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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김소월 시인

작성자자작나무|작성시간17.06.21|조회수843 목록 댓글 0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

 

(왼쪽 사진) 북한 신문이 소개한 소월의 옛집. 하지만 서울에 있던 소월의 3남 정호씨는 이집은 자신이 살던 옛날 그집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金素月. 북한 문단의 그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굴곡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때 민족주의, 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받다 67년 봉건·유교사상주의자로 낙인찍혀 그의 시와 함께 매장됐다. 그의 시가 다시 햇빛을 보기까지는 20여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북에서 소월 詩에 대한 평가의 분기점은 67년. 북한 “문학신문”은 소월 시에 대한 재평가가 내리기 직전인 66년 5월부터 2개월동안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제하의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이 기사는 “문학신문” 소속 기자인 김영희가 직접 소월의 고향을 찾아 취재한 기행문이다. 올해(12월24일)로 서거 64주기를 맞는 그를 기리기 위해 본지는 이 기행문을 단독입수, 전재한다. 기사 가운데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국내 소월 연구가 金鍾旭씨가 주석(괄호안 내용)을 달았다. 일부 표현과 내용은 우리식 표기법으로 바꾸거나 첨삭했다.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사람이어!

사랑하던 그사람이어!

 

이것은 소월 김정식(金廷湜)의 묘비에 아로새겨진 그의 유명한 시 일부다 (소월의 묘비는 현재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에 소재하고 있다. 소월은 최후를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에서 마쳐 그의 묘소는 그곳에 있었는데 1965년 그의 본적지인 곽산(郭山) 남단동(南端洞)으로 이장됐고 시비(詩碑)도 그곳에 세워졌다. 이 시비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초혼(招魂)’이 새겨진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설사 이 ‘글발’이 새겨져 있지 않다 해도 그의 묘비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이 통절한 노래가 스스로 귓가에 울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으리라.

 

2남 은호씨가 준 소월의 사진

 

일찍이 송강 정철(鄭澈)의 묘를 찾았던 시인 권필(權 )이 ‘빈산에 나뭇잎 지고 쓸쓸히 비 내리나 선생의 노래는 귀에 상기(항상) 쟁쟁하다’고 노래한 바 있거니와 소월의 묘비 앞에 서니 말 그대로 그의 시가 귀에 쟁쟁한 것 같다.

천재시인 소월의 시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의 가슴속에 잠겨 칠현금처럼 힘있게 울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소월의 고향을 찾은 것은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을 때이다. 새 깃과 같이 포근한 ‘금잔디’ 위에 시인은 잠들어 있었는데 그 둘레에는 소월이 평생 그토록 좋아하던 아름다운 진달래가 그에게 그윽한 향기를 품어주고 있었다.

자연은 너무나도 불행했던 시인을 따뜻이 품어 위로하는 듯 싶었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소월, 나 역시 그의 시를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시를 사랑하던 나머지 그의 아름다운 시의 요람, 시인의 고향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은 해마다 봄이 오면 더욱 간절하였다.

소월의 시에는 ‘진달래꽃’뿐 아니라 ‘여름의 달밤’‘가을 저녁’도, 고요히 눈 내리는 겨울 아침도 있다. 말하자면 춘하추동을 다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는 봄을 무척 그리워한 시인이었다.

그래 봄이 오면 소월의 고향을 더욱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소원대로 여름이나 가을, 더구나 겨울이 아닌 바로 이 봄에 소월의 고향을 찾게 되었다.

나는 수수께끼처럼만 듣던 ‘차 가고 배 가는’ 곳도 보았고, ‘접동새’ 찾아들던 골짜기도 보았다. 처음 찾는 고장이지만 언젠가 본 듯한 정다운 풍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보다 정다운 것은 그의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반가이 나를 만나주었다. 소월이 평생 못잊고 그리워한 그 사람들을 만났으니 무엇이라 감격이 자꾸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때마침 청명날 밤 나는 소월의 옛 고향집에 하루를 묵었다. 맏아들 준호는 청명날이라 푸짐한 음식을 차려주었다. 그가 바로 소월의 시 ‘돈과 밥과 맏아들’(이 시의 원제는 본래 ‘돈과 밥과 맘과 들’이지 ‘돈과 밥과 맏아들’이 아니다)에 나오는 그 맏아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만 열세살 난 소년 김정식이 그 놀랄 만한 시재를 보여준 ‘긴 숙시(熟視)’를 썼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였다(그러나 최근 이 산문시는 소월의 작품이 아니라 소월(素月) 최승구(崔承九)의 작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소월의 옛이야기를 들으로 왔다니까 그날 밤 소월의 집에는 수많은 소월의 옛 친구들과 친척들이 찾아왔다. 거기에는 김정식이 자기 호를 왜 소월로 붙였는가를 아는, 항렬(行列)로 보아 소월의 할아버지 격인 76세의 김송하 노인, 사립 남산학교 동창생인 김상적·김상점 노인들, 소월이 장가들 때 각시를 구경왔던 매실 할머니 등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밤 가는 줄 몰랐다. 시인이 작고한지 설흔(서른)해도 더 넘고 또 어떤 이는 시인과 헤어져 40∼50년이 되었으나 모두가 어제인 듯 생동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다시 그의 고향을 보니 무심히 보이던 ‘모래동’도, 그저 스쳐 지날 수 있는 ‘오리나무’도 모두가 사연이 깊었다.

