대성동 고분에서 6점이나 출토된 것이었을까?




야오이 시대 600년간 존속했던 요시노가리 시대의 유물을 일본의 요시노가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데  일찍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던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인 파형동기를 찍어내는 주형을 볼 수 있다.  거품집을 통해 파형동기를 찍어냈다는 것은 얼마나 수요가 많았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2000년 전 고대인의 숨결을 머뭄고 있는 파형동기.

파형동기를 만들어낸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파형이라 불리는 회전하는 갈고리 모양의 기원에 대해서는

스이지가이설, 즉 오키나와 이남의 따뜻한 해역에서만 잡히는 스이지가이조개)에서 기원이 있다는 설이다.


남쪽 바다에서 잡히는 귀중한 조개를 장신구나 팬던트로 사용하는 풍습이 야오이 시대의 규수지방에서 유행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남쪽에서 잡히는 불가사의한 조개, 특히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여러 유물에서도 인할 수 있다.




 



불가사의한 조개, 스이지가이 조개는 한문의 水와  닮아서 스이지가이라 불리운다.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집안에 들어오는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스이지가이는 옛날방언으로 '모모운나'라고도 불리운다. 
'모모운나'라는 뜻은  소의 뿔과 닮아서 모모운나라고 불리웠다.






오키나와 통일제국이 형성된 것은 15세기 왕국의 이름은 류큐왕국이다.
그 왕국에는 현재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된 슈리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메이지유신 직후에 일본에 합병될 때까지만 해도 독자적인 왕국형태를 지닌채 고유한 문화를 가진채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염직물, 칠기, 악기등 특산물을 교역한 무역국이었다. 해양 실크로드를 통해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교역되었다고 전해온다. 바로 이 해양 실크로드를 '조개의 길'이라 부른다.


'조개의 길'를 통해 스이지가이는 일본으로 건너가 파형동기의 원형되었으며 조개문화는 우리나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야요이 시대가 되면 규슈의 호족들이 오키나와에서 나는 대형 권패를 장식품으로 즐겨 사용했는데 이를 고호우라, 이모가이라 부르는데 이 조개로 만든 팔찌를 좋아했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이 조개를 규슈에 수출하여 그 대신 쌀, 철제품, 유리옥 등이 오키나와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런한 규슈와 오키나와의 교역을 총칭하여 ‘조개의 길’이라 불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 스이지가이 조개를, 그당시 방언으로 모모운나, 즉 소 뿌리를 닮은 조개라고 불렀다고 전해오는데 소는 오키나와만의 고유동물이 아니다.


소는 신성한 동물로 숭배되었던 인도에서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스이지가이를 부적으로 삼는 풍숩은 오키나와 이전의 시대부터 전해온 해양문화가 도래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분황사는 서기 634년 선덕여왕 3년에 축조 된 모전 석탑이다.

1915년 모전석탑을 해체한후 수리하는 과정에서 2층과 3층의 사이에서 사리 장신구가 봉납된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서  특별한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은 이모가이 조개가 발굴된 것이다.

특별 공양품에는 그 당시 최첨단 문명제품 철제 가위와 바늘, 금동제 장신구가 발견되었는데  가장 특이한 것은

이모가이 조개였다.
가공된 조개껍질형태로 말 엉덩이 부분에 남해산 이모가이 조개를 사용했다는 것은 말해준다. 그 조개는  말을 타고

나가는 장수에게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부적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조개의 길'을 통해 다양한 해양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후는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이방인으로 서기 48년 7월 붉은 돗배를 타고 바닷가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학자들 이 학설을 반신반의 하고 있다. 왜냐하면 허황후가 배를 타고 온 곳이 인도로 금관가야지역까지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다는 것이다. 2000년전에 바다를 건너서 금관가야에 도착한다는 것은 시간상, 공간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또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과연 허항후는 그 먼 바다를 건너 금관가야까지 건너와 수로왕의 비가 되었다는 전설이 사실일까?




인도의 아요디아지방은 바닷가로부터 수백km 떨어진 내륙지역으로  현재는 라마가 태어난  사원을 두고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유혈사태를 벌이고 있는 분쟁지역이다.

아유타국은 중국 당나라의 고승 현장이 16년간에 걸친 구법여행을 마치고 쓴,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농업이 번창하고 꽃이나 과일이 풍성한 나라라고 전해오고 있다.

현재 그 지역의  왕손들은 허황후 전설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사실을 뒷 받침하는 증거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카(구모가이조개)라는 조개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오키나와에서 보았던 스지이가이 조개가 아유타국이 존재했던 아요디아지역에서는  상카라 불리우며 나쁜 재앙을막는데 부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상카를  기도할 때 또는 제사를 지낼때 분다고 한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성지답게 거리 곳곳에 신전들이 있는데 그 신전에서 그 조개를 들고 있는 신 비슈누 신을 발견할 수 있다.



