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꽃
안도현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밀어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마당 안에 극지가 아홉 평 있으므로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먼 기차 대가리야, 흰 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
파꽃
심은섭
포크레인의 터빈엔진 소리에 밤잠 설친 파꽃들,
파밭에 둘러앉아 마태복음을 읽는다꽃
고무타이어를 신고 살던 완행버스가
레일을 밟는 자기부상고속열차로 진화하던 오후
007가방을 든 정장차림의 먹구름 떼가 몰려 와
푸른 지폐로 파밭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회색 얼굴의 꽃들이 원시림으로 숨어드는 동안,
공장굴뚝 연기로 파꽃의 이마에 하얀 금이 갔다
신발 신은 채 잠든 고층빌딩,
그 허리에 찬
가스총구 속으로 실종된 개구리 울음소리
밤마다 도시의 그림자,
밭둑을 넘어와 양철지붕 마당을 퍼가는 소리에
입술에 몇 채의 물집이 생긴 파꽃, 그
꽃이 피던 땅엔 한 접시의 새벽도 내리지 않는다
파꽃이라 부르겠다
권현형
어떤 자들은 달콤한 과즙 한 방울을
얻어 마시기 위해 이십 년 동안이나
배밀이로 모래사막을 건너기도 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 1이 멀미를 한다
한쪽 발을 들고 서 있으면 어지럽지 않다고
동방박사처럼 남자 2가 램프를 건네 준다
남자 1은 지상으로 내려올 때까지
램프를 들고 한쪽 발로 서 있다
카메라는 기우뚱한 소년의 늙은
불안한 눈망울을 줌인한다
캔뚜겅을 위로 젖혀야 하나 남자2가
망설인다 남자 1이 확신범처럼 외친디
젖혀, 위로 젖혀
식혜여? 남자 2가 묻는다
배야, 갈아 만든 배
배가 뒤집혀 고래에게 잡아 먹힌 선원들처럼
둘은 램프를 밝혀 서로의 캄캄한 입 속으로
갈아 만든 배국물을 밀어 넣는다
스물에 들어가 마흔에 가석방된 무기수를
넥타이 매본 일 없이
여자를 안아본 일 없이 장기 면벽한
남자1 남자 2, 인간극장을
파꽃이라 부르겎다
매운 눈물 속에 피는 꽃
파꽃을 무기수라 부르겠다
파꽃의 추억
이만섭
고향집 모퉁이 여름밤이면
어둠의 그늘 가지런히 쓸어놓고
달밤의 적막을 오종종 불러들여 파꽃을 피운다
둥글게 여민 머릿단마다
싸락눈 맞은 듯 너무 하해서
숨겨둔 마음들이 밀회하는 듯
그저 눈부시기만 한데
밤마실 갔다 온 누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달빛창 걸어놓고 혼곤히 잠들었네
나는 그것을 웬일로 보았을까
파꽃
조은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난다
너의 방을 두드리는
내 몹시도 발목이 비틀거렸다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나는 존재여
가까지 하면 눈물이 나는 존재여
머리 숙이고 있어도 몇 발짝 앞
문 잠그는 너의 손가락이 보였다
간혹 보였다
눈이 다 감기도록 우울하고 신선한 존재여
긴 밤을 위해
핏줄 사이로 끈끈한
바람이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캄캄하게 채워진 내 몸의 단추 하나가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파꽃이여
파꽃이 피는 이유
권정일
고백해 봐요,
왜 꽃을 피우는지.
강을 사이에 두고 파와 가로등은 마주 봐요 파는 강 저편에서 쏘아대는 불빛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언제부턴가 가로등을 연모하기 시작 했어요 문명과 반문명은 내외(內外)해야 하거든요
파, 파하! 파하! 파하!
피어나는 웃음들.
저녁, 해 그림자의 귀를 물고 가로등은 서둘러 불빛을 꺼내요 근지러워, 근지러워 불빛을 물고 잠수하는 강물을 따라 들어가는 파, 하하하 낮엔 햇빛과 밤엔 가로등불빛과 연애해요
강은 이들의 여관이에요.
사생활이 없어요.
강심으로 난 모든 길이 가로여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야 해요 시간을 잊은 파들의 격렬한 구애, 화끈 몸 달아오르다 지친 가로등이 불빛을 거두어들이는 아침
밤새 하얀 아이를 수없이 퍼질러놓았어요.
파, 꽃밭이에요.
올해도 파 농사 절단이라며 파 꽃모가지를 뚝뚝 따 강물에 던지는 아주머니, 농산물시장은 파 꽃은 뱉어 낸대요 강은 표정을 지우고 흘러가요 꽃 피우는 일이 때론 생계를 똑똑 따내는 일이기도 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