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金德三 尙鼎(丙子)
【原文】
有客叩門,袖致情翰。披讀未了,驚喜倍品。因審年來侍學珍勝,感慰不可言。
老生病根已深,拔去未易,蓋年衰氣敗,收拾回元,實難爲力,奈何。時欲撥昏,溫理舊業,而久病之餘,習懶成性,只是撫躬傷歎而已。
惟冀吾賢契旣有此事,常存如不及之心,以輸惜分陰之功,則聖賢方冊,無非適道要旨。果能有味於此,而驗諸踐履之實,雖隔千里,亦不異合堂同席而語也。
朴秀才德卿,邇來所讀何書,作何工夫也?每愛其志尙堅確,探索儘有條理,區區之望,殊不淺淺,願與琢磨,以爲進德修業之地,老夫眞切之望。
去至月晦間,家豚及姪兒自鍾城還,得聞家兄安否甚詳。家兄雖在罪廢棘圍中,能以理自勝,氣力無減平時,亦能讀書親筆硯,聞來不覺增氣而發歎也。
今年凶歉,八路同然,而北界偏甚。在謫者尤所難聊,而幸蒙主倅顧見,俾免乏絕之患云,是亦天也,良幸良幸。
【역주】
有客叩門(유객고문)
손님이 문을 두드림. 외부 방문객이 찾아왔음을 뜻하는 전형적 서두 표현.
袖致情翰(수치정한)
편지를 소매에 넣어 가져와 전달함. ‘情翰’은 정성 어린 편지.
驚喜倍品(경희배품)
놀람과 기쁨이 배가됨. ‘倍品’은 정도가 몇 배로 증가함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
侍學珍勝(시학진승)
학문을 모시고 닦는 상황이 매우 훌륭함. 제자들의 학업 상태를 높여 이르는 말.
老生(노생)
노학자 또는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표현.
病根(병근)
오래된 병의 근원, 고질적인 질환.
收拾回元(수습회원)
흩어진 기운을 거두어 원기(元氣)를 회복함.
撫躬傷歎(무궁상탄)
몸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탄식함. 자책과 한탄의 표현.
不及之心(불급지심)
항상 미치지 못한다는 마음. 학문 수행에서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끼는 태도.
分陰(분음)
한 순간의 시간. 매우 짧은 시간을 아껴 써야 함을 뜻함.
聖賢方冊(성현방책)
성현의 서책. 유학 경전 및 전적 전반을 지칭.
適道要旨(적도요지)
도(道)에 이르는 핵심 요지.
踐履(천리)
실제 행동으로 실천함.
進德修業(진덕수업)
덕을 높이고 학업을 닦음.
琢磨(탁마)
서로 학문과 인격을 연마함.
家豚(가돈)
자신의 아들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姪兒(질아)
조카.
鍾城(종성)
함경북도 종성 지역.
罪廢棘圍(죄폐극위)
죄를 입어 유배되거나 폐출된 상태.
以理自勝(이리자승)
이치로 스스로를 이겨냄.
筆硯(필연)
글쓰기와 학문 활동 전반.
凶歉(흉겸)
흉년과 기근.
八路(팔로)
조선 팔도 전역.
北界(북계)
함경도 일대 북방 지역.
在謫者(재적자)
유배 중인 사람.
主倅(주쉬)
수령(관찰사·부사 등 지방관)에 대한 호칭.
顧見(고견)
돌보아 봄, 배려함.
乏絶之患(핍절지환)
궁핍과 결핍의 걱정.
是亦天也(시역천야)
이 또한 하늘의 뜻임.
【번역문】
김덕삼 상정(尙鼎)에게 답함 병자년
어떤 손님이 문을 두드리며 정성 어린 편지를 품에 안겨 주었는데, 이를 다 읽기도 전에 놀랍고 기쁜 마음이 배가되었습니다. 이어서 그간의 근황을 살펴보니, 학문을 모시고 공부하는 상황이 매우 훌륭하다고 하니 감격과 위안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병이 이미 깊어 제거하기 어려우며, 이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탓으로 원기를 회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때때로 어둠을 걷어내고 옛 학업을 다시 익히고자 하나, 오래된 병 뒤에는 게으름이 습성이 되어 그저 스스로를 돌아보며 탄식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이미 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항상 ‘미치지 못하는 듯한 마음’을 품고 잠시도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성현의 서책은 모두 도에 이르는 핵심 지침일 것입니다. 이를 진정으로 음미하고 실천으로 검증할 수 있다면, 비록 천리 밖에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한 방에 모여 함께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박수재 덕경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요. 그의 뜻이 굳고 확고하며 탐구 또한 조리 있게 이루어지고 있어 항상 깊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작은 바람이 아니니, 서로 갈고 닦아 덕을 높이고 학업을 완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난달 말경에 아들과 조카가 종성에서 돌아와, 형님께서 안부가 매우 상세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형님은 비록 죄를 입어 유폐된 처지에 계시지만, 이치를 따라 스스로를 지키며 기력이 예전과 다르지 않고, 또한 독서와 필묵의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이를 듣고 저도 모르게 기운이 솟고 감탄이 나왔습니다.
올해는 흉년이 들어 팔도 모두 어려움이 같으나, 북쪽 지역은 특히 더 심합니다. 귀양살이하는 처지에서는 더욱 견디기 어려우나, 다행히 수령의 배려를 받아 결핍의 걱정에서 벗어났다고 하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부주】
이 서신은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의 문집에 수록된 교유 서간으로, 제자 및 동학과의 학문적 교류와 정서적 유대를 함께 보여주는 자료이다.
내용은 병환과 노쇠로 인한 자기 성찰에서 출발하여, 후학들에게 ‘불급지심(不及之心)’ 즉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조선 성리학에서 강조된 수양론의 핵심 정서이며, 학문 수행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전형적 표현이다.
또한 학문을 “천리 밖에서도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고 본 대목은, 성리학적 지식 공동체가 공간적 거리를 초월하는 정신적 네트워크임을 보여준다.
저자 이숭일은 영남학파 계열의 유학자로서, 현실 정치보다는 향촌 교학과 제자 교육에 중심을 둔 실천적 성리학자였으며, 이러한 서간문들은 그의 학문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원하시면 이 항재 서간들을 기반으로 “조선 후기 학문 네트워크 구조도(師弟·交友 맵)”까지도 시각적으로 정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