비슈누신은 인도에서 브라마, 시버와 더불어 3대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신이다.

비슈누신은 악을 몰아내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지상에 부활한다는 미래의 신으로 여기고 있다.

한손에는 수레바퀴를 들고 있고 또 다른 한손에는 조개를 쥐고 있는데
수레바퀴는 태양과 진리 상징하고 샹카(조개)는 인류최초의 소리이자, 나쁜 기운과 악을 물리치는 천상으로 나팔소리로 여기고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샹카를 부는 것은 힌두교의 오랜 전통이다.

지금도  누구나 살아생전에 한번씩 순례를 해야하는 인도 최대의 성지인 겐지스강 성지에서는 의식의 시작을 조개 나팔을 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지상의 나쁜 기운을 없애고 대기를 정화시키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성대학교 박물관에서 형질인류학사상 획기적인 연구가 있었다.

대성동 고분에서 30여명의 순장유골을 출토되었다. 하지만 그당시 30여명의 인골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다.  

2004년 8월 서울대 의대 서정선교수와 김중일교수 팀의 한국유전체학회에서 김해 이안리 고분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남방계로 알려져 학계에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서정선 교수에게 대성리고분에서 출토된 인골 샘플을 제공하여 유전자 분석을 의뢰하게 되었다.

유전자 분석은 인골에서 미토콘디리아 유전물질 DNA를 수집하여 전체염기서열로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기관으로 자체적으로 유전되는 DNA를 갖고 있다. 이 DNA는 어머니를 통해서 유전되는 특성이 있어 유전학계에서는 가계조사, 인류계통조사에 활용하고 있다.


염기서열은 개인이나 대상마다 다르기 때문에 기준이 되는 서열과 차이로 표시를 하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경우 켐브리지 표준염기서열(영국 캠프리지연구소에서 최초로 밝힌 표준 염기서열)을 기준으로 표준으로 한다.


이 비교과정을 통해서 대성동공분의 인골이 어디로부터 온것인지 알아볼수 있다.
대성리고분
57호 순장자 분석결과
7개정도의 변이를 보이는데 한국인과 몽골인 200명의 유전자 변이와 비교하니 전체 7개에서 6개의 샘플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한  아프리카를 나와서 중동 아라비아 반도 걸쳐 남쪽아시아 이동한 타밀인과 일치 (인도남부인)과 비교해보니 전체 7개에서 6개가 일치하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이는 금관가야에는 북방계와 남방계가 함께 공존했다는 것을 말하며  허황후의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것을 간접 증명하고 있다.

파형동기는 일본 야요이 시대의 유물로 일본에서만 출토된 유물로 알았던 것이 대성리고분에서 출퇴됨으로서 왜 이제까지 왜계유물로 알려진 파형동기가 금관가야지역에서 출토되었는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해양실크로드 즉, '조개의 길'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스이지가이, 오키나와 방언으로 모모운나라고 불리우는 조개는 인도를 걸쳐 일본 오키나와에 전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인도 아요타국의 조개부적 문화가 어떻게 일본에 전해졌을까?
바로 그 해답은 금관가야 수로의 비가 되었던 아요타국의 허황후의 전설로부터 그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을 듯 하다.


<참고>

조몬문화(繩文文化)
조몬시대인은 수렵·어획 및 식용식물의 채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이민족이 아니라 현대의 일본인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이 논쟁 끝에 인류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이다. 그러나 제작된 조몬식토기에 현저한 지역차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전국토에 걸친 집단을 구성할 만한 결합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야요이문화 (彌生文化)
일본 선사시대에 수도작(水稻作)을 기초로 한 최초의 문화(BC 200년~AD 300년)를 말한다.식량채집을 기초로 한 전단계의 조몬문화[繩文文化]와는 근본적으로 격차가 있고, 뒤이어지는 고분시대(古墳時代) 이후의 문화와는 경제적 기초 위에서 질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다. 수도작의 개시와 더불어 이 문화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금속(철 ·청동)기의 사용 ·제작의 개시이다. 철기가 주로 공구(工具) ·이기(利器) ·무기 등으로 발전한 것이라면, 청동기는 보기(寶器) ·제기(祭器) ·장신구 면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였다. 그러나 야요이시대 전 ·중기에는 아직도 석기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야요이시대에는 중국 ·한국에서 새로운 기술 ·지식 ·사상 등이 많이 건너왔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벼 중심의 농작물 재배(벼 외에 보리 ·조 ·콩 ·삼도 있었다), 금속기의 주조와 단조(鍛造), 유리구슬의 가공, 방추차(紡錘車)로 실을 뽑고, 기계로 옷감을 짜는 것 등이다. 또한 돌식칼 ·간돌도끼[磨製石斧]와 새로운 신앙 ·의례 ·풍속도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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