나는 그가 거닐던 바닷가─ ‘파랗게 좋이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 노을 스러지는’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고, 그가 좋아하던 ‘녕변의 약산’도 올랐고, ‘비맞아 함뿍이 젖은 제비도 가다오다 돌아’온다는 구성(龜城)땅도 편답(遍踏)하였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그곳 들에는 많은 전변(轉變)이 일어났다. 그곳 들에는 소월이 ‘상쾌한 아침’에서 그렇듯 열망한 ‘많은 전변’이 일어 ‘우리의 손에서 아름다와’졌다.

“참! 선생은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만일 그이가 앉아 계신다면 우리 세상을 얼마나 감격에 겨워 노래했겠소.”

이 말은 어려서 소월에게 무척 사랑받았다는 왕인협동농장 차성관 작업반장의 말이다. 이렇게 얘기를 듣고 보니 땅을 구르는 뜨락또르(트랙터) 한대 무심히 볼 수 없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드면’하던 소월이 우리의 땅을 울리는 뜨락또르를 본다면 얼마나 환희에 넘쳐 노래하였을까.

지금 나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가 놓여있다.

시인의 둘째아들인 은호씨가 나에게 준 소월의 사진, 문장리에 있는 시인의 딸 김구원이 나에게 들려준 소월의 일화를 적은 두툼한 수첩, 그가 소학교 시절 배웠다는 교과서 그리고 시인의 소꿉놀이 친구였던 관상리 오철청 할머니가 소월에게서 배웠다는 노래 구절들, 시인을 두고 일찍이 친구들이 지은 시문들, 서투른 솜씨로 내가 찍은 20여점의 사진들… (殷鎬는 소월의 둘째아들. 소월은 부인 洪實丹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준호, 은호, 정호, 낙호, 구생, 구원으로 김구원은 소월의 차녀다).

 

남산봉 기슭에 자리잡은 소월의 묘

 

어떻게 하면 이 자료를 가지고 소월의 생애와 그 고향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먼 옛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일화를 수집한 리인로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선행한 명인들의 일화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은 후손들의 큰 의무라고 하였다.

내 어찌 “파한집”의 저자를 따를 수 있으랴마는 다만 후대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무딘 붓을 가다듬을 뿐이다.

이제 얼마간 지상을 통해 독자들과 더불어 소월의 고향을 붓이 내키는 대로 찾을까 한다.

곽산읍에서 남단리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재를 넘어 마을 뒤로 돌아서 가는 지름길이고 또 하나는 신작로를 따라 마을 앞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신작로 길을 택하였다.

소월이 그렇듯 아름답게 노래한 고향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고 생각하니 사뭇 감회깊은 가운데, 문득 머리위에서 정겨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신작로 위에는 물오리떼가 날고 있었다. 만일 저것이 기러기떼였다면 소월은 이곳에서 ‘길’이라는 시를 노래했을 것이다.

 

말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이것이 고향마저 일제에 빼앗긴 소월의 시다. 고향을 사무치도록 사랑한 시인은 죽어서도 넋은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설 땅마저 빼앗긴 시인이 갈 곳은 그 어디였으랴. 마을을 들어서니 벌써 햇살이 쫙 퍼졌다.

소월의 고향은 남향으로 위치해 있는데 그 뒤를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야산이라고 볼 수 없는 남산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남산봉 왼쪽에는 금로봉이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 기슭에는 관리위원회와 상점, 유치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참고로 남쪽에 살고 있는 소월의 3남 정호씨는 아버지의 고향집에 대해 “아버님이 자란 곳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일명 남산동) 569번지다. 본가는 열네칸이나 되는 입구(口)자의 묵은 기와집이었다. 집 울 뒤의 3천여평의 담장 주위에는 옛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각종 과일나무가 즐비하게 있었다”고 한 글에서 적었다).

남산봉은 소월의 옛집 뒤에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그 산 상봉에는 흡사 투구 모양을 한 투구봉이 있고 그 밑으로 산 줄기가 뻗었는데 ‘옥녀 산발형’즉 옥녀가 머리를 풀은 형극이라는 구천봉이 있고 그 사이로는 덕수물이 내린다는 횅천골이 있다.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진달래봉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언덕도 있다.

이 남산봉 기슭은 갈피마다 소월의 시가 깃들어 있는 곳이며 소월이 어린 시절 일화를 남겨놓은 시의 요람이다. 진달래봉은 금잔디와 오리나무 숲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린 소월은 여기에 올라 글짓기를 했다.

소월의 묘도 이 전망 좋은 남산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작은 남산봉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곽산읍이 한눈에 보이고 남행열차의 모습도 보인다. 앞쪽으로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고깃배가 떠돈다. 바다 한가운데에는 신미도 삼각산이 불쑥 솟아난듯 떠있다.

 

산에나 올라서서

바다를 보라.

사면에 백열리 창파 중에

객석만 둥둥… 떠나간다. (소월의 시 ‘집생각’의 한 구절)

 

소월의 짧은 시들은 자연을 그대로 품에 안고 있다. 남산봉에는 곳곳마다 소월의 시가 스며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남산봉 기슭 후면에는 무슨 전설이라도 깃든 듯한 여러가지 모양의 괴석이 깔려 있는데 그 반대편으로 고려의 명장 서희 장군이 거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쌓고 선조들이 외적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릉한산이 놓여 있다.

그 주변으로 의병장 홍천록이 어부 4백여명으로 의병을 조직했다는 선사포, 더 가까이는 평안도 농민전쟁 당시 마을사람 모두 인민의 편에 서서 싸우다 한사람 같이 순사하였다는 남촌…. 그리고 투구봉 바로 위에는 봉수대가 자리잡고 있다.

