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침묵을 위해 문을 닫는 산에 든다
빈 나날 이 허망에 무릎까지 오는 낙엽
헛디딘 발자국 찾아 내 여기 또 왔네.
이마를 타고 앉던 굽이친 능선들이
뒷덜미 잡아채서 푼수대로 이던 하늘
흰구름 건너던 낮달 고삐되어 걸렸었지.
힘겨운 한 마루 발 아래 굽어보니
버리면 쉬웠으리 부질없는 짐보따리
이제야 호흡 낮추어 걸음 사려 놓는다.
무딘 날 날을 세워 비뚠 가지 잘라내고
목숨의 눈 먼 둘레 얼룩도 닦아내고
다시금 햇살 창창할 꿈을 찾아 볼 일이다.
--- 채천수,「겨울 산 보법步法」전문,『대구시조의 숲』2012
잠든 척 모로 누운 근육질의 강골 사내
한 때 잉걸불이던 제 속내 다스리는지
하얗게 길을 지운다, 세속으로 이어지는
낮달 한 잎 물고 간 새 숨어든 구름 이고
시리게 언 뼈마디 짐승처럼 우는 나목裸木
살아 온 시간만큼이나 가지 친 시름에 겨워
왜 산을 오르는가, 허허실실 되묻는다
숫눈이 환할수록 눈 뜨고도 허방 짚어
느낌표 혹은 쉼표로 세상 다시 가늠할 때
함박눈이 2막 3장 합창처럼 쏟아진다
환청의 골이 깊은 이 황홀한 아수라도
정녕코 길을 잃었나, 아님 나를 잃은 걸까?
걸음 멈춰 돌아보면 움푹 팬 눈의 생살
놀뛰는 정맥인 듯 꿈틀, 길 하나 낳고
누군가 그 통점 따라 생을 반쯤 오른다
--- 박해성,「겨울, 설산에 들다」전문,『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2012
어째 마음 한 구석 하릴없이 무너질 때는
저자로 가는 발걸음 잠시 접어두고
낯익은 골목길 돌아 돈달산을 오르자
마음 앞서는 길에 무슨 짐이 필요하랴
가슴에 와 부서지는 싱그러운 눈빛들
한길로 목청 돋우며 온몸으로 올라야지
땀으로 다가선 하늘 굽어보는 영신 들판
수석도 영강* 지나며 이름 하날 챙기듯이
사는 일 굽이치는 일 다 하늘에 닿아 있네
저 들 한 톨 옹근 벼알로 영글고 싶다
길은 멀어도 날은 저물다 밝아오는 것
마음 속 별 헤아리며 돈달산을 오르자
* 영강, 문경을 흘러 낙동강에 이르는 지류로 수석 산지로 유명.
* 돈달산은 문경시 점촌1동의 배산(背山).
--- 권갑하,「돈달산行-문경새제」전문『』2012
도봉*
-아버지
권갑하
돌아보면 늘 한 자리 너그러운 표정으로
가끔 걱정 있으신지 흰 수건 두르지만
축 쳐진 내 뒷모습엔 혀를 끌끌 차신다
밤새 신경통으로 끙끙 앓으시다가도
이마 훤한 웃음으로 문 활짝 여는 아침
그깟 것 잊어버리라며 등을 툭툭 치신다
* 도봉산
---
돌아앉은 주흘산
-문경새재 2
권갑하
이 사람, 서울은 뭐하로 갈라카노
엉디 붙인 곳이 바로 서울 아이가
송악도 자네 가슴팍 자리 틀지 않터나.
*한양 도읍 시 주산을 모집할 때 뒤늦게 소식을 들은 주흘산이 달려가 보니 이미 삼각산이 자리 잡은 뒤였다. 낙심한 주흘산은 삼각산이 보기 싫어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 그런데 주흘산 아래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 촬영장인 통일국가 고려의 서울인 송악의 개경궁과 고려촌이 들어섰다.
