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웃음
최금진
고등어를 다듬으며
또 누가 토막 난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본다
이제 살인은 유행이다
비디오나 인터넷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나자빠지고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다
죽음이 재미있다는 건 아이들도 알고 나도 알고 당신들도 안다
아비가 자식을, 자식이 아비를 죽는 데 내어주리랄 성경 예언이
가장 스릴 있게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재미있는 건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아내를 살해하고 그 혀를 잘라 먹었다는 인도 사내와
옆 짝꿍을 연필칼로 베어 죽였다는 일본의 초등학교 소녀와
문득, 그냥 문득, 생각나서 가족을 죽였다는 프랑스 소년
무 토막처럼 뎅겅뎅겅 잘려져서 발견되는 우리나리 시체들
이제 살인은 전 세계의 흐름이며,
최첨단 유행이다
탁탁, 도마 위에 쏟아지는
살의를 온 몸으로 느끼며 부르르 떠는 힘의 발작을
손으로 꾹 움켜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불끈거리는 칼의 힘을
흥분의 광기를 가만히 아래로 내려누른다
칼이
내 손에서
키득키득, 자꾸만 웃는 밤이다
칼과 칼
김혜순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긴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다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는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도 내 몸처럼 구멍이다 저 검은 구멍을 베어버려라
거기서 솟는 따뜻한 피로 얼굴을 씻어라
아무리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저 끔찍한 사랑
그러기에 이제 내 사랑은 몸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번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다행인가? 우리 사랑이 아직 저렇게 공중에 떠 있다는 것
코르시카 장인의 칼
정복선
코르시카 장인의 단도 하나를 사신다구요?
그는 만들 때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칼을 만듭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칼,
그 칼을 만드는 그 순간의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이
그 칼을 담금질하는 그 순간의 해류와 태풍의 향방이
한순간의 두려움과 망설임이
한순간의 거침없는 낙법(落法)과 배 띄우기가
칼의 몸을 이루고 칼의 날카로운 혀가 되기 때문이지요
칼을 만들 때마다 그는 전생(全生)을 투신하죠
천하의 명궁이 쏜 화살처럼 칼날 끝을 향해 날아들어 가죠
태초의 운무처럼 칼 속 우주를 유영하다가
오래 참고 오래 아낀 것들과 더불어
번갯불에 탁, 맞는 순간 벼림이 완성되겠지요
당신, 코르시카 장인의 칼은 꼭 하나만 사십시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칼,
한 개로도 넘치지 않겠어요
칼
문정영
날이 선 칼은 늘 시퍼렇게 몸 다듬는다
불에 덴 자국 푸른 물에 담가서 시퍼런 멍 자국을 만든다
천 번 두드려 날카로워진 칼은
제 몸 아파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 함부로 벨까 두려워서 운다
칼
정다운
내 몸속을 지나간 것들은 온전하지 않다
당신이 나를 뒤덮었던 깜깜한 점차 희붉어지듯
내 몸속엔 오직 더운 아침들
불어나는 살점이 있고 그 켜켜마다 무수한 알들이 살고 있다
지나간 것은 늙고 푸른 곰팡처럼 들러붙고
알들은 곰팡이를 뜯어먹고 자란다
나는 알들을 기르기 위해 살고 있을 뿐
사람이 한 사람을 지나가면서 뿌리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다
알들은 쇳독처럼 오르고 짓질린 얼굴과 얼굴이
나의 이마를 짚어주면서 살아내게 하지만
어떤 알들은 뜨거운 모루 위에서 그만
터지고 녹아버린다 무엇을 죽였는지도
모르게 살고 있는,출렁이는 몸통의 당신을 위해
당신의 기억속엔 당신이 아는 나도 질서도 없다
그것은 한때 평화로웠던 지나간 것들일 뿐
내 알들을 쇠처럼 푸르게 담금질해서
당신의 배 속에 꽂아 비트는 것, 그것만이
당신이 알게 될 우리의 밤이다 그때까지
곧 붉은 기억을 쏟으며 입 벌릴 당신을 생각하며
오늘 죽은 어린것의 이름까지도 긁어모아
더 크고 뾰족한 칼을 만든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웃어대는 당신을 위로하면서
칼에 대하여·2
오태환
자오선을 따라 겨누면, 복숭아뼈에서 임파선까지 사타구니에서 십이지장까지 경정맥까지, 누리에 창궐하는 한낮의 뭇 꽃들이 옷깃을 여민다 그 칼은 너무 커서 곱자로도 컴퍼스로도 잴 수 없다 칼 속으로 횃대비가 내리고 눈보라가 친다 담천(曇天)처럼 맑게 으슥하다가 어느새 고실고실한 햇무리로 촘촘히 메운다 밤이 되면 수백만 광년 수천만 광년을 비껴 온 먼지별서껀 좀생이별서껀 사수좌(射手座)서껀 떼별빛들이 그 안에서 으리으리 마애불처럼 닳고 삭는다 물처럼 보드라운 칼 들숨, 또는 날숨 같은 칼 칼집에서 뽑지도 않았는데 진작 해안에서 소스라치는 흰 연화(蓮華)무늬 물결소리도 그치고, 설채(設彩)의 구름단청 뒤에서 환하게 들끓던 번갯불도 잦아든다 칼의 변경이 저 혼자 아득하다
칼에 대하여·3
오태환
1.
