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법가가 부국강병을 기치로 유가에 도전하다.
법가사상은 전국시대 말기를 석권한 사상으로 전국시대 제가사상의 총결산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법가사상이야말로 분열과 상쟁이 지속되어온 전국시대를 매듭짓는 새로운 천하질서를 열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법가사상을 추종했던 진시황이 이사를 등용함으로써 5백여 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고 사상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룬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부국강병을 추구한 법가는 전국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법가 역시 도가와 마찬가지로 유가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한비자 · 오두>편의 다음 대목이 그 실례이다.
“인의를 논한다면 중니는 노애공의 신하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노애공의 권세 아래 머리를 숙였다.”
한비자는 공자가 도덕을 내세우면서도 노애공의 권세에 굴복해 신하가 되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는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유가의 군신론을 폄훼한 것이다. 법가 역시 다른 제가와 마찬가지로 오직 유가의 위선과 허구를 적나라하게 폭로해 ‘백가쟁명’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만이 중요했다.
한비자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봉건제제가 하루 속히 붕괴되어야만 새로운 통치 질서가 도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아가 당시 열국 군주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는 종횡가의 유세가 난세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가 천하를 통일해 다스리지 않는 한 천하의 혼란상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비록 ‘군주의 법’이기는 하나 객관적인 기준으로 천하를 공평무사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비자는 냉엄한 국제정세 속에서 다른 나라에 침략당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부국강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유가의 덕치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군권(君權)을 절대적으로 강화해야 하고 군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국강병이 불가결하다고 확신했다.
이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순자로부터 영향 받아 형성되었다. 순자는 유가 내에서 최초로 법치를 적극적인 의미의 통치술로 인정한 인물이다. 훗날 성리학자들은 이 점 때문에 순자를 법가로 간주해 이단으로 몰아갔으나 순자는 명백한 유가였다.
한비자는 스승인 순자의 ‘예치’를 ‘법치’로 바꾸면서 법가 이론을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비자로 상징되는 법가 역시 큰 틀에서 볼 때 유가의 한 지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법가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노자사상이었다. <한비자> 55편 중 <주도>와 <양각>, <해로>, <유로>편 등 상당 부분이 노자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비자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법가사상가가 있었다. 자산과 이회, 신도, 시교, 신불해, 상앙 등이 대표적이다. 한비자는 이전의 다양한 유형의 법가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제나라의 관중과 정나라의 자산을 법가로 분류할 수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법가사상은 상앙이 출현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고 보아야 한다. 상앙은 변법자강의 계책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법가사상의 만개를 예고한 인물이다. 전국시대 중엽에 진(秦)나라가 천하제일의 강대국이 된 것은 전적으로 상앙의 변법에서 기인한다.
상앙은 형명학(刑名學)에 밝아 훗날 <상군서>로 불리는 불후의 명저를 남겼다. 형명학은 훗날 명가(名家: 논리학파)의 이론을 지칭하기도 했으나 원래는 법가의 통치술을 뜻한다. 비록 상앙이 <상군서>를 직접 저술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나 <상군서 · 획책>편에 있는 다음 대목을 보면 법가사상의 효용에 대한 상앙의 기본입장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법술(法術)을 채택하기만 하면 인주(人主)가 침상에 누워 음악을 듣기만 해도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상앙의 변법에서 그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앙은 신상필벌을 확고히 함으로써 법의 위엄를 확립했다. 당시 열국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세족들이 보유한 신권(臣權)이 막강해 군권을 크게 억제하고 있었다. 이는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상앙은 바로 엄법을 통해 군권을 강화함으로써 변법의 걸림돌부터 제거했다.
법가사상은 군주를 단순히 존중하는 ‘존군’의 차원을 넘어 군주를 귀하게 여기고 신하를 가벼이 여기는 ‘귀군경신’ 사상에 기초해 있다. 이는 백성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군주를 가장 낮게 평가하는 맹자의 ‘귀민경군’ 사상과 대조를 이룬다. 법가의 ‘귀군경신’ 사상은 기본적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왔다. 고래로 부국강병은 강력한 군권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군약신강’의 상황은 상앙의 지적처럼 오직 태평성세에만 통용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라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신권세력의 전횡에 극도의 경각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공자와 법가는 맥을 같이하고 있었던 셈이다.
순자는 공자의 이런 취지를 발전시켜 최초로 ‘존군’ 이론을 체계화했다. 유가에서 말하는 ‘존군’ 사상의 근본취지는 본래 권신들의 전횡에 따른 기존질서의 붕괴를 막자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의 취지와는 상관없이 봉건질서의 붕괴는 중앙집권의 강화로 나타났다. 군주의 비중 또한 전례 없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법가는 이와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 순자의 ‘존군’ 사상을 ‘귀군(貴君)’ 사상으로 확대시켜나간 것이다.
훗날 한비자는 상앙의 법치론(法治論)을 토대로 신불해의 술치론(術治論)과 신도의 세치론(勢治論)을 가미해 자신만의 독특한 ‘법, 술, 세’ 이론을 완성시켰다.