------------------------------
산, 귀를 닫다
김제현
보내지 않아도 갈 사람은 다 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올 사람은 오느니
때없이 서성거리던 일 부질없음을 알겠네
산은 귀를 닫고 말문 또한 닫은 강가
느끼매 바람소리, 갈대 서걱이는 소리뿐
한종일 마음 한 벌 벗고자 귀를 닫고 서 있네
------------------------
금강산
이근배
산이 사람인 거
사람이 산인 거
한번은 뱃길이 처음 열렸대서, 또 한 번은 반세기
까딱 않던 휴전선 쇠울타리가 끊기고 뭍으로 길이 뚫
렸대서, 그렇게 두 번 금강산엘 갔다. 돌 , 물, 구름,
나무야 윗대 묵객들 죄다 쓰고 죄다 그렸으니 더 보
탤 것 어디 남겼으랴, 살아 밟을 줄 몰랐던 길,
나는 듯 오르니 산은 간데 없고 여기 불쑥 저기 불
쑥 내미는 얼굴들, 아하 먼저 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들 예서 사시는구나, 북 치고 장구 치고 날마다 잔칫
날이구나
이제 알겠네, 사람들이 금강산에 와서
왜 모두 돌이 되고 물이 되는가를
--------이근배 시집"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문학세계사]에서
내가 왜 산을 노래하는가에 대하여
이근배
목숨을 끊은 양 누워 슬픔을 새김질 해도
내 귀엔 피 닳는 소리 살 삭이는 소리
산, 너는 죽어서 사는 너무도 큰 목숨이다.
그 황토흙 무덤을 파고 슬픔을 매장하고 싶다
다시는 울지 않게 천의 현을 다 울리고 싶다
풀 나무 그것들에게도 울음일랑 앗고 싶다.
어느 비바람이 와서 또 너를 흔드는가
뿌리처럼 해도 누더기처럼 덮여오는 세월
깊은 밤 가위 눌린 듯이 산은 외치지도 못한다
--------------------------------
떠나라 외로우면
걷고 또 걸어가라
산정山頂에 홀로 올라
비로소 보는 뒷모습
슬픔도 위안이 되듯
눈물별 안고 오라
진순분,「산정山頂」전문,『시조춘추』2012 하반기호
------------------------------
산에 오르니
김 교 한
산록은 오솔길 열어 망설임을 덜어준다.
새소리 물소리 흐르고 있는 피리소리
신비론 눈동자들이 나를 에워 반짝인다.
산마루에 올라서니 길 트이는 땀의 보람
삶의 늪 헤엄쳐 나와 잠시나마 나무가 되어
이렇게 사이 떠 있어 眺望할 수 있다네.
시간표도 사라진 날에 산이 내게 오라더라
진솔한 경위서 한 장 쓰다가 또 지우고
너무나 구겨진 여백을 푸른 가지에 달아본다.
-------------------------------
푸르다가 지쳤는가 만산 활활 타는 불길
돌 틈 꿰어 흐르는 선혈 무늬 맥박 소리
천성산* 허물고 있다 뿌린 설문 뜨겁다
*양산에 있는 산, 유서 깊은 내원사가 있음
김교한,「가을 천성산」전문,『잠들지 않는 강』2011
-----------------------------
수목장
-이한성
산에 오르자, 산이 제 발로 내려오고 있었다
정상으로 길을 내던 바람이 비껴 서서
굳은 몸 통성으로 푼 폭포를 보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키를 한껏 낮춘 정오
풀잎은 풀잎끼리 가슴을 맞비비는데
언 발목 시린 노루가 굴피집을 여순다
나는 안다, 산이 쉽게 그늘에 젖은 이유
층층이 누워 있는 아버지에 그 아버지
허연 뼈 묻어도 좋을 소나무 밑 때문이다
《시조시학》2007. 가을호
------------------------
한라산 5.16도로
김 윤 숙
사랑을 간직하면 이 길을 못 지난다
쏟아지는 눈발을 나뭇가지로 받아내며
갈 때를 알고 가셨나
저 하얀 혁명, 아버지
내 가게 장미다발 밤사이 산길 올라
누구 앞을 밝히나, 또 한 생 부케를 든다
불현듯 유리 냉장고
성에로 핀 저 열꽃들
국토건설단 그 발길들 삽자루로 끌려간 길
어승생 산 노루 떼 그 울음도 끌려갔네
전화벨 마지막 울림
혼 부르듯 가고 있네
그 여름 꽃 모가지 싹둑싹둑 잘라낸 손
몇 번을 지워도 오자처럼 박히던 가시
아버지, 흰 구두 한 켤레
혁명의 길 닦고 있네
---------------------------
태백산맥
김호길
골마다 별떨기 지고 착한 꽃들도 진 다음 얼마나한 기인 날을 산 바람은 울고 갔나
갈대숲 머리를 풀고 기구하는 어둠 속을........
