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숲...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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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도화지
- 조회수 : 18
- 09.07.09 13:40
| 젖지 않는 마음 - 나희덕 - 편지 3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 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봄눈이 오는 날 편지를 부친다 - 정호승 용서하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봄눈이 오는 날 편지를 부친다 용서할 수 없는 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며 사람들이 울면서 잠드는 밤 한 사람의 마음을 용서하기 위하여 마지막 잎새 하나 땅 위에 떨어지고 또 한 사람의 마음을 용서하기 위하여 또 한 사람의 들녘이 저물어간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어깨 위에 기대어 날마다 위로받지 못하는 자의 눈물이여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기 위하여 봄눈이 오는 날 편지를 부친다 봄편지 - 김초혜 너를 본다 얼굴이 부서져 흔들리고 있는 너를 만난다 그물을 던져서 건져올린 그대 그대는 적막이구나 네가 떠났어도 나는 나를 떠날 수 없다 너를 어둡게 할 수 없어 나는 너로 산다. 눈 오는 날의 편지 - 유 안진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가을 편지 2 - 김종길 대문깐 줄장미는 늦은 여름부터 잎을 떨구어 지금은 녹슨 철조망처럼 앙상하지만 철 아닌 붉은 꽃 두세 송이 거기 선연히 피어 있듯, 머리칼 성글고 살결은 메말라 삶도 어김없는 늦가을이건만 철 아닌 꽃과도 같은 진한 빛갈의 순간은 있어 몸과 마음 그윽히 달아오름이어! 뒤늦은 편지 - 유 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갯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내소사에서 쓰는 편지 - 김혜선 친구여 오늘은 너에게 내소사 전나무숲의 그윽한 향기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너에게 내소사 솟을꽃살문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싶다 한 송이 한 송이마다 금강경 천수경을 새겨 넣으며 풍경소리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냈을 누군가의 소명을 살그머니 엿보고 싶다 매화 국화 모란 꽃잎에 자신의 속마음까지 새겨 넣었을 그 옛날 어느 누구의 곱다란 손길이 극락정토로 가는 문을 저리도 활짝 열어놓고 우리를 맞이하는 것인지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른 너와 내가 건너고 싶은 저 꽃들을 바라보며 저 꽃에서 무수히 흘러나오는 불법을 들으며 나는 오늘 너에게 한 송이 꽃을 띄운다 그림엽서 - 김남조 여행지 상점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별달리 이름 환한 사람 하나 있어야겠다고 각별히 절감한다 이국의 우표를 붙여 편지부터 띄우고 그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것을 이 지방 순모실로 짠 쉐타 하나, 목도리 하나, 수려한 강산이 순식간에 다가설 망원경 하나, 유년의 감격 하모니카 하나, 최소한 일년은 몸에 지닐 새해 수첩 하나, 특별한 꽃의 꽃씨 잔디씨, 여수(旅愁)서린 해풍 한 주름도 넣어 소포를 꾸릴 텐데 여행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불켠 듯 환한 이름 하나의 축복이 모든 이 그 삶에 있어야 함을 천둥 울려 깨닫는다 엽서 한 장 - 강은교 오래 못 본 친구에게서 항공엽서 한 장이 왔다. 낯 모르는 항구의 잿빛-푸른 하늘이 찍혀 있었다. [틈틈이 부탁하신 종(鍾)을 보러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녀석은 너무 커서(집채만큼)-메고 가기 힘들고, 어떤 녀석은 너무 작아서 소리도 안 날 것 같고......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때였다. 옆에 있던 바람 한 올이 불쑥 일어서며 제 가슴을 쳤다. 뎅--, 종소리가 울었다. 방황하는 편지 - 이명자 밤마다 나는 편지를 쓴다. 새벽이 오면 나의 편지는 조금씩 지워지면서 떠나고 나는 지워지는 편지의 뒷덜미에 나의 숨결을 하나씩 뽑아 던진다. 이윽고 호흡곤란 증세에 시달려 나의 편지는 천천히 중단된다. 중단될수록 거세지는 침묵의 속력을 너는 모르리라. 너의 눈썹을 강타하는 그 폭풍의 종이에 썼다 지운 침묵의 속력을 모르리라, 너는 지우고 다시쓴 편지의 약해진 속력에 안심하는 너는 모르리라. 편지가 하나씩 지워지는 밤 거리가 지워지고, 집들이 지워지고, 한 동네가 지워지고, 강과 산이... 