남산봉은 이 곱고 다정할 뿐만 아니라 슬기롭기도 하였다. 시인의 남다른 조국애도 이런데서 자란것이 아니겠는가. 남산봉! 그리고 남산마을, 이 정다운 산천, 아름다운 마을에서 어떻게 시인이 자랐는지 알기 위해 저녁녘에 소월의 옛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북에 남은 소월의 가족 직업도 소개


김소월의 집에 밤이 오면 ‘아오라비 접동새’ 등 작은 새소리가 고요를 타고 들려온다.

소월은 이 집을 시에서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을 잊지 못해 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시 ‘집생각’‘우리 집’‘나의 집’을 통해 노래했다.

소월의 집에는 풍경화와 가족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소월은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의 3남 정호씨가 술회한 적이 있다. 지난 1990년 9월 문화부에서 소월의 진영(眞影)을 새로 제작할 때 사용했던 동아일보 구성지국장 시절(1926년)에 찍었던 퇴색한 사진을 보고도 정호씨는 그것이 선친의 사진인지 여부를 가려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농장의 재간있는 목수인 이 집의 주인 소월의 장남 준호 그리고 평북도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으로 있는 은호, 대학을 마치고 평양의 어느 설계 연구기관의 연구사로 있는 락호 등 소월의 아들들 얼굴이 차례로 보인다. 그리고 아랫방에는 영실, 정옥, 영철 등 시인의 손자, 손녀들이 포근히 잠들어 있다.

이날 노인들이 들려준 불우한 소년 정식의 이야기 중에서도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시인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이야기였다(소월의 숙모 계희영(桂熙永) 여사의 ‘소월에 대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소월의 성장과정은 실제 전하는 사실과 틀리는 곳이 상당히 많다. 예컨대 계여사는 소월이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적었다).

어린 소월이 세상에 태어날 무렵은 평화롭던 곽산 땅도 일제의 침략으로 날이 갈수록 소란스러웠다. 일제놈들은 남산봉 뒤쪽에 철도공사판을 벌여 놓았다.

마을사람들이 응하지 않자 약이 오른 일본놈들은 마을의 몇몇 청년들에게 불의의 폭행을 가함으로써 조선사람의 기세를 꺾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소월의 부친 김성도(金性燾), 지금의 김송하 노인의 부친 김경로 등에게 생트집을 부렸고 김성도에게는 잔인한 폭행을 하였다.

성도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며칠후부터는 일제를 저주하는 고함을 지르며 실성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완전히 정신이상에 걸려 폐인이 되었다.

소월은 아버지의 사랑은 받지 못했으나 어머니로부터는 끔찍한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 장씨는 시부모를 모셔야 했고 실성한 남편을 돌보아야 했으며 농삿일까지 맡아야 했다(소월의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라 불렀다).

자연히 소월은 조부를 따르게 되었다. 조부 김상주(金相疇) 노인 또한 반일감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린 소월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향토의 원한과 슬픔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후일 소월은 길가에서 일본 관리들과 마주치면 ‘개와 사람이 어찌 한 길을 걸을 수 있는가’라면서 돌아서서는 놈들이 다 지난 다음에야 되돌아 걸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단순한 ‘향토시인’이 아닌 애국시인으로 자란 것은 이러한 가정환경과 중요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나는 지으리 나의 집을

다시금 큰 길을 앞에다 두고…

나는 문깐에 서서 기다리리…

지나가는 길손을 눈여겨보며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나의 집’ 중에서)

 

옛집은 전란 중에 불타고...

 

소월의 생가 택호(宅號)는 일봉집이다. 소월의 노할머니가 선천군 일봉리에서 이곳으로 시집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집의 사랑방에는 마실꾼들이 항상 모여 일제의 탄압에 나라 걱정을 하였으며 이야기마당으로 이용되었다.

원래 곽산 땅은 옛날부터 전설과 민화가 풍부한 곳이어서 이야기의 샘물은 마를 줄 몰랐다. ‘릉한산성’에서 거란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을 비롯해 봉건 영주의 포악상을 폭로하는 ‘수청베리 이야기’, 그 효성을 하늘도 알아본다는 ‘효녀 사월 이야기’, 절개를 지킨 ‘최씨부인 이야기’, 단독으로 호랑이를 잡은 ‘박돌소년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사랑방에 모인 동네사람들은 소월의 첫 문학선생인 셈이었다. 여섯살밖에 안된 소월은 옛이야기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심청전’ 등은 책에 쓰인대로 내용과 곡조를 줄줄 외웠다.

사람들은 귀엽기도 하였지만, 저 애가 신동이 아닌가 싶어 범상히 생각하지 못했다.

상주노인은 당시 한문에 조예가 상당히 깊었는데 하루는 글읽기를 마치며 책을 덮으려는데 어린 소월이 들어서며 “제가 한번 읽을테니 들어보세요”라고 말했다.

소월은 앉은 자리에서 여러 장에 걸친 글을 두루 외웠다. 상주노인은 손자를 덥썩 안고 “이게 정말 여섯살짜리 애인가”하고 탄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은 “상주노인집에 문장이 났다”고까지 하였다.

