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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아 피천득 선생 생애와 업적/ 정정호

작성자사무총장|작성시간18.08.05|조회수685 목록 댓글 0

         금아 피천득 선생 생애와 업적

      

                                                                       정정호(중앙대 명예교수, ‘피천득 평전저자)

 

국민수필가 피천득은 1910529일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에서 아버지 피원근과 어머니 김수성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신각 근처에서 구두 등 고급 양장품을 파는 신상(紳商)을 운영해 거상(巨商)이 되었고, 어머니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에도 대가였다. 1910829일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면서 피천득은 태어나 얼마 안 되어 나라를 잃은 망국민(亡國民)이 되었다.

 

유치원 입학 전에 이미 청진동 근방 서당에서 2년 동안통감절요3권까지 배우는 등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민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 7세가 되던 1916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타계했다. 피천득은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경성제일고보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평안남도 강서에서 요양하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천애 고아가 되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피천득은 1923년 소학교 4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2년을 월반하며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영재고아인 피천득 소문을 듣고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며 영어와 문학을 지도했다. 또한 피천득은 경성제일보고 재학 중 2년 연상인 양정고 학생 윤오영(후에 유명한 수필가가 됨)과 함께 동인지첫걸음을 만들어 작품을 싣는 등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보였다.

 

그는 약관 16세 나이에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테 단편소설마지막 수업을 번역하여 동아일보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 뒤 춘원 이광수 권유로 경성제일고보를 중퇴하고 동양의 파리로 불린 상하이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대세는 일본으로 유학을 하러 가는 것이었으나 중국 상하이로 유학하러 간 것 자체가 일제에 대한 저항 표시였다. 그는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수업하는 토마스 한버리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상하이 후장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30년에 잠시 경성(서울)으로 귀국하여동아일보(193047일자)에 첫 시차즘(찾음)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연이어편지,무래등 다수 시와 수필을 발표했다.

 

피천득은 상하이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흥사단에 가입해 흥사단우가 되었다. 1932128일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중국군과 일본군 간에 벌인 전쟁 참상을 경험했다. 피천득은 처음에는 후장 대학 상과에 입학했다가 영문학과로 전과하였고 193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논문 주제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애국 시인인 W. B. 예이츠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의 예이츠가 되고 싶은 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귀국 후 일제당국에 의해 불령선인”(반동분자)으로 낙인이 찍혀 변변한 직장에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지 않고 중국으로 간 것으로 일제 미움을 샀고, 무엇보다 민족 선각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 단우였기 때문이었다. 피천득은 일제강점기에 글을 쓰는 것은 무의미함을 깨닫고 더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도 결단코 거부하였다. 피천득은 그 뒤 경성대 이공학부 도서관에서 영문 목록을 작성하는 등 허드렛일을 해방 때까지 계속했다. 그는 1939년에 춘원 이광수 부인인 당시 의사였던 허영숙 여사 추천으로 임진호 씨와 결혼하였다.

 

피천득은 19458월 조국이 해방되자마자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 예과 교수에 취임했다. 그리고 1947년에 첫 시집서정시집을 상호출판사에서 상재하였다. 그 뒤 1948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54년에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 연구 교수로 보스턴에 1년간 머물며 미국 대표적인 현대 시인인 로버트 프로스트 등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 그리고 1959년 시와 수필을 묶은금아시문선을 경문사에서 펴냈다. 1968년에는 작품 영역집인플루트 연주가, A Flute Player를 삼화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69년에는 미국 여러 대학교에서 한국문화와 문학에 관한 순회강연을 했다. 1974년 정년보다 1년 조기 퇴직한 그는 그 뒤에 명예교수가 되었다.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5년에는 제9회 인촌문학상(시 부문)을 수상했으며, 이듬해 샘터사에서 금아 피천득 문학선집인인연,생명,내가 사랑하는 시,셰익스피어 소네트집을 출간했다. 1999년에는 제9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했다. 2002년 번역 단편소설집어린 벗에게를 여백출판사에서 펴냈다. 2006년에는 그의 수필집인연이 러시아어와 일본어로 출간되었다. 2007525일 만 97세 일기로 타계하여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종로구 청진동이 배출한 피천득은 100세 가까이 살면서 우리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문인이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의 순수, 겸손, 단순, 소박의 삶의 자세를 흩뜨린 적이 없었다. 그는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그런 보기 드문 희귀한 삶과 문학과 사상이 합치된 문인이었다.

 

그 문인적 업적은 우선 수필 부문에서 가장 탁월하다.수필,오월,유순이,인연,빠리에 부친 편지등 주옥같은 명편들은 일반 독자들 심금을 울렸고, 그의 수필집인연은 최고 걸작이 되어 현대 한국 수필 문학을 이끌어가는 찬란한 별이다. 피천득은 수필뿐 아니라 1930년부터 쓰기 시작한 시 분야 또한 출중하다. 한용운, 김소월, 정지용, 윤동주 등에 의해 가려진 면도 있지만 그의 시생명,이순간,만년,등은 시집생명에서도 주옥같은 명편이다. 사람들은 그의 시를 산호라 하고 수필을 진주라 부른다. 그 수필이 없더라도 피천득은 문학사에 남을 것이다.

 

또한 피천득은 영문학자로서 많은 번역을 남겼다. 그 번역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한국시 같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앞으로 피천득을 논할 때 번역문학에 쌓은 금자탑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피천득은 영어 교수로서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와 영한사전 등을 출간하며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 기여한 바도 매우 크다.

 

피천득 삶과 문학을 총결산한다면 100년 가까이 순수하고 청빈한 문인과 학자로 살아 우리 모두의 정면 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 문단에 남긴 수필들을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고 시 또한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였다. 한마디로 금아 피천득 선생은 척박한 역사와 비루한 시대 속에서도 향기로운 문학의 꽃을 피워낸 희귀한 문인이라 하겠다.**

 

-  주, 인터넷상에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해 행간을 띠었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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