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타구를 놓치는 G·G 사토 |
G·G 사토. 베이징올림픽 일본 야구대표팀 멤버다. 한때 세이부 라이온즈 4번을 치던 선수다. 우리에겐 ‘고마워요, 사토’로 친숙한 이다.
올해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 많은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인생은 책 한 권 분량이다. 그만큼 사연이 많다. 특히나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는 삶으로 유명하다.
# 대학 시절까진 불운했다. 늘 백업이었다. 실력도 없었다. 대학 4년 동안 홈런은 1개뿐. 당연한 이유로 대학 졸업반 때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그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친구들은 ‘사토가 야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고 믿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토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산하 싱글A 팀 바타비아 먹독스에 입단했다. 과거 김일엽, 이승학이 뛰었던 팀이다. 거기서 그는 포수로 전향했다. 파워배팅도 배웠다. 미국에서 야구에 눈을 뜬 그였지만, 정작 오프시즌 일본으로 돌아왔을 땐 야구공을 잡지 않았다. 연예기획사 보디가드로 일했다. 돈을 벌어야 했던 까닭이다.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 건 2002년이었다. 그는 세이부를 찾아가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지금 실력이면 프로지명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실제로 그의 파워는 대단했다. 그런 그를 이토 쓰토무 세이부 코치는 주목해서 봤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3년. 이토의 추천으로 사토는 세이부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에선 흔치 않은 ‘해외파 유턴’이었다. 언론은 사토를 가리켜 "운이 좋은 남자"라고 칭했다.
#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2006년까지 그는 45경기 이상 뛰지 못했다. 개인성적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선구안은 갈수록 나빠졌다. 2006년 138타석에 나와 42번이나 삼진으로 물러났다. 반면 볼넷은 고작 3개.
그는 어느 팀에나 있을 법한 ‘가능성은 보이나, 현실은 반대’인 선수로 조용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가뜩이나 포수자원이 많은 팀 사정으로 포지션도 외야수로 바뀐 터였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행운이 찾아왔다. 2007년이었다. 그는 이해 136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8푼, 25홈런, 69타점을 기록했다. 수비도 좋아 실책을 1개도 기록하지 않는 ‘100% 수비’를 자랑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능성이 폭발한 것이었다.
2008년에도 사토는 ‘펄펄’ 날았다. 5월에만 홈런 9개를 몰아치는 괴력을 발휘했다. 3연타석 홈런은 덤이었다. 실력이 뛰어난데다 말재주도 탁월해 사토를 보며 팬들은 열광했다. 그해 올스타 투표에서 사토는 양대리그 통틀어 최다득표자가 됐다.
행운은 계속 이어졌다. 호시노 센이치 베이징올림픽 일본야구대표팀 감독은 사토를 대표팀 외야수로 발탁했다. 호시노 감독은 사토의 수비력을 높이 평가하며 주전을 약속했다. 사토도 이에 화답하듯 “올림픽을 응원해주시는 팬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플레이를 펼치겠다”며 전의를 다졌다.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던 ‘낙오자’ 사토의 인생 대역전극을 보며 일본 언론은 “이것이 인생”이라고 흥분했고, 일본인들은 '나도 할 수 있다'며 용기를 되찾았다. 사토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게 분명해 보였다.
세이부 시절 사토의 스윙 장면 |
# 해피엔딩은 없었다. 악몽만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징올림픽 준결승 한국전에 좌익수로 출전한 사토는 2개의 실책을 범했다. 특히나 8회 2사 1루에서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놓친 건 일본인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물론 한국 입장에선 사토야말로 은인 가운데 은인이었다. MBC 허구연 해설위원의 “고마워요, 사토”는 그런 의미에서 시의적절한 표현이었다.
사토는 3, 4위 결정전 미국과의 경기에서도 실책을 범하며 팀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사토의 행운이 숨을 멎는 순간이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일본으로 귀국한 사토는 일본 야구팬이 가장 사랑하던 선수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플레이어가 돼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경멸의 대명사가 됐다. 그즈음 일본 예능프로그램에선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하는 상대에게 “사토같은 녀석”하며 핀잔을 주는 게 유행이었다.