한때 소월이 학비가 없어 학교를 못가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어른들을 따라 밭에서 쇠스랑을 쪼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쉬었다 하자고 하자 소월은 엽낭에서 책을 꺼내 땅에 박은 쇠스랑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책뿐만 아니라 피리 또한 잘 불었으며 장기도 한몫하였다. 그의 장기는 동네어른들을 거의 이기는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저 ‘진달래봉’ 앞 못가에서 낚시질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루는 가만히 가보니 미끼도 달지 않은 낚시를 온종일 못가에 던지고 있더란 말일세. 보아하니 낚시질에는 생각이 없고 글귀를 생각했던 모양이네.”

한 노인은 소월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소월의 고향집은 6·25 때 미군의 눈먼 폭탄을 맞아 사랑방은 완전 파괴되고 원채도 거의 무너진 것을 목수인 아들 준호가 다시 보수하여 살고 있다.

소월이 출생할 무렵 이 집은 원래 초가였는데 지금은 기와를 얹고 있다(소월의 3남 정호는 그의 집이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으로서 매우 큰 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은 소월의 생가는 아니다. 그의 생가는 구성군 왕인리 안끝 부락이다(소월의 생가는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본적지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 569번지와 혼동하여 본적지를 소월의 생가로 잘못 적어놓고 있는 기록을 많이 보고 있다. 소월은 오산중학을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한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배재중학에 남아있는 그의 학적부에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된 사실이 얼마 전에 드러났다. 그것은 1902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할 그의 출생연도가 명치33년(1900)으로 기재된 것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공주 김씨 족보(族譜)를 봐도 1902년생으로 나타나 있는 만큼 시정되어야 할 줄 믿는다).

 

주춧돌만 남은 남산학교

 

                                                                                                                                 (왼쪽사진) 남산학교를 졸업한 뒤 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 그는 여기서 조만식, 김억 등에게 배웠다. 3.1운동후 일제에 의해 폐교됐다.

 

 

지금도 그 마을에는 소월의 외삼촌 어머니가 살고 있는데 소월은 외가댁인 그곳에서 태어났던 것이다(소월이 태어난 곳은 외가로 당시의 습속이 갓 시집온 색시가 첫 아기를 출산할 때는 반드시 새색시의 친가에 가서 아기를 낳게끔 되어 있어 소월은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만년에 쓴 경향적인 것으로 추측되는 시편들과 그가 사용한 모든 것이 몽땅 폭격에 없어졌다(김정호씨의 말을 빌리면 8.15 직후까지도 아버지 소월이 남긴 미발표 유고가 한 트렁크 정도는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북한 소월의 후손들은 단 한편의 소월 원고를 보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소월이 낚시질한 못을 넘어 수업을 쌓던 남산학교 터로 발길을 옮겼다.

소월은 불우한 소학교 시절을 보냈다. ‘일봉집’은 몰락했고 그의 어머니는 소월에게 모자조차 사줄 수 없어 한숨을 지었다니 쪼들렸던 가사를 짐작할 수 있다.

 소월은 남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집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3년동안 어른들을 따라 농사를 지었다.

그가 다닌 사립 남산학교는 진달래봉,구천봉 등이 좌우에 서 있는 아늑한 골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보잘 것이 없고 운동장이라야 노적가리 하나가 들어앉기 빠듯할 정도였다.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이다.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소월은 재학시절 타학교와의 경쟁에 학교를 대표하여 출전, 1등상으로 연필과 백로지를 타가지고 오기 일쑤였다.

당시 소월의 문재(文才)가 어떠했는지는 그의 어릴 적 글인 ‘긴 숙시’를 보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소월은 조숙한 소년이었으며 남들이 마치기 어려운 재능을 가진 어린이였다. 현재 평양에 있는 시인과 함께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교수 한경순 박사의 말이 생각났다.

소월이 남산학교를 다닐 무렵은 소위 한일합방을 전후한 때여서 여간 시국이 복잡하지 않았다. 일본은 애국적인 감정이 농후한 사립학교를 백방으로 해체하려 하였다. 그들은 사립학교에 다니면 배울 것이 없다는 맹랑한 낭설을 퍼뜨려 학생들을 소위 공립 보통학교로 유인하였다.

곽산읍에 있는 공립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도 이러한 방법으로 남산학교를 없애버리려 하였다.

하루는 그가 소월이 다니는 학교에 왔다. 그가 교실에 들어서자 교실 안은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일본인 교장은 소월 앞에 이르러

“연필은 무엇으로 만드느냐.”

“일본은 동쪽에 있느냐, 서쪽에 있느냐.”는 등 하찮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렇게 유순해 보이던 소월의 얼굴은 파랗게 일그러졌고, 그렇게도 답변을 잘하던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와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었다.

일본인 교장이 간 후 소월과 몇몇 학생들은 비밀리에 배우던 ‘국권은 어데로 가고/ 기반되기 어인 일가. /…여보 우리 동창 제군/우리 본분 지킵시다’로 된 “유년필독”이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결국 소월은 소학교 4년간을 첫자리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더이상 웃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름다운 素山의 月色

 

김정식의 호 ‘소월’(素月)이란 두 글자의 유래는 어디에 근거하고 있을까(소월이란 필명은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곽산읍의 향토사에는 남단리에 소산(素山)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소산과 소월이란 이름에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취재하면서 남단리를 죄다 뒤졌지만 소산이란 산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의 연장자인 김송하 노인을 찾아 우선 소산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노인의 집은 바로 진달래봉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송하 노인은 소산이 바로 진달래봉이라고 말해주었다.

놀랍게도 우리가 여태 다녀온 남산봉을 가리켜 옛날에 소산이라고 불렀던 게 아닌가. 소월이란 이름도 이 소산과 관련되어 있었다.