득통이라는 스님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야부선사가 지은 것으로 나오는 게송은 널리 알려져, 글 아는 축 가운데에서는 거의 모르는 이가 없을 성싶다
竹影掃階塵不動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月穿潭底水無痕 달빛이 못물을 꿰뚫어도 물 위엔 흔적 하나 남지 않네
위 책에서, 이는 야부가 "須菩提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이라는 송에 화답하여 지었다는 해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몰시기와 비슷한 연대에 쓰인 송나라의 『밀암선사어록』과 고려의 『진각국사어록』에는 나란히 “良久云”를 붙여 이 시구가 ‘예로부터 일컬어진’ 것이라 언명한다 이런 까닭으로 야부가 지었다는 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이 자주 생긴다
허나 그 붓놀림의 맵시가 누구의 것이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벽준의 바윗돌이 비바람에 닳아 가뭇없이 사라졌을지언정 원래 놓였던 자리의 맑고 단정한 기운은 늘 어엿한 법이다 이 미장센의 으리으리한 韻氣 앞에서 전거와 서지를 따져 뭘 바로잡으려는 시늉은 그저 거추장스럽고 부질없을 뿐이다
2.
1,000년 가까이 격절한 이 시구를 놓고, 나는 하릴없이 붓방아나 찧는 짓 외엔 달리 도리가 없겠다 物과 物의 경계를 지운 무욕과 정밀의 지극한 지경이라 일컫든, 하늘의 法과 땅의 度를 빌려 연화장계를 오마주했다 쓰든, 그냥 기운생동의 절경이라 갈기든, 나로서는 어떤 발묵과 설채의 註釋을 빌린 데도 달리 수단을 찾기 어렵다 그, 10호 명조체의 활자와 활자, 획과 획 틈새에 서린 공간의 사늘하고 밝은 淸虛라니
3.
北川의 희고 푸른 물살을 옆구리에 낀 왕복 2차선 이면도로를 타박타박 산책하는 중이었다 나는 두 걸음쯤 앞에서 버티고 선 송장사마귀 한 마리를 발견했다 우정 녀석의 코앞에 쪼그리고 앉아 빤히 내려보았다 녀석은 나를 의식했는지 톱니가 거칠게 돋친 종아리를 아스팔트바닥에 세우고 날개를 투명한 가위처럼 화들짝 펼쳐들더니, 급기야 낫 모양의 두 앞발을 마구 휘저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꽤 한산할지라도 자동차도로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당장 머릿속을 스친 것은 당랑거철이라는 오래된 경구였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들고나는 자동차바퀴 앞에서 그 운명을 가늠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부근의 삭정이로 녀석을 집어 풀숲 저편으로 옮겼다
수풀 사이로 슬금슬금 사라지는 녀석을 지켜보는데, 왠지 가슴 한 구석이 큰물에 둑 무너지듯 서늘하게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생각하면 그건 녀석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나에 대한 무참한 위로의 표지였다 올해로 데뷔한 지 28년째다 스스로 글로부터 유폐된 채 시와 언어를 완전히 작파한 10년을 오려내도, 나머지 18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18년간의 전 경로는 맨 처음 『채근담』에서 읽은 야부의 시구와 온전히 겨룰 수 있는 딱 한 구절을 얻기 위한 고단한 우회로였을 테다 그러나 그동안의 내 노력은 모두 그가 모는 만승전차의 기치창검과 무쇠바퀴 앞에서 젖심까지 쏟아내며 버티고 선, 한 마리 허술하고 성근 송장사마귀 깜냥에 불과했다
녀석이 사라진 방향의 서슬이 잠깐 환했다가 그늘졌다 나는 군청색 추리닝바지 바람에 슬리퍼짝을 끌며 마을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송장사마귀는 곧 가을이슬에 폭싹 젖은 채 고스란히 해체돼 스러지고 말 것이다 부시게 푸른 하늘을 前景으로 까마귀 두엇이 전봇대 위에서 까악까악 까르르르 짖어대고 있었다
4.
아아, 칼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