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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사랑한다는 것은/신영복

작성자자작나무|작성시간17.06.14|조회수662 목록 댓글 0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입니다.
모든 사랑은 비약으로 이어지고
비약은 다시 비상으로 날개를 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한 사람에 머물지 않고
그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으로 이어지고
어느새 아름다운 사회와
훌륭한 역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복



출처: http://eventhere.tistory.com/345 [even there]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알려진 신영복님의 글씨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를 어떤 사람은 '연대체'라고 불렀다.
< 여럿이함께>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
모두가 뜻을 같이하여 동지애로 연대감을 북돋는 듯한 모습이라고 한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이다.
신영복 선생이 한글서체에서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중요한 계기는
바로 그 '연대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신영복 선생이 쓴 서예작품을 보면
그 내용이 한결같이 진보적이고 리얼리즘적이며
삶과 역사에 대한 은은한 인식을 담고 있다.
단 한번도 그는 가벼운 감상으로 흐른 일이 없다.
도덕적인 것, 교훈적인 것, 정치구호적인 것을 피하고
<녹두씨알> <흙내> <처음처럼>같은 간명하지만
폭넓은 이미지가 담긴 글귀를 찾아내어 그의 특유한 필치와 구성법으로
부기(附記)를 달고 관서(款署)를 매긴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모든 예술작품은 내용이 그 형식을 규정한다."
신영복 선생은 자신이 서예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한 내용이
한글의 고체나 궁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음을 느꼈다는 것은 이 점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찾았고,
또 그 형식으로 하여금 내용을 받쳐내게끔 함으로써
작가적 개성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신영복의 서풍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으니
논리학에서 "그렇게 이루어진 형식은 다시 다음 내용을 규정한다"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것을 예술의 세계에서는 일가(一家)를 이루어간다고 말한다.

<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shinyoungbok.pe.kr

 

신영복 선생을 자주 만난다. 물론 직접 뵙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신영복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다. 그럼에도 자주 '만난다'고 하는 것은 '처음처럼' 때문이다.

그사람의 말과 글은 곧 그 사람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주 '처음처럼'은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 '처음처럼'을 자주 만나기에 신영복 선생을 자주 만난다고 한 것이다. 기자의 '처음처럼' 사랑은 꽤  오래됐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2007년에 출간된 신영복 선생의 서화집 '처음처럼'에서 신영복 선생은 삶의 의미를,
'처음처럼'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출처:신영복 교수 홈페이지 '더불어숲'


 

 

신영복 이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린 것은 1988년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신영복 선생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나왔다. 육군 중위 신분으로 육사에서 경제학과 교관을 하던 신영복 선생은 19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이라는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풀려날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시작한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야 통혁당 이라는 단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는 신영복 선생은 갖은 고문과 구타 끝에 '통혁당 핵심 성원'이 됐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28살의 전도유망했던 '교수' 신영복은 이름이 아닌 죄수 번호로 불리는 '수감자'가 되어 세상과 격리된다.

억울함과 비관을 견디지 못해 감옥에서 숱한 재소자가 자살을 택했지만 신영복 선생은 '반듯하게' 살기로 한다.  한달에 딱 한번 주어지는 엽서 작성 시간이 신영복 재소자가 세상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시간이었다. 

한달을 기다려 머리 속에서 다듬고 다듬은 문장들을 가족들에게 보낸다. 이렇게 보낸 글들이 묶여져 나온 책이 바로 1988년 출판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다.

엽서와 관련해 신영복 선생은 지난해 펴낸 '담론'에서 "신문지 크기 만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좋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며 가족들이 편지의 최종 독자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였다"고 밝히고 있다.

▲신영복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재소자가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엽서를 보내게 된 계기는 우연적이다. 

감방 동료였던 전직 목수가 집을 그리는 장면을 보고 신영복 재소자는 충격을 받는다. 