마침내 모든 손가락들이 켜는 불빛이 지워지나니, 어두운 지도 위에서 방황하는 편지의 폭풍아, 속절없이 캄캄하게 나부끼는 손가락들아, 되돌아 오라, 밤이 깊었으니 다시 시작해야지, 숨쉬는 연습 우리의 입김이 서로에게 닿는 연습 우리가 각각 떠나서 거기 또는 여기에서 잘 지워지고 있음을 확인해야지 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겨울 편지 - 안도현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12월 저녁의 편지 -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에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마지막 편지 - 안도현 내 사는 마을 쪽에 쥐똥 같은 불빛 멀리 가물거리거든 사랑이여 이 밤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마음인 줄 알아라 우리가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헤어져 남남으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듯 서로 다른 길이 되어 가더라도 어둠은 또 이불이 되어 우리를 덮고 슬픔도 가려주리라 그대 진정 나를 사랑하거든 사랑했었다는 그 말은 하지 말라 그대가 뜨락에 혼자 서 있더라도 등 뒤로 지는 잎들을 내게 보여주지는 말고 잠들지 못하는 밤 그대의 외딴집 창문이 덜컹댄다 해도 행여 내가 바람되어 두드리는 소리로 여기지 말라 모든 것을 내주고도 알 수 없는 그윽한 기쁨에 돌아앉아 몸을 떠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이제 이 세상을 나누어 껴안고 우리는 괴로워하리라 내 마지막 편지가 쓸쓸하게 그대 손에 닿거든 사랑이여 부디 울지 말라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지 말고 그대가 길이 되어 가거라 가을서한 - 나태주 1 끝내 빈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 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 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 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 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돌아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 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 빛 한 초롱. 겨울 저수지에서 쓰는 편지 - 이정록 그대 머리맡이나 옆구리로 굽이치며 흘러드는 물줄기 싱싱한가. 寒風에 배를 밀고 가는 새떼들 물갈퀴처럼 손발 시려운가 마른 갈대숲에 차마 얼어붙지 않으려 살얼음 깨무는 달빛 차가운 밤 가슴 밑바닥 자갈 이끼, 흔들며 치솟는 샘줄기에 입 대고 있는가 새의 발목에 악수를 건네는 솔 그림자처럼, 그대에게 가리라 살얼음에 靑針을 벼리는 솔잎처럼 연애편지를 쓰는 밤 - 정해종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명함에 쓴 편지 - 김경미 눈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지요 여의도 한 빌딩 지하에서 문득 마주쳤지요 십몇 년 만인가 아득한데 아직도 혼자라며 웃었지요 걱정 스치는 이쪽 눈빛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참 번듯한 명함을 내밀었지요 귀찮고 성가신 사소함들에마다 찾으라 했지요 여름 햇빛 속 걷다 가방이 귀찮을 때, 손톱 밑에 가시 박혔을때, 비싼 음식이 맛없을 때, 돈 꾸고 갚기 싫을 때, 그리고 또, 소녀인 양 웃는데 문득 흰 나비떼들 창을 넘어들고 따라들어온 바람은 서늘했지요 신사의 악수는 청량했지요 돌아와 베란다 저 밑, 공사 끝나가는 성당을 봤지요 봄 되면 가서 많이 뉘우치리라 했던 곳이지요 붉은 벽돌 위에 쌓인 흰 눈이 꼭 남자의 울어 붉던 눈 같지만 폐인 된다더니 안 된 그대 그 명함 눈 속으로 날려보냈지요 마당에 선 성모마리아, 두 손 벌려 그 흰 종이 다 받아드는 것 똑똑히 보았지요 흐린 날의 연서 - 함민복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 번 그녀를 만나고 한 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그리운 편지 - 김정우 그리워 그리워서 가슴이 너무 아파오는 날에는 편지를 씁니다 하얀 편지지에는 물빛 얼굴을 한 그대가 파도처럼 출렁일 뿐 마음은 글이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 알던 설레임은 이제는 즐거운 아픔으로 추억하게 합니다. 그리워한다는 건 미처 다 사랑하지 못한 안타까움일 뿐 언제나 다 채워지지 않은 갈증처럼 답답해 오는 가슴 아픔입니다 얼룩진 편지가 전해진 그대 손 안에서 마른 기침같은 불편함으로 읽혀진 나의 마음은 언제나 초라하다고 느끼는 것은 받지 못한 답장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입니다 마음이 마음으로 통하지 못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을 난 알지 못하지만 오늘 흔들리는 별빛 아래서 또 그렇게 편지를 씁니다. 