 

(왼쪽 사진) 소월이 어린시절 다녔던 사립 남산학교 그림. 본래는 서당으로 지어진 'ㄷ'자형 한옥인데 작가가 그린 것이다. 

 

 

송하 노인은 항렬로 보아 시인의 할아버지격이요, 연세로 보면 시인보다 열 한살 위다. 그러나 남산학교를 다닐 때는 소월보다 두 학년이나 아래 반이었다.

어느 해인가 소월은 송하 노인에게 자기의 필명을 소월이라 짓는 것이 어떤가하고 물었다. 송하 노인도 찬성했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소월은 소산에 뜬 달이라는 말인데 고향 산에 뜬 달로서 언제나 그리운 향토를 지켜보겠다는 뜻이요, 나아가서는 내 나라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큰 뜻이 기본을 이루고 ‘소’(素)자는 희다, 소박하다는 뜻과 바탕 또는 근본이란 뜻으로도 쓰이는데 흰 달과 같이 결백하여 소박하며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소산(素山)의 달밤은 아름다웠다. 산기슭에는 시냇물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소산에 뜬 달처럼 언제나 향토를 지켜보겠다던 김소월은 자신의 고향, 고향사람들에 대한 정에 못이겨 ‘정 베이는 칼 없고 물베이는 칼 없다’고 써놓은 적이 있다.

이것은 시구가 아니라 중학에 다니던 그가 오래간만에 고향에 들러 친구들과 함께 남산학교에 올라가 칠판에 우연히 써놓은 글이다.

그는 이처럼 그 이름과 함께 평생을 고향과 고향사람들과 한몸으로 살았다.

어느 때인가, 그는 고향에 들르러 온 적이 있었다.

소월을 각별히 사랑하던 노인들은 그가 고민에 쌓여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시냇가로 소월을 불러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소월은 반대로 노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격한 감정이 가슴을 눌러왔다. 그는 즉석에서 빼앗긴 조국을 부르짖으며 압제자를 저주하는 즉흥시를 불렀다. 그런 후 그는 소산이 떠나갈 듯 통곡하였다(이 즉흥시를 외던 노인은 얼마 전 사망했다).

 

시인이여! 그대 이름을

소산에 뜬 달이라 하였으니

내 오늘밤 그대 얼굴을 보는 듯하여라.

그대는 산상에 떠 빙그레 웃고

그대는 여기 관개수에 잠겨

<인제는 내 고향도 좋은 세상이라. >

정다움에 못이겨 출렁이누나.

오오 시인이여 눈물을 걷우라.

‘불서럽던’ 세상은 그 옛날이오

‘허공중에 헤어’졌던 그리운 이름이

그대 고향에도 찾아왔슴에…

 

남산봉 일대 공원지대 조성계획

 

“아마 1931년인가 봅니다. 나는 시인을 꼭 한번 만나고 싶어 그가 서울에 들르러 왔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지광’(朝鮮之光)사 앞에서 그를 만난 일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후 내가 사랑하던 시인의 고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관리위원장의 말이다. 시인을 그리워하던 사람들, 시인이 그리워하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이 땅의 주인이 되어 향토를 아름답게 꾸려나가고 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라면’하고 시인이 그렇게 갈구하던 이 땅 위에는 얼마나 많은 전변이 일어났는가. 여기 동구 옆에 자리잡은 모판을 보라. ‘저마다 외로움의 깊은 근심’에 쌓였던 곳이 이제는 사람마다 즐거움에 가득 찬 얼굴로 파릇이 돋아나는 모판을 가꾸며 좋아라고 법석이다.

얼마나 은혜받은 대지인가. 들에는 해마다 풍년이 든다. 그리고 산에는 배·복숭아 나무가 주먹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사로청원들이 작성한 10개년 전망계획도에 의하면 남산봉 일대는 아름다운 공원지대로 꾸며진다.

동구 밖을 나서니 소월의 둘째 손자 김영보가 뜨락또르를 몰고 간다. 조그마한 보습댈 땅도 없던 우리에게는 이제는 뜨락또르 대군이 마음껏 활개치는 그런 넓은 대지가 차려진 것이다.

우리는 관상리로 가 시인의 소꿉놀이 친구였던 오철청(본명 오철)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정식이가 소월인 줄은 해방이 되어서야 알았지”라고 말한다. 오철청 할머니를 찾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소월과 할머니의 동생 오숙과의 관계를 알고 싶어서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소월의 소꿉놀이 동무인 오숙이 시인의 첫 연인이며 후에 오숙의 죽음을 슬퍼하여 소월이 ‘초혼’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아, 우리 오숙이가 나보다 두살 아래였는데 그때 열살이 되나마나 했지. 그리고 오숙이는 정식이가 죽기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전쟁 때 미국놈 폭격에 죽었네.”

이 증언은 ‘초혼’을 한낱 연정시로 돌려버리려는 부르주아 문인들의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증명해준다. ‘초혼’은 잃은 조국을 목타게 부른 애국시인 것이다. 소월은 죽음을 앞두고 고향의 그리운 벗들을 찾아다닌 일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주군 서호리에 있는 노문희 노인이다. 소월은 그날 노문희 집에서 낮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하룻밤 쉬고 가라는 친구의 만류를 무릅쓰고 저녁 길을 떠났다. 그때 노인은 소월과의 석별을 애석히 여겨 그날 밤 시 한수를 손수 지었다.