사토 자신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그는 아내에게 “죽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냈고, 포털사이트 검색란에 ‘자살’을 입력하기도 했다.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던 행운은 역설적으로 위기 뒤에 찾아왔다. 2009년 딸이 태어나면서 사토는 마음을 다잡았다. 혼신을 다해 훈련했고, 결국 사토는 그해 타율 2할9푼1리, 25홈런, 83타점을 기록했다. 프로에 입문한 이후 최고 성적이었다.
# 사토의 부활은 1년짜리였다. 2010년 그는 컨디션 난조와 부상이 겹치며 크게 고생했다. 53경기에만 출전했고, 타율도 2할4리에 그쳤다. 사토는 2011년 부활을 자신했다. 그러나 팀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즈음 일본에 갔을 때 퍼시픽리그 관계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어쩌다 사토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그 관계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이부는 사토를 돌보지 않을 겁니다. 방출할 게 분명해요. 문제는 다른 팀도 사토를 영입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당시 기자는 “과연 사토처럼 3년 연속 20홈런, 60타점 이상을 기록한 타자를 다른 팀이 가만히 놔둘까요?”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그 관계자가 한 말이 “일본 프로야구라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거나, 큰 지탄을 받은 선수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매장되곤 합니다. 일본 프로야구 12개 구단이 암묵적으로 ‘서로 저 선수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협정을 맺기 때문이죠. 네, 일종의 이지매입니다. 사토는 범죄를 저지른 선수는 아니지만, 베이징올림픽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연봉협상 때도 구단과 대립각을 세우기 일쑤였고. 모르긴 몰라도 사토가 세이부에서 방출된다면 그를 영입할 팀은 없을 겁니다. 지켜보세요.”
사실이었다. 사토는 2011년을 끝으로 세이부에서 방출됐다. 그러나 다른 팀의 적극적 구애는 없었다. 일본 야구계는 사토의 은퇴를 예상했다. 하지만, 사토가 택한 건 현역 연장이었다. 그리고 무대도 일본,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였다.
그는 이탈리아를 선택한 배경을 “일본에서는 괴로운 일만 있었다. 마지막으로 야구를 즐기고 싶었다”며 “이탈리아가 외국인 선수 영입에 적극적이라 결국 유럽행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이탈리아리그 포르티튜 볼로냐에서 뛴 사토는 타율 3할1푼9리, 3홈런, 22타점을 기록했다. 성적도 좋고, 선수 자신도 "진심으로 야구를 대하는 이탈리아 선수들을 볼 때마다 큰 감동을 받는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사토는 원정경기에 동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사토와 야구는 여기서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연말 지바롯데 마린스에 입단한 사토 |
# 은퇴를 결심하던 지난해 연말. 사토의 손을 잡아준 이가 있었다. 지바롯데 마린스 이토 쓰토무 감독이었다. 과거 세이부 시절 ‘무명의 마이너리거’ 사토의 손을 잡아줬던 이토는 다시 한번 사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본 프로야구의 보이지 않는 ‘카르텔의 유리벽’을 이토가 깬 것이었다. 사토는 감격했다. 최저연봉 1천만 엔의 계약안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발 나아가 사토는 “연봉의 3분의 1로 홈구장 시즌권을 사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역 어린이들을 꾸준히 초대하겠다”고 밝혔다.
선행을 베풀자 행운은 다시 찾아왔다. 애초 개막전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던 사토는 동료선수의 부상으로 1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3월 31일.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개막 2차전에 사토는 7회 대타로 등장했다. 2010년 7월 1일 이후 1천3일 만에 들어서는 타석이었다.
사토를 지켜보는 일본 야구팬들의 표정엔 애증이 교차했다. 그걸 사토도 안 것일까. 그는 일본야구계 복귀 첫 타석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스윙했고, 결국 그 타구는 좌전안타가 됐다.
경기가 끝나고서 사토는 “계속 야구를 할 수 있어 좋습니다”하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야구 고마워요(野球ありがとう)”라고.
사토는 돌고 돌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성공과 실패를 맛보면서도 그의 중심엔 항상 야구가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야구가 그를 버릴 순 있어도 그가 야구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야구선수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한 가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가 현실에서도 유효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젊었을 때 흘리지 않은 땀은 나이를 먹었을 때 눈물로 돌아옵니다. 이점 잊지 마세요. 스포츠춘추 박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