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걸린 아내와 유년의 추억이 요즘 내 벗이에요”
아흔을 넘어서도 사랑받는 수필가 피천득
수필을 쓴 지 30년이 넘었지만,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수필가인 피천득 선생. 아흔을 넘은 나이에도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지난 12월, 바람이 갑자기 차갑고 매서워진 아침에 피천득 선생을 뵈러 반포의 아파트를 찾았다. 11월 29일 김춘수 시인이 타계한 후, 지난겨울 크게 폐렴을 앓았다는 피천득 선생 건강이 궁금해진 것이다.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찾아간 곳, 선생은 따뜻한 녹차와 호두를 간식 삼아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새로운 책보다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지요. 늦게 잠이 드는 날에도 새벽 6시에는 일어나는데,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는 계속 책을 읽어요.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죠.”
선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뺏어서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고 하자, 선생은 걱정 말라며 잔잔한 웃음을 짓는다. 라디오에서는 연신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람스와 바하를 좋아하는 선생은 요즘은 KBS FM에 주파를 맞추고 온종일 흘러나오는 국악과 교향곡을 감상한다.
“아마 하루 중에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가장 많을 거예요. 들으면서 옛날 생각하며, 그저 그렇게 보내요. 내 나이가 아흔넷인데 무슨 새로운 계획이 있겠어요.”
선생은 신기하게도 며칠 전 일은 기억이 잘 안 나도, 유치원 다니던 시절 일은 생생한 장면으로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과거로 거슬러 가면서 점점 기억이 또렷해지고, 현재는 그때 기억을 기쁨으로 떠올리며 보내는 것이다.
“내가 이제 소유하는 건 기억밖에 없어요. 내 친구들도 이제 다 가고 없거든.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이 유일한 기쁨이지요.”
간병인 아주머니와 알츠하이머를 앓는 부인 임진호(86) 여사와 단출한 생활을 하고 있는 피천득 선생. 부인은 선생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보호해주는 사람 정도로 여기고 의지한다고. 치매에 걸리면 없던 성질도 부리고 아이 같은 짓도 많이 한다는데, 임진호 여사는 일절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단다.
“치매가 참 이상스러워요. 내가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딜 간다고 하면 무척 싫어해요. 자식도 마찬가지예요. 누군지는 모르는데, 참 반가워하거든요.”
선생은 치매에 걸린 뒤에도 평상시 그대로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아내가 그저 고맙고 미안하다. 피란 가서 고생시킨 것도 미안하고, 아내보다 딸을 귀하게 여긴 것도 미안하지만, 가장 미안한 건 같이 즐길 게 없어서란다.
유명한 수필 <서영이>에서도 밝혔듯이, 선생의 딸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서영이에게 이쁜 아내를 만나서 이쁘게 낳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딸 서영 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겨울에 아내가 자는 방에는 구공탄을 때도, 딸이 자는 방에는 장작을 땠다는 선생은 나이 먹을수록 그게 더욱 미안해진다고.
“요즘은 아내와 함께 정주영 씨 얘기가 나오는 <영웅시대>를 봐요. 같이 TV를 보는 것밖에는 할 게 없거든. 내가 공부를 많이 하느라 그동안 아내를 심심하게 한 것도 미안하지.”
얘기가 길어지자 선생은 힘이 부친 지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졌다. 작년 겨울 심하게 폐렴을 앓고는 ‘죽다 살아났다’는 선생. 집 안에는 그때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선생을 위해 벽마다 박아놓은 철제 손잡이가 보인다. 그래서 그전까지 매일 하던 산책도 이제는 제자들이 왔을 때만 가끔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도, 막역한 사이의 신부님이 집으로 찾아와 대신하면서 매사 조심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인 둘째아들이 늘 체크해주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하단다. 큰아들 세영 씨는 캐나다에, 서영 씨는 미국에 있으니, 옆에 있는 유일한 자식인 수영 씨가 이틀에 한 번씩 들른다고 한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영양제들도 모두 둘째아들이 준 것이라고.
“내가 더 많이 살고 싶으면 욕심이 지나친 게지. 이제 죽음이라는 큰 문제만 남은 거지요. 그저 자는 듯 죽는 것, 그게 바로 내 마지막 남은 원이에요.”
그저 하루하루 TV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책도 읽으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피천득 선생. 그에게 <우먼센스> 독자들을 위한 새해 덕담을 부탁했다.
“요새 날씨는 별로 안 춥지만 마음이 추운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많은 세월 살아온 내 눈으로 보면, 예전보다는 낫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강한 사람들이라, 새해엔 모든 게 잘될 겁니다.”
선생은 자신의 앞날에 전혀 새로울 게 없다고 했지만, 따뜻한 캐모마일차 한 잔과 담소로 불쑥 찾아간 손님의 하루를 새롭고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선생에게도 2005년 새해가 이런 소소한 기쁨으로 채워지길 바라며 선생의 집을 나섰다. 다시 찬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는 길에 선생의 시 <새해> 한 구절이 떠올랐다.
출처: 2005년 7월《우먼센스》에서 발췌
[피천득 문학비 제막식]
https://m.cafe.daum.net/kum-A/jh8l/23?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