 

만류하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운종산에 해 저물고 갈 길은 멀고 멀다.

오늘밤 솟는 달을 같이 보면 어떠리.

천태산 높은 봉에 일어나는 저 구름아.

애끓는 이별 눈물 비삼아 배여다가

가시는 님의 발길에 뿌려주면 어떠리.

 

문단과의 관계가 거의 없던 소월이었으나 소박한 고향사람들과는 정분이 두터웠다. 다음의 일화는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구성군 방현 장거리에 시인을 아는 국수장수가 있었다. 소월이 죽은 뒤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 국수집에 와서 소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이 국수장수는 소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만 보면 너무나도 반가워 국수값을 받지 않고 보냈다는 것이다.

소월은 어릴적부터 고향 앞바다를 사랑했다. 그가 교편을 잡았던 곳도 바로 바다를 눈앞에 둔 렴호리였다.

이곳 사립 중신학교에서 소월은 아동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본격적인 시 창작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과 어민들의 자제였는데 월사금을 물지 못해 도중에 그만두는 어린아이가 많아 졸업할 때면 7∼8명만 남기 일쑤였다.

 

사립 중신학교 교사직 몸담기도

 

학교는 운영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어서 새학년도가 되면 선생들이 학생 모집에 나서곤 하였다. 가난한 노인들은 어린 것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다. 어떤 학부형은 해마다 두달을 기한으로 학교 수리에 동원된 대가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소월은 이러한 가난한 아동들을 동정해서, 바다를 그리워해서 스스로 이 학교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가 바다를 못견디게 그리워한 까닭은 시 ‘바다’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잦는

붉은 물이 자라는 바다는 어디

고기잡이꾼들이 배 우에 앉아

사랑노래 부르는 바다는 어디

파랗게 좋이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 놀 스러지는 바다는 어디

곳 없이 떠다니는 늙은 물새가

떼를 지어 쫓니는 바다는 어디

건너서서 저편은 딴 나라이라

가고 싶은 그리운 바다는 어디.

 

바다를 지척에 둔 그가 왜 이처럼 바다를 그리워하였을까. 물론 그가 그리워한 바다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가 아니다. 그는 자유에의 갈망을 바다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월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정도어업조합’이라는 게 있어 어민들을 혹사하였다. 조합측은 어민들의 안정은 아예 생각지도 않아 풍파만 일면 어부들의 시체가 번번히 포구에 밀려나오곤 하였다.

바닷가에는 ‘이별암’이라는 바위가 생기기까지 하였는데 그 까닭은 고기잡이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끝에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여인마저 밤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깃든 탓이다.

소월은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가슴아파하며 많은 서정시들로 창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곽산휴양소가 자리잡고 있다. 휴양소가 자리잡은 고미향 언덕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앞에는 무수한 바위가 바닷물에 씻기우고 뒤에는 잔잔한 저수지가 누웠는데 돌 위에는 보트들이 나뭇잎모양 떠 있다.

젊은 소월이 이 언덕에 서서 멀리 아름다운 고향산을 우러러보며 불길 이는 서해 기슭에 뜨거운 마음을 담갔을 것이다.

이 무렵부터 2∼3년동안 소월은 가장 왕성한 창작욕에 불타올라 수십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소월은 ‘이별암’위에 서서 ‘붉은 조수’(潮水)라는 시를 썼을 것이다.

 

북에서 보는 '애국시인' 김소월의 행적

 

소월은 불행한 중학시절을 보냈다. 남산학교를 첫자리의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윗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재능을 아깝게 여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열다섯살 때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오산중학교에서 소월은 수재로 꼽혔는데 특히 어학·수학의 성적이 남달랐다. 1919년 3월의 3·1 독립운동을 맞은 것은 그가 3학년 때였다.

당시 오산에서 계산에 이르는 가도에는 수많은 시위군중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당시 동문회(동창회) 회장이었던 정식은 학생 중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서서 시위대열에 참가하였다. 정주에 있던 경찰대는 급거 오산으로 출동하였고 가슴에 전단을 품고 시위의 선두에 섰던 소월은 붙잡혀 수색당하였으나 눈치빠른 그는 그 전단물을 감쪽같이 감추어 그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오산학교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계속 놈들의 추격을 받았다. 그는 정주군 서호리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3·1 독립운동은 실패했다.

그가 오산학교에 나타났을 때는 사랑하던 학교는 불탄 자리만 거멓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소월은 눈물을 머금고 배재학교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몇해 후 그는 단편소설 ‘함박눈’을 창작하였다. ‘함박눈’에는 3·1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조국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소월이 일본에서 돌아온 것은 학비 탓도 있었지만 일제의 민족차별 정책에 분개해서였다(소월의 귀국은 당시 관동대지진으로 놀란 가족들의 호출 때문이다). 고향에 내려온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금융조합에서 일보는 것이 어떤가하고 물었다. 그러나 소월이 일제 어용기관에 근무할 리 없었다.

그는 구성군 방현에 와서 ‘운동회’라는 신문기사를 썼는데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소월 선생으로 존경했다. 소월은 지방소식들과 함께 관리들의 협잡사건과 경찰들의 폭행사실도 써보내곤 하여 일제 관헌의 미움을 받았다.

그는 서울에 있는 부르주아 문단을 얼치기 문사들이라고 가끔 불렀다.

죽기 얼마 전 소월을 찾은 한 청년이 당시의 문단에 대한 시인의 견해를 알고 싶어 우선 이광수의 소설에 대해 물었다. 그는 몹시 신경질적으로 ‘이광수의 글은 글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밝혔다.