통상 집을 그리라 하면 지붕을 그리고 이어 기둥을 그리고 바닥을 그리는 자신과 달리 '목수'는 바닥부터, 다시 기둥으로, 맨 마지막에 지붕을 그렸기 때문이다. 

자신과는 정반대로, 하지만 실제 집 짓는 순서와 똑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는 '서울대'를 나온 자신이 아닌 목수 출신 수감자였던 것이다.

이때의 충격을 신영복 교수는 "현실에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창백한' 관념을 반성"하게 됐다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밝히고 있다. 교도소에서 만난 숱한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삶과 언어가 "자신의 계급성분을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신영복 재소자가 엽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엽서를 쓰며 단순히 전도유망했던 서울대 출신 교수였던 신영복 재소자는 비로서 세상과 사회에 눈을 뜨면서 진정한 '지식인'이자 한사람의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여름 옥살이'에 대한 단상을 밝힌 다음 글은 신영복 재소자의 인간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C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1985년 8월 계수님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29쪽.)

존재 자체가 원망과 미움의 대상인 '감옥'이라는 '절망'적인 공간에서 신영복 재소자는 낙담하고 불행하고 비루해지는 대신 인간에 대한 '사색'을 하며 진정한 성찰에 눈뜨게 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가 '유배'라는 극한 상황에서 마침내 '다산'이 되고 '추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신영복 선생은 그래서 자신의 옥살이를, 감옥을 "사회학 교실이자 역사학 교실, 최종적으로 인간학 교실"이라고 했다.

이와관련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신영복 교수의 성공회대 정년퇴임을 앞두고 쓴 글에서 "선생의 사상을 일관하는 저류는 인간 해방"이라며 "마르크스의 경직성을 넘어서며 동시에 과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점에서 우리 진보주의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신영복 선생의 학문적 성과를 기렸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자신이 만난 사람 모두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인간적으로 대하는 지식인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는 말로 신영복 선생을 평가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출처: 신영복 교수 홈페이지 '더불어숲')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이듬해인 1988년 8월 15일 광복절, 신영복 재소자는 20년간의 옥살이 끝에특별 가석방 형식으로 출소한다. 20대의 팔팔했던 청년이 40대 후반의 중년이 돼 세상과 다시 마주한 것이다.

출소하던 그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출간됐고, 1989년부터는 성공회대에서 경제학 강의를 시작했고 2006년 정년퇴임한 뒤에도 석좌교수로 있으며 후학을 길렀다.

배우고 가르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신영복 교수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영복 선생은 시대와 인간을 관통하는 수많은 명문과 '처음처럼'과 '더불어한길' 등 '신영복체'라는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는 특유의 독특한 글씨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출처: 신영복 교수 홈페이지 '더불어숲'


 

 

"돌이켜 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으로 인하여 그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1996.)

'돌이켜 보면'으로 시작하는, 사랑과 평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저 유명한 구절은 어쩌면 신영복 선생 스스로의 삶을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열하게' 흘러야만 했던 강물처럼 신영복 선생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닥쳤던 간첩단 사건이라는 '험준'하고 '가파른' 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치열하게'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물의 본성이 그러하듯 낙담하고 비루해지기 쉬운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라는 인간 본성을 찾아내 잃지 않고 간직하며 세상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이야 말로 선생이 이뤄낸 가장 빛나는 성취일지 모른다.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하고 전율에 빠졌던 이유도, '나름' 힘들 때마다 선생의 글로 위안을 삼는 것도, '처음처럼'을 사랑하게 된 것도 다 그때문이다.

현대사의 질곡을 몸으로 체화하며 한평생 치열하게 살아왔던 신영복 선생이 15일 밤 11쯤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향년 75세. 

야만과 광기의 시대, 치열했지만 '그들'처럼 '야수'가 되지 않고 그 치열함을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던 선생이 드디어 '가장 낮고 가장 평화로운' 곳으로 떠난 것이다.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암 투병중인 지난해 '담론' 서문에 쓴 글이다. 

'처음처럼'. 선생의 글을 만나러 슈퍼마켓이라도 가야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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