한비자는 상앙의 법치론만으로는 궁극적인 통치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상앙이 진효공 사후 세족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실을 주목한 데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나라의 부강도 결국 신하들에게 이용될 뿐이라는 경고다. 한비자가 신불해의 술치론을 도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상앙의 법치론과 신불해의 술치론 위에 군주의 위세가 더해져야만 신하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권력과 지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가 신도의 세치론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비자는 상앙의 법치론과 신불해의 술치론, 신도의 세치론을 종합한 위에 스승이었던 순자의 ‘예치’ 이론과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가미해 법가사상을 완성시켰다. 순자의 ‘예치’ 이론은 표면상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한비자의 ‘법, 술, 세’ 이론의 기본골격을 이루고 있다. 한비자 이론의 핵심은 ‘법치’에 있다. 한비자는 ‘예치’의 ‘예’를 ‘법’으로 치환시켜 자신의 ‘법치’ 이론을 완성시킨 셈이다.
‘예’란 광의로 해석할 경우 당연히 법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법 또한 광의로 해석할 때 ‘예’와 대동소이하다. 특히 제재성이 강한 ‘예’는 기능상 ‘법’과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예’와 ‘법’ 모두 실천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의 간극은 매우 미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자가 이상적으로 그린 예치국가는 전국시대 말기라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했다. 부국강병을 위한 보다 실용적인 통치이념이 절실했다.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은 순자의 ‘예치’ 이론과 달리 한비자의 ‘법, 술, 세’ 이론의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비자는 ‘치천하’의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시된 <도덕경>의 ‘지공(至公)’과 ‘도(道)’ 개념 등을 ‘법’으로 대체시킨 뒤 ‘법치’야말로 최상의 통치라고 주장했다.
양자는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농후한 ‘인치(人治)’ 대신 인간 밖의 어떤 사물을 기준으로 한 ‘물치(物治)’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한비자가 <도덕경>의 ‘도’ 개념을 끌어와 자신의 ‘법, 술, 세’ 이론을 미장한 이유였다.
그러나 법가가 ‘무사’의 요체로 내세운 ‘법치’는 법의 권위를 현실적으로 군주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끝내 ‘인지(人治)’로 함몰되는 모순을 빚고 말았다. 이는 법가가 말하는 법치가 ‘귀군’ 사상과 결합되면서 사실상 군주를 견제할 장치가 소멸되어버린 것을 뜻한다. 바로 여기에 법가가 내세운 법치의 치명적인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순자는 법가와 달리 입법(立法)은 물론 행법(行法)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가 ‘예치’를 가장 바람직한 통치로 간주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가 법가가 통치의 객관성 확보를 자랑삼아 내세운 법치가 끝내 ‘인치’로 함몰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없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법가사상은 유가나 도가가 지니지 못한 뛰어난 면을 지니고 있다. 공과 사를 엄별했던 것이다. 한비자는 ‘공’ 의식을 강조하고 개인의 ‘사’가 지배하는 영역을 일체 봉쇄했다. 공과 사를 엄격히 대립시켜 부국강병을 꾀한 한비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독자성을 가장 먼저 찾아낸 인물이기도 하다.
천하통일 이후 진시황은 신분세습의 봉건체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군신들이 건의를 물리치고 이사의 건의를 전격 채택해 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만들어냈다. 어떤 의미에서 진시황은 신분세습의 봉건질서를 혐오하며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통치질서를 구현하고자 했던 공자의 염원을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수제’를 중시한 맹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성리학자들은 진시황을 희대의 폭군으로 매도했다. 문서갱유를 통해 유가를 생매장하고 수많은 유가경전을 불태우는 등 야만적인 반문화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치평’을 중시한 순학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진시황은 비록 학문을 제한하기는 했으나 일정한 수준의 ‘치평학’을 습득한 ‘법관’을 내세워 나라를 통치한 점에서 공자의 이상을 최초로 구현한 위대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비록 진제국이 유가적 소양을 지닌 ‘유관’ 대신 법가적 소양을 지닌 ‘법관’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유관’과 ‘법관’ 모두 인간이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한 공인(公人)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이미 전국시대 말기부터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 모두 서로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한비자 집대성한 법가사상도 제가의 사상을 두루 흡수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가 봉건질서를 대체할 대안으로 제시한 제국질서 역시 전한제국 이래 수천 년 동안 역대 왕조가 하나같이 유지한 사대부 관료체제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가 상정한 제국질서는 법가사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여기에는 맹자의 왕도보다 한 단계 차원이 높은 도가의 제도(帝道) 사상이 차용되었다. 한비자는 형이상의 해석에 권위를 지닌 도가의 이론을 끌어들여 법가사상을 합리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법가가 역사발전의 추동세력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한비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 한비자의 통치사상이 인간의 본성 및 형태에 대한 냉철한 심층 분석에 기초해 있다고 평가된 데 따른 것이다. 공자사상을 비롯한 유가사상의 본원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한비자를 위시한 법가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결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