그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할 말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그리워 그리워서 가슴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답장 없을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그대를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숲속 편지 - 문옥영 헤맬수록 쓸쓸한 길 끝에는 별들의 집이 있고 겨드랑이에선 푸른 깃털이 돋는데 누가 이곳에 몸만의 사랑을 심어놓았던가요. 날지 못한 깃, 서릿발 하얀 응달에 편지로 쌓인 오늘 가슴에 단단한 옹이가 만져지는 건 당신, 어두운 기억속에서 나란히 발 묻고 따뜻한 체온 서로 덮어주던 때가 그리운게지요 그렇게 오래도록 그리워하다보면 뿌리채 썩는 아픔이 올까 몰라, 차라리 통째 베어지는게 나을지도 몰라요. 슬픈 편지 - 하덕규 흐리고 비내리는 우울한 날처럼 그렇게 슬픈 편지를 내게 띄운다고 미안해 하지 마 사는 게 그저 어렵고 아픈 너에게 커다란 나무가 되어주지 못하는 네 지친 날개 쉬게 할 수 없는 내 부끄러운 노래 그렇게 잠깐 너의 어린 시절 위에 머무는 나의 노래는 그렇게 잠시 네 마음 속에 살던 나의 노래는 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어디론가 불어서 또 너를 떠나갈텐데 흐리고 비내리는 우울한 날처럼 그렇게 슬픈 편지를 내게 띄운다고 미안해 하지 마 편지 쓰는 일 -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초겨울 편지 - 김용택 앞산에 고운 잎 다 졌답니다 빈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눈 내리겠지요 눈 내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엽서 - 박형준 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말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겨울 엽서 - 홍수희 당신의 침묵이 풀릴 때까지 여기 이대로 있겠습니다 얼어붙은 겨울강이 흐르기까지 여기 이대로 있겠습니다 당신 몰래 흐르는 뜨거운 눈물 저 언 강을 마저 녹이면 그 때는 한 말씀 주시겠지요 네 눈물도 기어이 보여 주시겠지요 초록엽서 - 이양우 벌써 오셨답니까, 기다림이 짙은 동구밖에 앙상한 손끝으로 눈꼽을 떼려던 계절의 촉촉한 새. 철길 맞은 켠 집 지나는 기적소리 그 정든 간이역두 초록빛 등성이로 냇갈 개오지 끝자락 잡고 펄럭이는 봄날 팔짱도 여미고 순(荀) 자란 참 두릅 향내음 앳띤 봄날에 언덕 바지 연지 찍은 꽃 환타지 산색(山色) 번지는 꿈물살에 지웠던 이름들 되살아나는 앳띤 봄날이 다가왔답니까, 사막에서 띄우는 편지 - 남유정 폐허 위로 한 줄기의 목마른 길이 지평을 부른다 사막, 하얗게 비워진 길로 단봉낙타 한 마리 걸어간다 발바닥을 달구는 모래알보다도 외길의 부름은 더욱 뜨거워 불사의 힘으로 지평에 자일을 거는 나의 낙타여 기억의 단애 저 편, 이미 세포마다 아로새겼을 슬픔의 내력 그대여, 더는 묻지 마라 광활한 지평으로 붉게 타는 노을처럼 마음의 불길을 따라 내달리던 때도 있었으나 낙타의 등이 평평해질 때까지 느리게 걷고 또 걸어 나아갈 뿐 달빛마저 바람에 쓸리는 폐허 가득할 때도 물겨치던 이랑마다 노래의 씨앗을 뿌린다 어둠 가득히 성운이 흐르는 밤이면 저 하늘을 지붕 삼아 돌아오는 물길의 소리인 양 가슴으로 파고드는 그 가락에 젖으리라.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 원재훈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새가 날개를 가지듯 꽃이 향기를 품고 살아가듯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생의 비밀을 적었다. 아이의 미소를, 여인의 체취를, 여행에 깨우침을, 우체통은 간이역이였다. 삶의 열차가 열정으로 출발한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였다. 그래 그런 날들이 분명 있었다. 낙엽에 놀라 하늘을 본 어느 날이였다. 찬바람 몰려왔다 갑자기 거친 바람에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그것은 상처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나의 우체통에는 낙엽만 쌓여 가고 하늘은 상처투성이의 어둠이였다. 밤엔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데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거울에다 쓴 편지 - 강창민 해는 서편으로 돌려보내고 비는 개울로 돌려보내고 그대가 보낸 노래는 다시 그대에게 돌려보낸다. 꽃은 꽃에게로 돌려보내고 바람은 불어온 창 밖으로 돌려보내고 그대는 그대에게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어이 하리, 이 그리움, 이 슬픔은 돌려보낼 곳이 없구나. 슬픈날의 편지 - 이해인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유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 가는 삼십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 말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에서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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