청년은 소월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광수·주요한·김동환 등 삼인시집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니 ‘도대체 그 글들은 시가 아니며 백해무익한 글들이라’고 말하였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소월의 스승이라고 자처한 김안서에 대해 물었는데 ‘번역이나 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를 두고 비난하기를 싫어하던 그였지만 그 당시의 문단을 두고는 늘 이렇게 비난하곤 했다.

김소월은 시인이자 농민이었다. 소월은 이 땅이 우리의 손으로 아름다워질 그날을 기다리며 처갓집 땅을 부치면서 7년동안 방현리에서 보냈다. 그는 부지런한 농민이며 땅을 귀중히 여긴 사람이었다. 그는 이 지방에 처음으로 고구마와 유자를 도입한 사람이었다. 농민들의 동정자에서 스스로 호미를 들고 논과 밭에 나섰던 것이다. 처가와 그 사이도 땅을 준 사람과 땅을 부치는 사람으로 갈라져 소월은 장인과의 거래는 거의 끊어진 상태가 되었다. 불과 몇 발자국 사이를 두고 있는 처갓집이었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마저 외가에 가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 대신 농군들과의 관계는 빈번하였다. 당시 억울하게 차압을 당할 뻔한 홍필도 노인은 “소월이는 우리 농군들 일이라면 작두날에도 올라설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1932년 수리조합이 생기면서 전국 도처에서 사람들이 고용되어왔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시인과 친교를 맺었는데 오늘 이 마을에 있는 차성관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니 주재소와 그의 끄나플들의 감시는 더욱 심해 갔다. 면주재소는 수로계획도에 시인의 집을 그려넣고 집을 몽땅 헐어버리려고까지 하였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시로 그 아픔을 노래했던 것이다.

그의 스승으로 자처한 김안서로부터 혹독한 평을 받고 반송되어온 시를 보고 붓을 꺾은 적은 있으나 시인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다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선진적인 노동운동과 그 사상을 체득치 못하였던 소월은 날이 갈수록 고민만 커갔다.

 

일본경찰 폭압에 자살 결심

 

이 무렵 경찰의 폭압은 더욱 극심하였다. 그의 반항과 고통은 이에 비례하여 더욱 커갔다. 소월은 심지어 해외로 갈 것까지 생각했다. 5남매의 아버지가 돼 있던 소월은 가족들을 버리고 망명할 수는 없었다. 1934년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실단은 의외의 변고에 억장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둔 것이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 봉지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소월의 사망에 대해서는 자살설·자연사설 등 최근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지금 북한의 “문학신문”에서도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나 당시 “조선일보” 1934년 12월27일자에 보도된 소월의 사망에 대해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즉,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 -方峴- 일찌기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여 우리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소월 김정식씨가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바 지난 이십사일 아침에 뇌일혈로 급작히 별세하여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김억은 “여성”잡지(1939년 6월호)에서 시인 백석과의 ‘소월의 생애’라는 대담기사를 남기고 있는데 소월은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소월은 그렇게 죽었다. 그를 천재로 만든 것은 그의 남다른 감수성, 그의 시를 낳은 아름다운 고향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뜨겁고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월의 고향 남산봉에는 조선작가동맹원 일동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여 있다.

‘김소월, 그대의 주옥같은 노래는 인민들의 가슴에 자랑 높이 울리고 향토와 인민에게 바친 애국정신은 조국만년에 빛나리라.’ @ (월간중앙 1998년 12월호)

[출처] [본문스크랩]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 (북한 문학신문)|작성자 태권브이


여기에 실린 시들은 소월이 생전에 펴낸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시들로, 원전의 오류 부분들을 바로 잡은 결정본입니다. 파일명에 부여된 일련번호를 통해 시집의 원래 배열 순서를 확인할 수 있으며, 발표 당시의 원문(1920년대의 텍스트), 시해설, 주석 등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가는길

.........그립다/말할까/하니 그리워

가을 아침에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가을 저녁에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강촌(江村)

.........날 저물고 돋는 달에

개아미

.........진달래꽃이 피고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그리합니까?

개여울의 노래

.........그대가 바람으로 생겨났으면!

구름

.........저기 저 구름을 잡아타면

귀뚜람이

.........산(山)바람 소리.

그를 꿈꾼 밤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금(金)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기억(記憶)

.........달 아래 시멋 없이 섰던 그 여자(女子),

.........어제도 하루밤/ 나그네 집에

깊고 깊은 언약

.........몹쓸은 꿈을 깨여 돌아누을 때,

깊이 믿던 심성(心誠)

.........깊이 믿던 심성이 황량한 내 가슴 속에,

꽃촉(燭)불 켜는 밤

.........꽃촉(燭)불 켜는 밤, 깊은 골방에 만나라.

꿈(1)

.........닭 개 짐승조차도 꿈이 있다고

꿈(2)

.........꿈? 영(靈)의 헤적임. 설움의 고향(故鄕).