북새, 하늬, 돌개........바람은 바람대로
갈아드는 산자락을 잎새들도 느끼는데
몇 만년 베고 누워서 깊은 잠에 어린 산아!
한 때 무지개 비낀 세월도 그물고 칡넌출 가시덤불 헤집고 사는 사슴
그 망울 삼삼이는 봄은 어데만큼 머무는가
수풀도 진초록의 융단으로 깔린 산하, 훨 훨 철새가 되어 누비고 싶은 정을
실실이 뿌리고 가는 이슬비가 지난다
목숨의 모진 뜻을 씹고 사는 풍란이듯 풍화된 황토밭머리 빛 바랜 초가에도
가늘게 등불은 밝아 흔들리고 있더니라
언제까지 곤한 잠에 떨어져 있을 건가
,
피 진한 모국어로 뒤트는 아침마다
혈맥 그 숨결은 돌아 눈 부비는 나무들
.*******열린시조 2001 봄호에서****
비슬산 가는 길
조오현
비슬산 굽잇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萬疊疊 두루 적막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
잊고 있었구나
끊겨버린 안부처럼
아픔이 깊을수록 향기마저 깊어져
혀 짧은 바람소리를 가슴속에 품는 산.
서걱대는 댓잎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안으로 문을 잠근 채 밤새도록 뒤척이면서
뼛속에 통곡을 묻는 너의 아픔 몰랐네.
무시로 흔들고 가는 천둥 비바람에
꿈틀대는 역심(逆心)의 칼 풀꽃으로 달래는 줄
몰랐네, 세상에 눈멀어 내 미처 알지 못했네.
그렇지, 사람이면 새벽 산은 닮아야지
캄캄한 시간들을 비수(匕首)처럼 등에 꽂고
읽다 만 경전(經典)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산.
-민병도, <새벽 산>, <<유심>>, 2006년 겨울호.
----------------------------
익은 열매들이
후둑후둑 떨어져내려
오히려 더 적적한
가을 산을 오르노라면
어디쯤 이승의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한 톨 작은 목숨 위에
크고도 높은 사유(思惟)
투명한 여울 속에 조약돌 드러나듯
하늘 뒤 또 한 세상이
보일 것도 같았다
-조동화, <가을 산을 오르며> 전문
-----------------------
桐華寺 갔다오는 길에 산이 나를 따라와서
도랑물만한 피로를 이끌고 들어선 찻집
따끈히 끓여주는 차가 단풍만큼 곱고 밝다.
산이 좋아 눈을 감으신 부처님 그 무량감
머리에 서리를 헤며 귀로 외는 풍악 소리여
어스름 앉는 황혼도 허전한 정 좋아라.
친구여, 우리 손들어 작별하는 이 하루도
천지가 짓는 일들의 풀잎만한 몸짓 아닌가
다음날 雪晴의 銀嶺을 다시 뵈려 또 옴세나.
-정완영, <山이 나를 따라와서> 전문
---------------------
장인봉과 자소봉 사이 바위벼랑 그 아래
내 몸이 묻힐 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묻혀서 우거질 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새소리로 우짖을, 나뭇잎으로 짙푸를
자소봉과 장인봉 사이 아득한 하늘다리
그 아래 지나는 바람 이젠 너임을 알겠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소재
이정환,「청량산」전문,『별안간』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