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빈들에서
고진하
오래 전 나는 빈들의 시인이었다
노래하는 집시처럼 새빨간 혓바닥만 살아
젊음을 탕진하고 있을 때
신(神)은 나를 빈들로, 텅 빈들로 내몰았다
야생의 초록 골짜기를 헤매다
빈들에 초막 몇 채를 세웠고
이슬과 구름의 관(冠)을 쓴 굴뚝들도 세웠다
어느 날
외딴 산모룽이 돌아가다
돌연 만난 꽃, 고독한 두루미를 닮은
두루미천남성을 사랑했고, 코브라의 머리를
쏙 빼닮은 그 흰 꽃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목이 긴
아버지가 물려준 가난과 고독은 형벌이 아니었고
형벌이기도 했다
털 빠진 황구 떼 컹컹컹 몰려다니는
빈들을 떠돌며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머무는 곳 말고
어디 따로 낙원(樂園)을 예약한 적이 없었다
허허로운 빈들의 보초 허수아비 흔들리듯
항상 흔들리는 곳이 내 시의 경작지였다 이젠
빈들
강연호
아무도 찾아오지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덮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긴 실꾸리 풀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 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나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빈들
김 용 택
빈 들에서
무를 뽑는다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처럼
나는
하얀 무를 들고
한참을 캄캄하게 서있다
때로
너는 나에게
무 뽑은 자리만큼이나
캄캄하다
저무는 빈들에서
정일근
어둠 그 다음에는 무엇이 따라 오느냐
저무는 빈들에 서면 이내 아득한 바람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세상 길은 끊어지고
풀들, 잡목들 자욱히 흐느낀다
빈말 빈몸으로 살아온 날들 뒤돌아보느니
이유도 까닭도 없이
소죄하고 싶다 사람아
마을의 먼 불빛들이 따스하게 다가오고
돌아가 누울 지상의 방 한 칸이 뜨겁다
꼬리에 불 밝힌 별 하나
서천으로 가고 있다
빈들에 서서
이정원
저, 무청 푸르딩딩한 대님만 남은
들판
우수에 잠겨 침침하다
단물로 품었던 속정까지 내주고야
빈 들이 되었다.
산발한 은발로 밭두둑 억새꽃
몇날 며칠 손짓 거듭했어도
내 안에도 썰렁 썰렁 비어가는 들판 있는거
눈치 못채고 있다가
11월이 들녘 끝자락부터 아득 아득 저물어 오면
나도 못내 저물어 땅거미가 되는 것인데
저물다가 문득
自盡하려 곤두박히는 나뭇잎 보았다
재빠른 하강곡선
그속에 잎맥같은 무수한 길이 보였다
뿌리에서 잎맥까지 이어진
길따라 나섰다
감은눈 속으로도 휘영청 열린
길은 이제 들숨에서 시작되고
날숨으로 끝나가고 있다
뿌리가 준비한 거한 목숨들
길 가운데 빼곡했다
텅텅 비워야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
그 길 어느 도중에야 섬광처럼 왔다
내 비어가는 속 뜰 어디엔가도
형형안 만다라 한폭 쟁여져 있으려나
다시 빈들에 서 본다
冬 安居에 들고 있는 초겨울
저 들판
바람 쓸리는대로 지는 잎새처럼 떨어져
섭생의 가드레일 같은
난해한 눈빛으로 열반경을 읽고 가는
새 떼 한무리
가뭇없는 허공에 銀紙처럼 구겨박혀
일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