꿈길

.........물구슬의 봄 새벽 아득한 길

꿈꾼그 옛날

.........밖에는 눈, 눈이 와라,

꿈으로 오는 한 사람

.........나이 차라지면서 가지게 되었노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나의 집

.........들가에 떨어져 나가 앉은 메기슭의

낙천(樂天)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남의 나라 땅

.........돌아다 보이는 무쇠다리

.........성촌(城村)의 아가씨들

.........새하얀 흰눈, 가볍게 밟을 눈,

눈 오는 저녁

.........바람 자는 이 저녁

님과 벗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에게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님의 말씀

.........세월이 물과 같이 흐른 두 달은

달맞이

.........정월(正月) 대보름날 달맞이,

닭소리

.........그대만 없게 되면

닭은 꼬꾸요

.........닭은 꼬꾸요, 꼬꾸요 울 제,

담배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두 사람

.........흰눈은 한 잎/ 또 한 잎

들도리

.........들꽃은/ 피어/ 흩어졌어라

마른 강(江)두덕에서

.........서리맞은 잎들만 쌔울지라도

만나려는 심사(心思)

.........저녁해는 지고서 어스름의 길,

만리성(萬里城)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루밤!

맘 켕기는 날

.........오실 날/ 아니 오시는 사람!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하소연하며 한숨을 지우며

먼후일(後日)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몹쓸 꿈

.........봄 새벽의 몹쓸 꿈

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무덤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무신(無信)

.........그대가 돌이켜 물을 줄도 내가 아노라,

무심(無心)

.........시집와서 삼년(三年)

묵념(默念)

.........이슥한 밤, 밤기운 서늘할 제

물마름

.........주으린 새무리는 마른 나무의

바다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잦는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걷잡지 못할만한 나의 이 설움,

바라건대는... 보섭 대일 땅이...

.........나는 꿈꾸었노라

바람과 봄

.........봄에 부는 바람, 바람 부는 봄,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반(半)달

.........희멀끔하여 떠돈다, 하늘 위에,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워요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봄밤

.........실버드나무의 검으스렷한 머리결

봄비

.........어룰 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부귀공명(富貴功名)

.........거울 들어 마주 온 내 얼굴을

부모(父母)

.........낙엽(落葉)이 우수수 떠러질 때,

부부(夫婦)

.........오오 안해여, 나의 사랑!

부헝새

.........간밤에/ 뒷 창(窓) 밖에

분(粉) 얼굴

.........불빛에 떠오르는 새뽀얀 얼굴,

불운(不運)에 우는 그대여

.........불운(不運)에 우는 그대여, 나는 아노라

붉은 조수(潮水)

.........바람에 밀려드는 저 붉은 조수(潮水)

비난수 하는 맘

.........함께 하려노라, 비난수 하는 나의 맘,

비단 안개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루라도 몇 번(番)씩 내 생각은

삭주구성(朔州龜城)

.........물로 사흘 배 사흘

산(山)

.........산(山)새도 오리나무

산(山) 위에

.........산(山) 위에 올라서서 바라다보면

산유화(山有花)

.........산(山)에는 꽃피네

새벽

.........낙엽(落葉)이 발이 숨는 못물가에

생(生)과 사(死)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서울 밤

.........붉은 전등(電燈).

설움의 덩이

.........꿇어앉아 올리는 향로(香爐)의 향(香)불.

수아(樹芽)

.........설다 해도/ 웬만한,/ 봄이 아니어,

실제(失題)(1)

.........동무들 보십시오 해가 집니다

실제(失題)(2)

.........이 가람과 저 가람이 모두처 흘러

안해 몸

.........들고 나는 밀물에

애모(愛慕)

.........왜 아니 오시나요.

어버이

.........잘 살며 못 살며 할 일이 아니라

어인(漁人)

.........헛된 줄 모르고나 살면 좋와도!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江邊) 살자,

엄숙

.........나는 혼자 뫼 위에 올랐어라.

여름의 달밤

.........서늘하고 달 밝은 여름 밤이어

여수(旅愁)

.........一유월(六月) 어스름 때의 빗줄기는

여자(女子)의 냄새

.........푸른 구름의 옷 입은 달의 냄새.

열락(悅樂)

.........어둡게 깊게 목메인 하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옛낯

.........생각의 끝에는 졸음이 오고

옛이야기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

오는 봄

.........봄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오시는 눈

.........땅 위에 쌔하얗게 오시는 눈.

왕십리(往十里)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올지라도

우리 집

.........이바루/ 외따로 와 지나는 사람 없으니

원앙침(鴛鴦枕)

.........바드득 이를 갈고

월색(月色)

.........달빛은 밝고 귀뚜람이 울 때는

잊었던 맘

.........집을 떠나 먼 저곳에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자주(紫朱) 구름

.........자주(紫朱) 구름

저녁때

.........저녁때

전망(展望)

.........전망(展望)

접동새

.........접동새

제비

.........제비

지연(紙鳶)

.........지연(紙鳶)

진달래꽃

.........진달래꽃

집 생각

.........집 생각

찬 저녁

.........퍼르스럿한 달은, 성황당의

천리만리(千里萬里)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하며

첫치마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초혼(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추회(追悔)

.........나쁜 일까지라도 생(生)의 노력(努力),

춘향(春香)과 이도령(李道令)

.........평양(平壤)에 대동강(大同江)은

풀따기

.........우리 집 뒷산(山)에는 풀이 푸르고

하늘 끝

.........불현듯/ 집을 나서 산(山)을 치달아

하다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합장(合掌)

.........나들이. 단 두 몸이라. 밤 빛은 배여와라.

해가 산(山)마루에 저물어도

.........해가 산(山)마루에 저물어도

황촉(黃燭)불

.........황촉(黃燭)불, 그저도 까맣게

후살이

.........홀로된 그 여자(女子)

훗길

.........어버이님네들이 외오는 말이

희망(希望)

.........날은 저물고 눈이 나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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